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33 긍정적으로 고려해주세요 (1)
안휘성 남궁세가.
선대 가주, 남궁탄의 뒤를 이어받은 신임가주 남궁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세가를... 나가시겠다구요?"
"조금 다릅니다만, 비슷하군요, 가주."
그의 맞은편에는 남궁탄이 죽어 대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언소영이 앉아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어머니께서 중심을..."
"남궁세가의 중심은 언제나, 가주입니다. 알고 있을텐데요?"
언소영은 가주가 된 아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 가모는 세가의 일에 대해서 잘 모르니, 어미가 안주인의 일을 맡는 편이 낫겠지요. 하지만 가모가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지면, 어미는 없는 편이 낫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궁학은 황급히 말했다.
안 그래도 외지에서 엉뚱한 사파 고수와 엮여 고생을 하고 온 어머니였다.
그런 상태인 어머니를 세가 바깥으로 내보낸다니, 가주로서도 아들로서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알고 있어요, 가주. 하지만 미뤄서도 안 될 일입니다. 가모에게 나이 든 어미가 붙어있어봐야 부담밖에 더 되겠습니까?"
"어머니..."
"염려마세요. 3개월 정도 가르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모는 영민하니까요."
아내의 칭찬이라면 입이 찢어질 남궁학도, 어머니가 이렇게 나가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얼굴을 찌푸렸다.
선이 굵어 무게감 있는 인상의 남궁학이었기 때문에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얼굴이었지만, 어머니인 언소영은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자신의 뱃속에 자라고 있을지 모를 생명이 아니었더라면, 그녀 역시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강윤이 그렇게까지 확신했다면 가능성은 높았다.
'세가의 의원한테 보일 수는 없고, 다른 좋은 의원을 구해봐야겠다.'
2개월 정도 되면 임신 여부가 명확해질 것이었다. 진맥을 받아 확실해지면 세가에서는 떨어진 곳에 장원을 구해 거기서 살 계획이었다.
시집올 때 친정에서 데려온 시비들과 그 딸들을 데려간다면 비밀을 함구해줄 것이었다.
'우리 아가...'
가문 같은 것은 아무 상관없이 온전히 사랑으로 빚어진 아기.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자식들도 여전히 소중했지만, 이 아기는 특히 각별했다.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히고, 좋은 것만 보여주리라.
언소영은 살짝 손으로 배를 쓸며, 무사히 아기가 자라고 있기를 소망했다.
팽연화에게 해피 섹스 타임을 목격당하고 며칠이 지났다.
원래 당장 팽연화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당혜원은 며칠 정도는 묵혀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당장은 나쁘게 생각하며 죽어라 배척하려고 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왜 그랬는지에 관심을 돌리게 될 거라면서.
그 때 찾아가서 서서히 부추기는게 좋을 거라고 하던데, 역시 정보기관 짬밥 무시 못하는 것 같다.
허둥지둥 나한테 다 털어놓던 당혜원이 맞냐, 당혜원은 전설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혼자서 팽연화를 찾아가서 설득을 해볼 거라고 한다. 아마 지금쯤 가지 않았을까?
한편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면...
챙
"좋구나!"
좋긴 뭐가 좋아 씨발이.
나는 검을 들고 고천을 공격하고 있었다.
사부에게 허락을 받은 나는 고천에게 제안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미 내 아들 노릇 서비스를 받고 있던 고천은 공짜로 받던 것에 요금을 내야한다는 사실이 마뜩찮아보였지만, 정가구매하셔야죠, 손님.
일단 제갈미령을 속이기 위한 용도로 자신의 독문검법의 간단한 투로와 검의 파지법, 기초적인 보법을 알려주었다.
물론 내력의 움직임은 모조리 뺀, 외부에 보이는 움직임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그 움직임을 흉내만 내면서 나머지는 피지컬로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지만, 멀리서 보는 제갈미령에게는 그 허실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언제까지 이걸 해야됩니까?]
[아내가 여길 떠날 때까지.]
내 검술은 내가 봐도 못 써먹을 수준이었지만, 속도와 근력만큼은 엄연히 절정고수 수준이었기 때문에 고천은 모처럼 흥이 난 듯했다.
중간에 잠깐 쉬어도 되는데 쉬지 않고 내 공격을 받아넘기는걸 보면.
고천의 방어는 마치 큰 산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측량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을 겪은 굳건한 산.
검의 크기만 보면 오히려 황보효선보다 작았는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검초의 구성 역시 특별히 힘으로 찍어누르기에 적합한 느낌도 아닌데.
고천이 검을 움직이는걸 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나는 어느새 설득의 성패에 대한 생각을 잊고 검을 움직여 고천의 검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생각하는데에 정신이 팔렸다.
당혜원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팽연화의 처소, 정확히는 연무장 앞에서 방문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이 곳을 찾는 것은 그녀로서도 오랜만이었는데,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다.
마치 그것이 팽연화의 현 위치를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당혜원은 입맛이 썼다.
설령 부부가 서로 사이가 멀어졌더라도 팽연화는 세가의 기둥 같은 존재.
그녀가 든든히 중심을 잡고 있지 못했더라면 당가가 과연 사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의문을 품는 사람은 많았다.
지금껏 팽연화를 세가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가주의 의도를 직접 규탄한 사람이 무련각주를 제외하면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녀가 만약 당가를 위해 헌신하기를 포기한다면...?'
상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어느덧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기별을 넣으러 갔던 무사가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길에는 값비싼 야명주가 박혀있었다.
공기가 제한적인 지하에서 횃불을 피울 수는 없기에 내린 조치였다.
당혜원은 이렇게까지 돈을 퍼부어서 만든 것이 아내를 남에게서 감추기 위한 새장이라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같은 집단에 속한 강력한 고수는 그 존재만으로 구성원의 사기를 북돋운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격이 다르다.
어떤 암기를 써도, 어떤 독을 풀어도 그녀를 해칠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
오라비의 열등감 때문에 이런 고수가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 수련해야 하다니.
당혜원이 거의 그녀에게 가까이 도달했을 즈음, 경쾌하게 움직이던 도가 폭발적으로 속도를 높였고 곧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땀으로 번들대는 팽연화의 얼굴에는 착잡함이 어려있었다.
"어서 오게, 대주. 수련중이라 여기로 불렀네."
"괜찮습니다, 가모."
두 사람 사이에 사적인 호칭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한쪽에 놓인 천으로 가볍게 땀을 닦아낸 팽연화는 애도를 병기대에 걸어놓고 당혜원을 돌아보았다.
"이 연무장에는 거의 누구도 찾아오지 않지."
"..."
"그리고 누가 숨어들어온다고 해도 내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강호 전체에 많지 않아. 그러니 안심하고 말해보게."
꿀꺽
"그런... 관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설명을."
만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팽연화의 가라앉은 눈을 보니 새삼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가엾은 여인의 처지를 생각하며, 당혜원은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았다.
"먼저 가모께서 확인해주시길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뭐지?"
당혜원은 대답 대신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팔 안쪽을 내밀어오는 행동의 의미는 하나.
'맥문을 짚어라...?'
팽연화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당혜원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맥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기를 밀어넣어 당혜원의 내력을 관찰한 결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전과 격이 다르게 강한 내력이 흐르고 있는데다, 그 정순함 역시 놀라울 지경이었다.
물론 아직도 일류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절정고수도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기를 회수한 다음, 팽연화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대주가, 수련을... 참으로 열심히 했나보군..."
당혜원은 심유한 눈으로 팽연화를 마주 보았다.
그 눈이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도 알지 않느냐고. 이건 수련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성취라고.
원래의 당혜원의 내공은 간단히 말해 잡탕이었다. 그녀가 먹은 영약이 잡탕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영약이란 자연에서 비정상적으로 기가 뭉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특정한 내공심법에 걸맞게 만들어지는 영약이란 존재할 수가 없고, 필요한 기와 필요없는 기가 뒤섞여 혼재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 영약을 채취하고, 필요없는 기운을 담고 있는 부분을 걸러내고, 영단을 만들어 복용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정제하더라도 불순물은 양이 줄어든다 뿐이지 여전히 남기 때문에 섭취하는 자가 열심히 운기행공을 해서 필요한 기만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당혜원에게는 그런 과정이 주어지지 않았다.
무공의 재능도 특출난 수준이 아니었고, 여자였기 때문에 더욱 발전 가능성도 낮았다.
당조명과 방계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 분배되고 남은 것이 당혜원에게 주어졌다.
잡스러운 내력을 몰아내는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양도 시원찮은 내력이 잡스럽기까지 해서 오히려 당혜원의 무공 성취를 가로막은 셈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팽연화 역시 알았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뭔가 특별한 기연이 있었겠지.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당혜원의 외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할 상황임에도, 팽연화는 고지식하게 당혜원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고지식한 성격답게 본론을 잊지 않고 다시 지적했다.
"하지만 이 자리는 대주의 성취를 축하하기 위해 가진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게."
"모르시겠습니까?"
머리도 꼬리도 없는 질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혜원의 얼굴을 응시하길 몇 초, 벼락이 치는 듯한 깨달음이 팽연화를 덮쳤다.
"설마, 설마... 말도 안 되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눈앞에 이미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팽연화에게 당혜원이 확인시켜주듯 말했다.
"지금 제 성취는, 그와의 교접의 결과입니다."
"그 자가, 인간영약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당혜원은 고개를 젓고 등선공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름을 바꾸고, 주로 그 효능에 관해서 중점적으로.
"음양신공이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네만..."
"들어보셨다면 이 무공에 대한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겠지요."
딴은 그랬다. 팽연화는 이성과 교접하는 것만으로 내력이 정순하고 강해지는 무공에 대해서 들었다면 잊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가주에게는... 보고했나?"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보고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니까요."
"하지만 세가를 위한다면..."
당혜원은 이런 팽연화의 말에 보란듯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런 무공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될 겁니다."
"..."
"무림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당가 내에서도 그에게서 무공을 빼앗아 독식하려고 하겠지요."
그게 정말 당가가 부흥하는 길이냐고 묻는 당혜원의 말에, 팽연화는 크게 자책했다.
"미안하네. 너무 놀라워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질 못했던 것 같아..."
팽연화의 솔직한 사과에 당혜원은 내심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여기까지는 당혜원이 예상했던대로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그, 강 소협에게 도움을 얻어낼 수 있었나?"
"도움이라뇨?"
"무공의 성취를 높이기 위해 강 소협과... 교접을 한 것이 아닌가."
당혜원은 피식 웃었다.
"아니에요."
"...아니라니? 설마..."
"맞아요. 그냥 그 남자가 좋아서, 사랑해서 안겼어요."
무공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으로 얻어진 이득일 뿐이죠, 라고 말하는 당혜원을 보며 팽연화는 혼란에 빠졌다.
"남편은, 자네 남편은 어쩌고?"
"어느 남편을 말씀하시는 거죠? 정략결혼으로 만나서 작업처럼 아이를 만들던 남편? 틈만 나면 기생을 찾아가는 남편? 아내를 우습게 보는 남편은 더더욱 아닐 거고..."
"..."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팽연화는 더이상 당혜원에게 남편을 언급할 수 없었다. 당혜원이 남편과 관계가 소원하다는 것을 그녀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 남자는 절 뜨겁게 안아줘요. 제가 사랑스러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만하게..."
"만약 남편과 혼인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그의 남근이 절 찌를 때마다..."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팽연화는 기가 쭉 빨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알던 당혜원은 어디 가고, 외도 상대와의 시간을 천박하게 묘사하는 음탕한 창부가 눈앞에 있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팽연화는 당혜원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겠네. 그러니 이만 가주게. 더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그럼 한 가지만 더."
팽연화의 축객령에도 당혜원은 짤막하게 한마디를 남겼다.
"저는, 그리고 강 소협은 이 기쁨을 새언니도 알았으면 해요."
"무슨...!"
경악한 팽연화의 모습을 보지 못한 척하며 당혜원은 확고한 태도로 말했다.
"긍정적으로 고려해주세요."
그렇게 몸을 돌리고 걸어가는 당혜원.
팽연화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당혜원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충격적인 말의 해일을 더 감당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종일관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당혜원의 뒷모습을 보며 안심할 뿐이라니.
혼란스럽던 팽연화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정리된 생각은 그녀가 자신을 새언니라고 부른 것이 꽤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