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6 뒈져라, 이 미친년아! (2)
강윤이 한창 산을 내려가고, 검성은 반대로 산을 올라오던 그 시각.
아미산 구석 어느 분지에서는 눈물겨운 모녀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혜아야!"
언소영은 눈물젖은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어머니..."
남궁혜 역시 힘없이 웃으며 어머니를 마주 불렀다.
언소영은 딸을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다소 초췌해진 기색이긴 해도 상한 곳은 없어보였다.
필요없는 사람 한 명이 끼어있지 않았더라면 언소영은 정말 순수하게 재회를 기뻐할 수 있었으리라.
"보기 좋군. 역시 가족은 함께 있어야지."
그 필요없는 사람이 말까지 한 마디 밉살스럽게 끼워넣으니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해줬더라면 더 좋을 뻔했군요."
이자성은 당돌한 대꾸에 내심 기가 막혔지만 그저 웃었다. 그녀가 일부러 들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소영은 제자의 아이를 가졌다. 그것도 자신의 뜻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제자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아니었다. 언소영 역시 그 이야기를 할리가 없었다.
검성을 비롯한 지극히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색혈마 이자성은 섭혼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타인의 심령을 제압하고, 감정을 조종하고, 기억을 고쳐쓸 수 있는 술법이 섭혼술이었다.
완벽하게 뜻대로 고쳐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했다.
예를 들면 남궁세가의 가솔들의 기억을 고쳐써서 '압도적인 고수에게 세가의 절정고수가 살해당했다' 가 아니라, '절정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고수의 습격에 맞서 세가의 절정고수들이 적을 유인해갔다'라고 믿게 만든 것처럼.
덤으로 '우선 세가에 빨리 알려야한다' 라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궁세가의 가솔들이 즉시 사천당가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자의 존재는 반드시 비밀로 남아야했기에 이자성은 그 섭혼술로 언소영과 남궁혜의 기억도 고쳐쓸 심산이었다.
'애초에 강윤이라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거나, '언소영을 범한 것은 이자성이다' 정도로 고쳐쓸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지껏 범한 여자만 해도 기백을 헤아렸다. 한 명 정도 더해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그 계획은 벽에 부딪혔다.
남궁혜는 어렵지 않게 강윤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었지만, 언소영은 불가능했다.
섭혼술로 기억을 지우는데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피시전자가 그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할수록 기억을 지우기 어렵다.
둘째, 피시전자의 내력이 정순하고 고강할수록 기억을 지우기 어렵다.
어처구니없게도 언소영은 제자와 사랑을 나눈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아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언소영은 지난 한 달 동안 괄목할만한 내력의 성장을 이루어냈다.
'미친놈... 한 달도 안 되서 절정 상급에 가깝게 만들어놓다니...'
이자성은 제자가 남궁혜의 외모를 평한 말을 떠올렸다.
[남궁 소저 말입니까? 예쁘죠. 예쁜데, 뭐라고나 할까... 예쁜 꽃? 예쁜 그림? 예쁜 경치? 그런 느낌입니다.]
내심 고자인게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던지. 등선공의 발전에는 방사가 필수적인데 이대로 희망이 꺾이나 노심초사했지만...
'얼마나 박아댔으면 다른 무공수련은 하나도 못했는데 오히려 무공수위가 높아지는지 원...'
절정 중급 중에서도 하위에 가까웠던 내력이 절정 상급을 노려볼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확인된 제자의 성욕은 기꺼운 일이었지만 그 결과 기억을 지우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우릴 부른 이유가 있겠죠? 세가에서 몸값이라도 지불한다고 하던가요?"
딸에게도 의심받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따위 말버릇으로 지껄여도 다 이해하고 참아야된다는 말이었다.
언소영의 내면에서 제자에 대한 애정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더욱.
"자네들을 데려갈 사람이 찾아올 것일세. 아, 몸값 따위는 받지 않으니까 염려말고."
분명히 이자성에 대한 감정이 실려있는 듯했지만 이 정도는 아량으로 넘어가줄 수 있었다.
이자성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지풍이 날아가 두 사람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자 그녀들의 안에서 내공을 억누르고 있던 현천지기가 흩어지고 금제가 풀렸다.
"금제가...!"
"언제까지고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나."
두 사람은 내공이 돌아와서 기뻐하는 것도 잠시, 곧 얼굴을 굳혔다.
"어허, 얼굴 풀게, 얼굴 풀어. 천하제일 검협이 자네들을 구하러 왔는데 그렇게 얼굴이 굳으면 쓰나."
주변을 짓누를 것 같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는 기척의 주인이 검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곧 화색이 되었다.
"쯔쯔... 그 미친개가 인망 하나는 제대로 쌓았구먼. 제대로 그 인간을 접해본다면 꼭..."
이자성의 손이 쾌속하게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 손에는 원래부터 쥐어져 있던 것처럼 검날이 쥐어져있었다.
"소문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텐데 말이야, 안 그런가 황보 아우?"
그 검을 쥐고 나타난 강건한 인상의 노인이 답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오랜만이오, 이 형."
"서라."
나는 조심스럽게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듯하던 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 말씀입니까요?"
묘하게 시선에 위압감이 있어서 말이 비굴하게 나갔다.
"여기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느냐?"
"...귀한 댁 분이신 것 같아서 저 같은 천것에게 볼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지 말입니다요."
"그럴 수도 있겠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띨빵해보였다. 뭐지?
"하지만 이 산 속에서 복면을 쓰고 있는 놈이 결코 선량한 민초일리는 없을터.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등에 검을 차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답정너인 것도 그렇고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나는 은근히 내력을 일으켜 전투준비를 하면서도 열심히 입을 놀렸다.
"에구머니! 오해입니다요! 목은 마른데 물은 없고 입 안이 깔깔해서 천으로 가린 것이지 결코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요!"
"오해인가 아닌가는 내가 판단하겠다. 자, 어서 복면을 내려라."
내가 손을 들어 복면을 일단 내리려는데, 갑자기 이 년이 검을 뽑는 것 아닌가?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죽이는게 아니다. 복면은 내가 내릴 것이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거라."
그러면서 검 끝을 복면 가까이 가져간다. 이랬다 저랬다 오졌구요. 그리고 찔리면 니가 책임질래?
나는 몸을 펄쩍 뒤로 뛰고... 싶었지만 등 뒤는 낭떠러지다.
"제가! 제가 내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제가 여기서 죽으면 저 하나만 보고 살아가시는 노모는 어쩌란 말씀입니까요!"
"노모가... 계신가?"
"형이란 작자가 돌아가신 부친의 유산을 들고 날라버린 탓에, 어머니께서는 몸도 마음도 병들어서 시름시름 앓고 계십니다요!"
되는대로 펼쳐대는 메소드 연기에 여자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바싹 들이대던 검도 살짝 멀어졌다.
"재주없고 못난 아들이지만 목숨 걸고 상행에 다녀와 이제 어머니를 편히 모실 준비를 했는데, 제가 여기서 죽으면 어머니께서는..."
"효자였군."
살짝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니 감동한 눈치였다.
'이 여자, 혹시...'
빡대가린가?
대충 야부리 좀 털었다고 그거에 넘어가네?
내 생각을 모르는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복면은 되었네. 짐만 조금 확인하겠네. 괜찮겠는가?"
"물론입니..."
흔쾌히 대답을 하려던 나는 문득 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고 굳어버렸다.
이 안에는 혹시 하오문의 신세를 질 때를 대비해서 사부가 하오문 사천 지부장에게 간단히 적어준 서신이 있다.
겉봉에 [이자성] 세 글자도 아주 이쁘게 박혀있고.
'이걸 보여주면 즉시 전투다. 어떻게 하지?'
1초 동안 두뇌를 풀가동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보여드려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혹시 귀하신 분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요. 워낙 더러운 물건들이 든지라..."
"괜찮네. 먼 길 다녀오는 사내들이 얼마나 지저분해지는지 정도는 잘 알지. 괜찮으니 열어보게."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등짐을 쉽게 열 수가 없었다.
한편 내가 머뭇대자 여자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이 산에, 어떤 마두가 숨어있다고 하더군."
"...처음 들었습니다요."
"염왕도라고 하는 자인데, 그 무공이 절정고수 중에서도 상위에 꼽힌다고 들었네."
"그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요."
"그래...?"
결국 손을 쓸 생각인 것 같았다. 사부를 제외한 사람과는 처음으로 싸워보는 탓인지, 내 손 안에는 땀이 가득했다.
"정확히 자네의 짐 정도의 크기라면 도 한 자루가 간신히 들어갈 것 같군."
"...그렇습니까요?"
"생각해보게, 그런 큰 도를... 이렇게 빠르게 휘두르는 거지."
말을 맺기도 전에 휘둘러오는 검에 반응이 늦었다. 미친...?
싸악
오싹한 소리와 함께 등짐의 옆이 터지면서 내용물이 전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밑은 말할 것도 없이 강.
"내 도오오오오오온!!!!!!"
서신 외에도 당분간 생활비로 쓰라고 준 돈이나 갈아입을 옷 같은 것이 들어있었는데, 그게 강에 빠져버린 것이다.
"도, 도가 든 것이 아니었나? 염왕도의 관계자가 아니었어...?"
"씨발, 무슨 개소립니까! 염왕도인지 나발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내 돈, 아이고 내 돈..."
어디 적당한 주루에 가서 맛집 탐방이나 하면서 지내려고 했는데!
은자가 그 정도면 1년 정도는 너끈히 흥청망청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나한테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겁니까!"
"아니 그게,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는 모습에 순간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불효자가 멍청해서 주머니를 다 털렸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
메소드 연기까지 동원해서 통곡을 하는 거다.
돈도 제법 있어보이겠다 있는 만큼이라도 뜯어내면 그래도 당분간 일용할 양식 정도는 구하겠지!
어깨가 움츠러드는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나는 발판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통곡했다.
"아이고, 어머니이이!! 이 못난 아들이 손가락을 베어 피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아아아!!"
투둑
한창 연기에 몰입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마치 밧줄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여자가 나를 허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흐억!"
"조금만 참게."
아현한테도 이 꼴이 나더니, 무공을 익혔는데 왜 또 이 꼴이지?
그렇게 붙잡힌 상태로 원래 내가 있던 자리 쪽을 보니, 튼튼하게 다리를 지탱하던 밧줄이 끊겨나가 있었다.
어, 저 위치...? 딱 내 등짐...?
'이 씨발년이 실수로 밧줄까지 끊어버렸구나!'
와꾸가 반반하다는 사실은 이제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되도 않는 누명으로 사람을 고생시키더니, 돈도 버리게 만들고 이젠 다리까지 끊어버려?
밧줄이 빠지면서 그것에 엮여있던 발판들이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 여파로 멀쩡하던 반대쪽 밧줄까지 끊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무너지는 발판이 점점 뒤를 쫓아오고...
"아."
반대쪽 절벽까지 단 세 걸음을 남기고 발 밑이 비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