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
바쁘다. 바빠.
박호빈이 경영과 애들을 버스 두 대에 실어 왔는데, 대략 50명은 족히 넘었다.
한꺼번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장례 도우미들은 갑자기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아···. 힘들어."
선미는 기계처럼 절하다가 지쳤는지, 빈소에 다리를 뻗고 등을 벽에 기댔다.
"괜찮아?"
"박호빈 이 미친 새끼. 사람을 왜 이리 많이 데려왔어!"
"나름 동기 생각한 거니깐 너무 뭐라 하지 마. 그래도 좋네."
"뭐가?"
"네가 조금 씩씩해진 거 같아서."
"솔직히 말할게. 이상하게 기운은 나. 나 장례식장에 사람 많은 게 좋다는 이유를 알거 같아."
"왜?"
"정신이 없으니깐 슬픔마저 잊어버리거든. 혼이 나가는 거 같네. 아... 이런 드립은 안 되나?"
"안되니깐 좀 닥쳐. 누가 들을까 봐 겁난다."
"알았어. 그런데 너희도 고생이다."
선미는 밖에서 뛰어다니는 임석훈, 이혜민을 봤다.
둘은 어느새 서빙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음식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데, 익숙한 한 사람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서영 누나."
"현찬아!"
한서영 누나가 검은색 옷에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조심히 들어왔다.
"누나 바쁜데 어떻게 왔어요?"
"너 요즘 야구 안 보지?"
"약간 그렇죠?"
"독수리가 가을에 야구 하는 거 봤어?"
...
'나는 행복합니다' 시전 중이구나.
"선미는 어딨어?"
"안쪽에 있습니다."
"어디? 어 선미야!"
"언니···."
"하···. 어쩌다가. 일단 인사부터 할게."
"네."
3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 일학년 때 모습이 겹쳐 보인다.
서영 누나는 빈소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후, 이선미 손을 꼬옥 잡았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너희 보러 학교 올걸."
"언니도 바빴잖아요. 우리도 못 가서 죄송해요. 식사하셨어요?"
"아니. 조금 앉아 있다가 가려고. 그리고 오기로 한 사람도 있어서."
"누구요?"
"너와 내가 아는 선배야.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일단 밖에 있을게."
"네 언니. 현찬아 부탁할게."
"알았어. 누나 이쪽으로 오세요."
"그래."
온다는 선배가 누구지? 조금 있으면 알겠지.
그나저나 서영 누나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
잠시 말동무를 해줘야겠다.
누나와 한쪽에 앉는데, 임석훈이 다가오더니 내 옆에 앉는다.
"요~ 독수리 걸 한서영 누나 아니에요?"
"야. 한 번도 안 와놓고는 무슨. 잘 지냈어?"
"그럼요! 우리야 여전히 바보같이 지내고 있죠."
"후후. 두 사람 다 여전하네."
"누나도 하얀 피부 여전한데요? 응원 열심히 안 한 거 아니에요?"
"임석훈 미친놈아. 너는 누나 보자마자 웬 시비야? 그런데 진짜 피부 안 탔네요."
"야구가 빨리 끝나서 그렇다 왜! 그래도 이렇게 보니 다들 반갑다. 민현찬 너는 이제 춤 잘 춰? 내가 너 춤 선생님이었잖아. 진짜 과티 패션쇼 때, 바위처럼 춤추는 거 보고 기겁했었는데."
"그게 언제 일이에요. 저 이제 춤신춤왕입니다."
옆에 있던 임석훈이 한마디 거든다.
"누나. 현찬이 그 후로도 미친놈처럼 춤췄어요."
"지랄. 다음 해 축제때 밖에 안 췄거든."
"그다음 해 오티 때도 춤 췄었잖아."
"그랬나? 잠시만 너 오티 때 안 왔잖아."
"이야기 들었거든."
투덕거리는 우리 둘을 보더니 서영누나가 웃는다.
"아하하. 예전 그대로구나. 너희들 보니 그때가 그립다. 참. 재밌었는데. 나 사실 치어리더 하다가 힘들면, 너희들이랑 함께 했던 학교생활을 떠올려. 그럼 엄청 기운 나거든."
"그건 독수리라서 힘든 걸지도···."
"음. 인정."
"야! 너희들!"
"알았어요! 야구 이야기는 이제 안 할게요. 임석훈 너도 닥쳐."
"오케이! 행복하니깐 닥치자!"
"진짜 못 살아. 후훗."
우리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과티 패션쇼에서 임석훈 다리 다친 이야기, 은미랑 춤춘 이야기, 다음 해 오티때 무대를 같이 꾸몄던 이야기.
추억 보따리네.
한참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소리에 서영 누나가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어? 이제 왔나 보네!"
"누구 오기로 했어요? 은미?"
"아니. 혜진 언니."
"아. 혜진 선배요."
"..."
"..."
"파라오 심혜진 누나요?"
"혜진 선배님요?"
"아하하. 너희 둘 귀신 봤어? 왜 놀라? 오늘 연락하니깐 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시간 맞춰서 온 거야."
"누나가 혜진 선배한테 연락했다고요?"
"응. 우리 둘은 계속 연락했었어."
"두 사람 예전에 싸웠었잖아요."
"다 옛날 일이지. 오히려 싸워서 더 그랬는지, 언니 졸업하고 연락하게 되더라. 언니 여기예요!"
서영 누나는 빈소를 나오는 혜진 누나에게 손을 흔들었고,
"서영아 늦어서 미안. 어 현찬아!"
혜진 선배는 자기에게 인사하는 고학번들을 제쳐두고 우리에게 달려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현찬아. 선배는 무슨. 너무 얼어 있는 거 아냐?"
그러게요. 오래간만에 보니깐 어색하네요. 그리고 미드는 여전히 엄청나시네요.
검은색 정장을 입었는데 블라우스가 터질 거 같다.
혜진 누나는 서영 누나 옆에 앉았고, 나와 임석훈은 두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석훈아. 밖에 있는 각목 다 치워라."
"오케이. 혹시나 모르니 여기 술병도 치우자."
"너희들 죽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하하. 진짜. 너희도 이제 졸업반인데 어떻게 신입생 때랑 똑같냐! 잘 지내지?"
"저는 졸업반 아니니 패스. 현찬아 네가 대답해."
"저는 잘 지내죠. 그런데 두 사람 진짜 친해요?"
내 질문에 서영 누나와 혜진 누나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혜진 언니랑은 두 달에 한 번씩은 만나. 내가 표도 구해줬는데."
"너희들은 서영이 응원하는 거 보러 한 번을 안가? 애가 섭섭해하더라."
"언니. 안 섭섭했어요."
"웃기네. 혹시나 연락 안 하냐고 나한테 물어봤으면서."
...
미안해요. 회사 가면 꼭 사람들 데리고 갈게요.
우리는 파라오 심혜진 누나와도 잠시 옛 추억에 빠졌다.
임석훈이 한서영 누나한테, 아직도 혜진 선배 피오나 공주 같냐고 묻다가 욕 처먹고,
나는 혜진 누나한테 각목으로 회사 후배도 때리냐고 했다가 욕 처먹고.
옛날에는 심각했던 이야기가 지금은 소중한 추억 보따리가 되어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선미가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끝났다.
혜진 누나는 선미를 가운데 앉히더니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이렇게 보네. 진작 연락할걸."
"혜진 언니 아니에요.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지. 대학교 때 유일하게 내 말 잘 들었던 후배잖아."
"언니. 저는요."
"서영아 너는 말 엄청 안 들었어. 우리 옛일 꺼내지 말자."
"네~"
두 사람을 보더니 이선미가 웃는다.
"후훗. 두 사람 친한 거 보니깐 신기해요."
"그렇지? 세상일은 모르더라고.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혜진 누나는 박호빈을 봤다.
"저 철없는 애가 자기 일처럼 이렇게 나설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다들 20살, 21살이었지.
서로에게 서툴고 감정적이었던 만큼 어떻게 보면 순수했었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 어느덧 사회 바로 앞에 서 있다. 혜진 누나는 이미 사회에 나간 지 2년이 지났고.
그래서인지, 순수했던 시절을 함께한 서로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한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고 서영 누나와 혜진 누나는 집에 갔다.
그리고 박호빈과 같이 왔던 경영과 학생들도 갔고, 이제 장례식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래도 아까와는 다르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가서인지, 마음의 허전함은 많이 옅어졌다.
나는 잠시 빈소 밖에 나와 있는 선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신없었지?"
"응. 호빈이도 끝나고 밥 한번 사줘야겠어. 나 이렇게 사람 많이 올 줄 몰랐거든. 후... 우리 엄마 나보고 왕땨냐고 친구도 없냐고 놀렸는데, 깜짝 놀랐겠다."
선미는 텅 빈 빈소에 어머님 사진을 잠시 바라봤다.
...
장례식장은 이런 거였지.
오래간만에 만난 인연에 마음이 풍성해져도, 금방 다시 가라앉게 되는 곳.
그리고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오는 곳.
애틋한 마음으로 선미를 보는데, 여대생 두 사람이 쭈뼛쭈뼛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
민다희, 김소민이다.
"너희들. 여기야."
내 말에 선미가 고개를 들어서 두 사람을 봤고, 다희와 소민이는 어두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너희들도 왔어?"
"언니···. 흑흑···."
"언니···."
"소민아. 오랜만에 봐서 왜 울려고 해. 우선 인사부터 하자."
"흑흑···. 네···."
"..."
두 사람은 말없이 선미를 따라 빈소에 들어갔다.
차분한 마음으로 보는데, 김소민이 명절날 세배하듯이 앉은 절을 하려고 한다.
너 상갓집 처음 와보는구나.
"음! 음!"
헛기침 소리에 민다희가 고개를 돌리다가 그런 김소민을 발견했다.
화들짝 놀라더니 발로 소민이 다리를 툭툭 친 후 절을 했고, 소민이는 그제야 자기가 한 실수를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며 자세를 고쳤다.
"흡."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선미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산 사람은 살아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무리 슬픈 와중에도 미소 정도는 지을 일은 있다.
나는 인사를 끝내고 나온 두 사람과 함께 한쪽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소민아. 나는 조금 전에 봤다."
"...오빠! 조용히 해요! 나 처음 와봐서 그런 거라고요!"
"이해해. 사실 와준 거만 해도 고마워. 밥 먹을 거지?"
"네."
손가락으로 숫자 2를 가리키자 임석훈이 밥을 챙겨와서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천천히 먹어. 소민아 너는 요즘 뭐하길래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힘드냐? 남자친구 생겼어?"
"재밌는 남자친구가 없네요. 요즘 도서관에 박혀 살고 있어요. 3학년 되니깐 한 과목에 시험만 8번이에요."
"그래서 피부가 많이 망가졌구나."
"오빠. 오래간만에 본 사람한테 진짜 이러기예요? 다희랑 둘이서 잘 지내더니, 이제 나 따돌려."
그때 뒤에서 선미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현찬아. 너는 왜 소민이 괴롭혀. 두 사람 멀리서 와줘서 고마워."
선미는 내 옆에 앉았고, 소민이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미안해요. 사실 다희한테 이야기는 들어서 한 번은 연락하려고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이해해. 공대 공부가 그렇다면서. 인간미 없어진다고 하더라고."
"맞아요. 진짜 교수가 싸이코인 거 같아. 후···. 괜찮아요?"
"나 괜찮냐는 말만 오늘 수십번 들어서, 이제 등에 괜찮다고 매달고 다닐까 싶어. 다희 너는 쇼핑몰 잘 된다면서? 모델 한 번 해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힘들 거 같네."
"아니에요. 다음에 시간 날 때 부탁드릴게요."
...
민다희 이거 보소.
유소라 닮아서 열정이 생겼나?
새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선미를 보는 눈빛이 반짝거린다.
"야. 다희야. 너 눈동자에 힘 좀 풀어라."
"...네."
"애한테 왜 그래. 밝아서 좋은데."
"저···. 언니."
"응. 소민아. 뭐 부족한 거 있어?"
"아니. 사실 언니한테 드릴 게 있는데, 이걸 줘도 될지 모르겠어요."
"뭔데 그래?"
소민이와 다희는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선미에게 건넸다.
선미가 사진을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뭔데 그래?"
"우리 사진이야."
나는 선미가 건넨 사진을 봤다.
한 장은 3학년 때 땡땡이치고 벚꽃 구경하러 간 사진.
한 장은 축제 때 사진 동아리 행사했던 사진.
그리고 진희 울스케전에 찍었던 사진.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이 고스란히 있었다.
선미는 한 장씩 보면서 김소민에게 말했다.
"소민아. 이 사진은 언제 찍었대? 나는 너희들하고 같이 한 적도 별로 없는데."
"현찬 오빠랑 같이 다닐 때 틈틈이 찍었었어요. 저···. 언니. 지금 이 사진을 주는 게 다른 의미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다희랑 생각하다가 우리 즐거울 때라도 보면 기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인화 해왔어요. 그치 다희야?"
"맞아. 언니. 그리고 이거는 우연히 구한 사진이에요···. 저도 있는지 이번에 알았어요."
다희는 하얀 손으로 사진을 한 장 더 건넸는데, 거기에는 병실에 선미와 어머님이 있었다.
"...너 이거 어떻게?"
"오빠한테 제 카메라 맡긴 적 있었거든요. 그때 오빠가 찍었었나 봐요."
"...아. 한참 쇼핑몰 때문에 돌아다닐 때 찍었었나 봐."
"그런가 봐요. 우연히 있길래 인화 해왔어요."
선미는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한 방울 흘렸고, 우리는 잠시 기다려줬다.
"다들 고마워. 다들 정말 고마워."
다희와 소민이는 그런 선미 손을 잡아줬고, 전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세 사람은 정말 사소한 인연이다.
소민이가 사회에서 선미를 만났다면, 다희에게 5만 원을 보내고 말았을 거다.
그런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니, 어리기 때문에 아직 사람들한테 지치지 않아서 그런가?
그 사소한 인연마저 다들 소중히 여긴다.
나이가 들면 느낄 수 없는, 오직 지금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자 사람에 대한 열정이다.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데, 그때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봤는데, 네 명의 대학생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덤성아. 여기 아냐?"
"맞다. 진희 가시나야. 니는 연예인 돼도 왜 이리 안 당당하냐?"
"뭐래. 빨리 들어가."
"이세연 밀지 좀 마라."
"얘들아. 여기 맞아."
덤성이, 세연이, 진희, 현아다.
07학번 장난꾸러기들이 다시 한곳에 뭉치다니.
반갑다.
< 가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