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59화 (259/295)

< 병원 >

예슬 누나에게 말하고 대학교로 내려가는 중이다.

아니, 50년대도 아니고 영양실조가 웬 말이야?

내가 실컷 놀고 있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나는 역시 학교를 비우면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었단 말인가?

- 지랄 말고 운전이나 조심히 해라.

넹!

한참 동안 운전을 해서 학교 근처에 도착하자 휴대 전화가 울렸다.

응? 이번에는 임석훈이다.

- 여! 민현찬 너 어디야?

"지금 학교 가는 중이야. 이야기 들었지? 선미 쓰러졌다면서? 아직 병원이야?"

- 아까 퇴원했고, 지금은 원룸 와서 쉬고 있어.

"뭐? 영양실조라면서? 바로 병원에서 나와도 돼?"

- 영양실조 아냐. 그냥 빈혈이야. 세연이 걔는 의대 갔으면서 영양실조랑 빈혈을 구분 못 하냐?

그래 영양실조는 너무 하잖아. 아마도 여자들이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을 때 쓰러지는 것과 비슷한가 보다.

여튼, 다행이다.

"세연이가 당황해서 그랬겠지. 나 한 10분 정도 지나면 원룸에 도착할 거 같아. 너도 가지 말고 있어. 오래간만에 얼굴이나 보자."

- 그러자. 그런데 선미 무슨 일 있어?

"왜?"

- 얘가 또 뼈밖에 안 남았는데? 아마 빈혈도 안 먹어서 온 거 같아. 궁금해서 나랑 혜민이가 계속 물어봤는데, 괜찮다고만 하고 아무런 이야기를 안 해주네. 너는 뭐 들은 거 없어?

미안···. 요즘 섹스하고 다닌다고 들은 게 전혀 없어.

선미가 힘들어 할 만한 일이 뭐 있지?

아! 갑자기 뭔가가 머리를 반짝 스치고 지나갔다.

"글쎄···. 하나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한데."

- 뭔데?

"...이야기는 못 해주겠다."

- 선미 남자한테 차였냐?

"그런 거는 아니고, 개인사라서 말해주기 조금 그래. 일단 내가 만나서 물어보고 확실하면 말해줄게."

- 그래. 알았다. 너희 둘이 제일 친하니깐 너한테 부탁 좀 할게. 그럼 나랑 혜민이는 이만 빠진다.

"야!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얼굴이나 보고 가지. 뭘 빠져?"

- 일단은 빠져 있을게. 사람들 많으면 이선미가 이야기하겠냐? 아무도 없이 너희 둘만 있어야지 이야기하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세연이는? 아직 거기 있어?"

- 이세연은 선미가 이제 괜찮다고 집에 가라 해서 갔어. 나랑 혜민이 빠져나온 다음에 세연이 불러서 같이 한잔하고 있을 테니, 이야기 끝내고 여기로 와.

"오케이. 동사무소 다니더니 애가 행정처리가 빨라졌네."

- 으하하하. 짬밥은 코든 입이든 먹는 대로 늘더라. 그럼 조금 이따가 보자.

뚝. 전화가 끊어졌다.

다들 선미가 아파서 쓰러지니 비상이네. 그만큼 이선미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하필 이 순간에 다른 데서 활동하고 있었던 게 마음에 걸린다.

잘못한 건 없지만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기분이다.

일단 빨리 가서 이야기 들어보자. 선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야지 마음이 편해질 거 같다.

이선미 원룸 앞에 도착했다.

여기 정말 오래간만이네.

선미 원룸을 보자 아다를 떼였던 추억에 빠져든다.

...

정신 차리고 어서 이선미를 만나자.

나는 원룸 현관문 앞에 섰다.

"선미야. 나 왔어. 문 열어줘."

...

아무 대답이 없다.

설마! 다시 쓰러진 건가?

"야! 이선미! 괜찮아. 악!!!"

시불. 갑자기 문이 열렸고, 철판과 코가 부딪혔다.

아오! 아파!

코를 어루만지는데 선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너 왜 왔어? 서울 모터쇼 행사 중이잖아."

"너 쓰러졌다는 말 듣고 놀라서 왔다. 이번에는 쓸개가 아픈 건 아니지?"

"아하하. 쓸개는 무슨. 그냥 조금 무리해서 빈혈 온 거야. 됐지? 이제 집에 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군데 이렇게 문전 박대하는 거냐?"

"너는 워낙 음흉한 놈이어서 무섭거든. 지금도 얼굴 봐봐. 서울에서 뭘 하고 다니길래 변태처럼 얼굴이 검냐? 다크써클도 턱까지 내려왔고."

그러게. 너무나 기 빨리는 일주일을 보냈어.

"열심히 일해서 그렇지. 일단 들어갈게. 이야기나 좀 하자."

"이야기만 할 거지?"

"그럼. 지금 네 모습 봐라. 이야기 말고 다른 거 하기도 겁난다."

나는 선미를 봤다. 반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었는데, 허벅지와 팔에는 뼈만 앙상했다.

어제 예슬 누나를 봐서 그런지 유난히 더 얇아 보인다.

내 시선을 느낀 선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기 팔과 다리를 쳐다봤다.

"흐음. 요즘 살 뺀다고 안 먹었더니 많이 빠졌네."

"거짓말하기는. 네가 살 뺀다고 안 먹을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해 봐. 너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서 너무 심심하다. 하아~~~"

"억지 하품하지 말고. 너 전주에서 나랑 한 약속 생각 안 나? 힘든 일이 있으면 적어도 말은 해주기로 했잖아."

내 말에 선미 표정이 굳어졌다.

얘도 참 은근히 아무것도 못 숨긴단 말이야.

"아무 일도 없어. 진짜야."

"너랑 나랑 몇 년 친군데 얼굴만 보면 알 수 있어. 어머니 일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

"네가 이렇게 살 빠질 일은 가족뿐이잖아. 어머니 다시 병원 가셨다고 말하기도 했고. 안 좋아지셨어?"

선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고, 나는 기다려 줬다.

조금 있자 깊은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다가는 옆집 사람들 시끄러워서 잠 못 자겠네. 일단 들어와."

"그 말을 기다렸어. 들어갈게."

"이상하다? 왜 이리 말하는 게 변태 같아졌지?"

"아니거든. 어서 들어가자."

나는 가녀려진 선미 허리를 감싸고 원룸 안으로 들어왔다.

선미는 한쪽에 있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서 나에게 툭 던져줬다.

"이거 마셔."

"맥주 없어?"

"운전해서 온 거 아니야? 다시 운전해야 하는 놈이 맥주는 무슨."

그 말도 맞네.

딸깍. 캔 음료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시자, 이선미가 입을 열었다.

"엄마 암이 재발하셨어. 4기래. 몸 곳곳에 퍼져서 이제 방법이 없대."

아니길 바랐는데.

모터쇼 전에 선미가 병원 간다는 말 들었을 때부터 약간의 불안함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니길 바랐는데.

마음 한쪽이 노숙자에게 점령당한 서울역처럼 무거워졌다.

"어느 정도야?"

"의사는 길면 1년이라는데···. 모르겠어."

"괜찮아?"

"응. 사실 약간은 예상했거든."

"...어떻게?"

"항상 최악의 일은 행복할 때 일어나잖아. 대학생활이 너무 재밌어서 약간은 예상했었어. 내 삶에 이렇게 즐거운 일이 계속될 리가 없는데 하고 말이야."

"그랬구나. 하. 나도 걱정되는 마음에 생각은 했었는데, 막상 일어나니 힘내라는 말 말고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네. 미안하다···."

"미안하기는 무슨. 우리 엄마 아픈 게 너 때문인 것도 아니고. 괜찮아. 그 말도 고마워. 너마저 옆에 없었다면 나는 정말 힘들었을 거야. 네 덕분에 대학 생활도 엄청 재밌게 보냈고. 정말 고마워 현찬아."

선미는 다가와서 나를 꼭 끌어안았고, 나도 손을 뻗어 선미를 꼭 안아줬다.

"...선미야 포기하지 말자. 괜찮아지실 거야."

"응. 포기는 안 해.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봐야지. 항암치료도 다시 시작할 거고."

"그래 내가 최대한 너 도와줄게. 나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야."

"아하하. 바쁜 놈이 잘도 시간 남겠다. 괜찮아."

"또또 힘들면서 혼자 버티려고 한다. 같이 해보자. 우리가 도와줄게."

"우리?"

"응. 나뿐만 아니라 임석훈, 이혜민, 이세연 전부다. 2년 전에 몰래 너 찾아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가 도와줄게. 물론 좋은 일도 아니고 너 혼자 견디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돼. 그래도 때로는 힘들 때 친구한테 기대어는 봐.

우리는 3년 동안 같이 웃고 울고 화내면서 보낸 가족이잖아. 먼 훗날 사회에 나가서 멀어질지 모르더라도, 지금은 함께하자. 네가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생각은 그래. 너도 다른 애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연기하는 거, 생각보다는 힘들 거야."

선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조금 있자 입을 열기는 열었는데.

쪽!

어라? 내 입술에 뽀뽀를 해줬다.

"고마워 현찬아."

"...지금 뽀뽀한 거예요?"

"아하하. 미친놈 갑자기 왜 높임말이야."

"너무 놀라서. 너 이선미 맞지?"

"맞거든? 고마워서 뽀뽀 한 번 해줬어. 영광인 줄 알아."

"진짜 영광이지. 이선미가 보뽀를 해주다니."

"너 방금 발음 일부러 흘린 거 아니지?"

"아! 아냐! 이건 진짜 너무 놀라서 한 실수야!"

"이 새끼가! 당황하는 게 아무리 봐도 실수가 아니잖아! 야! 보뽀라고? 너는 이 상황에도 그딴 생각만 하냐?"

"아니래도! 진짜 아니래도!"

이선미는 웃으면서 나를 개 잡듯이 팼다.

이씨... 나 진짜 놀라서 말실수한 건데. 보니깐 선미도 뽀뽀한 게 민망해서 일부러 오바하는 거네.

모른 척 맞아주자.

한참 동안 때리더니 근심이 조금 날아갔는지 밝게 웃었다.

"그래도 너랑 이야기하니깐 속이 뻥 뚫린다."

"다행이네. 어쩔래? 오늘 애들한테 이야기할래?"

"오늘? 다들 집에 갔잖아. 됐어, 언제 또 다 불러."

"너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나는 임석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선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선미에 손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고, 우리는 전화기 하나에 얼굴을 맞닿은 모습이 되었다.

- 야! 야! 민현찬이다. 현찬아 어떻게 됐어?

"뭘 어떻게 돼? 너희 어딘데?"

- 우리 지금 학교 앞 맥줏집이야.

"누구누구 있어?"

- 제일 귀찮은 거 물어보네. 보자, 나, 세연이, 진희, 혜민이, 유소라, 어? 박호빈 넌 왜 있냐? 뭐? 길 가다가 우리 모여 있는 거 보고 왔다고? 오늘은 좀 꺼져라. 여튼 이 정도 있고, 조금 있으면 은미도 오기로 했어. 그리고 혜리인가 하는 신입생도 있는데?

"... 이 미친 새끼야! 사람을 왜 그리 많이 모아놨어!"

- 응? 아무래도 좀 많지? 여기서 누구 집에 보낼까? 네가 말하면 내가 보낼게.

"아! 아!!! 일단 너는 그냥 집에 가라. 임석훈 개새끼야!!! 일단 끊어!"

미친놈아! 눈치가 있는 거야? 아니면 의리가 대단한 거야.

시불. 이러다가 과 사람들 다 오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는데, 선미가 깔깔 웃었다.

"아하하하. 어떻게 됐는지 알겠다. 임석훈이 한 명씩 다 불렀나 보네."

"하 이 새끼를 어떻게 하냐···."

"뭐. 나는 오히려 고마운데."

"뭐? 정말?"

"응.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가서 이야기해주지 뭐."

"아니···. 너 개인사 남에게 알려지는 거 엄청 싫어하잖아."

선미는 다시 한번 나에게 키스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원래는 그런데, 이번에는 네 말 들어보려고. 혼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보다는 차라리 많으면 사람이 아는 게 더 좋을지 누가 알아? 나 민폐 주는 거 싫어해서 그랬는데, 이번에는 민폐 한 번 줘볼게. 나 도와줘 현찬아. 사실 혼자서 병원 다니고 학교 다니기 너무 힘들어."

"그래. 힘들지. 서울 왔다 학교 왔다 반복하는 게 보통 거리도 아니잖아.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불러."

"그래도 돼?"

"그럼. 나중에 전부 다 괜찮아지면 그때 밥이나 쏴라."

"아하하. 네가 잘도 밥으로 만족하겠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럼 오늘 애들 만나러 갈 거야?"

"응. 같이 가자. 우선 좀 씻어야겠네."

선미는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나를 향해 씩 웃었다.

"현천아. 일이 다 끝나면 말야."

"다 끝나면?"

"그때는 밥 대신 같이 씻어줄 게~"

"... 혹시 선불로 지금 씻는 건 안 되겠지? 아! 야! 농담이다!"

"미친 새끼. 너는 역시 좀 맞아야 해."

수건을 얼굴에 집어 던지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런 선미 뒷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여전히 씁쓸하다.

밝은 척하지만, 천하의 이선미가 오죽 힘들면 많은 사람에게 어머님이 아픈 걸 이야기할까.

우리가 병을 치료해줄 수는 없어도, 함께는 해줄게.

나는 휴대 전화를 든 후, 예슬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현찬아. 내려간 일은 잘됐어?

"누나 죄송해요. 정말 무책임한 말이지만, 저 내일부터 모터쇼 못 나가겠어요."

- 어? 왜?

"학교에 큰일이 생겨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니야. 괜찮아. 부산에서도 책임감 느끼고 했던 넌데, 오죽 큰일이면 못 하겠다고 말하겠어. 엄청 큰일인가 봐.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다음에 정리되면 우리 서울에서 밥 한번 먹어요."

- 그래. 너 목소리 들어보니깐 많이 심각한가 보네. 민우 오빠한테는 내가 말할게.

"아니에요.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거 같아요. 제가 전화할게요."

- 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일주일 동안 수고했어.

예슬 누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보면서 이야기해줄게.

나는 바로 민우 형한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고, 박인혜한테도 했다.

이제 다 한 건가? 모터쇼는 이렇게 섹스만 하다가 끝났구나.

디리리링.

그때 내 휴대 전화가 울렸고, 발신자는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인 막심걸 이혜리였다.

"혜리야. 웬일이야?"

- 현찬아. 너 모터쇼 그만둔다면서?

"어. 학교에 일이 좀 생겨서. 도저히 못 할 거 같아."

- 엄청 큰일이야?

"응. 엄청 큰일이야. 너 그런데 목소리가 아쉬워 보인다."

- 아쉽지. 너 어제 나 모델 서는데 한 번도 안 왔잖아. 나 레이싱복 입은 거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 뭐, 어제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다음에 보여줘."

- 다음에 언제? 우리 만날 일이 있을까?

"글쎄? 생각보다 만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나 너희 회사 2대 주주거든.

- 진짜? 그럼 다음에 서울 오면 나한테 연락한다고 약속해줘!"

"알았어. 다음에 올라가면 꼭 연락해줄게. 그런데 당장은 안 될 거야."

- 와~ 이렇게 비싼 남자 처음임!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원래 몸값이 조금 비싼 편이거든. 농담이고 일부러 신경 써서 전화까지 해줬는데 아쉬운 소리 해서 미안해. 다음에 기회 되면 보자."

- 정말 아쉽다. 응! 기다릴 테니까 꼭 올라오면 연락해줘!

그래. 올라가면 연락은 줄게.

하지만, 당분간은 힘들 거야.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듯이, 당분간은 선미에게 집중하자.

< 병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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