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
"세연아. 선미 선배님 어디 갔어?"
"글쎄. 잠시 자리 비우신 거 같은데."
"오래간만에 와서 너무 죄송하네."
"현아 이 가시나야. 그러게 학교 다니면서 자주 인사드리고 그랬어야지."
"덤성아! 너도 휴가 때 잠시 봤으면서!"
너희들 너무 웅성거리는 거 아니니? 누가 보면 친구 만나러 온 사람들인 줄 알겠다.
그 모습을 본 선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쟤네 어떻게 왔대. 세연이야 온다고 했었고, 덤성이는 휴가 나온 거야?"
"글쎄? 머리 길이 보니 전역한 거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나?
"일단 나는 가볼게. 현찬아. 소민이랑 다희 좀 부탁해."
"아. 언니 저희 이제 일어나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밤 10시네. 늦었는데도 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언니 힘내세요."
"언니. 끝나고 같이 한 번 봐요."
"응. 그러자."
소민이와 다희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미는 빈소로 들어가고, 다희는 세연이 진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소민이와 함께 장례식장을 나갔다.
휴···. 정신없네. 아까 사람 많을 때 왔으면 얼굴도 제대로 못 봤겠다.
그나저나 얘들도 장례식장은 처음일 거 같은데.
앉은 절을 하나 유심히 봤는데, 다행히 선미에게까지 인사 절을 하며 무사히 넘겼다.
...
잠시만... 덤성아 왜 한 번 더하려고 하니?
미친놈아!!!
화들짝 놀라는데, 다행히 현아가 인상을 쓰며 내려가는 덤성이를 잡아 올렸다.
"야... 너는."
"왜?"
세연, 현아, 진희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덤성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린다.
"풋···."
그 모습이 재밌는지 선미는 살짝 웃음 지었다.
"선배. 죄송해요. 제가 교육해야 했는데."
"현아야 괜찮아. 너도 이제 3학년이라서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
"누나. 제가 세연이랑 진희랑 간다고 해서 현아까지 불렀습니다. 우리 네 명이 일학년 때 멤버지 않습니까."
"어쭈. 너 이제 누나라고 한다?"
"그럼요. 저 이제 전역까지 했습니다."
"정말?"
"네. 언제 전역했냐면요."
...
이러다가는 빈소에서 만담 파티가 벌어지겠네.
콜록콜록 기침 소리를 내자 이세연이 내 눈치를 읽고, 덤성이 팔을 한 대 툭 쳤다.
"덤성아. 나가서 이야기해. 언니, 늦어서 미안해요."
"어제 종일 같이 있다가 갔잖아. 미안하기는. 진희는 바쁘지 않아?"
"선배. 저 괜찮아요. 당분간은 한가해요."
"후훗. 연예인이 오다니. 여기 사람들 구경하러 오겠다. 우선 밖에 나가자. 현찬아."
"알았어. 너희들 이쪽으로 와."
나는 07학번 네 명과 함께, 방금 소민이와 다희가 있던 곳에 앉았다.
임석훈에게 식사를 부탁하려는데, 어느새 챙겨 와서 우리 앞에 놓았다.
"야. 너희들 좀 한 번에 와. 여기 방금 치웠어."
"뭐래. 선배는 좀 더 열심히 일해야 해요."
"석훈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이고. 이세연 싸가지 없는 거 봐라. 현아야 안녕~ 잘 지냈어?"
"네~"
"너 좀 얌전해진 거 같다?"
"이제 저도 3학년이잖아요."
"그럼 이제 술 먹고 세면대에는 안 토하겠네."
"아아! 선배 그거 어떻게 알고 있어요?"
"민현찬이 이야기해주던데?"
"야! 내가 언제 이 미친 새끼야!"
"아니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다들 맛있게 먹어."
"선배. 왜 저한테는 인사 안 해줘요?"
"진희 너는 이제 연예인이잖아. 나는 악플 달리기 싫다~ 그럼 바빠서 이만~"
임석훈은 웃으며 갔고, 조금 있자 선미가 왔다.
나와 덤성이 사이에 앉은 후, 덤성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너 전역 했으면서 왜 누나한테 말 안 했어?"
"...선배. 아까 절 두 번 해서 죄송합니다."
"뭐? 아하하. 그거 마음에 담고 있었어? 그래서 다시 선배라고 부르는 거야?"
"...네."
"풋..."
"아하하."
"하하하하."
우리 모두 조용히 웃었고, 덤성이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었다.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그래도 이 멤버는 자주 보던 사람들이라서 편하네. 현아도 학교에서 간혹 봤으니. 현찬아, 그런데 신기하지 않아?"
"뭐가?"
"코 찔찔이들이 어느새 다 컸잖아. 모여서 보드게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렇네. 아! 생각해보니 보드게임에서 진희가 승부사였지! 그때부터 울스케 우승이 정해져 있었던 건가?"
"아아앙. 선배~ 울스케 이야기하면 부끄러워요. 저는 여기 오면 그냥 진희일 뿐이에요. 헤헤헤."
그 말도 맞다.
티비에서야 연예인이지만,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그냥 한진희다.
우리는 앞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추억에 빠졌다.
현아와 선미는 축제 때 음식만 만들었다며 웃으며 이야기하고,
덤성이는 국토대장정 때 자기를 버리고 갔다고 투덜댔고,
이세연은 고양이 옷을 입었다고 나한테 핀잔주고,
진희는 엠티에서 자기가 아파트 노래 부를 때, 나와 덤성이가 백댄서 한 거를 이야기하고,
해도 해도 이야기 주머니는 끝이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어두운 장례식장에서 가장 반짝였던 이야기를 나눴고,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되었다.
선미가 시계를 보더니, 후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제 가봐야지. 벌써 열두 시야. 세연아 차 가지고 왔어?"
"언니. 차 없이 왔어요."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덤성이가 선미 어깨에 손을 올린다.
"선배. 아니 누나. 우리 밤새고 갈 겁니다."
"뭐? 아니야. 괜찮아."
"하이고. 우리가 안 괜찮습니다. 누나 혼자 여기 어떻게 둡니까? 현찬 햄! 아닙니까?"
"너 아직도 햄이라는 말 못 고쳤나?"
"군대 가서 더 심해졌습니다. 햄. 저희 같이 밤새도 괜찮죠. 햄이랑 누나들도 밤샐 거잖아요."
말해서 뭐 해?
마침 오늘 밤샐 멤버가 필요하다.
은미는 오전에 잠시 왔다가 내일 다시 온다고 했고, 혜민이도 일단 오늘은 집에 간다고 했고.
나와 임석훈 두 사람만 있기는 적적하거든.
나는 선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쟤들도 그래야지 마음이 편한가 봐. 다들 마음먹고 왔는데, 그렇게 해줘."
"...세연아, 진희야, 현아야. 괜찮아?"
"언니! 나는 내일도 셀 거예요."
"선배. 당연하죠. 저 요즘은 시간 많아요."
"선배. 저도요. 이때까지 못 본 거 하루종일 같이 있어요."
"누나 저는요?"
"너는 내 어깨에 올린 손이나 치워. 전역했다고 건방져졌어."
"아! 누나 잠시만요! 햄! 선미 누나 좀 말려보세요."
"네가 무덤 판 건데 뭘 말려."
이선미는 덤성이 볼을 꼬집으며 웃었고, 다들 덩달아 미소 지었다.
우리는 긴 밤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
이틀째 날이다.
첫날에 너무 많은 사람이 왔는지, 오늘은 조용하다.
그래서 덕분에 조금씩 쪽잠을 잤고, 다시 밤이 되었다.
후배들은 집에 갔다. 세연이와 진희가 하루 더 있겠다는 거 다음 날 아침 출상할 때 오기로 하고 겨우 보냈다.
옆에서 듣던 덤성이와 현아도 그때 같이 오기로 하고 일단은 집에 갔다.
- 행님. 운구할 때 사람 모자라니깐 저 꼭 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한 덤성이의 말이 매우 기특하다.
다 끝나면 밥 사줘야겠다.
시간은 어느새 밤 11시가 되었고, 장례식장은 항상 그렇듯이 적막함이 가득하다.
그 고요 속에 나 임석훈, 이혜민, 이선미가 테이블에 앉아 있다.
피곤함에 모두 말없이 있는데, 임석훈이 한 명씩 손가락질 했다.
"너 뭐해?"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선미야. 이 새끼 귀신 들렸나 보다."
"원래 미친놈이잖아."
"한 명이 없어. 한 명이."
"뭐가 한 명이 없어?"
"혜민아. 은미가 없잖아. 은미가! 은미 언제 온대? 연락해 봤어?"
"조금 있으면 도착한대. 기다려봐. 그리고 촬영 때문에 못 올 수도 있을걸. 은미다!"
검은색의 단아한 옷을 입은 은미가 들어오고 있다.
우리 네 명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러 갔고, 은미는 선미를 보자마자 손을 잡았다.
"선미야 늦어서 미안. 나 촬영 때문에 늦었어. 어떻게든 빨리 오려고 했는데."
"괜찮아."
"은미야 와도 괜찮아? 내일 촬영은?"
"혜민아. 특별히 하루 미뤘어. 아프다고 하고."
"그래도 돼?"
"글쎄? 헤헤헤. 현찬이가 알아서 해줄 거야. 안 그래?"
...
너 이번 드라마 제작 민정상이 하지?
"아무 힘이 없지만, 그건 해줄 수 있을 거 같다. 임석훈 네 말대로 드디어 다섯 명 다 모였네."
"그래. 이래야지 밸런스 맞지. 은미야 인사부터 하자."
"야!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지 마. 나 어제 낮에 와서 했잖아."
"하루에 한 번씩 하는 거 아냐?"
"아우~ 바보냐 너?"
우리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임석훈을 봤고, 석훈이는 당당하게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대단하다 임석훈. 역시 내 친구야. 은미 너 몇 시에 갈 거야?"
"나 밤새고 갈 거야."
"그래? 그럼 일단 우리 들어가자."
"응."
우리 다섯은 한쪽에 앉았다.
나, 석훈, 은미, 선미, 혜민
이렇게 다 모인 게 몇 년 만이지?
나는 묘한 울렁임에 고개를 돌려 한 명씩 봤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일학년 신입생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깐 일학년 때 생각난다."
내 말에 임석훈이 거든다.
"그러게. 애들아, 우리 일학년 때 기억나?"
"시끄러워. 오래간만에 만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감성에 빠져들어."
"야! 이선미. 우리 오래간만에 만난 거야!"
"다 같이 만난 건 그렇지만 개별적으로는 자주 만났잖아. 나, 은미, 혜민이도 한 번씩 보고, 남자 너희 둘은 당구 친다고 가끔 보고."
"그것도 그렇네. 오케이! 옛날이야기 하지 말자."
"그래. 어제 종일 이야기 했더니 힘들어."
나는 임석훈과 선미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하나 생각나는 거는 있어. 다들 축제 때 기억나?"
이혜민이 기억나는지 나를 보며 웃는다.
"교복 입었을 때? 기억나지. 너 그날 비 엄청나게 맞았잖아."
은미도 혜민이와 마찬가지로 웃었다.
"맞아. 기억난다. 그때 현찬이 친구들도 오지 않았었어?"
"아 그 뭐였지? 고자남 인가 그랬는데?"
"임석훈 미친놈아! 동정남! 순진하다고 동정남이야!"
"으하하하 고자남이래! 미친 새끼."
"이선미 고자라는 말에 너무 좋아하지 마라. 생각해보면 다른 건 몰라도 그때 정말 재밌었던 거 같아. 심혜진 선배한테 갈굼 당하면서도 터틀맨 공연 보러 갔었고."
"맞아. 그러고 보니 이제 다시 볼 수 없구나. 그때의 무대도, 그리고 그때의 우리도."
은미는 마지막 말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그런 은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미야. 너 기억과 추억의 차이 알아?"
"아니. 몰라."
"기억은 죽어라 외워도 잊히는 거고, 추억은 아무리 잊어도 떠오르는 거야. 기억 안 난다는 말은 써도 추억 안 난다는 말은 안 쓰잖아."
"저 새끼 저거 강호동인가 보네. 명언 병 걸렸다."
"임석훈 닥쳐. 일학년 때 우리 일은 전부 다 추억이 되어서 머리에 새겨져 있어. 다시 그때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언제나 서로가 그리우면 그때를 떠올릴 수 있게 말야. 그러니깐."
나는 모두를 봤다.
"애들아. 우리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그때 추억을 떠올리면서 반갑게 인사하자."
"···너 미쳤어? 갑자기 왜 감성적이야?"
"선미야 글쎄. 그냥."
이제 사회에 나가면 자주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되니깐.
이제 대학교를 떠나 먼 곳에 취직될 수도 있고.
내 말에 혜민이가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나도 다른 과 갔어도 이렇게 함께 하잖아. 우리 언제 만나더라도 그때를 떠올리며 서로 반기자! 그런데 한 명이 빠진 거 같지 않아?"
"누구?"
"지금 저기서 오는 사람."
이혜민 말에 모두 고개를 돌렸는데, 정장 입은 박호빈이 오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 훈련 끝나고 이제 왔어. 내일 운구하는 사람 필요하다면서?"
이선미가 나를 보며 묻는다.
"네가 불렀어?"
"응. 호빈이도 우리 동기잖아."
"잘했어. 호빈아! 어서 이쪽으로 와!"
"야! 박호빈 빨리 와!"
"알았어! 은미야 어서 갈게!"
"쟤는 예나 지금이나 은미 말은 잘 들어. 너 아직도 은미 좋아해?"
"임석훈! 그런 거 아냐!"
"미친 새끼야 죽을래? 당황스럽게 하지 마."
"은미 너 지금 나 변호해 준 거야?"
"너 말고 내가 당황스럽다고. 아오~~ 쟤 다시 보내."
"너 꺼져!"
"다들 왜 그래!!!"
우리에게 걸어오는 박호빈도 일학년 모습 그대로다.
경영과 06학번은 다 같이 웃으며 장례식 마지막 밤을 보냈다.
*
선미 어머님 배웅을 끝내고 집에 왔다.
운구는 나, 임석훈, 박호빈, 덤성이, 그리고 찬영이라고 같이 축제 때 농구 경기를 했던 후배와 선미 가족분까지 여섯 명이 했다.
마지막에 선미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그 눈물은 잉크 번지듯이 주위 사람들에게 번졌다.
은미, 혜민, 세연, 진희, 다희, 소민 그리고 뒤늦게 온 소라까지.
모두가 함께했고, 함께 울었다.
이제 끝났네.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고, 나는 혼자 집에 왔다.
이틀 동안 밤새웠더니 피곤하다.
그대로 잠이 들었고 눈 떠보니 밤 9시다.
···
이제 뭐 하지? 다들 집에 가서 같이 놀 사람도 없는데.
밥이나 먹자.
치킨 한 마리를 시키려는데,
똑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암호를 대라!"
"나 선미야."
"어? 너 웬일이야? 잠시만!"
황급히 문을 열자 선미가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서울에 안 있고 내려온 거야?"
"서울에 우리 집 없잖아. 이모 집이 있지. 거기 있기도 뭐해서 내려왔어. 혼자 원룸에 있다가 적적해서 왔는데, 밥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는데."
"잘됐네. 장 봐왔어. 밥 해줄게."
"오~ 웬일로?"
"고마워서라는 대답은 안 할게. 그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갚을 거고, 그냥 내가 배고파서야."
"오케이. 이선미 답네. 그런 마음이라면 나도 편하게 얻어먹을게. 들어와."
선미는 빌라에 들어오자마자 부엌에 장바구니를 놓고 거실로 왔다.
"현찬아. 너 안 씻었어?"
"음식 주문해놓고 씻으려고 했거든. 나중에 씻어야겠네."
"내가 밥하고 있을 테니깐, 넌 씻어."
"오케이.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잠이 안 깨서 정신이 몽롱했는데, 우선 씻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적셨다.
피로가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잠도 깬다.
"후. 이제야 살 거 같네."
똑! 똑!
몸에 비누칠하는데 선미가 문을 두드렸다.
"뭐 없어? 프라이팬 싱크대 아래에 있어."
"들어가도 돼?"
"지금? 급하게 볼일 봐야 해?"
조금 기다리자 화장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선미의 쥐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씻어야 해서. 같이 씻을래?"
뭐? 지금 이선미가 같이 씻자고 말한 거 맞아?
"알았어. 들어와."
일단은 안으로 들어오라 하자.
< 가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