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 천하제일고수(색마)로 만들어주마 (2)
남궁세가주의 부인이자 남궁세가의 가모인 언소영은 잠시 갈 길을 멈추고 딸과 시비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딸을 잘못 키워놔서... 에휴..."
"괜찮네. 세가를 위한 충심 아닌가."
부드럽게 웃으며 시비를 달랜 언소영은 어차피 서둘러도 늦었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급하게 전갈이 들어온 것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보고 연락을 보냈을 뿐, 제때 도착하리라 기대하지는 않는 듯 했으니까.
시비 한 명이 멀리서 들려온 괴성을 확인하러 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재해'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챙
"거기 누구냐!"
세가에서 급히 보내온 절정고수, 남궁태현이 외치는 소리에 언소영은 고개를 돌렸다.
남궁태현의 검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청의노인이 뒷짐을 지고 표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체 언제?'
그녀를 포함해 이 자리에는 절정고수가 셋이나 있는 상황이었다.
남은 이대제자 몇 명은 몰라도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나 가까이 접근하다니?
노인은 그들의 시선 따위는 관심 밖이라는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남궁혜는 어디 있는가? 분명 아미산을 내려오고 있을터인데..."
"이놈! 혜아는 왜 찾는다는 말이냐? 대답하지 않으면 네놈의..."
퍽
"시끄럽구나. 남궁혜만 내놓으면 성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을..."
남궁태현은 말을 마저 맺지 못하고 머리가 날아간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노인은 보란듯이 손가락을 한 번 털어내고 다시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지풍을 날렸을 것이라는 짐작만이 가능할 뿐, 이들 중 누구도 노인이 손가락을 겨누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언소영은 등골이 시려왔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채채채채채챙
시비는 뒤늦게 비명을 질렀고, 뒤늦게 또다른 절정고수와 이대제자들이 가모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뽑았다.
"허, 괜한 짓거리를 하는구나."
노인은 묘하게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올리다가 무엇인가를 느낀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빈틈투성이로 보였지만 누구도 그에게 검을 휘두르지 못하던 그 때, 언소영은 빠르게 접근하는 기척을 느꼈다.
'안 돼!'
딸이 돌아오고 있었다. 노인의 목적은 딸이라고 했으니, 그녀가 잡혀가면 노인의 목적은 이뤄지는 셈이었다.
정확히 무슨 목적인지 알 수 없을지언정, 언소영은 노인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혜아야, 달아나거라! 어서!"
언소영은 외침과 동시에 발을 굴러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 정도의 실력으로 노인의 한 수라도 막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다행히 남궁세가의 절정고수는 그 한순간의 외침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녀와 즉석에서 합공을 펼칠만한 재치가 있는 사내였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창궁무애검법의 이 초, 창궁소월이 펼쳐지고 사방을 검영이 뒤덮었다. 뒤이어 언소영의 주먹에서 권풍이 일어 뒤를 받쳤다.
남궁혜는 제법 영민한 편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금방 이해했을 것이었다. 다만 언소영이 염려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제발 가거라!'
부드럽고 선량한 성품 때문에, 힘을 보태겠다는 허튼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
노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릴 수 밖에 없는 오판이었다.
둘이 힘을 합쳐서 버틸 수 있는 한계는 기껏해야 삼 초, 언소영은 그 정도를 예상했기 때문에 남궁혜가 머뭇거릴수록 그녀의 발악은 개죽음이 될 것이었다.
"쯧쯧..."
그 때, 언소영의 귓가에 노인이 혀를 차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 음성은 그들의 선택이 틀렸음을 비웃는듯 했다.
언소영은 움츠러드는 주먹을 억지로 내뻗었지만 설령 그 상황에서 주먹을 거두었더라도 별 의미는 없었으리라.
노인이 오른손으로 가볍게 튕긴 지풍에 허실을 속이며 끝없이 검영이 불어나던 창궁소월의 실초만이 정확히 격파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퍽
바로 한 호흡 전까지만 해도 결사의 각오로 무섭게 검을 휘두르던 남궁세가의 절정고수 한 명이 또 머리를 잃었다.
연이어서 날아드는 권풍은 가볍게 소맷자락을 털어버리는 것으로 처리한 노인의 시선이 남궁혜에게 가서 닿았다.
시종일관 느긋하던 노인의 안색이 변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도착하자마자 짐덩이처럼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인 나는, 화려하게 움직이는 검이 마치 장난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뭔데?
두 사람이 한 명한테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 같았는데, 뭔가 번쩍번쩍 하는 것 같더니 금방 상황이 끝나버렸다.
진짜로 개처럼 발려버린 것이다.
손가락만 몇 번 까딱이는 것 같더니 사방을 뒤덮던 검그림자가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사람 머리가 날아갔다. 이거 실화냐?
뒷모습으로 봐서 여자로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싸워보려고 하는 듯했지만, 점혈이라도 당했는지 곧 꿈쩍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아가씨, 피하셔야합니다."
"안 돼, 이대로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
"피하시길 바라셨습니다! 가모께서도 당해낼 수 없던 상대임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한편 아가씨와 아현, 두 사람은 저 노인네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시간벌이가 다 끝장난 이 상황에서도 논쟁이나 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장르소설에는 한가지 법칙이 있다. 그건 강한 놈은 약한 놈보다 무조건 속도가 빠르다는 것.
'이제 와서 도망가봤자 금방 잡힐걸.'
흔적을 보고 추적할 능력까지 있으면 도망이고 나발이고 봉쇄되었다고 보는게 옳았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기대해보려면 도망치라는 소릴 들었을 때 바로 내뺐어야했다.
우선 지금은 잡힌 다음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도망치자는 이야기를 꺼내려던 순간,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노인의 눈이 접시만하게 커지는 것을 본 나는 마치 맹수와 마주한 것 같은 감각을 느꼈고, 정신을 차려보니 몸을 돌려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양 옆에 자라나있던 아름드리나무의 허리가 꺾이는 듯 싶더니 내 앞에 쓰러진 것이다.
걸음을 멈춘 내 등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지 말고 이리 오게나.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귀찮게 군다는 짜증이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게다가 노인치고는 청량한 음색이어서 믿음도 갔다.
...는 지랄! 방금 사람 대가리 깨던 노인네한테 뭐래!
아무튼 여기서 더 도망가려고 해봐야 죽는다. 모르던 사실도 아닌데 몸이 멋대로 도망치던 것뿐.
난 다시 노인을 향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경멸이 담긴 아현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민망함에 걸음을 빨리 했고, 이윽고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는 노인 앞에 마주 섰다.
"어르신, 어쩐 일로..."
"어허, 조용히. 가만히 서있게나."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도 하고, 등허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손목을 잡아보는 노인을 상대로 나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게이는 아니길 절실하게 기도하면서.
손목에서 한동안 간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노인은 손목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저, 어르신, 확인은 끝나셨는지..."
절대, 절대 이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나는 최대한의 공손함을 쥐어짜야했다.
머리 대신 깨진 수박을 달고 살 수는 없었다.
"암, 아암! 끝났네! 끝났고말고!"
노인은 세상 유쾌한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할 수 있는게 그것뿐이었으니까.
"이보게, 소형제. 자네 혹시 무공 익혀볼 생각 없나?"
그랬다. 노인, 아니 구배를 올린 지금은 사부라고 불러야할 색혈마(色血魔) 이자성은 남궁혜의 처녀를 따먹으러 나타났다가 천고의 기재(=나)를 운좋게 주웠던 것이었다.
자, 이렇게 내가 왜 이 노인네 앞에서 '색천문의 이상' '방중술과 선도의 연관성' 등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는지에 대한 간단한 배경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노인네, 아니 이제부터는 마음속으로도 사부라고 불러야지. 입에서 잘못 나갔다가는 뒤질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사부는 열성적으로 나를 가르칠 생각인듯, 중간중간 이미 가르친 내용에 대한 질문이 날아왔다.
"자, 고대의 선인들은 신선이 되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이냐?"
"무공, 영약, 방중술입니다."
"그렇지. 고대에는 그 셋의 구분이 명확히 나뉘어져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지를 갈고닦는 와중에 다른 방면에 대한 지식을 자연스럽게 얻기도 했다."
강연은 계속 이어졌다.
시대가 흐르고 천하가 혼란에 접어들면서, 점차 무공의 중요성이 커지고 빠르게 발전해나갔다.
영약은 선도의 극의에 이르는데는 부족해도 무공의 습득에는 충분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무공과 더불어 발전을 거듭해나갔지만, 방중술을 통해 선도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 발전이 뒤처졌다.
자연스럽게 나머지 두 부류로부터 잡스러운 기술 취급 당하며 무시당한 끝에 소위 '색마'라는 부류로 분류되며 탄압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색천문의 칠대 조사께서는 당시의 이름난 무공이라는 것들과 방중술을 접목하여, 지금 내가 익히고 있는 '등선공'의 원형을 창시하셨다."
"..."
"이후 대를 내려오면서 조사들께서는 나름의 깨달음을 담아 등선공을 발전시키고 그에 맞는 초식을 만들어내셨다. 이것이 색천문의 역사이며, 신선을 목표로 선대로부터 쌓아올린 것들이니라."
듣고보니 제법 본격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육신을 맑게 하여 신선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그 과정에서 무고한 여자들을 따먹고 다닌다는 거지만.
"등선공은 근본적으로 자연의 기를 받아들여 육신을 맑게 하고, 수련을 통해 신선에 가까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공이다. 기초적인 동공(動功)을 시작으로, 점차 상위의 심법을 사용함으로써 서서히 수련을 진행해나가야함이 옳으나... 네게는 조금 다른 방법을 시도할 생각이다."
"다른 방법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앞으로도 문파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너도 모든 과정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으니, 새겨듣도록 해라."
사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몇 가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보고 따라 하거라. 이것이 바로 본문의 입문공이자, 동공인 '색도시발(色道始發)'이니라."
예? 뭐요? 섹시도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