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0 제 말이 맞지요? (2)
우우우우웅
사천당가 지하에 있는 연무장.
그 곳에는 한 사람의 여인이 도 한 자루를 무릎 위에 올리고 명상에 잠겨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도는 누구의 손에도 쥐어지지 않은 상태로 도명(刀鳴)을 울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한동안 지속되던 도명은 이윽고 가라앉기 시작하고, 여인은 조용히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여인의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연무장의 문이 열리며 무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갈 여협께서 세가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무련각주가 가모께도 말씀 올리라 하여..."
"오, 령 동생이? 알겠네."
항상 무뚝뚝하던 여인이 푸근하게 웃는 모습에 무사는 흠칫했지만 곧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벗의 방문에 당장 찾아갈까 생각하던 그녀는 역시 한 번은 제대로 수련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도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도를 쥐자 태풍 같은 기세가 몰아치고, 그 도가 움직이자 맹호가 포효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울음소리는 하북팽가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오호단문도법의 특징.
그것을 무림에서 두 번째로 잘 다루어내는 그녀야말로 정파 제일 여고수.
오절(五絶) 가운데 화절(花絶), 철도후 팽연화였다.
"괜찮겠느냐? 화씨 일문에 연통을 넣어보면 가주는 아니더라도 장로급을 보내줄 것인데..."
"정말 괜찮습니다, 어머니. 이미 거의 다 나은걸요. 의원이 당도하기도 전에 흉도 안 남고 나을 겁니다."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도 역시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면 안심시키는 것도 벌써 다섯번째였다.
슬슬 지겨울만도 했지만, 제갈미령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렇게 호들갑을 떨만도 했다.
고천과 목덜미가 주뼛 서는 목욕 시간을 보낸 나는, 대략적인 사정을 전해들었다.
20년쯤 전에 지봉(智鳳)이란 이름으로 삼봉의 일인이었던 여자.
사랑 하나만 보고 당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구룡의 일인이란 칭호와 무공실력 뿐이던 고천과 혼인을 했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 유일하게 태어난 금쪽 같은 외아들, 그게 바로 고현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협객이 되고 싶어했다.
무공도 어느 정도 가르쳐놨겠다, 경험도 쌓을 겸 고천의 권유에 따라 고가표국의 표행에 동행했는데, 하느님 맙소사.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그만 죽고 말았단다.
표행이 전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모조리 고천에게 보고가 되었고, 시신까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제갈미령의 정신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아들이 멀쩡히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들이 실종되었지만 수색중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죽음만은 기어코 부정했다고 한다.
사천에 찾아온 것도 친구와 만나면 마음이 조금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거기서 짜잔, 고현과 굉장히 닮은 내가 나타난다.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서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고 행복회로를 돌리던 제갈미령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분간은 푹 쉬고, 내 너희 아버지는 못 믿겠으니 무공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줄 사람을 구해보도록 하마. 그 때까진 얌전히 있거라, 알겠지?"
"예, 어머니."
"부인,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 하는 사람이 그리 쉽게 구해질리가..."
"상공께선 잘하시죠. 하지만 남을 잘하게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부를 떠올린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내게 눈총을 주는 고천을 보고 찔끔했다.
"고생한 애한테 눈총은 왜 줘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휙휙 검 좀 휘두르는거 보여주고 따라해보라고 하는 것뿐인데 그걸 어떻게 따라해요?"
"...부인이 잘못 본 거요. 그냥 현이를 보았을 뿐인데..."
찍소리도 못하고 잡혀사는 것 같지만 고천은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가짜 아들이라도 찾은 아내가 기운을 차리는 것을 보고 즐거운 것 같았다.
근데 어쩌나.
그 가짜 아들이 어떻게든 가짜 엄마 자빠뜨리는 상상만 줄창 하고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요즘은 성욕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하루에 10번을 싸도 문제없이 버티는 몸을 안 쓰니까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칭 엄마라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서 살내음을 풍길 때마다 필사적으로 애국가를 생각하면서 발기를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는 우선 당 가주에게 인사를 하고 오리다. 부인은 여기서 쉬고 있다가 나중에 다녀오시오."
"그래도 될까요? 당 가주 성격이 조금..."
제갈미령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가 가주 성격이 꽤나 지랄맞은 모양이었다.
"걱정마시오. 혹시 아오? 나이를 먹었으니 조금은 괜찮아졌을지."
"..."
제갈미령은 묵묵무답이었다. 진짜 개새낀가보다.
"아무튼, 잠시 다녀오리다. 표국에도 연통을 넣어야하니 조금 시간이 걸릴거요."
"그렇죠. 현이가 돌아왔으니 이제 수색을 그만 멈추라고 해도 되겠어요."
[다녀오겠네. 주변 사람들한테 허튼 소리 못하게 미리 언질을 주고 와야하니 시간이 조금 걸릴거야. 적당히 맞춰주고 있게.]
아, 알겠다. 고현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인데 뜬금없이 살아돌아오면 '얘 죽지 않았음?' 이라고 하는 놈이 나오겠지.
제갈미령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니 입단속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음이 안 되니까 이거 더럽게 답답하네.
[내 아내는 나도 쉽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고수네. 허튼 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네.]
앗, 역시 너무 쉽게 믿는다 싶더니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아무래도 고천은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애저녁에 파악한 모양이었다. 황보효선은 모르던데.
아무튼 고천은 그렇게 숙소를 비웠고, 나는 제갈미령과 마주 앉아 차와 다과를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제갈미령은 굉장한 달변가였는데, 자신이 겪은 일상 이야기를 늘어놓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얼굴도 젊은 편이어서 예쁜 누나랑 소개팅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응 하지만 아니야.
"그래서 장 표사가..."
[실례합니다.]
바깥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시비인듯 했다. 제갈미령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가모께서 제갈 여협을 찾으셨습니다.]
"오, 드시라 하게!"
문이 열리고 당가의 가모, 팽연화가 들어왔다.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
이지적인 인상의 제갈미령도 조금 날카로운 이미지가 있었지만, 이 여자는 어쩐지 건드리면 손가락을 베일 것 같은 예기가 뿜어져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제갈미령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 예기가 확 줄어들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령 동생! 오랜만이네!"
"화 언니!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예쁜 여자 둘이서 신이 나서 안부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눈이 즐거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둘 다 틀림없는 최상급 밀프. 오진다, 오져.
"이쪽 소협은 누군가? 나이치고는 꽤 수련이 깊은 것으로 보이는데..."
앗, 이런. 고천이 이쪽에는 밑작업을 안 쳤구나!
한편 팽연화의 질문에 제갈미령은 깔깔대며 웃었다.
"언니, 언니 조카도 못 알아봐요? 푸흐흡... 이쪽 소협은 누군가? 나이치고는 꽤 수련이... 푸흐흐흡..."
제갈미령이 보기에는 코미디인지 몰라도 팽연화가 보기에는 다큐가 틀림없는 이 상황.
"조카...?"
"제 아들 현이랍니다. 다섯살 꼬마 때 보고 처음 보시죠? 푸흐흐흡..."
제갈미령은 여전히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팽연화는 동공이 덜덜 떨리고 있다.
시발, 전음이 안 되니까 말을 못해주네! 나는 바디랭귀지를 극한으로 발휘해서 신호를 보냈다.
'이 아줌마, 아들, 없어, 나, 이 아줌마, 아들 노릇, 잠깐, 남편한테, 부탁, 받았어.'
제발 전해져라 시발...
어느새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기세만으로도 전신이 해부되는 느낌이었다.
내력을 일으켜 대항하지 않으면 허리가 꺾일 것 같은 기세.
잠깐동안 그런 기세의 폭풍이 계속되고나서 팽연화의 얼굴이 이채를 띠더니 곧 기세가 거두어졌다.
"제법이야. 동생, 아들 농사는 꽤 잘 지은 것 같은데?"
"말도 마요, 언니. 옷을 갈아입혀놔서 그렇지 이번에 고생고생하느라 여기저기 다친 걸 보면 아직 멀었어요."
팽연화의 연기력은 개도 안 물어갈 발연기였지만 제갈미령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후기지수 중에서는 손꼽힐만해. 조금만 더 다듬으면 구룡도 노릴 수 있겠는걸?"
"그럴까요?"
제갈미령은 아들 칭찬에 입꼬리가 승천하고 있었다. 그 때 전음이 울렸다.
[일단 지금은 맞춰주겠네. 나중에 날 납득시킬 설명을 준비해야할거야.]
고천 아재 빨리 와요...
당가 가주의 집무실.
고천은 사천당가의 당대 가주, 당조명과 마주 앉아있었다.
"허, 그래서 그 출신도 모를 애송이를 아들의 대역으로 쓰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가주."
"허, 참! 그래도 명색이 오대세가의 핏줄을 반려로 두신 분이, 그리 생각이 없소?"
고천은 이렇게 오대세가에 속하지 않은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듯한 당조명의 화법이 싫었지만, 아쉬운 것은 고천이었기에 참고 대답했다.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다 책임지겠소. 당가는 다른 건 해줄 필요가 없고, 그저 내 아내 앞에서 그를 내 아들처럼 대하면 되는 거요."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일이오. 나도 아버지와 숙부들을 잃었지만 다 이겨냈다는 말이오. 그런 쓸데없는..."
"당 가주."
고천은 이글대는 눈으로 당조명을 노려보았다. 무공수위에서 고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당조명이 찔끔했다.
"아마 당 가주는 모르겠지만, 낳아 키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버리는 것이오."
"..."
"전혀 쓸데없지 않소. 나는 부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소. 인륜을 저버리는 일만 아니라면 말이지."
"그, 그러다 평생 이겨내지 못하면 어떻게 할 참이란 말이오! 평생 데리고 살 거요?!"
"그렇게 되면 양자로 들이든 뭘 하든 내가 알아서 하리다. 당가는 그냥 아내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되오. 어려운 일도 아니잖소?"
무림의 모든 절정고수 가운데 가장 초절정에 가깝다고 알려진 검의 고수, 고천의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저 수용하면 된다는 의중을 담은 산악 같은 기세에 당조명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아, 알겠소! 고 국주가 모두 책임지겠다는데 내가 더 뭐라고 하겠소! 가솔들에게도 입단속을 해둘터이니 염려마시구려!"
당조명의 대답을 받아냈지만 참지 못하고 감정을 쏟아내버린 고천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당조명은 아주 뒤끝이 긴 성격이었기 때문에 무슨 귀찮은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고천은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천이 집무실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 가주의 지시에 따라 그림자 하나가 가주 집무실에 스며들었다.
"혜원아, 들었겠지?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오너라. 용모, 무공, 성격, 그 밖에 어떤 것이라도 좋다."
"...알겠습니다."
당가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그녀는 가끔 이렇게 쓸모없는 정보를 구하기 위해 차출되고는 했다.
고천의 가짜 아들의 정보를 캐서 어디에 쓰겠는가? 기껏해야 결격사유가 발견되면 제갈미령에게 공개해서 혼란이나 일으키겠지.
설령 쓸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보의 총책임자를 불러서 시킬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당혜원은 오라비인 당조명에게 결코 반항할 수 없었다.
편협한 성격의 당조명이라고 해도 가주인 이상, 밉보일 경우 자신과 데릴사위인 남편의 입지가 어떻게 망가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심한 성격의 당혜원은 결코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나이도 약관 정도라고 하니, 쉽게 정보를 캐낼 수 있으리라. 몽환초를 쓴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