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12화 (212/295)

< 감정 >

3층의 한 연습실.

그 연습실 한가운데 은미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데.

있는데...

있는데!!!

이건 아니다. 차라리 연기가 더 희망 있어 보인다.

축제 때는 몰랐는데, 기준을 연예인으로 잡으니 재롱 잔치 같다.

젠장. 댄스 가수는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

저대로 무대에 나오면 안티팬들이 황건적처럼 전국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겠다.

나는 옆에 서 있는 박인혜에게 입을 열었다.

"박 대표님. 은미 지금 가볍게 하는 거죠?"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안됩니다. 이건 아닙니다!"

"맞아요. 이건 아니에요. 어떻게든 좀 말려주세요."

처음으로 박인혜와 하나가 되었다.

"일단 제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희야 미안한데 박 대표님하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나는 혼자 연습실로 들어갔다.

한쪽에 등을 기대고 구경하는데, 정말 열심히는 하고 있구나.

내가 들어온 지도 모르고 연습을 계속한다.

10분쯤 지났나? 지친 은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런 은미 뒤로 걸어갔다.

"은미야."

"꺄!!!!! 하... 어? 아! 현찬아!"

그렇게 좋니?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다.

"열심히 하네. 이마에 땀 봐."

"아니야. 헤헤헤. 그런데 웬일이야? 나 보러 왔어?"

"응. 은미 너 보러 왔지."

"왜? 잠시만! 임석훈이 나 댄스 가수 연습한다고 너한테 말했지?"

석훈아. 미안.

"응. 나보고 말려 달라고 부탁하더라."

"아! 이 새끼! 임석훈 죽여 버릴 거야!"

"지금 감정 좋네. 이렇게 연기를 하지 왜 댄스 가수 하려고 해?"

"연기는 재능 없어.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언제까지 너한테 기댈 수도 없는 거고."

"기대기는 무슨. 친구끼리 돕는 거지. 누가 연기 가지고 뭐라고 해?"

"응. 감정이 없대. 하... 오디션 봤는데, 전부 다 떨어졌어."

"너무 우울해하지 마. 재능이 없는 건 아닐 거야."

"정말?"

"그럼. 감정이 없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감정 빼고는 다 있다는 말이잖아. 연기에 감정만 넣으면 되겠네."

나는 은미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며 옆에 앉았다.

"그 감정이란 게 뭔지 모르겠어. 현찬아 좋은 방법 없을까?"

"음. 크게 아프거나 슬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최근에 슬픈 적 있었어?"

"응. 나 춤추는 거 소속사 사람들한테 보여 줬는데, 전부 다 웃었어. 그때 엄청 속상했었어."

"그거는 부끄러운 거고. 그럼 기뻤던 적은?"

"없어. 그러고 보니 요즘에 기뻤던 적이 없네. 웃은 적도 없고."

하긴, 경제도 안 좋고, 회사도 안 좋고, 일도 안 잡히는데 웃을 일이 있을 리 없지.

"그러면 예전에 기뻤던 장소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예전에 기뻤던 곳?"

"응. 우리 체육대회 때 춤췄던 날 기억나?"

"아하하. 기억나! 그때 우리 진짜 재밌었는데. 그때는 잘 췄는데, 지금은 왜 못 추는지 모르겠어. 나 사실 그때 생각해서 댄스 가수 한다고 한 거였거든."

학교 축제용이랑 프로 무대는 다르단다.

댄스 가수에 바람을 넣은 범인은 바로 나였구나.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하고. 큰일이야. 헤헤헤."

은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큰일이다. 이렇게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못 말리겠다.

춤마저 재능 없다고 하면 상처받아서 더 동굴에 들어갈 거 같다. 다들이래서 못 말렸구나.

혼자서는 힘들다. 오늘은 일단 후퇴하고 다음에 임석훈이랑 선미까지 동반해서 다시 와야겠다.

나는 축 처진 은미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무 애쓰지 마. 힘든 일이 있을 때 좋은 방법중 하나는 꾹 웅크리는 거야.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묵묵히 연습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고마워 현찬아. 그래도 너 보니깐 기분 좋아졌어! 그래! 네 말대로 다시 춤 연습해야겠어!"

"어... 연기 연습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아니야. 나는 할 수 있다! 은미는 할 수 있다! 나는 국내 최고의 댄스 가수가 될 거야!"

...

아니야. 안 돼.

아이돌 세상인데, 솔로 댄스 가수가 설 곳은 없어.

젠장. 오래간만에 전원 소집 한번 해야겠다.

결국, 은미를 말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바로 임석훈과 이선미를 소집했고, 두 사람에게 오늘 일을 이야기해 줬다.

"내일은 세 명이 같이 가는 거다. 이의 없지?"

이선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내일 같이 갈게. 그런데 의외로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시대랑 원더걸스 못 봤어? 이제 걸그룹 시대야. 솔로 가수로는 답이 없어."

"그것도 그렇네. 임석훈 너는 내일 뭐 해? 너도 같이 가자."

"당연하지. 나는 은미랑 초등학교 동창인데, 당연히 가야지."

오케이. 어벤져스는 결집했고 내일 필사의 각오로 말려보자.

그때 휴대 전화가 울렸는데, 박인혜다.

이 아줌마 왜 이리 자주 전화해? 사귀는지 알겠네.

- 현찬 씨!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리 다급하세요?"

- 혹시 은미 거기 있어요? 아니면, 연락 안 왔어요?

"네? 은미요? 아니요. 연락 안 왔는데. 너희들 오늘 은미 연락받은 사람 있어?"

임석훈과 이선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우리 아무도 연락 못 받았어요. 왜요?"

- 은미가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요?"

- 네. 종이 한 장 남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뭐라고 적혀져 있었는데요?"

- '가장 즐거웠던 곳을 찾아보고 올게요'라고만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혹시나 친구들 만나러 간 건가 싶어서 전화해 본 건데, 진짜 안 왔어요?

"네 연락 한 통 없었어요. 일단 전화 끊어보세요."

뚝.

전화가 끊어졌고, 임석훈과 선미는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데?"

"사라졌다니?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가장 즐거웠던 곳을 찾아보고 오겠다는 쪽지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대."

"거기가 어딘데?"

이선미의 마지막 질문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가장 즐거웠던 곳이 어디지?

초등학교까지 내려가면 끝도 없잖아.

"일단은 우리 놀러 다녔던 곳 가보자. 임석훈 너는 과방에 가보고, 선미 너는 나랑 같이 옛날에 살았던 원룸 가자."

"잠시만. 나보고 과방에 가라고?"

"응. 너 죄 저질렀냐? 왜 표정이 굳어?"

"이 시간에 혼자 가면 귀신 나온단 말야."

...

5, 4, 3, 2, 1

"야 이 미친 새끼야!!!"

이선미가 임석훈을 두드려 팼다.

선미 나이스샷.

"아! 농담이다! 농담! 너희들 하도 심각해서 장난친 거야!"

"아후! 닥치고 어서 꺼져!"

임석훈 말은 그렇게 해도 서둘러 빌라를 뛰쳐 나갔다.

나와 선미도 두꺼운 외투만 걸치고 빌라를 나왔다.

은미야 어디 있니?

22살에 가출이라니. 돌아와 줘 멀지 않다면.

우리는 서둘러 옛날에 살던 원룸으로 갔다.

예전 원룸에 왔는데, 도둑고양이 하나 없이 고요하다.

여기서 섹스 많이 했었는데.

아차차. 옛날 추억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나와 선미는 이번에는 학교 다닐 때 놀았던 술집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은미의 머리카락도 찾을 수 없었다.

과방에 간 임석훈도 마찬가지다. 학교 그 어디에도 은미의 흔적은 없었다.

어디를 찾아봐야 할까 곰곰이 고민하는데, 그때 내 휴대 전화가 울렸고, 선미가 초조한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현찬아! 전화 받아봐! 은미 아니야?"

"잠시만. 여보세요?"

- 민현찬 잘 지내냐?

"어? 인봉이 형! 미안해요. 지금 바빠서 전화할 수가 없어요.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끊어요."

- 잠시만! 잠시만! 야! 너 은미랑 무슨 일 있었어?

"예? 형! 혹시 은미한테 연락 왔었어요?"

- 응. 갑자기 연락 온 게 이상해서 너한테 전화 한 거야.

"뭐라고 하던데요?"

- 우리 농활 갔던 곳 물어보던데? 그래서 가르쳐 줬지. 그런데 영 이상해서 너에게 전화했어.

"형! 진짜 고마워요. 제가 이 은혜는 다음 생에 꼭 갚을게요."

- 미친놈이. 이왕이면 이번 생에 갚아. 농활 멤버 모임이나 한 번 추진해라. 그럼 끊을게.

그래. 추억이 있는 장소는 학교만이 아니었지.

"현찬아 뭐래?"

"은미가 농활 갔던 곳이 어딘지 물어봤대."

"정말? 거기 갔겠네. 빨리 가보자."

선미가 서둘러 차에 올라탄다.

"잠시만 선미야."

"왜?"

"...나 혼자 갔다 올게.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

내 말에 선미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은미 잘 부탁할게."

"웃는 얼굴로 데리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선미는 내리고 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서둘러 농활을 했었던 시골로 악셀을 밟았다.

은미를 만나러 가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다.

'가장 즐거웠던 곳을 찾아보고 올게요'

일이 잘 안 풀리니깐 추억의 장소를 찾아간 걸까?

아니면,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과거를 헤맨다는 건 현재가 행복하지 않다는 건데.

너 지금 그렇게 많이 힘드니?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고, 정신을 차려보니 농활을 했던 마을회관 앞이었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은미는 여기 있구나. 마을회관을 둘러보자 작은 흰색 아우디 티X가 보였다.

요즘 힘든지, 차가 한 등급 내려갔네.

차 안을 봤는데, 은미는 없었다.

어디에 갔을까? 배밭에도 없고, 마을회관 안에도 없다.

그때, 옛 추억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자고 있었고, 은미가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 줬던 그 밭!

서둘러 그 장소를 향해 뛰었다.

어두운 시골길을 몇 번 헤매다가 겨우 도착했는데.

와씨! 깜짝이야! 처녀 귀신인 줄 알았네.

어두 컴컴한 밭 주변 나무 아래에 키 큰 여자 한 명의 뒷모습이 보였다.

은미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고, 다섯 걸음 정도 남았을 때 은미가 뒤돌아서 나를 보았다.

"꺅!!!!!!"

"깜짝이야!!"

"현... 현찬아. 여기 웬일이야? 하... 나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

"그렇게 무서운데 왜 혼자 왔어? 너 비명에 내가 더 놀랐다. 여기서 뭐해?"

"너는?"

"나는 가출 여대생 있다고 해서 잡으러 왔지. 너는?"

"아하하. 나? 그냥. 네가 좋았던 곳을 가보라고 했잖아. 생각해보니 여기가 떠 올라서 와 봤어. 나 여기서 정말 행복했었거든."

은미는 텅 빈 논밭을 한번 둘러보더니 눈을 차분히 감았다.

"옛날 생각나?"

"응. 우리 여기서 재밌었는데."

"지금도 재밌으면 되지."

"헤헤헤. 그러게. 맞아. 그게 맞는데."

찬 겨울바람이 은미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네. 현찬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잠시 바람 쐬러 온 거야."

"쪽지 하나 남기고 나온 거는 바람이 아니라 가출이야. 전부 다 너 찾아다닌다고 난리 났어."

"어? 정말?"

"그래. 임석훈하고 선미도 너 찾는다고 미친 사람처럼 학교를 헤맸어. 어서 가자."

"다들 왜... 우리 같이 못 논 지도 오래됐잖아."

"바보냐?"

나는 은미를 꼭 안았다.

"친구잖아. 아무리 오랫동안 못 봐도, 우리는 뜨거운 20살, 아니. 첫 사회를 같이 걸어 다녔던 친구야.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어."

"현찬아..."

은미도 나를 꼭 안았다.

따스하고 커다란 은미 가슴이 느껴진다.

내 머리를 끌어안는 은미의 차가운 손도 느껴진다.

그리고 향긋한 향수 냄새가 내 코로 들어왔다.

발딱!

- 전하!!! 오래간만에 은미 처자와 함께 합체를!

...

미친 병조 판서야 좀 닥쳐! 지금은 서면 안 돼!

하지만, 어림없지. 막대기는 발딱 섰고 은미 배를 사정없이 부비부비했다.

흠흠. 오래간만에 이러니 민망하네.

은미도 마찬가지 인지, 부끄러워하면서 나와 조금 멀어졌다.

"헤헤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다들 걱정하면서 기다리겠다. 우리 이제 가자."

"그러자. 너 얼어 죽기 전에 어서 가자."

"주머니에 손 넣어도 돼?"

이 추운 날씨에 장갑도 없으니, 은미 손은 꽁꽁 얼었겠네.

"응. 넣어. 그리고 내 손 잡아."

"고마워."

은미는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나는 차가운 은미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시골길을 말없이 걸었다. 조금 있자 마을회관에 도착했고, 각자의 차로 가려는 순간, 은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잠시만 차에 같이 안 있을래?"

"그러자."

작은 아우디TX에 은미는 조수석, 나는 운전석에 탔다.

히터와 라디오를 틀고 가만히 밖을 보는데, 하얀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현찬아. 눈이야."

"첫눈이네."

"그러게. 올해 첫눈이야."

나와 은미는 갑자기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만 봤고, 차 안은 어색함이 가득했다.

말없이 흰 눈을 보는데, 은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그때 연예인을 안 했으면, 다음 해에도 여기 왔을까?"

"안 왔을 거야. 나 다음 해는 국토대장정 갔었거든. 연예인 한 거 후회돼?"

"후회는 되는데, 후회하면 안 될 거 같아. 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후회해도 괜찮아."

은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은미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면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후회하는 것도 좋아. 나도 후회 많이 하는걸."

"너는 어떤 걸 후회 하고 있어?"

"그냥 이것저것. 너랑 헤어진 것도 가끔 후회해. 다만, 나는 그 후회에 잡히지는 않으려고. 후회에 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거든. 은미 너도 힘들면 후회해도 괜찮아. 하루 빡시게 후회하고 다음 날 털어버리면 되지 뭐."

"나는 요즘 그게 안 돼. 정말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너 원룸에서 같이 놀고 웃었던 그때로 말야. 우리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맞아. 그때 재밌기는 진짜 재밌었지."

"현찬아..."

은미의 차가운 손이 나의 따뜻한 손을 꽉 잡았다.

"만약. 내가 다시 돌아가면 네 옆에 있을 수 있을까?"

"...친구로서?"

"아니. 연인으로서."

"그럼 있을 수 없어."

은미 손이 흠칫했고, 라디오에서는 녹색지대의 '준비 없는 이별'이 흘러나왔다.

- 지난 시간 내 곁에서 머물러 행복했던 시간들이~

"그래. 이미 너에게는 좋은 사람이 있지. 이세연이라는 그 아이 때문이야?"

"그런 건 아니야. 은미야. 우리는 이미 끊어져 버린 인연이야. 한 번 끊어진 줄은 다시 묶어도 끊어진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새 끈이 돼야 해. 사실, 나는 그때랑 많이 달라졌어. 그때보다 냉정해졌고, 그때보다 차가워졌어. 은미 너는 어때?"

"나?"

"응. 후회에 발목 잡혀서 아직 그때를 살고 있는 건 아니야?"

"모르겠어. 요즘은 그냥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몸을 조수석으로 보내 은미를 안았다.

- 보고 플땐 어떡해야 하는지 오는 밤이 두려워져.

라디오에서는 녹색지대 노래가 계속 노래가 흘러나온다.

"은미야. 그때로 돌아와도 예전의 나는 없을 거야. 예전의 임석훈도 예전의 이선미도 없을 거야. 우리는 이미 그때의 우리가 아니거든. 네가 새로운 은미가 되어서 다시 우리와 함께했으면 좋겠어."

-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은미야. 예전에 네가 나한테 '다시 나에게 반하게 하겠어'라고 말했었잖아. 아쉽게도 너는 그 말을 했던 그때랑 똑같아.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어. 차가운 말 해서 미안. 그런데 이게 사실이니깐."

"모르겠어. 나 열심히 했는데, 계속 잘 안 돼. 그러니깐 정말 힘들어.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봐 그럼 잘 될 수 있을 거야."

"현찬아. 우리 진짜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

- 안 돼 지금은 이대로 떠나는 걸 그냥 볼 수는 없어~~

"미안. 우리는 이미 한 번 끊어진 인연이야.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야 해. 그 후에 다시 사랑할 수 있어."

"...현찬아."

"은미야. 세연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의 너를 사랑할 수 없어."

- 차라리 나 기다리라 말을 해~~~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냉정할 때는 냉정해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마지막 저주가 괜히 희망인 게 아니다.

그리고 은미는 지금 힘들어서 피할 곳을 찾고 있는 거다.

친구니깐 받아줄 수는 있지만, 계속 그곳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우리 둘 모두에게 안 좋다.

미안해 은미야.

"흑... 흑..."

냉정한 거절에 은미는 눈물을 흘렸다.

"미안."

"흑흑... 괜찮아."

-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

라디오에서 노래는 끝났고, 차 안은 다시 고요함이 가득했다.

어색하게 은미를 안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확 밀치더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부럽네요. 나도 대학교 계속 다녔으면 여전히 수수했을 건데. 진한 화장과 명품 가방이 초라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현찬 씨 마음은 알겠어요.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거죠?"

갑자기 연기를 왜 해? 민망해서 그런가?

그런데, 뭐지? 은미의 말에 내 마음이 울렁거린다.

일단... 나도 연기를 같이해주자.

"지금 내 마음은 너를 사랑할 수 없어."

"그래요? 알고는 있었지만, 슬프네요. 그런데, 이해도 돼요. 술집에서 접대하다 보니 남자 마음은 잘 알겠더라고요. 현찬 씨."

"네. 은미 씨."

"오늘 하나만 알아주세요."

"어떤 거요?"

"분수도 모르고 조르는 지금 내 모습. 진심이에요."

은미 맞아?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은미가 아니다. 술집에서 일하다가 평범한 회사원에게 반한 여자다.

은미 눈빛에 집중이 확 된다. 마음속에서 미안한 감정은 사라지고, 술집 여자의 처지에 공감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아픔이 내 심장을 쿡쿡 쑤셔왔다.

뚝.

잠시의 정적이 흐르더니 은미는 헤헤헤 웃었다.

"현찬아! 오늘 내 연기 어땠어?"

"대박이야. 방금 마지막 대사에 울컥했어. 진짜 연기였어?"

"그럼 연기였지! 진짜 괜찮았어?"

"어! 진짜 장난 아니야. 와... 뭐지. 이게 뭐야? 왜 갑자기 잘해?"

"에이.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야!"

아픔이 사람을 변하게 한 건가?

은미는 10분 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헤헤헤. 그래도 너한테 칭찬 들으니깐 좋다. 오늘 나 찾으러 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런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연기였던 거야?"

"차에 타고 나서부터 전부 연기였어."

"웃기네. 솔직히 말해라."

"진짜야. 그냥 그렇게 알아줘."

"알았어."

여자에게는 비밀 하나 정도는 있다잖아.

그냥 모른 척해주자.

우리는 손을 맞잡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봤다.

눈이차 본네트를 하얗게 만들 때쯤 은미가 다시 나를 보며 연기했다.

"현찬씨. 마지막 선물 하나 부탁해도 돼요?"

"네. 은미 씨."

"키스해주세요."

"이것도 연기야?"

"글쎄? 연길까? 아닐까?"

그러게 말이야.

은미는 이제 연기와 진심이 구별 안 되는 수준까지 왔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지. 연기와 진심 둘 다 대비해야 한다.

"...은미야. 일단 내 차로 갈래?"

여기는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좁거든.

넓은 SUV에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 보자.

- 쓰레기야. 쓰레기야.

호구신님! 이거는 만약을 대비하는 거예요!

< 감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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