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7 뒈져라, 이 미친년아! (3)
황보효선은 발 밑에 아무것도 없는 허전한 감각에 자신의 옆구리에 매달린 남자를 들고 온 것을 잠시 후회했다.
혼자서만 왔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의의 신봉자답게 그녀는 금방 그런 생각을 털어냈다.
이 사달을 낸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무고한 이가 휘말려 죽게 되었는데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이 자만은 살려야했다. 여기서 남자를 절벽 너머로 던지면...
"그대로 잡고 있어요!"
그 때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무심결에 반응한 황보효선은 움직이려던 손을 멈추었다.
이어서 남자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아잡으면서 다리를 뻗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발이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에 흩어진 발판을 딛으며 튕겨오르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불가능해...!'
완연한 절정고수라고 할 수 있는 황보효선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재주였다.
이 정도 실력의 신법을 가진 고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이는 많이 잡아도 서른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젊은 나이에 적어도 경신법은 자신보다 윗줄인 것이다.
"큭...!"
그 한순간에 맞은편 절벽으로 넘어오는데 성공한 남자는, 황보효선을 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허억, 허억..."
이어서 스스로도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한순간에 내력을 폭발시켜 위기를 넘긴 탓에 심력의 소모가 심했던 듯했다.
구명지은을 입었다는 생각에 그에게 사죄와 인사를 하려는데, 문득 그의 얼굴에 여전히 걸쳐져 있는 복면이 눈에 들어왔다.
애초에 그를 수상하다 여기게 된 계기가 된 물건이었다.
복면을 쓰고 아미산을 내려가는 의문의 젊은 고수.
'이거 좀 수상하지 않나?'
상대는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상태. 기회를 봐서 잘만 하면 제압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문초를 해보고 무고하다면 풀어주면 되겠지.'
조심스럽게 다가간 황보효선은 곧 후회했다. 굳이 그렇게 다가갈 필요가 없었다.
고마움을 표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면 되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남자가 경계심을 품도록 만들고 말았다.
남자가 순식간에 호흡을 고르며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꾼 황보효선은 우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은혜를 입었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나는 무림맹 산하 백호단의 부단주, 황보효선이라고 하네."
상대의 반응을 보고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무죄로 보고 풀어주느냐, 강공으로 찍어누르느냐, 보답을 미끼로 조부인 검성에게 데려가서 판단을 구하느냐.
"실례했습니다. 저는 이태현이라고 합니다."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오는 남자를 보고, 황보효선은 고민에 빠졌다.
황보? 황보오오오?!
씨발 검성 친척이라도 되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버리고 오는 건데!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나를 구하려고 해줬으니까 버리기는 꺼림칙해서 데려왔더니 이게 뭐냐고!
애초에 거기서 무너지는 발판을 딛고 올라오는 것이 도박에 가까운 수였다.
고를 외치지 않으면 끝장날 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달렸던 거였다.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본능적으로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에 걸었던 승부.
나도 어떻게 해냈는지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친 결과, 간신히 살아남았던 건데...
'그렇게 살려낸 이 여자가 검성 관계자면 좆된 거잖아!'
그냥 죽게 버리고 왔어야했나... 진짜 더럽게 꼬였네...
"이 소협,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내 억측으로 자네에게 피해를 입힌데다가, 구명의 은혜까지 입다니 면목이 없어."
좋아, 일단 가명 쓰기 성공했고. 근데 태현이가 누구더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삼청태현?
"황보 여협께서 거기까지 저를 데려가지 않으셨다면 저도 죽었겠지요.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아니. 애초에 저 다리를 끊은 것은 내 잘못이네. 게다가 나라면 무너지는 발판을 밟고 올라오지 못하고 죽었을 거야. 내 꼭 갚아주고 싶으니 나와 동행해줄 수 있겠나?"
말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중했지만 뭔가 촉이 온다.
'날 잡아가려고 그러나?'
"죄송합니다만, 저도 어머니를 빨리 뵈어야해서...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돌려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자네의 돈을 잃어버리게 만든 사람이 나 아닌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와 동행해주게."
메소드 연기를 핑계삼아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다짜고짜 저를 위협한 사람이 무림맹 사람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내 할아버님께서 검성이시네. 무림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해도 좋아."
오우쒯 친손녀였냐.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터놓고 말하지. 난 자네가 굉장히 수상하네. 이런 무공수위를 가지고서도 무림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감추고 내게 바짝 숙였던 점이 특히 말이야."
"..."
"날 따르게. 할아버님과 대면해보고 자네에게 죄가 없다면 절대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하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황보효선이 천천히 뽑아든 거검에서 우윳빛 검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몸을 크게 상하게 될지도 모르네."
이야, 그냥 쓴 복면이랑 숨기고 있던 무공, 메소드 연기가 이런 스노우볼이 되서 돌아오네?
나는 더 참아봤자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친, 먼저 시비 털고 남의 돈 털어먹은 년이 사람 죽일뻔해놓고 반성은커녕 이젠 끌고 가겠다고 지랄이네."
내 팩트폭행에 황보효선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내 손속이 과하다고 원망말게."
그녀의 검이 나를 겨누고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왔다.
그래도 욕이라도 한바탕 시원하게 하니까 속은 시원하네.
라고 생각하던 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 저기 말입니다. 여협. 대단히 죄송하지만 제가 사죄 말씀 올리고 싶은게..."
"이대로 따라갈텐가?"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하던 푸닥거리나 마저 하세!"
"아이고 여협!"
나는 황보효선에게 개같이 쳐발리고 있었다. 내공이야 둘 다 절정급으로 비슷하다고 해도, 초식 운용면에서 현저히 밀리니 당연한 결과였다.
왼쪽 어깨를 노리고 베어들어오는 검을 간신히 권으로 걷어내면, 귀신같이 오른쪽 아랫배를 노리고 찌르기가 온다.
그나마 3번 중에 1번 정도는 그걸 제때 받아내지 못해 몸에 상처만 하염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황보효선의 검은 극단적으로 변초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장중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광범위하게 차단해버리고 움직임이 둔해진 상대의 빈틈에 강맹한 찌르기를 가한다.
그것이 황보효선의 검이었다. 단순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검.
변초가 적은 만큼 움직임에 낭비가 적고, 그만큼 속도는 빨라진다. 여인이라서 부족한 위력은 검의 무게로 커버한다.
다행인 점은 그런 식의 공격은 결정타가 들어오는 경로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나 같은 내공만 많은 병신이라도 결정타를 방어할 경로를 쉽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 같은 무지렁이가 황보 여협의 큰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돈 몇 푼 잃은 걸로 여협께 불경한 언사를 했으니 어찌 용서를 바라겠습니까?"
"...어머니를 위해 모은 돈이 아닌가?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네."
그 설정 아직도 지속중이었구나. 아, 씨발!
깡!
"조심하게. 나도 가능하면 지금은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아. 적어도 전후사정은 알고 죽이는게 도리가 아니겠나?"
씨발 내 대가리 뚫을 뻔한건 너잖아요!
그래도 슬슬 검의 궤적이 눈에 익고 있다. 아무래도 이제 타이밍이 온 것 같은데?
나는 걸음을 슬슬 뒤로 물리면서 공격을 피했다. 점점 수풀이 우거진 곳까지 위치를 옮기자, 검속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큭..."
황보효선은 대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변초가 적다고 해도 사방에 나무가 있는 상황에서 검을 평소처럼 휘두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절정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조급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고 저를 그냥 보내주십시오. 제가 무슨 악행을 저지르거나 사악한 마공을 익힌 것도 아니잖습니까?"
"큭... 이제서야 여기로 끌어들일 생각을 떠올린 주제에 기고만장했군."
검을 타고 흐르던 검기가 더욱 진해지며 압박해들어왔다. 솔직히 일격이 들어올 때마다 기혈이 뒤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도 결코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입을 나불댔다.
"그럼요, 그럼요. 뒤늦게라도 이렇게 들어와보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천양지기를 실은 장력을 밀어내자 황보효선이 그대로 받아냈다.
아까까진 검기에 결을 따라 베어져 손쉽게 무력화되었던 장력이 지금은 황보효선에게 피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장력도 그대로 들어가고... 크으, 좋구만, 좋아."
그렇게 도발하자 황보효선은 다시 멧돼지처럼 쳐들어왔다. 넘어온다, 넘어온다.
"뭐라고 하셨죠? 손속이 과해도 원망말라? 풉!"
계속해서 도발을 뿌려주며 적합해보이는 지형을 찾아서 조금씩 물러난 결과, 나는 목적한 위치까지 도착했다.
"입만 산 소리도 끝이다!"
쉬이이익
검기가 진하게 맺힌 검이 찔러들어온다.
그야 몰아넣은 것 같았겠지. 슬슬 밀려나던 놈이 등 뒤에 바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으면 나 같아도 그랬을거야.
빠드드드득!
황보효선의 거검이 묵직하게 바위에 찔러드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거검이 있는 자리에 나는 없었다.
나는 여유롭게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로 황보효선을 내려다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빠르게 공격할 수 있는 찌르기로 공격해오는 적.
주변에는 검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조급해진 정신.
순간적으로 검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까지 있다면?
어려울 것도 없는 빅픽처, 아니 스몰픽처다.
"뒈져라, 이 미친년아!"
나는 등룡보법의 각법 중에 용조각(龍爪脚)을 펼쳤다.
용의 발톱처럼, 세 갈래의 날카로운 참격이 맺힌 발로 적을 치는 각법.
면상에라도 맞으면 그대로 황천행 티켓 발권 완료다.
그래, 그 면상에...
'씨발!'
다가온 죽음에 절망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발이 아주 잠깐, 반의 반 호흡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늦어졌다.
그 결과, 용조각은 황보효선의 거죽 하나 긁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여유를 가장한 말투를 여전히 유지하며 말했다.
"아깝군요. 그래도 이제 여협은 빈 손 아닙니까? 항복하고 갈 길 가시죠."
그 찰나의 순간 황보효선은 즉시 검을 놓고 몸을 뺀 덕분에 옷의 가슴팍이 살짝 베어지는 정도로 끝났다.
이건 솔직히 내가 이긴 게임 아닌가? 검성 손녀가 검 없이 뭘 할 수 있음?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바위에 꽂힌 검을 멍한 시선으로 보던 황보효선이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황보효선은 소위 꼴리는 밀프다. 그런 여자가 허리띠를 푼다? 오우야, 오우야, 오우야...
그걸 넋놓고 보던 나는 다음 순간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잇, 싯팔."
허리띠에 검기가 덧입혀지더니 꼿꼿이 일어선 것이다. 연검이었다.
"그래, 자네의 본심 아주 잘 들었네. 이젠 정말 봐주지 않을 것이니 각오하게."
좆같은 2페이즈 필요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