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여행 >
- 2008년 이제 10초 남았습니다. 10, 9. 8
종각역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다들 큰소리로 카운트 다운을 따라 한다.
- 3, 2, 1 댕~~~ 댕~~~
- 와~~~~ 해피 뉴이어~~~
저마다의 얼굴에 새해에 대한 기대감과 지나간 2007년에 대한 아쉬움이 깃들어있다. 나는 조용히 티비를 껐다.
종소리 들었으면 됐지 뭐.
"아~ 심심하다."
- 다시 태어나도 바뀐 건 없군.
"그러게 말이에요."
순간 전생인지 착각했다. 전생에도 나 혼자 집에서 티비로 종소리 들었는데, 이번 생에도 혼자 듣다니.
크리스마스만 남자친구, 여자친구 없었어요. 예전에 그렇게 말했던 인싸들처럼 나도 마찬가지인 운명인가? 임석훈이 절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거 따라갈걸.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어라? 그때 엘지 싸이온 벨소리가 미친 듯이 울렸다. 누가 연락 온 거지?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맙소사. 내 삶은 전생이랑 달라졌구나! 새해를 축하하는 문자 메시지가 수십 통이 몰려온다.
햄! 제가 일등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덤성이
오빠. 내년에는 나 좀 귀여워 해주세요. 해피 뉴이어- 현아
현찬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 조만간 봐.- 은미
야! 내년에 나 연기 좀 도와주라. 너 보면서 연습하게. 매리 새해- 혜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나 내년에 과대표 해보게 도와줘.- 호빈
굳바이 2007! 올해도 농활 가자! 국토대장정은 안 간다.- 인봉이 형
선배! 새해 복 받아요. 우리 밥은 언제 사줄 거예요?- 메뚜기.
너 민아 만났다면서! 명절날 안 내려와? 새해 복 많이 받아.-진아
현찬 새해 복 받아. 내년 동아리 화팅.- 엘레나
...
...
..
유미 누나, 박인혜 대표님, 연영과 학회장, 총 학회장, 찬영이, 농활멤버, 국토대장정 동생들 등등... 끝없이 문자가 온다.
크흑. 감동이다. 중간에 박호빈이라고 뭔가 이상한 게 끼어있는 것 같지만, 무시하자. 그런데 너 군대 안 가니?
타닥타닥타닥.
나는 오는 문자에 서둘러 답장했다. 길다. 똑같은 내용을 보내도 되지만, 이 기분을 즐기고 싶어서 일일이 내용을 적어서 보냈다. 캬! 살맛 나네.
디리리링.
문자를 계속 보내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진희야."
- 선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문자 보내지."
- 헤헤헤. 정성 없어 보이잖아요.
"준비는 잘 되어가?"
- 네. 선배 빨리 보내고 싶어 하는 거 아니죠?
"아니거든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거든요. 새해 복 많이 받아."
- 알겠습니다. 올해 정말 고마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짜슥. 그래도 선배 챙긴다고 전화도 해주고. 네가 최고다. 이제부터 캡틴 아메리카라고 불러줄게.
디리리링.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반니 형이다.
- 현찬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네. 형.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뚝. 휴 정신이 없네. 남자는 통화가 짧은 건 기분 탓이겠지?
전생이랑 똑같다는 말은 취소다. 12시 종소리가 들리자 수많은 전화와 문자가 나에게 쏟아졌고, 답장하자 한시를 훌쩍 넘겼다.
그런데? 중요한 두 사람은 정작 전화도 문자도 없다. 바로 선미와 세연이다.
무슨 인기투표 1, 2위라도 한 거야?
그래. 우리가 합체해서 그레이트 다간 된 게 몇 번인데. 두 사람은 내가 직접 전화를 하자.
나는 선미한테 먼저 전화했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거기 혹시 이선미 님 휴대폰예요?"
- 자고 있어. 왜?
"야. 너는 새해인데 자고 있어? 진짜 재미없게 보낸다. 그럴 거면 우리 집에 오지?"
- 엄마가 피곤하다고 일찍 자서 그래.
미안. 한 번에 패드리퍼로 만들어 버리네.
"원래 새해는 재미없게 보내야 해. 새해 복 많이 받아. 올 한 해 수고했어. 넌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 ... 미쳤어? 이 밤중에 무슨 개소리야?
"발정 난 개가 되려고 한다. 왜?"
- 아하하하. 그쪽으로 노선 정한 거야? 이제 나랑 따로 다니자. 무섭거든.
"아니거든요. 여튼 새해 복 많이 받아."
- 아앙~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혹시 방금 신음 낸 거야?"
- 지랄 이단 옆차기를 하세요~ 끊는다.
크흑. 선미 너는 역시 남자로 태어나야 했어. 찰진 대화가 내 귓불을 찰싹찰싹 때린다.
이제 노란 머리에게 전화하자.
- 디리리링. 딸깍.
"여보세요. 이세연 씨. 뭐 하시나요?"
- 아. 민현찬 씨. 세연이 지금 부모님이랑 있어요.
어라? 이세인 주류 담당자님이네?
"세인 누나. 저번에 와인 감사했어요."
- 소주에 타 먹었다면서? 원래 와인 그렇게 먹나 봐요?
"하하하. 그날은 술을 많이 먹어서요. 누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현찬 씨 한테 누나라고 불리니깐 신기하네요.
"에이. 누나시죠. 원래 술 주시는 분이 누나예요. 이제 현찬이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현찬 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연이 바꿔 드릴게요.
술 달라고 하니깐 바로 손절한다. 거 너무한 거 아니요? 하지만, 네 동생이 있는 한 너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양주를 줄 수밖에 없을 거다.
갑자기 왜 납치범이 된 거 같지?
그때 전화기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 언니! 빨리 내 휴대폰 내놔! 안 줄 거면 짜증 나니깐 말 걸지 말고.
- 내가 말했지? 전화 안 하면 먼저 연락 올 거라고?
- 어? 현찬 오빠 전화 왔어? 어서 휴대폰 줘!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이게 무슨 상황이지? 관심법이 필요하다.
- 자. 여기 있어. 좋아하지 말고.
캬. 알겠다. 이세인 고수네. 이세연 전화를 가져가서 나랑 연락 못 하게 하고, 궁금한 내가 전화하게 만드는 방법을 썼구나.
전화 소리도 일부러 들려줘서 자기 때문에 세연이가 연락 못 했다는 걸 알려주고.
연예계의 알렉산더 대왕이 여기 있구만.
- 오빠! 나 언니 때문에 전화 못 했어요.
"진짜? 나는 연락 안 와서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어."
- 오빠 맞아요? 방금 걱정했다고 말 한 거예요?
"하지만, 어림없지. 말실수 한 거다 요녀석아. 뭐 하고 있었어?"
- 저는 부모님이랑 방금 송년회 했어요.
어라? 그런데 좀 이상하다. 통화할 뿐인데 너무 반갑다. 이세인의 판 짜기에 당한 건가?
"그래? 나도 누나가 있는데, 누나나 언니들은 원래 성격이 이상한가 봐. 동생들 괴롭히는 맛에 사는 거 같아."
- 킥킥 맞아요. 우리 언니는 말이죠.
한동안 세연이랑 계속 전화를 했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하면 할수록 빠져든다. 이게 통신매체의 매력인가. 다음에는 모스부호로 한번 이야기해 보자.
- 아하~~ 선배. 나 이제 자야겠어요. 우리 벌써 한 시간이나 통화했어요.
"벌써? 우리 한 시간이나 했다고?"
- 네 선배. 지금 세시예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돈데크만을 탄 것처럼 빨리 흘러갔다.
"그래. 이제 자야겠다. 잘 자고 좋은 꿈 꿔."
- 킥킥. 꺄하하하하.
"왜 웃어?"
- 오빠 이상한데요? 왜 이리 다정하게 느껴져요?
"기분 탓이거든요."
- 에이 좋다가 말았네. 그럼 내일 봐요.
"내일? 내일 무슨 일 있어?"
- 오빠!
"안다 알아. 장난친 거야. 내일 여행 가기로 했지."
- 잊어버렸으면 진짜 가만 안 놔두려고 했어요.
"가만히 안 놔두면? 설마? 선배 잡아먹으려고? 나는 언제든지 준비 되어 있어."
- 진짜 싫다. 끊어요!
"농담이야 농담. 그럼 잘자."
- 네. 오빠~ 잘 자요.
"..."
-...
"안 끊어?"
- 오빠가 먼저 끊어요.
"네가 먼저 끊어."
- 그럼 가위, 바위, 보해요.
"가위 바위 빠"
- 가위 바위 묵
"으하하하. 내가 이겼으니깐 어서 끊어"
- 쳇 알았어요.
긴 통화가 드디어 끊겼다.
가위, 바위, 보라니. 세연이 너도 아직 애는 애구나. 귀엽네.
...
이세연이 귀엽다니! 새해 들어서 내가 미친 게 분명 하다.
*
딩동.
"오빠 저예요."
다음날 오후 두 시. 카랑카랑한 고양이 소리가 현관에서 들렸다.
이제 왔니? 내일 올 줄 알았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인상을 썼다.
"늦으셨네요. 열 시에 오신다던 분이."
"아. 미안해요. 집에서 이야기 좀 한다고요."
"엄마한테 붕권 맞았나 봐. 사과를 다 하고."
"뭐래. 저 원래 사과 잘하거든요."
"너는 사과 잘하지? 나는 바나나인데. 으하하하 아! 고오급 개그야~~"
"진짜! 미쳤나 봐!"
"미안 안 할게. 어서 가자. 준비 다 했어?"
"네. 옷이랑 다 챙겨 왔어요. 오빠 차 타고 갈 거죠?"
"그게 편하겠지? 차에 간식거리랑 먹을 거는 이미 잔뜩 사 놨어. 어디 가고 싶어? 말만 해."
"음. 우리 강원도로 가요."
"말만 해. 계속 들을 테니깐. 계속 말해봐. 아!"
이세연이 내 배를 한 데 툭 쳤다. 역시 세연이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
"아오. 진짜. 점점 이상해져 가는 거 같아."
"더 멋있어진다고?"
"아니요. 더 맛있어지는데요."
응? 너 왜 섹드립해? 그건 나의 영역인데.
이세연. 동백꽃에서 감자를 주다가 거절당한 점순이처럼 얼굴이 붉어지면서, 부끄러워한다.
"으하하하. 너 방금 섹드립 한 거야?"
"아씨. 오빠 때문이에요. 나까지 물들었잖아. 어서 가요."
"재밌다. 한 번 더 해줘."
"싫거든요. 변태 오빠 어서 가요."
투덜투덜하면서도 내 팔짱을 낀다.
세연이가 다가오자 향긋한 향수 냄새가 나를 뛰게 한다. 본능에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C컵의 가슴골이 보였다. 그리고 위로는 나를 노려보는 이세연이 보였다.
"...오해하지 마라. 인사 한 거다. 악!"
"진짜 방심을 못 해."
이세연은 내 발을 밟고는 먼저 갔다. 고양이에서 호랑이로 왔다 갔다 하네. 정신 없다.
*
부르르릉.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1%만 탄다는 내차. 넓어서 좋기는 좋다.
처음에는 조금 아쉬웠다. 이세연의 BMW를 타고 멋있게 가고 싶었는데. 쿠페 타입이라서 천장도 열린단 말이야.
"오빠. 차 엄청 밀려요."
조수석에 앉은 이세연이 정면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러게. 어제 새해 보고 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날씨 때문인 거 같은데요. 눈 올 거 같다."
"그러게. 기상청에 전화해 볼까?"
다시 태어나니 불편한 게 제법 있다. 미래에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바로 떴는데.
여튼 지금은 이세연 차를 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이천 지나는데, 하늘을 보니 함박눈이 내릴 기세다.
"잠시만요. 전화해 볼게요."
"농담이야. 전화하지 마."
"강릉에 눈 많이 오면 어떡해요?"
"내차 사륜 돼서 괜찮아. 그리고 그러면 또 재미가 있지. 우리 어차피 숙소도 예약 안 했잖아. 가다가 아무 도시나 들어가서 자고 놀자."
"아! 킥킥. 그것도 재밌겠다. 그럼 그냥 가요."
다시 태어난 나. 많은 게 달라졌지만, 위기상황에 대한 데처 능력도 달라졌다.
어릴 때는 계획 한 데로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제는 돈도 많겠다 어머 죧됐네. 하고 넘기는 여유가 생겼다.
다행히 세연이도 스케줄 목숨 거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랬으면 여행계획부터 치밀하게 짰겠지.
흘러가는 데로 즐기는 여행도 나름의 맛이 있다.
*
나름의 맛은 개뿔.
강원도에 폭설이 내렸다. 아니, 분명히 예전 기억으로는 이때쯤 강원도는 맑았는데.
인싸 친구들이 강원도로 여행 가서 일출 사진 찍은걸, 싸이월드로 몰래 봐서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눈 속에 세연이가 사라져도 '아쉽네! 다음 생에 만나' 하면서 빠르게 손절 할 정도로 쏟아져 내린다. 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미래가 바뀌는 게 날씨도 바뀌나 보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 게 나비효과를 일으킨 걸 수도 있고. 섹스가 이렇게 위험한 겁니다.
"눈이다~ 너무 좋아~"
복잡한 내 머리와는 다르게, 세연이는 조수석에서 밖의 창문을 보면서,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 우리 고립된 거야."
"뭐 어때요? 이것도 재밌어요."
"정말? 안 무서워?"
"뭐가 무서워요? 어차피 언젠가는 그칠 건데."
"그렇긴 하지. 그럼 우리 강릉으로 그만 가고 일단 휴게소로 들어가자. 잘못하면 도로 한가운데 고립될 수도 있어. 그럼 화장실도 이 페트병에 봐야 해."
나는 운전하면서 마신 물병을 들고 흔들었다. 이세연은 나를 보면서 씨익 웃더니 페트병을 뺏어 갔다.
팍! 팍!
"아! 이 가시나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 머리통을 팍팍 쳤다.
"말이 그렇다면서 내 허벅지는 왜 쳐다봐요?"
"추울까 봐. 추울까 봐!"
"웃기네. 잘도 그랬겠어요. 진짜. 내가 못 살아. 휴게소로 가요. 거기서 그칠 때까지 기다려 봐요."
우리는 휴게소로 들어갔다.
*
새해가 하루 지난 강릉은 이미 인기가 땅에 떨어졌는지, 휴게소에 차들이 별로 없다.
하긴, 어제가 피크였지.
우리는 차에서 눈이 그치길 기다렸다. 한 시간쯤 있었지만,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 유리창은 눈이 한가득 쌓여서 앞을 볼 수조차 없다.
"안 되겠다. 여기서 밤샐 준비해야겠다."
"정말요?"
"응. 그런데 너 왜 그리 신났니?"
"킥킥. 이상하게 왜 이리 신나지. 뭔가 어릴 때 걸 스카우트 캠핑온 기분 들어요. 어? 왜 그렇게 봐요?"
걸 스카우트라니. 나는 해양소년단이었는데. 여튼 너도 옛날 사람이구나.
"내 맘이다. 우리 기름 넣고 음식 사러 가자. 우선 앞 유리창부터 닦고."
"나도 도와줄게요."
"우쭈쭈~ 우리 세연이 어른 다 됐네~ 오빠 도와주고."
"그러게요. 오빠도 아저씨 다 됐네요. 처음에 나한테 잔소리만 하던 사람이 이제는 달래 주고."
"어? 무슨 소리야?"
"말 안 해도 알아요. 나 엄청 신경 쓰고 있죠?"
"...어. 너 이런 환경에 지내본 적 없잖아. 솔직히 편하게만 살았을 건데. 많이 불편할까 봐 걱정돼."
"나름 익숙해요. 우리 집 어릴 때 가난했거든요."
"정말?"
"네. 24평 아파트에 산 적도 있어요."
음. 가난의 기준이 나랑은 다르구나. 여튼, 노이로제 많은 사람처럼 짜증 낼 줄 알았는데, 지금 오히려 즐긴다. 다행이다.
이제 본격적인 재난 준비를 해보자.
< 새해 여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