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가 >
초여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살을 태우는 듯한 땡볕으로 바뀌었다.
벌써 7월 중순이다.
진희는 울트라 스타K 연습에 한창이다. 7월 중순 넘어서 첫 방이 시작된다는데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매우 궁금하다.
소라의 쇼핑몰은 꽃단장을 마쳤다. 지금은 별로 안 유명해서 입에 풀칠할 정도지만, 곧 울스케에서 진희가 예쁜 모습으로 나온다면, 매출이 폭발적 성장 할 거다. 그걸 위해서 민정상을 통해 아주 약간의 입김도 넣은 상태고. 긍정적인 결과가 당연하듯이 예상된다.
선미는 여전히 병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어머님은 하루가 지날수록 눈에 띄게 야위어갔다. 그나마 선미마저 말라가는 걸 내가 필사적으로 밥을 먹여서 겨우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다들 부지런하고,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나는 뭐 하고 있지?
시불. 4학년은 정말 심심하네.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남는 시간에 섹스 판타지를 채우려고 했는데, 사람이 없다.
대학교에서의 여사친은 이제 거의 바닥 났고 남은 건 진혜리 정도인데, 내 주위에 많은 여자를 보고는 기가 죽었는지 나에게 조금의 벽이 생겨있다.
- 쓰레기네.
'진혜리를 보면서 섹스 판타지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려고 했죠 호구신님?
- 어떻게 알았냐?
뻔하죠. 뭐. 그리고 나 혼자 좋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섹스 판타지는 진혜리에게 행복을 주는 거예요.
- 걔 이제 20살인데? 넌 33살이고?
이렇게 말하니깐 진짜 쓰레기 같네.
"그래! 나 쓰레기다!!!"
"오빠! 깜짝이야!!! 갑자기 뭐한 거예요?"
"응? 이세연? 너 왜 우리 집에 있냐?"
"심심해서 놀러 온 지 두 시간이 지났거든요."
아 그랬지.
그래서 결국 남은 이세연과 나 둘이서 할 일 없이 빌라에서 빈둥빈둥하고 있다.
이세연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플레이스테이션을 다 하고 있을까?
보고 있기 안타깝다.
"세연아. 우리 놀러 갈래?"
"어디로요?"
"차 탄 다음에 그냥 직선으로 쭉 가는 거야. 네비도 지도도 없이. 어때?"
"안 내켜요. 다른 제안 제시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선미 언니 병원 가야 하지 않아요?"
"이번 주는 오지 말래. 이모가 엄마랑 가족끼리만 있고 싶다 했단다."
"그래요? 무슨 일 있으시나?"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아는 거지."
"..."
"..."
우리 둘 다 말이 없어졌다.
6개월 1년이라 외쳤던 의사는 이제 한 달, 두 달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다.
쩝. 여행은 무슨.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에 함부로 자리를 뜨기 겁난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렇구나. 언니 어떡해..."
"너는 안 답답해? 너까지 이렇게 자리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는데."
"저 아는 사람이 오빠랑 언니뿐이잖아요. 고등학교 때는 개 싸가지 왕따였고. 두 사람 빼고는 만날 사람도 놀 사람도 없어요."
"그건 그래. 겨우 들어간 의대에서도 왕따니깐. 아! 아! 야! 나 오빠다. 발로 얼굴 밀지 마라."
"그러면 오빠답게 말 좀 예쁘게 해요. 에이씨! 이건 왜이리 어려워!"
이세연은 플레이스테이션 패드를 땅바닥에 던졌다.
"어렵지? 흡사 너의 의대 생활처럼."
"뭐래. 나 학점 4점대 나왔는데."
"...그런 말 하지 마라. 갑자기 괴리감 느껴진다."
"킥킥킥. 이제야 동생이 좀 놀라워 보여요?"
"응. 개미 눈곱만큼 놀라워 보여. 아!!! 세연아!!! 심심해!!!"
"나도!!! 아!!! 오빠!!! 너무 심심해!!!"
우리는 거실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팔다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심해 죽을 거 같아.
디리링.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고,
"야! 누구 폰이야? 내 거야?"
"잠시만요! 오빠!!! 아!! 내 거는 아녜요. 오빠 거예요. 끊기기 전에 빨리 받아요!!!"
"알았어!! 시발. 어딨어!!!"
"욕은 하지 말고요!!! 저기 바닥에 있어요!!!"
"오케이!!!"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본 사람처럼 휴대전화를 들었다.
"누구세요? 오늘 무조건 시간이 되는 민현찬 입니다!"
- 오빠야!!! 나 진혜리 예요!!!
"어? 진혜리? 네가 웬일이냐? 너 여름방학인데 고향 안 내려갔어?"
- 저 고향이예요!! 오빠야는 뭐 하고 있어요?
"집에서 이세연이랑 시간을 치킨처럼 먹고 있다."
- 어? 세연 언니야랑 같이 있어요?
"응. 너 별로 안 친하잖아. 언제 언니야 됐어?"
"오빠는 다 듣는데 친하고 안 친하고를 말해요? 누구예요?"
"진혜리야. 왜 그 시끄러운 애 있잖아."
- 나는 안 시끄럽거든요!!!
"봐봐. 벌써 시끄럽지. 그런데 왜?"
- 고향이면 놀러 오라고 하려고 했죠.
"그래? 아쉽네. 나 아직 학교야. 여기서 해야 할 게 많아서."
- 히잉. 그렇구나. 알았어요. 그럼 개학하고 봐요.
뚝. 전화가 끊어졌고, 세연이가 궁금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진혜리가 왜 전화 왔어요?"
"걔 고향도 경상남도잖아. 나보고 고향이면 놀러 오라고 전화했대."
"그렇구나. 갈 거예요?"
"거길 왜 가? 여기서 운전해서 가면 여섯 시간 걸린다. 그렇게는 못 가겠다."
"그럼 오빠 고향은요?"
"내 고향? 여섯 시 내 고향?"
"아 뭐래. 진짜 재미없어. 오빠는 고향 안 내려가요? 안 간 지 너무 오래 안 됐잖아요."
"나? 보자... 일 년 정도 안 내려갔네."
"불효자다. 오빠 부모님한테도 좀 잘해요."
"너는? 너 서울에 아빠하고 밥 안 먹은 지 얼마나 됐어?"
"...의대 붙은 날 먹은 게 마지막인가?"
"불효녀다. 너도 불효녀다."
"아 뭐래. 그러고 보니 나도 가족 모임 안 한 지 오래됐네."
"언니는 잘 지네?"
"조금 있으면 시집간다는데요?"
"설마? 진짜?"
"아니요. 농담이에요. 몰라요 어떻게든 잘 지내겠죠."
우리 둘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선미에게 신경 쓴다고 변명했지만, 병문안하면서 마음 한쪽에 각자의 부모님이 생각난 건 어쩔 수 없다.
"흐음. 일주일 정도 시간 있지?"
"네. 오빠. 갔다 오세요."
"그래야겠다. 너도 갔다 와."
"나도 오래간만에 가족 여행이나 갔다 와야겠어요."
"그게 그렇게 쉽게 갈 수 있어? 아버지 휴가 써야잖아."
"아빠가 사장인데 그냥 쓰면 되죠. 뭐."
"아하!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네. 그래. 세연아. 우리도 가족 좀 챙기자. 건강할 때 많이 봐야지."
"맞아요. 그리고 그래야지 더 마음 편하게 선미 언니를 보러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오케이. 짐 쌀 거 있어? 서울은 내가 데려다줄게."
"오~~ 웬일로요? 안 그래도 차 서울집에 놔두고 와서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 정도는 기본 매너지. 그럼 렛츠고!"
"네~ 렛츠고!!!"
그래. 여유 있을 때 나도 고향 한번 내려가야겠다.
*
이세연을 서울에 데려다주고 부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 봉사활동 갔을 때도 집에 안 갔었네.
으아아앙. 부모님 불효자라서 웁니다.
그리고 운전이 힘들어서 웁니다.
시불!!!
학교에서 서울 가는데 한 시간, 서울에서 부산 내려오는데 일곱 시간, 모두 합쳐서 여덟 시간 운전 중이다.
차 안 밀리면 휴게소 안 거치고 네 시간이면 가는데 오늘따라 왜이리 밀리냐?
고생고생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하나 깨달았다.
우리 집 엄청나게 낡았구나.
큰길에서 경사 오르막을 5분 정도 걸어서 집에 도착했는데, 내 앞에 있는 건 어릴 때 커 보이던 주택이 아닌, 영화 완득이에서 나올듯한 2층 주택이었다.
내가 돈이 수십억이 있는데, 부모님은 아직 이런 곳에 살다니. 이제 돈도 많은데. 집 한 채 사드려야겠다.
가슴 아픈 마음으로 캐리어를 들고 집에 들어갔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현관문을 열고 외쳤는데, 조용하다.
다들 어디 가셨나?
거실을 두리번거리면서 보는데, 안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은 이런 비싼 거 왜 샀어요?
- 허허허. 애들 다 나가고 할 일 없으니깐 산 거지.
응? 아빠가 또 무언가를 사셨나 보다.
안방 문을 열자 엄마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이었고, 아빠는 스피커를 설치하고 있었다.
"저 왔어요."
"응. 아들 왔어?"
"아들 왔어?"
"..."
"..."
"야!!! 네가 여기 왜 있어? 갑자기 왜 왔어?"
"너!!! 온다면 엄마한테 말하고 오지!!!"
제가 죽었다가 왔습니까.
두 분 모두 귀신 본 듯이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일 년 동안 전화도 없던 놈이 갑자기 오니깐 그렇지. 혹시 손자 나왔냐?"
"아빠. 손자는 무슨."
그래. 부모님도 이제 연세가 있으니 손자를 보고 싶지.
특히 엄마 피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 모습에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이제 효도할게요.
"그런데 이건 뭐예요? 홈시어터예요?"
"어. 천만 원 주고 샀다."
"...돈이 어딨었어요?"
"우리가 가진 건 돈뿐이잖아. 너희 엄마가 화장품에 100만 원 써서 화나서 나는 홈시어터에 돈 썼어."
엄마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영양 크림 때문에 반짝이는 거였고, 화장대에는 갈색 병이 일렬로 서 있었다.
"두 분 모두 너무 하시네. 차라리 그 돈이면 집을 사세요. 이 집 너무 오래됐잖아요."
"너 무슨 소리 해? 여기 조금 있으면 재개발되어서 사는 거야."
"...네? 재개발요?"
"응. 지금 나가면 바보지. 재개발되면 몇억 벌걸?"
아. 우리 집 그리 가난하지 않았지. 깜빡했네.
여튼 두 분 다 건강하셔서 다행이다.
아빠는 오래간만에 본 아들보다 홈시어터가 좋은지 계속 만졌고, 엄마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볼을 꼬집었다.
"으그으그. 너는 그렇게 내려오라고 해도 안 오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내려왔어? 사고 친 거 아니지? 유럽에 유학 보내놓은 너희 누나 하나만 해도 나는 머리 아프다."
"사고는 아니고요. 보내드린 용돈은 잘 있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네가 보내준 용돈은 하나도 안 쓰고 저축만 했다. 그래서 무슨 사고 쳤는데?"
"사고는 누나가 치지 저는 안쳐요."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자식놈은 원래 그런 거야. 갑자기 부모 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아니면 뭔가 마음이 불편한 일이 있던가."
"네?"
"네놈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엄마 아빠는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마라. 설치 다 했네. 여보. 애 왔는데 밥이나 먹읍시다. 그래도 뜨끈한 집밥은 먹여서 보내야지."
선미 병문안을 다니면서, 부모님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가?
아버지의 무덤덤한 말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는데 엄마가 내 옆에 왔다.
"아들."
"흑... 네 엄마."
"장 봐놓은 거 없어. 너 먹을 거 네가 사와."
"네? 뭐라고요?"
"그러게 누가 갑자기 오래? 당신, 뭐 먹을래?"
"나는 회. 아빠는 싱싱한 모둠회가 먹고 싶다."
"그럼 회랑 엄마는 족발. 저기 우리 집 밑에 시장 가면 맛있는 족발집 있어."
"집밥 해주는 거 아니에요?"
"집에서 밥 먹으면 집밥이지. 어서 사와."
"...그럼 카드 주세요."
"아이고. 동네 사람들. 아들 한양 보내 났더니 얌생이 돼서 왔어요. 부모한테 카드 달라고 합니다."
...
엄마 아빠. 그냥 제가 사 올게요.
나는 집에 온 지 5분만에 다시 집을 나갔다.
*
밥은 든든하게 먹었고, 엄마는 자러 갔다.
오래간만에 아버지랑 둘이서 술을 먹는데, 서먹서먹하다.
그 분위기에서 각 소주 두 병 정도를 마시자, 아버지가 허리를 세운 후, 나에게 말을 했다.
"무슨 일 있냐?"
"사실은요."
나는 선미 일을 이야기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막상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뭐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뭐라 할 게 뭐 있어.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거지. 보자... 너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10년 정도 됐지? 내가 44살 정도일 때네."
"아빠 벌써 54살이에요?"
"부모님 나이도 모르고. 자랑이다 이 짜슥아."
"오늘 알았으니 패스."
"너 위에서 생활하더니 많이 밝아졌다. 옛날에는 이렇게 농담하면 진짠 줄 알고 벌벌 떨었는데."
"예전처럼 꽁하던 성격은 이제 아닙니다."
"다행이네. 여튼 그때가 44살 일 때인데. 참 그랬지."
"어땠어요? 저야 마냥 슬퍼서 울기만 했거든요."
"고아라는 말 알아?"
"부모 없는 아이잖아요."
"44살에 고아가 된 기분을 느꼈다."
도르르륵.
아버지는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한잔 마셨다.
"너희 할아버지가 아픈 기간이 5년이었다. 그동안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지. 그런데 막상 돌아가시니 나는 부모 잃은 아이가 되었어. 이 집도, 저기 김해에 있는 땅도, 아무런 도움 없이 나 스스로 일해서 산 건데, 너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 나는 아이가 되더라."
아버지! 김해 땅값 많이 올라요! 팔면 안돼요.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숙연히 말을 경청했다.
"부모란 그런 존재야.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으면 등을 받쳐주는 기둥이 사라지는 거 같아. 그 애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했지?"
"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막상 그런 일이 생기면 버틸 수 없을 거다. 옆에서 잘 도와줘라.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아빠 도움이 왜 필요해요?"
"그때가 되면 알 거다. 지금은 몰라."
"그렇다면 일단 도움 한 번 키핑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자 이야기하는데 안 놀라네요?"
"놀랄 게 뭐 있어. 너도 이제 23살이니 여자 손도 못 잡아 본 바보에서 사람 될 때가 된 거지. 그래서 부산이 아니라 멀리 보낸 거고."
"...감사합니다."
아들을 디스하는 아버지지만, 말의 알맹이는 내 심장을 때린다.
고아라...
경험하지 못한 나는 알 수가 없는 감정이구나.
더 선미를 신경 써줘야겠다.
다르르륵.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워서 입에 넣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빠!!! 잠시만요! 할머니 계시잖아요!!!"
"응 왜?"
"아니, 그런데 왜 고아라고 해요?"
"...새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는 꼭 내가 부연 설명까지 해야겠냐? 그런 기분이었다고. 그리고 내 세대에 아버지랑 어머니는 느낌이... 하 됐다. 나는 술 취해서 자러 가야겠다."
"아니. 이건 세대 문제가 아니라 말실수 같은데."
"대충 알아들어. 잔다. 이거 치워라. 내일 너희 엄마 폭발하는 거 보기 싫으면."
...
뭔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꼬였나 보네.
그래도 무슨 뜻인지만 알면 되지. 짧은 대화였지만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줬다.
아버지는 자러 가고, 나는 복잡한 마음에 설거지하는데,
디리리링.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금 밤 11시인데 누구지? 어? 진혜리다?
- 오빠야! 오빠야! 오빠야!!! 부산이라매?
얘는 또 어떻게 부산 왔는지 알았대?
그런데 좋은 일 있나?
진혜리 목소리는 들뜨고 시끄러웠다.
< 휴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