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여행 >
12월이 되었다.
나는 지금 의대 건물 근처에서 이세연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있자 청바지에 코트를 입은 세연이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건물에서 나왔고, 나를 보더니 사람들을 팽개치고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오빠 여기예요! 오~~ 웬일로 깔끔하게 입었네요."
"너무 편하게 다닌 거 같아서 이제 좀 챙겨 입으려고. 너도 츄리닝 아니네?"
"오빠가 잘 입으니깐, 나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때 이세연 의대 동기들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우리 근처에 섰다.
"세연아, 누구야?"
"저번에 말했던 나랑 제일 친한 오빠야. 잘 생겼지?"
"어. 진짜 잘생기셨다. 안녕하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챙겨 입고 나오길 잘했네.
이세연 동기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너무 세연이를 편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자랑하고 싶었을 건데.
무엇보다 얼굴 믿고 안 꾸미고 다니면 전생이랑 똑같은 삶이잖아! 앞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잘 챙겨입고 다녀야겠다.
회사 생활에서도 필요한 부분이다.
"이제 가자."
"네. 너희들도 방학 잘 보내~ 다음에 봐~"
"응 세연아. 방학 잘 보내."
우리 둘은 팔꿈치가 맞닿을 정도로 붙어서 정문을 향해 걸었다.
"너 친한 애들 있었어? 다행이다."
"쟤들도 아싸여서 친해졌어요. 진희 바쁘니 같이 밥 먹을 사람 정도는 있어야죠. 아!!! 좋아~ 좋아~ 좋아~"
"갑자기 뭐가 그렇게 신났어?"
"이제 방학이잖아요! 오빠 시험 잘 봤음?"
"보기는 잘 봤음. 풀지를 못해서 그렇지."
"치~ 학점 관리 잘하면서 괜한 소리 하기는."
"의대생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는 않거든. 그나저나 생각해 봤어?"
"뭐요?"
"됐다. 혼자 갈 거다."
"아하하하~ 우리 여행 가는 거요? 당연히 생각해봤죠! 나는 무조건 좋아요! 어디 갈 거예요? 제주도? 아니면 울릉도?"
"너 섬에 들어가고 싶은 거 같은데. 이거 기분 탓이지?"
"어? 그러고 보니깐 그렇네! 악!!!!!"
"또 갑자기 왜?"
"나 방금 오빠랑 같이 섬에 갇히는 생각 했음. 끔찍해!!! 두 번 다시 어디에 갇히고 싶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저번처럼 눈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 하지 말고 우리 해외 가자!"
"진짜요? 해외 가자고요?"
"왜 싫어?"
이세연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너~~~무 좋죠!!! 오빠가 웬일이래? 해외 가자는 말을 다 하고!"
"그냥. 나도 졸업인데 놀러 가면 좋을 거 같아서."
"어디 갈 거예요? 선미 언니 만나러 독일 갈래요?"
"아니. 우리끼리 여행 가고 싶어. 칸쿤 어때?"
"칸쿤요···? 응? 어디지? 스리랑카 이런 곳은 아니죠? 열대 밀림체험은 안 하고 싶습니다!"
"아니거든. 멕시코에서 제일 놀기 좋은 해변 중에 하나야. 플로리다 사람들이 자주 놀러 가는 곳이래. 엄청 유명한 휴양지야."
전생에 아는 사람이 신혼여행 갔다 온 후, 좋다고 강력 추천했었다.
마침 12월 말이면 건기쯤 되니 날씨도 나쁘지 않고.
이세연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개를 돌려서 세연이 얼굴을 봤는데, 해바라기가 피어 있다.
"좋아!!! 진짜 좋아!!!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나, 이거 거짓말이면 진짜 오빠 다 뜯어 버릴 거예요!"
"...너 은근히 섹드립 한다. 거짓말 아니야. 이미 다 알아봤어. 가는 길에 뉴욕에서도 며칠 보내는 코스야. 마음에 들지?"
"아! 너무 좋아!! 오빠!!!"
이세연은 나에게 얼굴을 비비며 매달렸다.
"야! 사람들 보고 있어!"
"어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어요? 나는 오빠가 여행 가자 해서 제주도 정도 생각했거든요!"
"그 정도로는 우리에게 약하지. 나 할 때는 하는 사람이야. 대신 조건이 있음."
"뭐예요? 설마! 뭐 밤새 그런 거 아니죠? 아니 그런 거라도 밤새 할래!"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애를 이상하게 만들었어!"
"아하하하~ 당황하니깐 재밌어! 그럼 뭐예요?"
나는 세연이와 한 걸음 떨어진 다음 모델처럼 포즈를 취했다.
"우리 존나 멋있게 입고가자. 마치 할리우드 커플처럼 보이게. 어때 콜?"
여자들이 해외 갈 때 제일 중요한 게 패션이지. 그래야 사진이 예쁘게 찍히잖아.
이세연도 여자인지 껑충 뛰면서 좋아했다.
"나도 콜! 백화점 가서 옷 사야겠어!"
"...잠시만. 설마 그 쇼핑을 함께해달라는 건 아니지?"
"노노노~ 아녜요. 그러면 재미없잖아. 오빠는 여행 가는 날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너 뭐 하니?
엄지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내가 얼마나 스타일리쉬 한 사람인지 보여줄게요! 아마 깜짝 놀랄걸요? 아하하~ 너무 신나!!!"
그렇게 좋아?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여행 한 번 데리고 갈걸.
괜스레 조금 후회가 된다.
*
여행가는 날, 아침 일찍 차를 이세연 서울집 앞에 주차하고 기다렸다.
언제 나오니?
5분쯤 지나자 덜컹거리는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왔어? 와... 잠시만."
"킥킥킥. 어때요?"
이거 반칙인데. 너 이렇게 예뻤어?
풀 메이크업을 한 이세연. 하얀 피부가 더 하애져셔 붉은 입술이 도드라진다.
그 입술에 노란 머리 그리고 고양이 같은 얼굴이 합쳐지자 귀여우면서 섹시한, 예쁘면서도 요염한!
- 닥치고 그냥 보기나 해.
네 호구신님.
시불. 그냥 예쁘고, 귀엽고, 요염하다.
이렇게 예뻤었어?
두근. 두근. 두근.
학교에서 츄리닝 입던 것과는 다른 세연이 모습에 흡입되듯이 빨려 들어간다.
진짜, 여자는 꾸미면 천 배쯤 더 예뻐지는구나. 지금 모습을 민정상이나 박인혜가 봤으면 바로 연기자 데뷔시켰을 거다.
이세연은 캐리어를 손에서 놓고 양팔을 뒤로 돌린 후,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오빠~ 나 어때요?"
"잠시만. 너 그런 포즈 하지 마."
"아~~ 왜요!"
"귀여워서 미칠 거 같아! 와 너무 예쁜 거 아냐?"
"오빠야말로 너무 멋진데요? 우리 오빠 이렇게 잘생겼었나?"
양손으로 내 코트를 톡톡 만진다.
에헴. 나도 어디서 꿀리지 않아.
오늘 나름 잘 챙겨 입고 왔지. 칼 한 자루 심장에 꽂혀있으면 지금 딱 도깨비의 공유다.
...보급형 공유 정도는 되겠네.
"그럼. 이렇게 예쁜 사람 옆에 서야 하는데, 안 챙겨 입으면 안 되지."
"아하하~ 오늘 립서비스 왜 이리 좋아요?"
"오늘은 립서비스 아니고 진짜 진심이야. 네가 너무 예뻐서 너무 좋아!"
"그래요?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평소에도 입을 걸."
"너는 오빠 보니깐 어때?"
"헤헤헤. 나도 좋아요~ 분위기 있는 게 외국 모델 같아요."
"그래? 네가 좋아하니깐 나도 좋네. 나도 마찬가지로 네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챙겨 입고 다닐걸."
"그러게요. 우리 한동안 서로에게 너무 무심했었나 봐요."
효과 있네.
서로가 얼마나 예쁘고 잘생긴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준비 다 했으면 이제 갈까? 캐리어 줘."
"제가 들고 갈게요."
"노노~ 오늘은 제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어? 아하하하 기분 좋아~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캐리어를 받아서 자동차 트렁크에 실은 후, 차에 탔다.
"오~ 오빠 이거 새 차예요? 나 처음 타봐."
"어때 좋지?"
"네! 이렇게 입고 외제 차 타니깐, 우리 진짜 연예인 같은데요? 나 지금 텐션 높아지고 있어. 정말 신나!"
너도 여자구나. 들떠서 어깨춤을 춘다.
여자라면 예쁘고 멋있고 싶은 게 당연하지.
좋아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는데, 세연이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케이스를 꺼냈다.
"뭐야?"
"잠시만요~ 눈 감아보세요~"
나는 눈을 감았고, 얼굴에 뭔가 쓰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연이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로 얼굴에 선글라스가 있었다.
"후후~ 여행 갈 때는 필수품이죠~ 어때요? 쇼핑하면서 커플 선글라스로 샀어요."
"오~ 좋아. 이거 비싼 거 아냐?"
"별로 안 비싸요. 진짜 비싼 건 이거죠."
"뭐? 또 뭘 준비했어? 어!"
쪽!
내 입술에 이세연의 입술이 붙었다.
살짝 뽀뽀한 후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헤헤헤~ 고마움의 키스입니다. 이게 진짜 비싼 거예요!"
"아니야. 이것도 싼 거야. 그리고 이건 키스가 아니거든."
"...에이~ 설마. 지금 키스 해달라는 거 아니죠?"
"딱 10초만 해줘. 지금 너랑 키스하고 싶어."
...
조용하다.
차 안은 조용해졌고, 이세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는데, 미치겠네. 예뻐져서 그런가? 심장이 폭발하듯이 뛴다.
향긋한 향수 냄새가 먼저 코로 들어왔다.
쪽!
우리의 입술은 가볍게 붙었고, 이세연 혀가 내 입술을 벌리면서 입안으로 들어왔다.
쪼륵. 쪼륵.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혀를 부드럽게 감쌌고, 10초가 지나자 세연이는 나에게서 떨어졌다.
"어... 어... 나 왜 부끄럽지. 오빠 얼굴 못 보겠어요."
"나... 나도 그래. 오늘따라 왜 이리 두근거리냐?"
"좋았어요?"
"너무 좋았어. 영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어."
"정말요?"
"어. 10초만 더해줘."
"아이! 그만~ 나중에 미국 도착하면 해줄게요."
"딱 10초만! 제발."
"치. 알았어요~"
우리는 다시 10초 동안 키스했다.
진한 브랜디를 마시는 기분이네. 키스에 취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자~ 이제 진짜 끝! 부끄러우니깐 빨리 출발해요!"
"어... 알았어. 정신 제대로 차려야겠다."
"왜요?"
"너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운전을 제대로 못 할 거 같아."
"...꺄아아악! 내 손발!!! 손발이 사라졌어!"
"으아악! 나는 오징어처럼 손발이 오므라들었어!"
"뭐래? 아하하하~ 너무 즐거워! 그럼 출발!"
"오케이 진짜 가자."
나는 조심히 차를 운전했고, 세연이는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고쳤다.
운전에 집중이 안 되네.
옆에서 화장을 고치는데, 왜 이리 반짝거리냐?
운전하는 내내 세연이 얼굴만 쳐다봤다.
*
뉴욕에 도착했다.
캬~ 민현찬 출세했어! 미국도 다 와보고!
우리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부터 갔다.
딸각.
프런트에서 키를 받은 후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와... 대박이야~~"
"워~ 사진보다 더 좋은데?"
한쪽 벽면이 커다란 유리로 되어있고, 밖으로 뉴욕의 상징 중 하나인 브루클린 브리지가 보였다.
이세연은 멋진 풍경이 좋은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예뻐?"
"네! 저 유럽도 많이 가봤는데, 느낌이 달라요."
"어떻게?"
"오빠 스파이더맨 봤어요?"
"당연히 봤지."
세연이는 나를 보면 웃었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아요."
그래?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미국 미국 하면서 여행가는 이유를 알겠네.
전통이 느껴지는 고층빌딩도 멋있지만, 가장 좋은 점은 어디에 있어도 할리우드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다는 거다.
캬~~ 죽이네. 부산 촌놈 많이 성공했다 아이가.
감탄하면서 브루클린 브리지를 보는데, 이세연이 카메라를 넣고 A4 용지 한 장을 나에게 건넸다.
"뭐야 이거?"
"헤헤헤~ 우리 여기 가요! 뉴욕에서 유명한 스테이크 집이래요!"
"그럼 당연히 가야지! 너 조사 다 해왔어?"
"그럼요! 여기 한 번 보세요."
가이드북 해도 되겠네. A4 용지가 책 한 권이다.
"여기 전부 다 가볼 거예요! 오늘 일정은 스테이크 먹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야경 보러 가는 겁니다. 어때요? 콜~~?"
"말해서 뭐 해? 당연히 콜! 빨리 가자!"
"네!"
우리는 가벼운 짐만 챙겨서 호텔을 나왔다.
*
스테이크를 먹고 나왔는데, 역시 계획과 현실은 다르구나.
배가 부른 건 둘째치고 장거리 비행에 대한 여파로 피곤이 몰려왔다.
그건 이세연도 마찬가지인지, 급격히 텐션이 다운되어 있다.
"스테이크 너무 짜.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리지?"
"피곤해? 그럼 들어갈까?"
"고민 중!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보러 가야 하는데."
"조금 쉬었다가 가자. 아니면 내일 가도 되고. 오늘 첫날인데 무리 안 하는 게 좋아. 참고로 나는 피곤한 거 아니다."
나는 이세연 노란 머리 두 가닥을 살짝 들어서 흔들었다.
"우리 세연이가 피곤 할까 봐 그런 거지."
"킥킥킥. 피곤하기는 쫌 피곤하네요. 하아앙~~ 오빠 일단 오늘은 호텔 돌아가요."
"그래. 안에 들어가서 야경 보면서 와인 한잔하자."
"네! 그 전에 저기만 들렀다 가요."
"어디?"
"저기요~"
세연이가 가리킨 곳을 봤는데, 빅토리아 매장이다.
"그래 가자. 화장품 사려고?"
"아니요. 속옷 살 건데요."
...
"빨리!!! 빨리 가자! 당장 가자!!!"
"오빠! 잠시만요! 아~ 진짜!"
나는 서둘러 세연이 손을 잡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아하하. 속옷이라니 좋아하는 거 봐!
"아니야! 그건 오해야. 나 사실 쇼핑하는 거 좋아해!"
"참나~ 잘도 그러겠네요. 저기 안쪽에 속옷 있어요."
우리는 화장품 코너를 지나서 속옷이 전시된 곳에 갔다.
역시 천조국인가?
사이즈가 딱 봐도 커 보인다.
이세연은 커다란 브래지어를 든 후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전부 다 엄청 크다~"
"에헴! 하지만 우리 세연이도 만만치 않게 크지. 악!!!"
"한국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이야기 하지 말지?"
"네. 알겠습니다. 이거 어때?"
"그건 오빠 취향이잖아요.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들어요."
나는 면이 꽉 차 있는 속옷을 들었는데, 이세연은 검은색의 레이스 망사 속옷을 들었다.
이거 입고 여행 다니기는 불편할 거 같은데.
"내일 많이 돌아다닐 건데 불편하지 않겠어?"
"내일 안 입을 건데요?"
"그럼? 한국에서 입을 거야?"
세연이는 내 귀에 입술을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오늘 밤에 입을 거야~ 오빠 죽었어!"
!!!!!!!
이게 해외여행의 위력인가?
이세연이 나에게 죽었다고 말하다니!
"콜! 콜! 나 죽을래! 빨리 계산하자. 내가 살게!!!"
"아하하~ 그만 좀 좋아해요~ 사람들 다 들리겠어요!"
"사는 김에 벨트도 사자! 저기 끈으로 된 거! 저거 예쁘네!"
"참나. 그래요!"
우리는 야한 속옷을 세트로 산 후, 매장을 빠져나왔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야경?
그딴 게 뭐임?
일초라도 빨리 호텔로 돌아가자!
< 해외여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