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180화 (180/295)

< 사연 >

소라와 함께 동방에 왔다.

우리 말고 다 왔는지 많은 사람이 왁자지껄하고 있다.

"형. 저 왔어요."

"왔어? 어! 옆에 분 누구야? 진짜 예쁘다."

공찬혁 형의 한 마디였다. 그리고 1초 정도 지났나?

동아리 모든 남자의 눈이 쏠렸고, 모두 입을 쫙 벌렸다.

여자애들도 입을 쫙 벌린다. 초면이어서 질투를 느낄 시간도 없나 보다.

"헤헤헤. 안녕하세요. 현찬 오빠 아는 동생 유소라 라고 합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소라가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자, 게임 끝났다.

모두가 소라를 둘러싸고 미어캣처럼 바라본다.

"진짜 예쁘시다."

"몇 살이에요?"

"헤~ 저 신입생입니다. 스무 살이에요~"

"남자친구 있어요?"

"야~ 너 처음 본 사람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후훗. 남자친구 없어요~ 현찬 오빠한테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절대 안 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동아리 놀러 온 거랍니다."

소라에게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남자들.

마지막 한 마디에 입이 귀에 걸려서 해벌레 한다.

...

너희들 앞으로 밥값 많이 나가겠다.

그런데 소라야. 너 그러다가는 여자들한테 질투 폭탄 맞는다.

걱정되는 찰나, 소라는 닌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한 여자애한테 가더니 귀걸이를 보며 꺅꺅거린다.

"언니~ 이거 티파니 거 아니에요?"

"응? 어떻게 알았어?"

"저 이거 사고 싶었거든요~ 진짜 예쁘다~ 언니랑 너무 잘 어울려요."

"아 진짜? 나도 이거 보자마자 진짜 마음에 들었거든. 잘 어울리지?"

"네~"

"한번 해볼래?"

"아니에요~ 언니가 해야지 예쁘지 저한테는 안 어울려요."

갑자기 남자 동아리원 한 명이 신난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툭 튀어나왔다.

"왜? 소라 너도 잘 어울릴 악!!!!!"

"아! 죄송해요! 실수로 발 밟았어요. 오늘 처음 뵙는데. 진짜 죄송해요."

"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너 실수로 밟은 거 아니잖아.

남자 동아리원이 개소리하기 전에 차단한 거잖아.

저거 고단수구먼. 흐름을 읽는 건 나와 동급이네.

여튼 모든 동아리 사람들이 소라에게 홀라당 넘어갔다.

훗. 하지만 나에게는 다희와 소민이가 있지.

두 사람은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건데. 소라야 어떻게 할 거냐?

소라는 여러 사람이랑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민이에게 흘러갔다.

후훗. 소민아. 한 방 먹여라.

그런데 너희 둘 뭐하니?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쑥덕쑥덕 이야기하더니, 동시에 나를 노려본다.

...

왜? 내가 뭐 잘못했어?

"하~ 오빠! 이렇게 예쁜 동생 밥 한 번 안 사줬어요?"

"오빠! 이렇게 예쁜 언니 밥도 안 사주고 뭐 했어요?"

응?

내가 너희들 밥 안 사줬나?....

잠시만! 그런데 지금 그게 왜 나와?

"내가 밥 사주지 않았어?"

"우~~ 안 사줬거든요~ 참나~ 진짜 실망임. 나에게 소라 같은 동생 있었다면 맨날 밥 사줬겠다."

"헤헤헤. 저야말로 언니처럼 귀여운 동생 있었으면 맨날 밥 사 줬을 거예요. 현찬 오빠는 자기가 복에 겨운 줄 모른 데도요."

"맞지? 내 말이 그래! 진짜 자기가 얼마나 복에 겨운 사람인지 몰라!"

"그러게 말이에요!"

두 사람은 나를 천하의 역적인 것 마냥 갈군다.

북치고 장구 치고 너희들끼리 다해라.

그래 소민이는 넘어갔다 치고, 아직 나에게는 얼음 여왕 민다희가 있다.

어디 한번 도도하고 과묵한 다희랑도 친해져 봐라.

아니나 다를까 다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라를 보고 있다.

후후후 얼음 여왕. 렛잇고 좀 불러줘!

소라는 흘러 흘러 다희 앞에 섰고, 나는 UFC 경기가 되기를 빌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유소라 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크~ 차갑다. 인사하고 땡이다. 다희는 아무 반응이 없고, 소라는 당황해한다.

유소라. 너라고 별수 없구나. 다희에게는 안 되네.

어쩔 줄 모르는 소라를 보며 속으로 낄낄 웃는데, 갑자기 소라 손이 다희 허벅지로 움직인다.

너 화상 이야기하면 안 돼!!!

젠장. 한 박자 늦었다. 소라의 손은 이미 다희의 청반바지 위에 올라가 있다.

"언니~ 반바지 어디서 샀어요? 학교 앞 보세에서 샀죠?"

"네. 맞아요."

"헤헤헤. 초면에 죄송한데, 여기 끝단 한 번만 접어도 돼요? 그러면 더 예쁠 거 같아서요."

소라야... 차가운 얼음 맛에 미쳤구나.

처음 본 사람 반바지를 접는다고? 그럼 다희 화상 자국이 더 보이고 맨살이 더 노출되는데?

말려야 하는데 다희가 환하게 웃는다.

응? 이건 또 뭔 상황이야?

"후훗. 너도 보세 가게에서 디피된 거 봤구나~"

"네. 언니~ 예쁘신데 왜 가려요~ 조금 더 과감해 보세요~"

"그럴까? 그럼 너무 짧지 않아?"

"요즘 다들 이렇게 입잖아요~ 괜찮아요."

"부끄러운데."

아니야! 부끄러워하지 마!

응?

아씨. 이게 아닌데. 이상하게 말리네.

"그래! 다희야! 그 옷은 접어야지 예뻐."

"맞아~ 안 감이 흰색 이어서 접으면 정말 예뻐~"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나서서 동조한다.

그래. 다희는 여자들한테 더 인기 많았지.

"언니~ 제가 접어 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저 이런 거 잘해요~"

소라가 찰싹 달라붙어서 다희 청바지를 접어 올린다.

한 단 정도 접었나? 청반바지는 더욱 짧아졌고 이제 허벅지 대부분이 보인다.

저기. 그런데 다희야. 조금 흥분한 거 같다. 섹스 판타지가 노출증이라서 그런가 보다.

소라는 다희 반바지를 다 접은 후,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언니 진짜 예뻐요!"

"훨씬 괜찮다.~"

"역시 다희야~"

동아리 사람 모두가 다희 허벅지를 보며 예쁘다고 난리다.

너희들 저 허벅지 못 만져 봤제? 나는 만져봤다!

...

시불 진짜 정신 차리자.

여튼 다희마저 무너졌다. 어느새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자! 다들 이제 가자. 우리 멀리 가야 해."

대화가 길어지자 공찬혁 형이 자리를 정리하면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우리는 동방을 나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가는데, 어느새 내 옆에 소라가 붙어 있다.

"너 방금 장판파 조자룡 같았어."

"네? 무슨 말씀이세요?"

"가식 그만 부리고. 여기저기 휘젓고 다는 게 장난 아니었다고."

"지금 사람들 없지? 오빠한테 높임말 하니깐 스트레스받네. 반말할게. 여기 사람들이 착해서 잘 받아 주는 거야. 특히 다희 언니란 사람 귀엽더라. 이제 막 짧은 옷 입기 시작해서 신나 하는 게 눈에 보여."

"...그런 것도 눈에 보여? 너 마녀 아냐?"

"마녀는 무슨. 딱 보면 몰라? 짧은 바지 입어서 민망해하면서도 사람들 시선은 즐기잖아."

"진짜? 나는 그냥 무표정으로 보이던데?"

"이래서 남자들은 디테일이 없다는 거야. 하~ 여기 좋다~ 다들 착해. 과랑 달라."

"우리 동아리 분위기가 좋긴 해. 공부로 경쟁 안 해도 되는 것도 있고."

"그 말도 맞네. 아! 나 방금 동방 구경하다가 봤는데, 오빠 소민 언니랑 다희 언니랑 수영복 사진 찍었더라."

"눈썰미도 좋다. 왜? 질투 나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궁금한 게 하나 생겼어."

"뭔데?"

소라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둘 중 누구랑 잤어?"

"미친년아. 웬일로 얌전하다 싶었다."

"다시 물어볼까? 둘 중 누가 맛있 아! 씨! 가슴 꼬집지 마. 예민하단 말야!"

"신나서 까불기는. 얌전히 있어라."

"키키키. 알았어. 안 할게. 대신 다음에 동방 안에서 가슴 꼬집어줘."

"왜?"

"나 이런 곳에서 하는 게 로망이거든."

...

참 로망도 많다.

양주에 도착했다.

다들 옷은 챙겨오지 않아서 계곡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발 담그는 정도?

"언니들 이렇게 서면 돼요?"

"응! 소라야 너 너무 예쁘다."

"감사합니다~"

소라는 이제 사람들 무리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아니, 사람들이 소라에게 녹아든 건가?

다들 소라를 사진 모델로 삼고 싶어서 난리다.

나도 카메라 있는데...

아쉽게도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고, 나는 겉절이가 되어 구경만 하고 있다.

"너 뭐해?"

"찬혁이 형. 그냥 사람들 구경하고 있어요."

"천하의 인싸 민현찬이 웬일로 구경만 하고 있어?"

"그러게요."

오늘은 소라 기분 내는 날이니깐요.

새로운 사람들 만나서 저렇게 싱글벙글 쇼를 찍고 있는데, 굳이 내가 가운데 낄 필요는 없지.

그리고 나도 오래간만에 자연을 즐기자.

혼자서 한참 동안 여름꽃을 찍고 있는데, 누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소민이가 서 있다.

"무슨 일 있어?"

"오빠. 소라 다쳤어요!"

"응? 다쳤다니?"

"계곡에서 미끄러졌어요!"

하이고. 까불 때 알아봤다.

소민이를 따라서 서둘러 달려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다들 어떻게 어떻게 하면서 외치고 있고, 여자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야! 유소라 괜찮... 네."

뭐야? 조금 까인 게 다잖아.

"아니! 형! 이게 어떻게 괜찮아요!"

"예쁜 다리에 상처 난 거 안 보여요?"

"소라야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너희들 너무 한 거 아니니? 엄지손톱만큼 까였구먼.

젠장. 제일 얄미운 건 유소라다. 나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현찬 오빠 말 맞아요. 별로 다친 것도 아니에요."

"현찬 오빠가 무심한 거니깐 소라 네가 이해하렴."

"다희야. 너무한 거 아니야?"

"아.. 오빠 죄송해요. 소라 다친 거 보고 걱정돼서 그랬어요."

크흑! 야! 호구신 팬클럽 이거 사기 아냐? 나보다 소라를 더 보잖아.

쩝. 본의 아니게 악역이 되었네.

"다들 현찬 오빠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오빠 죄송한데 같이 약국 좀 가주실 수 있어요?"

"안 가. 삐졌어."

"우~~~ 오빠가 좀 같이 가줘요."

"아니야. 소라야 우리가 대신 가줄게."

하이고. 여자들은 나보고 같이 가라 하고, 남자들은 자기들이 같이 간다고 하고.

개판이구먼.

"현찬 오빠 죄송한데 부탁드릴게요~"

그런 분위기에서 소라가 나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자 주위는 진정되었고, 내가 같이 약국 가는 거로 정리되었다.

이것들. 전부 다 두고 보자.

나와 소라는 차에 올라탔다. 근처 약국에 도착해서 밴드를 하나 사고 나왔다.

나는 소라에게 밴드를 툭 건네며 말했다.

"붙이기는 네가 붙여라."

"킥킥. 설마 삐진 거야?"

"안 삐졌거든."

"삐졌네. 이러면 곤란한데~"

"왜?"

"나 오빠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일부러 넘어졌단 말야. 아씨. 발목 삐끗 한 정도로 하려고 했는데 까이고 지랄이야."

"요거 녹음해서 사람들 들려줘야겠다. 그런데 왜 나와 단둘이 있고 싶대?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거야?"

"죽는 건 밤에 죽여주시고요. 우리 천문대 가자."

응? 천문대? 젖문대를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라를 봤는데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 끝에는 천문대를 가는 표지판이 있다.

"여기 천문대가 있구나. 나는 잘 못 들은 줄 알았어."

"젖문대로 가자고 들었지? 가슴 매니아인 오빠가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저기 가보고 싶어."

"사람들 늦는다고 뭐라 하지 않을까?"

"병원 갔다가 온다고 하면 돼."

뭐. 그래도 되겠다.

아니 애당초 사람들 시선은 딱히 신경 안쓰인다.

"오빠. 나 저런데 한 번도 안 가봐서 그래. 한 번만 데리고 가줘. 소라 천문대 보고 싶어요!"

"귀여운 척하지 마라. 양주 군대에 입대시켜버린다. 알았다. 한 번 가보자."

"헤헤헤. 고마워요~"

소라는 나에게 꼭 안겨서 아양을 부린다.

진짜. 꼬리 아홉 개 있는지 발가벗겨서 확인 한 번 해봐야겠다.

천문대라고 해서 허블 망원경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산 위에 건물 하나 지어져 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없고 한적하네.

그런데 하늘이 심상찮다. 꾸물꾸물한 게 폭우를 한바탕 쏟아 낼 기세다.

"비 오겠다."

"응? 정말이네. 그런데 여기 너무 예쁘다."

"쓰읍. 너랑 안 어울리는데."

"분위기 좀 깨지 말아줄래. 우리 어서 구경하자~"

우리는 천문대를 한 바퀴 돌았다. 안에는 다양한 과학적 볼거리가 있지만 어림없지!

그냥 밖에서 풍경만 봤다.

한 바퀴 다 돌 때쯤 되자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찬혁 형이다.

"네. 형. 지금 갑니다."

- 어? 어떻게 알았어? 너희 둘 하도 안 와서 걱정하고 있어. 특히 소민이 걱정이 장난 아니야. 아! 아! 야 잠시만.

- 오빠! 우리 소라 데리고 어디 갔어요?

"우리 소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흉 질까 봐 병원 데리고 갔다. 소라 바꿔줄게."

전화기를 소라에게 넘겼다.

"네~ 언니. 괜찮아요. 헤헤헤. 이제 가려고요. 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뭐래?"

"오빠 위험하다고 빨리 오래."

"하이고 이것들. 천하의 유소라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헷가닥 넘어간 꼴 하고는."

"킥킥. 그 천하의 유소라를 손바닥에 올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신데 그러세요. 이제 가자."

응?

네가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다고?

흐음. 요것 좀 기분 좋은 말이네.

짜슥. 그래도 오빠로서 인정은 하고 있나 보네.

나는 무심하게 팔을 툭 내밀었다.

"뭐야?"

"팔짱 끼는 거 좋아하잖아."

"킥킥. 오빠가 가슴 느끼고 싶은 건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해도 웃으면서 팔짱을 낀다.

원피스가 하늘하늘해서 그런지 가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 전하!

닥쳐! 오늘 그럴 기분 아냐. 이제 차로 돌아가자.

두둑. 두둑.

어? 천문대를 가로지르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빠. 비 온다."

"그러네. 근데 점점 많이 온다."

투둑. 투둑. 툭툭툭 쏴아아아아

망할! 소나기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비는 어느새 폭우가 되었다.

"꺄!"

"어서 차에 가자!"

우리는 서둘러 차로 뛰었다. 최대한 빠르게 도착했지만, 젠장.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소라는 머리에 물이 젖은 채 으스스 떨고 나는 히터를 틀어줬다.

"괜찮아?"

"추워...."

"조금만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출발하자."

"오빠 잠시만. 우리 여기서 조금만 있다 가자. 비 너무 많이 와서 무서워."

그렇네.

폭우가 쏟아져서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다.

한동안 내리는 비를 보며 나와 소라는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처음 정적을 깬 건 소라였다.

"오빠 오늘 나한테 화났지?"

"아니. 전혀."

"그럼 섭섭한 거 있어?"

"없는데."

"일 때문이구나."

"..."

"...나 당분간 일 계속해야 해. 오빠가 신경 써 줬는데 미안."

"왜 일 해야 해?"

"오빠가 오해할 거 같아서 말해줄게. 아빠가 사채 썼어. 그래서 빚 갚아야 해. 시발! 드라마 감성팔이 같은 일이 나한테 생길 줄은 몰랐는데. 인생 졷같아."

"...너희 아버지를 내가 욕할 수는 없고. 얼만데?"

"엄청 큰돈이야."

"그래서 얼만데?"

"사천만 원."

"뭐 사천만 원!?"

"응. 진짜 큰돈이지?"

아니 예상보다 너무 적은 돈이야.

···

아니다. 만약 전생의 22살 나에게 사천만 원 빚이 생겼다면 어쨌을까? 나도 놀래서 기절했을 거다.

지금이야 돈이 많으니 얼마 안 되는 거지.

사천만 원이면 나에게는 푼돈이다. 까짓거 내가 갚아줄까?

"오빠. 대신 갚아준다는 말은 하지 마. 빌려준다는 말도 하지 말고."

"내가 그 말 할지 어떻게 알았어?"

"오빠 성격에 뻔하지 뭐."

"그럼 나한테 도움받아. 안 갚아도 돼."

"싫어. 나는 착한 사람 등쳐 먹긴 싫어. 오빠가 박호빈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바로 4천만 원 뽑아 먹었을 건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착한 사람이 상처받는 거 진짜 싫어. 나 봐봐. 엄마 없이 아빠랑 잘 지내면서 동생들 밥도 해주고 그랬는데, 이렇게 상처받잖아. 시발. 진짜 인생 졷같아."

빗물인지 눈물인지 소라 뺨을 타고 내려간다.

"괜히 자존심 세우지 말고 도움받아."

"자존심 문제가 아니야. 나도 무서워서 그래."

"뭐가?"

"오빠가 나한테 돈 빌려주면, 예전처럼 오빠를 대할 수 없을 거 같아. 뭔가 의무감에 잘해줘야 할 거 같아. 오빠도 마찬가질 거야. 나한테 돈 빌려주면 예전처럼 대할 수 있겠어? 아닐걸. 내가 돈 빌려줬는데 이것도 안 해줘 그럴걸?"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사람은 모르는 거야. 혹시 알아 돈 빌려줬다고 끈 같은 거로 나를 칭칭 묶을지. 나도 지금 우리 사이가 좋아. 괜히 돈 엮여서 이상해지는 거 싫어. 그리고 어떻게든 갚을 수 있어. 아빠랑 내가 병신도 아니고 사지 멀쩡 하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전생에 내가 소라를 만났을 때는 2년 후 인데, 잘 해결됐는지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라 말대로 돈 빌려주면 내가 변할 수도 있다. 소라도 변할 수도 있는 거고.

"어렵네. 일단 알았어. 네 말 존중할게. 아버지가 어디에서 빌리셨는데? 콩팥 때 간다는 그곳? 아니면 무 도사가 있는 그곳?"

"그냥 이 동네에 사채 하는 사람한테 빌리셨대. 월변으로 천만 원 빌렸다가 일 년 만에 이 사달 난 거야. 나는 월변이래서 똥인 줄 알았네."

"잠시만? 천만 원 빌렸는데 사천만 원이 됐다고?"

"응. 사채가 원래 그런 거잖아."

원래 그렇기는 하지만. 일 년 만에 그러지는 않아.

오호라. 요거 조금 해결법이 보이네.

돈 안 들이고도 소라한테 생색낼 수 있겠다.

< 사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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