밀푸색마 EP.40 어미와 같이 자겠느냐? (1)
신강.
흔히 새외로 분류되는 이 지역에는 강호 무림의 누구나가 알지만 실제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는 집단의 본거지가 있었다.
스스로는 명교(明敎), 무림인으로부터는 흔히 마교(魔敎)라고 불리는 이 집단은 교주이자 신마(神魔)라는 별호로도 불리는 한 사람이 통솔하고 있었다.
혹자는 그 자가 혀가 셋으로 갈라졌고 동공은 넷이며 날카로운 송곳니에는 적이 흘린 피를 빨아들일 수 있게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고 한다.
그런 소문의 주인, 신마는 지금 쾌남형의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네 글자를 이로 끊듯이 발음했다.
"혈, 마, 지, 재?"
이미 일흔을 넘긴지 오래된 그의 얼굴은 아직 30대 초반 정도의 팽팽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노인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최대한의 공경을 담아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합니다. 강호에서 혈마의 눈에 든 자들을 일컬어 그리 부른다고 합니다."
"그 노인네, 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 하는 거지? 내가 본교 지부 위치까지 친절하게 알려줬으면 뭘 할 생각인지는 알려줘야하는거 아닌가?"
사파에서 근골이 뛰어난 아이를 납치해 키우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보통 3,4살 정도의 아이는 가치관은커녕 기억도 안 남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다 자라서 가치관 정립까지 다 끝난 청년들을 납치해갔고, 그나마 제대로 잡아두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차라리 세력을 키우고 싶으면 본교에 입교를 하든, 하다못해 사파 잡졸들을 규합하기라도 했겠지."
신마는 상상했다.
일단 어중이떠중이 사파 문파를 불러모은 다음 '너희들은 다 내 부하다' 라고 외치는 혈마의 모습을.
반발이 생기면 지풍 몇 방으로 잠재워버리고, 굴복한 척하다가 도망친 놈들을 또 본보기로 죽이고.
그 다음 어디 정파 중에 이름난 곳 하나를 골라 습격해서 불태우고 부녀자를 겁간시키면 엉성하게나마 하나로 뭉칠 것이다.
그 정파의 현판을 갈아치우고 '혈마문'이라고 떡하니 적어놓으면 짜잔, 혈마의 손발이 될 세력의 완성이다.
"난 그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
"...말씀하신 내용은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그보다 지금은 대책을 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대책?"
"아마 이장로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얌전한 척 가만히 있던 혈마가 이제 세력을 일으키려고 드디어 준동하기 시작했다고 떠들고 다니겠지요."
신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현실성없는 이야기라는 걸 아는 몇을 제외하면 다들 엉덩이가 들썩거리겠군. 혈마에게 무림을 넘기느니 우리가 차지하자고 말이야."
"바로 그렇습니다."
"일장로, 내가 이장로에게 충분히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무림일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이야."
"..."
"대체 그놈의 무림일통이 무엇인지, 그 자들은 알고나 있는 것인가 말일세."
신마의 목소리에 명백한 불쾌감이 섞이자, 일장로는 즉시 고개를 바짝 숙였다.
"그 무림일통... 무림맹을 지우고 구파일방을 지우고 오대세가를 모두 지워버리면 되는 건가?"
"...그래도 끝나지 않겠지요."
"그래, 선대 중에도 무림을 본교의 발 아래에 두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았네. 압도적인 힘으로 정파무림을 짓밟았지. 그래서 세상을 명교천하로 만들기도 했었어. 수십년 동안은 말이야!"
쾅
신마가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치자 찔끔한 일장로는 두 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공손하게 모았다.
"그래서 남은게 무엇인가? 결국 그 수십년 동안 힘을 기른 정파 놈들의 손에 다시 이 변방으로 쫓겨나오기만 했지! 이걸 대체 몇 번을 반복해야한다는 말인가!"
"..."
"이장로에게 전하게. 무림일통을 하고 싶거든, 절대로 그 무림일통이 무너지지 않을 방법, 적어도 수백년은 유지될 방법을 찾아오던가, 교도들에게 헛바람 불어넣지 말고 닥치라고 말이야."
"...그리 하겠습니다. 하온데 아가씨께는..."
"경아에게는 불만 있으면 내 목을 치고 교주 자릴 가져가라고 해."
일장로는 이렇게 살벌한 소리나 주고받는 사이이면서도 여전히 살갑게 유지되는 부녀관계는 대체 어떻게 형성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강자존. 강자가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강자는 스스로 싼 똥을 치울 능력이 있지. 그래서 강자가 하는 말을 들어야하는 거야."
"...예."
"이장로가 하는 말에 넘어가는 거야 자유지만, 내 말을 뒤집으려면 그만한 힘을 가져야지."
"하오면, 혈마가 벌이는 일에 대한 조사는 어찌할까요?"
괜히 들쑤시면 교도들의 관심이 쏠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라는 일장로의 질문에 신마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조사는 자네 휘하의 사람만 써서 천천히 진행하고, 내가 서신을 하나 써줄테니 하오문에 전달하게."
"수신자는... 역시 혈마입니까?"
"제놈이 나한테 안 알려주는데 내가 어쩌겠나. 하수가 먼저 물어봐야지. 물어보면 또 싱겁게 알려줄지도 모른다는게 그 자의 알기 힘든 점이라네."
태연하게 자신을 하수라 칭하는 교주의 모습에 일장로는 조심스럽게 눈을 피했다.
"언젠가는 따라잡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말이야... 원래 하수는 고수 앞에서 숙이는게 맞는 거라네. 그 하수가 검성 황보운검이 됐든, 신마 영호상이 됐든 말이야."
일장로는 스스로를 하수라고 칭하면서 번뜩이는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았으니까.
"혈마지재?"
뭐야, 그건? '혈마가 인정한 바로 그 맛!' 뭐 그런 뜻인가?
"예! 강 대협을 비롯한 몇몇 강호인들이 그렇게 불리고 있답니다!"
대충 10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이 어린 놈의 이름은 당무혼.
팽연화의 아들이고, 당영의 남동생이다. 즉, 차기 당가를 이어받을 몸이라는 뜻.
팽연화와 즐거운 섹스연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 녀석을 끌고온 당영에게 붙잡혔다.
"강 대협께서는 굉장한 고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직접 사사(師事)를 받고 있다고..."
"사사까지는 아닙니다. 그냥 제 무공에 부족한 점이 보이면 일러주시는 것뿐이죠."
사사, 즉 스승으로 모시고 배움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팽연화가 내 스승은 아니지.
당무혼은 실수했다는 듯 제 이마를 치며 말을 정정했다.
"그렇군요, 사사까지는... 아무튼 그래서 꼭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뭐지, 꼭 응원팀 야구선수한테 사인을 부탁하는 것 같은 이 태도는? 부담스럽다.
당영이 처음 만났을 때 틱틱거렸던 것도 짜증나지만 이건 더 부담스러운데?
게다가 남궁혜를 만날 때 느꼈던 죄책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그래도 그 때보단 조금 덜하다. 그만큼 밀프를 따먹는데 양심의 가책이 줄어들었다는 뜻인가?
"혼아, 이제 가자. 하루종일 수련을 했을테니 강 소협도 많이 피로할 거야. 강 소협은 당분간 당가에 머물테니 또 볼 수 있단다."
당영이 의외로 제대로 누나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무혼은 자기가 미처 생각을 못했다며 편히 쉬시라고 고개를 꾸벅거렸다.
'혈마도르 하나 수상하면 대접이 이렇게 되나...'
지금까지 하수이자 애송이로서 계속 꾸벅대다보니까 저렇게 동경의 눈초리를 보내니까 몸둘 바를 모르겠네.
멀어지는 당씨 남매를 힐끗거리면서 객관을 향해서 걸어가자, 곧 건물이 눈에 보였다.
이미 연무장에 딸린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왔으니까 씻을 필요는 없고, 저녁을 먹고 잠깐 잠을 자줘야한다.
오늘밤에는 당혜원이 찾아오기로 했으니까, 미리 수면을 취해주는 편이 부담없이 밤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시비에게 부탁해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치우고 나니까 이미 해는 완전히 진 상태였다.
여기 식으로 말하자면 술시 초(오후 7시 반) 정도 된 것 같았다.
이젠 해나 달을 보고 시간도 맞추고, 여기 사람 다 됐다.
잠시 자기 전에 간단히 소화나 시킬 겸 객관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어떤 시비가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소협,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무슨 일입니까?"
시비는 내 존댓말에 질색을 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용건을 말했다.
"실은 제갈 여협께서..."
제갈미령이 아들을 부르면서 악몽을 꾸고 있다고 한다.
사실 저번에 한 번 사부한테 끌려갔다온 이후로 자주 그랬다고 하지만, 오늘은 정말 상태가 심각해서 나를 부르러 왔다고.
나는 그 시비에게 천천히 따라오라고 말한 다음 바로 신법을 발휘해 제갈미령의 처소로 달려갔다.
"현아... 현아..."
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제갈미령이 앓는 소릴 내는 것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시비들이 이미 제갈미령의 눈물과 땀을 닦아주고 있었지만 제갈미령은 뭔가에 홀린듯이 계속 아들을 찾고 있었다.
"현아, 현아... 어미도 데려가거라... 어미도 데려가...!"
꿈 속에서는 진짜 아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건지, 자기도 데려가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측은했다.
나는 시비들을 살짝 물리고 손을 뻗어 허우적대는 제갈미령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니, 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니까 염려마세요."
"현아, 현아..."
내 손을 잡고서도 계속 아들을 찾으며 웅얼대던 제갈미령은 곧 숨소리가 잦아들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한 시비에게서 깨끗한 천을 건네받아 얼굴에 묻은 눈물과 침을 닦아냈다.
"소협, 감사합니다. 제갈 여협께서 너무 힘들어하셔서..."
"괜찮아요.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날 불러주세요."
남편이 대신 멘탈 케어를 하게 시키려고 해도 고천은 오늘밤 여기에 없었다.
아무리 섬서와 사천이 인접한 지역이라도 그렇지,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계속 표국에 왔다갔다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오늘밤은 계속 지켜볼테니까 가서 쉬거나 일들 보세요."
"소협, 그런 일까지 부탁드릴 수는..."
시비들은 나를 말렸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내보냈다.
나도 사람인데, 아무리 상대가 꼴리는 밀프라고 해도 아들 생각으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어머니 상대로 자지를 세우지는 않는다.
우선 손을 놓고 옆에 앉아서 지켜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주 잡은 손을 놓고 손을 빼려고 했다.
어라?
손이 안 풀리는데? 힘 존나 세!
"으음..."
제갈미령은 눈꺼풀 틈에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느끼고 눈을 떴다. 지난밤에는 또 악몽을 꾼 것 같았는데, 평소와 달리 몸이 개운했다.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아준 다음부터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던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자신의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현아, 내 아들..."
고개를 돌려보니 아들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자신의 침상 옆에 엎드린채 잠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비를 닮아서 제법 덩치가 있는 아들이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특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치밀었다.
아마 지난밤 악몽을 꾸는 어미를 발견하고 계속 손을 잡아주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팽연화에게 무공을 배우느라 바쁜 아들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던져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왕지사 알려진 일이었다.
밤새 어미의 손을 잡아준 아들의 고마운 마음은 우선 받아두기로 하고, 제갈미령은 조금이라도 아들을 편히 쉬게 해주기 위해 아들의 어깨를 흔들어 잠을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