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88화 (288/295)

< 감기 >

디리리링.

나는 이세연 아파트 도어락 비번을 풀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연아! 이세연!"

어딨는 거야? 거실에는 없고.

안방에 들어갔는데, 세상에!

세연이는 속옷만 입은 채 침대에 누워있다.

"괜찮아? 진짜 아픈 거 맞지? 제발 안 아프다고 해줘!"

"하···. 오빠. 나 죽을 거 같아요···."

"그런데 왜 다 벗고 있어? 혹시 나를 원하는."

"야! 몸에 열나 죽을 거 같다고요! 아···. 아···."

미안. 혹시나 하고 기대... 아니, 오해했어.

나는 서둘러 이세연의 맨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는데, 타오르듯이 뜨겁다.

그러고 보니 가슴과 배에도 땀이 한가득하다.

"너 이러다가 죽겠다. 옷 어딨어. 어서 병원 가자."

"오빠···. 나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내가 업고 갈게. 옷 어딨는지 어서 말 해줘!"

"그럼 병 옮잖아요."

"그런 게 뭐 중요해. 나는 바보라서 감기 안 걸리니깐 괜찮아. 빨리! 빨리!"

서둘러 이세연에게 옷을 입히고 둘러업었다.

후끈.

등에 뜨거운 체온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거 장난칠 때가 아니네. 열이 40도는 족히 되는 거 같다.

팔도 축 늘어져서 꼼짝도 못 하고 있고.

일분일초라도 빨리 병원 가야겠다.

하도 많은 신종플루 환자가 와서 그런가?

병원 응급실은 차분히 대처했고, 이세연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원했다.

간호사는 링거와 몇몇 주사를 놓았고, 그 덕분인지 세연이는 지금 내 앞에 곤히 잠들어 있다.

다행이네.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 시. 하늘에 뜬 보름달이 이세연 얼굴을 비춰줬고, 나는 손을 뻗어 하얀 뺨을 한 번 훑었다.

"가시나야. 왜 아프고 그러냐. 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프지마 아프지마 도토잠보."

"그게 뭐예요? 주문이에요?"

"으악!! 깜짝이야!!! 일어났어?"

"하···. 네. 이제 좀 살겠어요. 어···. 오빠 미안한데."

"뭐? 뭐 가져다줄까? 물? 아니면 음료수? 물티슈?"

허둥지등 대는 나를 보며 힘없이 웃는다.

"물 좀 부탁드릴게요."

"공손하니깐 어색하네. 혹시 열이 많이 나서 머리가 익은 건 아니지?"

"돌아가시고 싶으세요?"

"반은 돌아왔네. 잠시만, 물 가져다줄게."

물을 냉장고에서 꺼내서 건넸고, 세연이는 힘없이 마셨다.

"좀 괜찮아?"

"네. 이제 좀 살겠어요."

"휴. 다행이다."

"뭐래. 내 걱정 하나도 안 해놓고는. 가슴부터 만지던 사람이."

"걱정 엄청나게 했어. 너 삐졌지?"

"아니요. 안 삐졌어요. 그러니깐 오늘은 집에 들어가세요. 오빠 여기서 밤새다가 신종플루 옮으면 어떡해요."

"괜찮아. 그럼 이 병실에 입원하지 뭐. 내 걱정은 하지 마. 생각해봐. 나 혼자 원룸에 돌아가면 네 걱정에 잠은 잘 수 있겠어?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병원에서 하고 싶다?"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너는 나에게 작고 여린 고양이 같다고. 나보다 약하고 여린 네가 아프니깐, 지금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아."

"거짓말···."

"들켰어?"

"아! 진짜!"

"뻘쭘해서 그래. 여튼 아프지 마라. 나 오늘 여기서 밤샐 거니깐 그렇게 알고."

"...네. 사실 오빠가 함께 있어 주니깐 기분 좋아요. 보호받는 기분도 들고."

"그러면서 왜 가라고 했어?"

"미안해서 그렇죠. 나 때문에 옮으면 더 그렇고. 이거 큰 병이라던데."

"백신 있으니깐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나도 너와 함께 있으니깐 기분 좋네."

"왜요?"

"오래간만에 함께 있잖아."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고, 그러자 이세연은 양손으로 나를 밀어냈다.

"옮아요. 우리 퇴원하면 해요."

"...넌 나를 무슨 색마로 보니? 그러려고 같이 앉은 거 아냐."

"그럼요?"

고개를 돌려 보름달을 쳐다봤다.

"달빛이 네 얼굴을 비췄기에 자세히 보고 싶었을 뿐이야."

"으억! 내 손발!!! 이게 뭐야! 졸라 느끼해!!!"

"인정. 이런 멘트 안 할게. 아씨 머쓱하네."

"킥킥킥. 오빠 오늘따라 왜 이래요? 계속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하하! 졸라 웃겨!"

그러게.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상황이 바뀌어서 그런가?

이세연이 신종플루 걸렸다는 의사의 말에 너무 놀라 가슴이 떨어질 뻔했다.

선미에게 떠난다는 말 들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 마음은 이세연한테 많이 기울어 있나 보다.

그래서인지 손이 가슴으로 간다···.

"뒤진다."

"...그거 선미 말툰데?"

"선미 언니가 이상한 짓 하면 이렇게 하라 했어요."

"그런 거 좀 배우지 마라. 옛날 미친년 나올까 봐 겁난다. 여튼 이제 자자. 너 피곤하지 않아?"

"하아~ 조금 졸려요."

"그래. 나는 여기 밑에서 잘게."

"안 불편하겠어요? 의외로 귀공자잖아요."

"농활 때는 풀밭에서도 잤거든. 안 불편해."

나는 한쪽에 있는 간이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잠들 뻔했는데, 세연이가 움직이는 소리에 깼다.

화장실 가나 보다.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돌어오더니 내 옆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자요?"

"...."

"자는 척하지 말고요."

....반쯤 잠든 상태야.

"자나 보네. 고마워요. 오빠. 그리고 좋아해요."

쿵쿵쿵.

이세연의 한 마디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헤헤헤. 섹스하고 나서 먼저 잠들었을 때, 몰래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병원에서 말해보기는 처음이네."

- 전하! 전하는 그냥 쓰레기입니다.

- 내가 어쩌자고 이딴 새끼를 살렸을까!

...

호구신님이랑 병조판서가 왜 듀오가 됐어요?

아씨! 그리고 내가 알았어요? 항상 곯아떨어져서 몰랐어요.

젠장.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일어날 수는 없다. 지금 일어나면 상당히 민망하니 듣고만 있자.

"에휴~ 나는 어쩌자고 이런 변태를 좋아해서 이 고생을 할까."

...변태라고? 두고 보자.

"그래도 말이에요. 오빠 옆에만 있어도 정말 좋고 행복해요. 못된 놈이긴 한데, 그래도 잘해줄 때는 엄청나게 잘해준단 말이야."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부스럭 소리가 나는 게, 세연이가 창가 쪽으로 움직였나 보다.

"하. 손잡고 싶다. 오빠 고추 말고 손잡았으면 좋겠어."

- 전하 와... 진짜 양심 없는 강아지네요.

- 이거 완전 카사노바가 됐어. 너 솔직히 말해봐! 세연이가 고추 잡은 횟수가 많아? 손잡은 횟수가 많아?

...고추요?

아! 시불! 이게 아니잖아! 그런데 틀린 말도 아니고. 아씨. 엄청 미안하네.

고추 이야기를 꺼내다니, 세연이는 내가 잠들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나 보다.

그 믿음을 계속 유지 시켜주고 싶은데, 젠장. 목에서 기침이 올라왔다.

"콜록! 크륵! 음!!"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궁예한테 처맞을 정도의 기침 소리를 냈고.

"깜짝이야! 오빠 안 자요?"

이세연은 호다닥 거리면서 내 팔을 흔들었다.

"으응? 으.... 으응..."

"오빠?"

"코....."

혼신의 연기가 통하기를.

"...에이! 아씨!!! 몰라!!! 자겠지. 나도 자야겠어!!!"

뭐야 통한 거야 안 통한 거야?

세연이가 다시 침대에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겨우 다시 잠들었다.

이세연의 병은 SRT처럼 빠르게 호전되었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병원에서의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차에 싣는데, 개운한지 내 옆에서 기지개를 쫙 켰다.

"아!!! 살 거 같아! 역시 안 아픈 게 최고야."

"그래 안 아픈 게 최고야. 편한 얼굴 보니깐 이제야 마음 놓이네. 그런데 신기하지 않아? 일주일을 같이 붙어있었는데 나는 안 걸렸어."

"역시!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는 옛말이 정말인가 봐요!"

"그거 예비 의사로서의 견해야? 너는 이제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의학적 근거가 있는 말을 해야 해."

"의학적 근거는 있어요! 뇌세포가 단순해서 감기가 도망간대요!"

"됐다. 가자."

"아하하~ 오빠 놀리는 게 제일 재밌어! 오늘 뭐 할 거예요? 내가 병간호해 준 답례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뭐 먹고 싶어요? 족발?"

"족발은 무슨. 다른 거 먹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

이세연이 다가오더니 자기 가슴을 내 팔꿈치에 붙였다.

"어떤 거요? 설마? 먹고 싶다는 게 이세연?"

"와! 지금 진짜 진심으로 야했다. 심장이 두근거렸어.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오빠가 고마워서 한 번 해준 거예요. 아씨! 괜히 했어!"

"괜히 한 건 아닌데, 오늘은 못 먹을 거 같아. 아씨!!! 이게 아닌데! 이세연 너는 그런 야한 말 하지 마! 뭔가 내 스텝이 꼬여! 하여튼 퇴원 축하 파티는 다음에 하자."

"왜요? 오늘 어디 가세요?"

"우선 첫 번째.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 잊지 않았지? 당분간 무리한 운동이나 술 먹지 말고 절대 안정을 취할 것.

그러니 얌전히 밥만 먹자. 너 한 번 더 아프면 그때는 내가 놀라서 쓰러지겠어. 알겠지?"

걱정해주는 말이 좋은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오늘 임석훈 만나기로 했어."

"석훈 선배요? 또 당구예요?"

"아니. 그냥 잠시 얼굴 보려고. 임석훈 만나고 올 테니까 빌라에서 쉬고 있어."

"치···. 알았어요. 어? 잠시만요 빌라라고요?"

"그래. 아파트 말고 빌라. 내가 당분간 간호해 줄게."

"그러다가 옮으면요?"

"그럼 네가 내 간호해 주면 되지요~ 어때 콜?"

"아하하~ 그런 게 어딨어~ 하지만 좋아! 오빠~ 콜! 이제 가요."

"그래. 손 줘."

"네?"

"우리 손 잡고 가자."

"손잡으면 백프로 옮아요!"

"그 위험성이 있더라도 네 손을 잡고 싶어. 파리의 연인 봤지? 가자 애기야!"

나는 멈칫하는 이세연 손을 잡았고.

"헤헤헤. 네!!!"

그렇게 좋아?

이세연은 아기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땅~ 땅땅! 땅!

오래간만에 당구장 와보네.

혼자 연습구를 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임석훈이 들어왔다.

"오~~ 민현찬! 당구 안 친다더니 왔네?"

"네가 죽어도 여기로 오라면서! 아씨 이세연한테 당구 안 친다고 했는데."

"여자친구냐? 드디어 사귀기로 한 거야?"

"사귀기는 무슨. 거짓말하는 게 싫어서 그래."

"새끼 좋아하면서 꼭 지랄이야. 어서 당구나 치자. 짜장면 내기 콜?"

"밥은 따로 먹어야 해. 당구비 내기나 하자."

"오케이~ 바쁘신 몸이니 어쩔 수 없지. 공은 어떻게 할래? 정구 놓고 칠 거야?"

"귀찮아. 그냥 풀고 치자."

안치려고 했는데, 막상 치니깐 재밌네.

한참 몰입해서 치는데 임석훈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세연이랑은 며칠 되었어?"

"헛소리 즐이다. 그런 사이 아닌 거 알잖아."

"이제는 그런 사이가 되었지. 둘밖에 안 남았잖아."

"···그런가? 아! 사실 잘 모르겠어."

"뭘 모르겠다는 거야? 너의 정체성? 혹시 여성화된 거야? 확인하고 싶으면 내 품에 안겨봐."

"미친놈. 미안하지만 남자에게는 관심 하나도 없다."

"아쉽네. 의절할 수 있는 찬스였는데. 그래서 뭘 모르겠다는 거야?"

"내가 세연이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방금 공 묻고 지나갔어!"

"이 새끼 이거 작전 아냐? 입 터는게 수상한데. 이번만 넘어간다. 게임은 게임이고 나는 네가 세연이를 좋아한다는 것에 내 오른쪽 불알을 건다."

"그럼 일부로 안 좋아해서 짝 부랄 만들어야지."

"젠장!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이거 하나 떼주기는 좀 그런데."

임석훈은 고개를 숙여 자기의 중심을 봤다.

···

이런 놈한테 세연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했다니.

나도 미친놈이지.

다시 당구를 치기 위해 자세를 잡는데, 임석훈이 조금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사실 너희 둘 사이가 애매하긴 해."

"됐다. 헛소리 할거지?"

"뭐 헛소리라 생각하고 들어. 둘이 사귀기에는 너무 친해졌거든. 너희 둘 너무 오래되었어. 벌써 3년이잖아.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다 보니, 연인보다는 가족에 가까운 느낌이지."

"그런가? 반은 맞는 거 같다. 얼마 전에 세연이 아팠잖아. 그때 마음 엄청 괴롭더라? 선미가 아팠을 때는 동갑이어서 그런지 그냥 빨리 괜찮아져라. 이런 생각만 들었었거든."

"이세연은 다르지?"

"응. 뭔가 어린 동생이 아픈 것처럼 걱정되고 잠이 안 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건가 싶은데, 또 막상 괜찮아지니 그냥 편한 동생 같아.

그렇다고 막 가족 같은 건 아닌데, 그 뭐랄까? 심장이 쿵쿵 뛰지는 않는다고나 할까? 아씨 모르겠다. 뭐 이리 복잡하냐."

임석훈은 큐를 놓고 나를 쳐다봤다.

"왜 복잡한지 가르쳐 줄까?"

"오케이. 이야기해 봐."

"···웬일로 내 말을 다 들어주냐?"

"이쪽으로는 네가 잘 아니깐. 이거마저 모르면 네 뇌는 그냥 기증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좋아. 할아버지 대신에 뇌를 걸고 말해야겠네. 너 최근에 세연이 화장한 거 본 적 있어?"

"···아니."

"그럼 치마 입은 거는?"

"···없네."

"너는 어때? 최근에 세연이 앞에서 꾸민 적 있어?"

"···없어."

"것봐. 너희 둘은 서로가 너무 편해진 거래도.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냐. 오래되어서 사람이 편하니, 익숙해지니 어쩌구 하지만, 그거 다 돌려 말하는 거야. 특히 이세연처럼 예쁜 애에게는 해당 안돼. 진짜는 뭔지 알아?"

"뭔데?"

"예쁜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되어서 그래. 남자는 정말 단순하다. 예쁘면 심장이 뛰고 좋아지게 되어 있어. 세연이가 제대로 화장하고 예쁜 옷 입으면 너 확 반할걸?"

···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안 반하면 그때는 감정이 식은 거야. 한 번 확인해 봐."

"뭘 확인해. 그렇다고 내가 너 좋아하는지 알아보게 예쁘게 입어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쉽네. 찐따처럼 그렇게 말했으면 의절했을 건데. 젠장! 오늘 절교 찬스 두 번 다 놓쳤다. 자 됐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어."

"뭔데?"

임석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둘이 여행 갔다 와. 한국 말고 해외로 말야. 여자들 해외 갈 때는 엄청나게 꾸미고 오는 거 알지? 너도 좀 챙겨 입고 가고. 그렇게 나가면 새로운 기분이 들걸?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말야.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어. 같이 여행 가서 한 번 서로의 감정을 확인해봐. 어때 형 좀 괜찮냐?"

···

역시 간헐적 천재란 말야.

괜찮은데?

세연이랑 해외여행 가봐야겠다.

< 감기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