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강 >
길었던 여행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집 앞에 도착하자 세연이는 잠에서 깨어나서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오빠 다 왔어요?"
"네. 도착했습니다. 세연 님."
"킥킥. 뭐래. 운전한다고 고생했어요. 아! 다음 주 화요일 알고 있죠?"
"다음 주 화요일? 또 여행 가자고?"
"와... 심하다."
너 왜 그러니?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상하다. 뭔가 잊은 게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
"아! 진희 미국 가는 날이지!"
"그걸 잊어버리고 있다니. 미국 간다고 바로 버리는 거 실화예요?"
"신화다. 이 기집애야. 너 그럼 다음 주 목요일은 무슨 날인 줄 알아?"
"음. 글쎄요?"
"와... 서연 누나 대전 가는 날인데, 모르는 거 실화냐?"
"정말요? 나한테는 이야기 안 해줬는데?"
"...2학년한테만 이야기했나보다."
"칫. 그럼 모르는 게 당연하죠, 다다음주 월요일은 덤성이 군대 가요. 우리 거의 일주일 동안 세 명을 배웅해야 하네요."
"네가 배웅도 다 생각하고. 우리 세연이가 달라졌어요."
"우리 오빠는 그대로네요. 계속 놀리고. 여튼 오빠 운전한다고 수고했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봐요. 나 내일 서울 갔다가 진희 가기 전에 내려올게요."
"그러자. 너도 고생했어. 잘 가~"
"빠잇."
빠잇 이라니. 순간 나우누리에 모뎀 켜져 있는지 착각했네.
이세연은 해맑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다들 자기의 길로 가는구나. 이 주 동안 바쁘겠다.
*
덤성이가 군대 간 다음 날 저녁. 선미가 내 자취방에서 뒹굴고 있다.
나는 음료수를 하나 툭 던지며 말했다.
"어떻게 우리는 한 명도 배웅하지 못하냐?"
"그러게. 다들 가족이랑 간다잖아. 그래도 전날 잠시라도 봐서 다행이야."
인천공항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며, 진희를 향해 손을 흔들려고 했던 우리 계획은, 가족들 모두가 배웅 온다는 말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나마 전날 간단하게 술이라도 한잔해서 다행이다.
그건 서영누나와 덤성이도 마찬가지다. 핵가족 시대에 다들 대가족으로 살고 있구나. 특히 덤성이는 거의 5촌 가족까지 온다고 해서 못 갔다.
딸깍.
선미가 음료수를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막상 다 떠나니깐 심심하다."
"그러게. 그냥 없는 거랑 떠나서 없는 거는 다르네."
"세연이는 언제 온대?"
"지금 오고 있대."
딩동.
그때 울리는 현관문 벨 소리, 양반은 아닌가 보다.
- 야! 문 열어. 내가 왔다.
어라? 이 목소리는? 나와 선미 눈이 마주쳤다. 임석훈이다.
현관문을 열었다. 임석훈이 싱글벙글거리며 웃고 있다.
"뭐야? 양반 아닌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쌍놈이 왔잖아."
"오케이. 인정. 내가 또 한 쌍놈 하지. 그래서 우리가 친구잖아. 유유상종. 여기가 쌍놈 집 맞습니까?."
"쌍놈 집 맞습니다. 역시 우리는 천하의 쌍놈 콤비지. 임석훈 당구 준비됐나?"
"민현찬 당구 준비됐다. 악!"
"악!"
나와 임석훈은 갑자기 날라온 쿠션에 고개를 돌렸다. 이선미가 우리 둘을 덤 앤 더머 보듯이 보고 있다. 너는 더머스트야.
"뭐하냐 너희? 바보 경진대회라도 하고 있어? 임석훈 넌 웬일이야?"
"오래간만에 보는 오빠한테 바보가 뭐냐? 선미야 나에게도 순정이 있단다~"
"지랄 로테이션 하시고요. 너도 심심했구나. 이제 만날 여자 없나 봐? 여기까지 오는 거 보니깐."
"응? 무슨 소리야? 너희가 나 불렀잖아."
너는 진짜 뭔 소리니? 나와 선미는 알아듣지 못할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석훈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진가 보다. 뭔가가 꼬였다는 걸 알았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본다.
"너 나 안 불렀어?"
"어. 나 부른 적 없는데? 누구한테 연락 왔어?"
"저예요."
깜짝이야. 이 판의 설계자가 드디어 나타났다. 임석훈 뒤로 노란 머리의 고양이가 보인다. 한 손에는 이상한 종이상자도 들고 있다.
"세연아!"
선미가 잃어버린 동생을 본 거처럼 마중 나왔다. 너. 임석훈한테도 반만 반가워 해봐라.
"세연아 네가 임석훈 불렀어?"
"네 선미 언니."
"왜? 어디 아픈 거나? 잘못 먹은 거 아니지?"
"야. 이선미. 내가 보고 싶어서 불렀겠지. 세연아 선배 보고 싶었어?"
"뭐래?"
캬! 사이다 감사합니다.
"부끄러워하기는. 애써 마음 숨길 필요 없어."
하지만, 임석훈이 더 고수구나. 능글맞게 세연이 말을 넘긴다.
내가 이 상황을 정리하자. 그대로 나 뒀다가는 이상한 소리 하다가 달나라까지 가겠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심심해서 술 마시고 싶었구나."
"비슷해요. 나도 이 멤버에 넣어주세요."
응? 갑자기?
나, 선미, 석훈 모두가 당황했다. 아니, 사실 우리는 멤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어쩌다가 보니 친해진 사람들이지.
이런 재밌는 상황을 놓칠 임석훈이 아니긴 한데, 너 뭐 하니?
임석훈은 이세연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패밀리에 들어오려면 자격이 있어야 해. 네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박호빈."
"합격. 민현찬은 어떤 사람이지?"
"색마? 변태?"
"합격. 점수 두 배로 줄게. 마지막으로 이선미가 자주 쓰는 단어는?"
"지랄 아니에요?"
"됐네. 현찬아, 선미야. 세연이 자격 있다. 받아들이자. 악!"
나는 임석훈 머리를 잡고 당겼다. 이상한 문제 내기는. 우리가 뭐라고 자격을 따져?
"세연아. 그냥 들어오고 싶으면 같이 놀면 돼. 굳이 패밀리 이런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마."
"나 양주 가져 왔어요."
"넌 이제 우리 패밀리다. 선미야. 됐다. 이제 막내 생겼다. 악!"
"너도 임석훈이랑 똑같아. 세연아 너 패밀리 되면 언니가 욕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그럼 지랄 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술이나 먹자."
"킥킥. 네 언니!"
이세연은 선미에게 팔짱을 끼고 빌라로 들어왔다. 우리 집인데, 왜 네가 결정 하는 거니?
임석훈도 나에게 팔짱을 낀다. 이 새끼는 미쳤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음흉한 얼굴로 나를 봤다.
"야. 나 세연이에게 못 물어본 거 하나 있어."
"뭔데? 안 들리게 닥치면서 이야기해봐."
"민현찬 여왕님 될 생각 있어? 캬! 이걸 물어봐야 했는데."
"그거 물어봤으면, 내가 기사가 되어서 네 목을 꿰뚫었을 거다. 술이나 먹자."
"그래도 이제 이 대 이 되니깐 밸런스 괜찮네."
임석훈 말이 맞네. 여자 둘, 남자 둘이 된 건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이 멤버도 나쁘지 않네.
*
우리는 세연이가 가져온 양주를 모두 비웠다. 그래도 술이 모자란 지, 맥주를 추가로 먹고 있다.
이세연이 왔는데, 후배가 아니라 정예 멤버가 모인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케미가 잘 맞다. 네 사람이 술 마시며 이야기하는 동안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다.
"킥킥. 아 웃겨. 아 맞다. 오빠는 다음 학기 뭐 할 거예요?"
오빠라는 말에 임석훈이 깔깔 웃는다.
"으하하. 이제 오빠라고 불러?"
"네. 그게 편하잖아요."
"그래. 사실 선배라고 할 때마다 오글거렸어. 나도 오빠라고 불러줘."
"석훈 선배는 싫어요. 맨날 과 행사 안 하고 도망갔잖아요."
"네가 할 말은 아닌데? 초반에 완전 까칠했던 애가 말이야. 그런데 민현찬. 너 진짜 내년에는 뭐 할 거야?"
"나. 일단은 집행부는 안 할 거야."
"왜? 잘했잖아? 지금 상황상 우리 쪽에서 내년에도 집행부를 해야 할 건데."
"누군가 하겠지. 할 사람은 많다. 이제 과대 내려놓고 남이 짜놓은 판에서 놀기만 할 거야. 그리고 동아리 가입하려고. 사진 동아리. 멋있지 않냐?"
"영정 사진 동아리 아니지?"
"맞다. 이 새끼야. 네 영정 사진 찍어줄게."
"내가 죽으면 슬퍼할 여자들이 20명 넘으니 일일이 보내줘라. 그럼 다음 과대는 누가 하려나"
다음 과대라.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우리 과는 아마추어처럼 과대를 정했다. 집행부가 다음 과대를 지목하는 방식이다. 물론, 과 행사 하는 동안 은근히 물밑작업을 하지만, 미래에 이랬으면 바로 페북 감이다.
"진호 형이 하고 싶어 하더라고. 나도 괜찮은 거 같아."
이세연이 고개를 갸웃 거린다.
"진호 형이 누구예요?"
"04 복학생 형 중에 괜찮은 형 있어. 왜 말은 능글맞게 해도 착하게 생긴 사람 있잖아."
"전혀 모르겠어요. 뭐 그런 사람 있겠죠."
"내년 과대인데 신경 안 쓰여?"
"나도 올해처럼 열심히는 안 할거예요. 한 번 했으면 됐어요."
뭐. 내가 열심히 안 할 건데, 이세연에게 열심히 해라고 할 수는 없지.
우리 이야기를 얌전히 듣던 선미가 입을 열었다.
"나 박호빈한테 연락 왔었어."
"정말?"
"과대 한다고, 부 과대 해달라고 하더라."
"어? 박호빈이? 군대 안 간대?"
"ROTC 간데."
이럴 수가! 박호빈이 ROTC를 간다고? 운명이 바뀌었다.
뭐, 지 알아서 잘 가겠지. 사소하네.
임석훈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이선미를 놀린다.
"그래서? 할 생각이야? 나는 네가 했으면 좋겠어. 호빈, 선미 조합도 괜찮지. 호선 어때? 악!"
"너는 매를 벌어요. 꺼지라고 했어."
"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진호 형이 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박호빈이 하고 싶다면 투표 붙여야지. 이거는 학과사무실에 말해서 두 사람이 합의 보게 하자."
원래는 우리가 투표까지 마무리 지어야 했지만, 타이밍도 늦었고 이미 개판 된 거, 이제 우리 손을 떠났다. 알아서 하게 냅두자.
이제 과대표로서, 집행부로서 모든 과 행사가 끝이다. 개인 민현찬으로 돌아와서 즐기자.
"자! 그럼 우리 패밀리에 들어온 이세연을 위해 건배합시다."
나는 맥주 캔을 들었다. 그러자 선미가 웃으면서 캔을 든다.
"그걸 네가 왜 결정해? 이제 과대가 아니란 걸 잊지마렴."
"내가 과대는 아니지만, 여기 우리 집이잖아. 집주인의 권리입니다."
"오빠! 술은 내가 사 왔는데요? 술 사 온 사람이 왕 아니에요?"
"자자. 그렇게 싸울 바에는 군인인 내가 할게. 세연아 잘 지내자!"
아이고. 하여튼 말이 끝나지를 않아요. 전부 다 십시일반으로 거든다.
"야! 다 됐어! 내가 대장이야! 불만 있으면 오백원."
"오! 박력 터져."
"언니! 박력은 무슨. 허세지."
"저건 허세도 아니야. 지 일학년 때를 기억하지 못해서 저러는 거야."
"석훈 선배! 현찬 오빠 일학년 때는 어땠어요?"
"찌질이 그 자체였어."
부글부글. 라면처럼 내 마음이 끓어 오른다. 이것들아! 어서 짠 하자! 맥주를 얼마나 들고 있어야 하니?
"다들 시끄러워 짠!"
"짠! 내년도 잘 지내보자!"
"짠! 언니 오빠들 잘 부탁해요."
"나는 충성!"
네 명의 술잔이 기분 좋게 부딪혔다.
*
2월이 되었다.
우리 집은 예전 아지트와 똑같아졌다. 네 사람은 겨울 방학 내내 모였고, 게임, 만화책, 영화등을 봤다. 말을 거창하게 해서 그렇지, 결국 빈둥빈둥 되었다.
아! 이런 빈둥거림 너무 좋다.
2월 첫째 주 주말. 오늘도 어김없이 선미와 세연이가 거실에서 뒹굴고 있다.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세연은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다.
"너 웬일로 공부해? 혹시 미친 거 아니지?"
"뭐래. 그냥 공부해보려고요."
"아! 저번에 말했던 거?"
"네."
선미가 만화책을 보다가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뭘 말했어? 나 빼고 너희끼리 놀아도 되는데, 이번 건 궁금하니 말해줘."
"세연이 의대 노리고 반수 할거래."
"그래? 다시 만화책이나 봐야겠다."
"아! 언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킥킥. 패밀리는 원래 그러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너 공부 잘했다고 했지?"
"네. 전교 일 등 놓친 적 없어요."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 전교 일 등에 돈 많고, 얼굴 예쁘니 시샘 받을 만하네."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와... 심하다. 후배한테 그렇게 말하고. 진짜 실망이야."
너희들 왜 한 편이 되었니? 기 빠진다.
입을 툭 내밀고 있는데, 이선미가 나를 봤다.
"너 그런데 동아리 한다고 안 했어?"
"응. 내일 동아리 가보려고. 너희 진짜 안 할 거야?"
"응. 난 안 해. 세연이 꼬셔 봐."
"오빠 나도 안 할래요."
"나중에 후회 하지 마라."
"후회는 무슨. 다행이라고 안도할걸."
"사진가 좋은 거 사서 배우면, 우리 사진이나 많이 찍어주세요."
쳇. 같이 동아리 하면 재밌잖아. 보름 동안 두 사람을 꾀었는데, 거절당했다. 별수 있나? 일단은 나 혼자 가보자.
아! 같이 가기로 약속한 사람 한 명 있었지? 갑자기 떠올랐다.
*
동아리 방이 모여 있는 학생회관.
나는 그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있자 청바지에 패딩 잠바를 입은 엘레나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걸어온다.
"현찬 안녕!"
"안녕 엘레나. 잘 지냈어?"
"응. 너무 추워."
"러시아가 더 춥지 않아?"
"러시아도 추운데, 한국도 추워. 으~~"
엘라나가 군밤 장수가 쓰는 모자를 고쳐 쓰면서 환하게 웃는다.
한겨울에 이렇게 러시아 스타일로 모자 쓰고 있으니깐 어울리네.
"현찬. 동아리는 알아봤어?"
"응. 어제 아는 사람 통해서 겨우 연락했어. 오늘 면접 보자고 하더라고."
"정말? 면접까지 봐?"
"말이 면접이지, 그냥 얼굴 보는 거야. 들어가자."
"응."
나와 엘레나는 학생회관으로 들어갔다.
전생의 내 기억으로는 사진 동아리 동방 위치가 5층 한쪽 구석이었는데.
막상 올라가자, 기분이 묘하다. 옛날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 사람들도 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가입할 때는 2년 후니깐, 아마 절반만 아는 사람일 거다.
"현찬. 어디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엘레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여기야."
나는 그런 엘레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낡아 빠진 나무문은 여전하구나. 조심스럽게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똑똑.
- 네! 들어오세요.
활기찬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문을 열자 동아리방, 아니, 동방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캬! 운명인가? 둘 다 아는 사람이다.
키 165 정도의 단발머리에 마르고 귀여운 여자가 나에게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13기 김소민이에요! 와! 두 사람 다 선남선녀다! 모델 해도 되겠어요!"
김소민. 학번은 07. 전생에 내가 동아리에 가입했을 때는, 4학년이었다. 그리 친하지는 않았었고, 말 몇 마디 나눠본 사이다.
"민다희 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겨울왕국인가? 발랄한 엘사랑은 다르게 차가움 그 자체인 여자가 김소민 옆에 서 있다.
엘레나는 그 여자를 보더니, 나에게 속삭였다.
"현찬. 진짜 예뻐. 키도 커."
응. 민다희는 핀란드 혼혈이거든. 키도 177이고. 김소민과 동기다. 전생에 둘이서 동아리를 주물렀었지.
그나저나 다희야, 우리가 악연이 좀 있지?
이 시국에 상스러운 일본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전생에 동아리에서 내 별명이 민다희 시다바리였었다.
< 종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