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 여행 >
"너희들 뭐야? 왜 신나 있어?"
"야. 친구 왔는데 왜 그리 쌀쌀맞게 굴어?"
이혜민이 입을 툭 내밀고 나를 본다. 이선미는 내 귀에 입을 대더니 귓속말을 했다.
"너 혹시 혼자서 하고 있었어?"
아오! 망할 가시나.
"뭔 소리야. 일단 들어와. 혜민아 손에는 뭐야?"
이혜민은 한 손에 잡지 같은 걸 들고 있다.
"이거 보여주려고 왔어."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혜민이는 잡지를 끄적거리더니 한 페이지를 나에게 들이민다.
"짜잔! 예쁘지?"
"어? 은미네?"
잡지 한 페이지의 1/4 정도 분량에 은미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서 있다.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허리에는 복근까지 잡혀 있다.
나는 모노키키 수영복이 좋은데. 아차차. 정신 차리자.
은미 정말 많이 예뻐졌구나.
이선미가 내 팔을 툭 쳤다.
"왜? 옛 여친이 예뻐졌으니깐 아쉬워?"
너도 옛 여친이야 인마. 네 옆에도 그렇고.
"아쉽기는. 은미 진짜 열심히 했나 보네. 살 완전히 빠지고 몸도 예뻐졌어. 그냥 친구로서 기특하고 대견해. 이거 보여주려고 온 거야?"
"아니. 발리 가자."
"어? 발리? 발리슛이 아니라 발리?"
"야! 너는 점점 아저씨가 되어가? 진짜 썰렁하다."
미안 30살의 아재력이 숨어 있어서 그래. 그리고 썰렁하다도 옛날 말이야.
"오케이. 썰렁한 거는 인정. 그런데 갑자기 발리는 왜 가자고 해?"
이번에는 이혜민이 신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은미 발리에서 화보 촬영한대. 우리 가면 시간 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발리 가려고. 현찬아 너도 가자. 숙소 비싼데 안 잡으면 돈도 그렇게 많이 안 들어. 그치 선미야."
"응. 생각보다 안 들더라. 가자 현찬아. 이럴 때 가야지 또 언제 가 보겠어?"
"안 가."
두 사람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이선미는 갑자기 나에게 땡깡을 부린다.
"가자! 가자! 가아자!"
"안가. 안가. 아안가!"
"아! 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희 둘 집사가 될 거 같아."
"...눈치챘어?"
"호호호. 현찬이 변했구나. 눈치 빨라 졌어."
"아줌마처럼 웃지 마라. 이혜민."
"이씨."
뻔하지. 선미가 아무리 외국 생활을 했더라도 낯선 곳에 가는 건 두려울 거다. 그리고 두 사람만 갔다가는 괜히 싸울 수도 있다.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 할 수 있는 게 나다.
"현찬 오빠~ 우리랑 같이 가요. 우리가 잘해줄게요."
"선미야 그래도 안 통해. 그리고 나처럼 음흉한 놈이랑 같이 가면 걱정 안 돼? 너 맨날 나보고 발정 났다고 하잖아."
"아씨. 그건 좀 무서운데... 혜민아 어떡하지?"
"응. 쟤 좀 위험하긴 한데. 밤에 막 우리 방 들어오고 그러는 거 아냐?"
섹드립 하네. 나도 같이하자.
"그래. 불알친구랑 여행 갔다가 불알 빤다는 말 못 들었어?"
두 사람은 나를 벌레 보듯이 본다.
왜! 너희는 섹드립 해도 되고 나는 하면 안 되니?
"아.. 진짜 저질이다. 우리끼리 가자."
"어... 선미야. 현찬이 많이 변했어."
그래. 나는 변태니깐 너희들끼리 가.
*
말은 그렇게 해도 선미와 혜민이는 같이 가자고 계속 졸랐다. 협상에 진전이 없자 두 사람은 삼일 뒤까지만 결정해달라고 말하고 집을 나갔다.
선미는 해외에서 산 적이 있어서 해외여행은 별로 안 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의 모습은 의외다. 아니면 혜민이가 같이 가자고 꼬신 건가? 너 그러다가 나처럼 호구 된다.
나는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잠시 발리를 검색해보려다가 말았다. 발리는 무슨. 이제 게임을 즐겨보자.
- 디리리랑.
또 누구야?
"선배!"
"귀 떨어지겠다. 세연아 왜? 무슨 일 있어?"
"내일 뭐 해요?"
"내일? 별일 없는데?"
"그럼 서울에 좀 와주세요."
너는 또 무슨 일이니?
"서울? 아! 세연아! 미안, 나 생각해보니 내일 약속 있어."
"아 진짜. 선배!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러기예요?"
"뭘 잘해줬는데?"
"응! 내가 차에서! 그 좁은 차에서! 허리 숙여 가며!"
"아이고 세연 님. 제가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킥킥. 와! 좋기는 좋았나 봐. 바로 얌전해져."
"음. 여튼 내일은 왜?"
"그냥 부탁할 게 있어서요. 선배 차 가지고 잠시만 와주세요."
"알았어. 몇 시까지?"
"오후 1시까지 오면 돼요. 그럼 내일 뵐게요."
세연아. 너는 어째 부쩍 여우가 되어가는 거 같니?
일단 가 보자.
*
부르르릉.
달리는 차 안에 조수석에는 이세연이, 뒷자리에는 이세인이 타고 있다.
"선배! 고마워요."
세연이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이세연이 나를 부른 이유는 유럽 여행 가는데 공항까지 태워 달라는 것이었다. 아니, 돈도 많은 사람이 택시 타면 되지 왜 나에게 태워 달라고 해?
"선배 화났어요?"
"아니. 안 났어."
뒷좌석에 앉은 이세인이 우리 대화를 듣더니 깔깔거리며 웃는다.
"현찬씨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 진짜 괜찮아요."
"세연이가 유럽 가기 전에 한번 보고 싶어서 부른 거예요."
"언니. 아니야!"
"아니기는. 맨날 집에서 현찬 선배는 현찬 선배는 말하면서. 엄마도 현찬씨 이름 알아."
"아 언니! 무슨 말 하는 거야! 아 짜증 나!"
이세연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창문으로 고개를 획 돌린다. 그래 싸가지는 없지만, 아직 20살이구나. 민망해하는 모습이 귀엽다.
특히 언니랑 같이 있으니 집에서 막내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인천공항 가는 내내 재잘재잘하면서 애교도 부린다.
"이거 선배 지갑이에요?"
운전하면서 고개를 슬쩍 돌리자, 대시보드 위에 올려놓았던 지갑을 세연이가 들고 있다.
"응. 왜?"
"오래 썼나 보다. 여기 떨어졌어요."
"너희들이 하도 선배 고생시켜서 그래."
"구경해도 돼요?"
"응. 괜찮아."
세연이는 내 지갑을 열어서 살핀다. 지갑 한쪽에 있는 스티커 사진을 꺼내서 보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무슨 일 있어?"
"네? 아니에요. 은미 선배가 옛날 여자 친구분이라고 했죠. 진짜 연예인 같다. 어떤 분이에요?"
"은미? 일단 연예인 맞아. 이번에 잡지에도 실렸거든. 음... 그리고 성격은 착해. 너처럼 싸가지 없었는데 철들고 착해졌어."
"잡지에 실렸다고요?"
"응. 비키니 모델로 실렸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워."
"...그렇구나."
뒤에 있던 이세인이 궁금한지 손을 앞으로 뻗어 이세연에게서 사진을 뺏었다.
룸미러를 보자 이세인이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 보고 있다.
"음... 현찬 씨는 잘생겨서 그런지 확실히 주위에 예쁜 사람이 많네요. 누가 옛날 여자 친구예요?"
셋 다요. 대답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세연이 머리를 뒤로 돌려서 대신 대답했다.
"언니. 이 사람이야."
"흠. 예쁘네. 청순하면서도 매력 있어. 세연아 안 되겠다. 포기하자."
"아! 뭘 포기해! 그런 거 아니래도. 짜증 나게 하지 마!"
"세연아 언니 말 들어. 너는 이길 수 없어."
"뭘 이겨! 선배 언니 말 듣지 마요! 지금 미쳤나 봐요."
"현찬씨. 우리 세연이가 그래도 잘 보면 예뻐요."
"언니! 제발. 그만해!"
역시 동생 괴롭히는 건 언니가 최고구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차는 인천공항으로 들어왔다. 나는 연예인들 밴이 내리는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서 캐리어를 꺼내 두 사람에게 주자 이세연이 아쉬워한다.
"선배. 같이 들어갔다. 악!"
이세인이 이세연 머리를 한 대 쥐어박더니 나를 본다.
"야! 여기까지 와준 것도 민폐야. 그만해. 현찬 씨 오늘 고맙고 미안했어요. 동생이 너무 좋아해서 잠시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괜찮아요. 뭐 우리가 이래 봬도 국토대장정 전우거든요. 주차하고 출발하는 거 보고 갈게요."
"저희 어차피 비즈니스 라운지에 있다가 바로 타면 돼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세요?"
"...누나. 저번에 그 양주."
"누나...? 양주? 아! 훗. 알겠어요."
님아 그 양주 잊지 마오.
이세연이 입을 툭 내밀고 나를 본다.
"누나래. 아 징그러워. 저는 뭐 사 올까요?"
"세연아 사고 치지 말고 무사히만 와."
"아 진짜. 나한테는 잔소리만 해. 선배 빌라 주소 좀 보내주세요."
"주소는 왜?"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주소 꼭 보내주세요!"
두 사람은 공항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일주일 정도 못 보다가 이렇게 보니깐 오히려 반갑고 좋다.
뭔가 운전해줬다는 기분보다는 친한친구 배웅해준 기분이 든다.
나도 이제 집으로 가자. 가기 전에 한 명 더 보고 가야겠다.
*
- 라일락 꽃향기 맡으며~
무대에서 진희가 짧은 치마에 민소매 티를 입고 노래 부른다. 상반되는 발라드를 부르자 더욱 관능적이다.
선미가 맥주를 한 잔 마시며 나를 봤다.
"그래도 후배 중에 이렇게 노래 부르는 사람 있으니 좋네. 간단하게 맥주 한잔 마시면서 노래 들을 수도 있고."
"그렇지. 진희는 보면 볼수록 노래할 때는 완전 사람이 달라진단 말야. 이제 마스크도 안 써."
"정말이네? 자신감 붙었나 봐. 아니면 국토대장정 때 무슨 일 있었어?"
"별로. 혹시 래프팅 때 떠내려가서 그런가?"
"아니면 산장에 고립되었을 때 무슨 일 있었나? 어? 너 왜 그래?"
맥주가 코로 들어갔다. 설마. 세 명이 해서 과감해 진 건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캑. 아니다. 어! 진희 온다. 진희야!"
"헤헤헤. 선배님 안녕하세요."
무대를 마친 진희가 우리에게 와서 선미 옆에 앉았다. 예쁜 여자 두 명과 한 테이블에 앉은 나를 주위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노려본다.
"노래 잘 들었어. 갈수록 느는 거 같아."
"감사합니다. 선미 선배님. 이제 부끄러움도 덜 한 거 같아요."
"아이고. 기특해라."
선미가 진희 머리를 쓰다듬자 진희는 강아지가 되어 환하게 웃었다.
잔뜩 애교부린 진희는 이번에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아! 현찬 선배! 세연이 유럽 갔다면서요?"
"응. 오늘 배웅해주고 왔어. 어떻게 알았어?"
"원래 저도 갈려고 했는데, 제가 알바를 못 비워서 못 갔거든요. 사장님이 손님들이 제 무대 보러 온다고 이번 달은 계속해달래요."
"너 팬 생겼구나. 좋은 일이야. 그럼 방학 동안 어디 가지도 못하겠다."
"네. 힝. 놀 때가 좋았는데."
"그래도 노래 부르면 좋잖아."
"일이 되니깐 부르기 전까지는 싫어요. 부르면 괜찮은데. 으앙~ 선미 선배~"
"아고고. 우리 진희 싫어서 어떡해."
두 사람은 친자매처럼 서로를 대한다. 진희도 여름방학 동안은 이제 꼼짝 못 하는구나.
임석훈은 군대, 세연이는 유럽, 진희는 공연, 서영 누나는 실종, 이제 방학 때 놀 수 있는 사람은 박호빈뿐인가? 생각만 해도 싫다.
"선배 저 가 보겠습니다."
진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나와 선미만 남았다.
선미가 맥주를 마시면서 나에게 묻는다.
"너 발리 진짜 안 갈 거야?"
"발리발리 발라셩 발라리얄라."
"아 진짜. 내가 남자였으면 너 줘팼어."
"미안. 그런데 너 좀 이상해."
"왜? 뭐가?"
"선미 너는 해외여행 같은 거 관심 없잖아. 왜 그렇게 가자고 해?"
"음... 사실 해외여행 가고 싶은 건 아냐. 그냥 우리끼리 여행 가고 싶어서 그래.
얼마 전에 여기서 우리 다 모였잖아. 그게 난 좋더라고. 그리고 이번에 임석훈 군대 가는데 우리끼리는 여행 간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났어."
"그렇지. 우리끼리만 간 적은 없지."
"그러니깐 다 같이 한번 가 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그래."
"가자."
"어? 가자고?"
선미 얼굴이 밝아졌다.
"응.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나는 너희들이 나 부려먹으려고 데려가는 줄 알았어."
"야! 누나 스타일 알잖아. 다른 사람에게 내 일 넘기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이혜민 스타일도 알지."
"...음. 여튼 그럼 가는 거다."
"오케이. 너희 방문 잘 잠가라. 내가 언제 들어갈지 몰라."
이선미가 웃으면서 나에게 팝콘을 던진다.
"꺼져! 그냥 꺼져! 여자들끼리 우정 여행 갈 거니깐 그냥 꺼져!"
"아! 농담이야."
"아오! 진짜. 섹드립도 좀 맛있게 쳐라. 그럼 여행 계획 짜보자."
그래. 돈도 많겠다. 발리 한 번 갔다 오자.
*
다음 날 내 자취방. 선미와 혜민이가 컴퓨터를 보며 인상 쓴다.
"혜민아 생각보다 엄청 비싸다. 비행기 값 내면 얼마 남지도 않아."
"휴... 그렇네. 선미야. 우리 현찬이랑 한방에서 잘까? 지금 예산으로는 그래야 할 거 같아."
"훗. 민현찬이랑 한 방에? 저 색마랑?"
선미가 나를 노려본다. 색마라니.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너희들 언제까지 방 예약할 거야? 벌써 여섯 시간 째야."
이혜민이 입을 툭 내민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괜찮으면 비싸고, 아니면 시설이 별로고."
"둘 다 비켜. 이러다가는 방 예약하면 여름방학 끝나겠다. 내가 잡을게."
선미와 혜민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발리의 유명한 풀빌라 몇 군데를 뒤졌다. 일정이 촉박해서 방이 없는데, 비싼 곳 한군데에 더블룸이 남아 있었다.
선미가 가격을 보더니 놀라서 내 어깨를 잡았다.
"현찬아. 여기 비싸지 않아?"
"괜찮아. 지금 다른 데는 방도 없어. 숙소는 내가 돈 낼게."
"정말?"
"진짜? 무리하는 거 아냐?"
"이정도야 뭐. 친구들끼리 여행 가는 거잖아. 단 이번 만이다."
둘 다 뛸 듯이 기뻐한다.
섹스 판타지 10개를 채웠을 때 들어온 포인트가 돈으로 3억이다. 혜민이가 2개, 선미가 1개니깐 9천만...
그냥 생각하지 말고 쓰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은 곳에서 놀고 싶다.
선미는 뒤에서 내 머리를 안았다.
"너무 좋아! 이번 여행 재밌겠다. 그런데 너 좋겠다. 여자 세 명에 남자는 너 혼자뿐이잖아. 우리 현찬이 정말 복 받았어."
"복 받기는 무슨. 선미야 잠시만! 여자 세 명이라니?"
"응? 은미 온다고 했잖아."
"잠시 온다는 거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도착하는 날이 은미 촬영 끝나는 날이래. 대표님에게 너 온다고 말하니깐 더 놀다가 오라고 했다던데?"
그야 내가 주주에다가 빚쟁이니깐 당연하지.
"게다가 은미가 공항에 마중 나올 거래. 맛집이랑도 미리 다 알아 놨대."
"갑자기 부담된다."
"뭐가?"
"여자 세 명에 남자 나 하나라면서?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혜민이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너 좋으면서 왜 부담된다고 말해!"
"부담되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여자 세 명이랑 같이 다니면 민망해."
선미가 피식 웃었다.
"우리 셋 다 수영복 입으면 너 부끄러워서 도망가겠다."
이선미 씨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그건 아니죠. 지옥이라 하더라도 따라다니겠습니다.
< 해외 여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