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88화 (88/295)

< 국토대장정 >

국토대장정.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행군이다.

전생에 주위에 갔다 온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모두가 공통으로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죽을 만큼 힘들다.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기는 하다.

일단 유미 누나를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겠다.

다음날 학교 앞 커피숍에서 유미 누나를 만났다.

누나는 내가 간다는 것만으로 기쁜지 싱글벙글 웃고 있다.

"누나. 아직 마음 정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우리는 이미 정했어."

"우리라니요? 어? 잠시만. 인봉이 형?"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커피숍 문이 열리며 인봉이 형이 들어왔다. 능글맞게 웃으면서 내 옆에 앉는다.

"현찬아. 가자."

"형. 제발 육하원칙은 따져 가면서 이야기해요. 올해는 농활 안 가요?"

"반니가 대신 가기로 했어. 나는 국토대장정 가려고."

"참나. 누가 받아 준대요? 국토대장정 아무나 가는 거 아니에요. 경쟁률이 100대1이 넘어요."

내가 알기론 국토 대장정은 웬만한 인턴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 학교에서 가는 건데."

"그러니깐요. 학교에서.. 뭐라고요?"

"학교 주최로 가는 거야. 다른 학교랑 연합해서 가기로 결정 났어. 총장 둘이 친구라서 술 먹다가 결정했대."

총장 둘이서 술 먹다가 국토 대장정이 결정 나다니. 멋지네.

믿기지 않아 유미 누나를 봤다.

"누나 진짜예요?"

"응. 그래서 연락한 거야."

진짜구나.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묻고 싶지만, 이미 결정 난 행사를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는 없다.

"현찬아 가자. 제발~~"

"민현찬! 우리 농활의 추억을 다시 만들자!"

두 사람은 내 손을 잡고 계속 꼬신다.

우리 학교에서 주최하면 자유도는 있겠다.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유미 누나. 그런데 저는 거기서 뭐 해요? 스탭이라면서요."

"너. 암행어사 같은 거야. 우리 처음 해보잖아. 조교만으로는 불안해서 한 조에 한 명씩 분위기 메이커 넣으려고.

농활 때도 너희 조 난리 난 거 네가 수습 했다면서? 인봉 오빠가 너라면 잘할 거라고 적극 추천했어."

"암행어사... 와. 두 사람 커플 사기단이네."

"야! 우리 커플 아냐. 그리고 사기 아냐."

"결국은 그냥 참가자잖아요!"

"어... 에이. 네가 어떻게 그냥 참가자야. 암행어사래도!"

암행어사라. 버럭 화는 냈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마음에 든다. 뭔가 힘을 숨긴 느낌도 난다.

"좋아요. 갈게요. 대신 조건 있어요."

"뭐?"

"우리 과 티오 줘요. 우리 과 한 명도 없는데 고생하기는 싫어요."

"어? 티오? 그거는 우리가 관여 안 하는데."

"그럼 없던 이야기로 해요."

"잠시만! 세 명! 더는 안 돼. 다른 애들도 가야지."

유미 누나 말 맞다. 더 달라고 하면 다른 학생들의 기회가 박탈된다. 어쩔 수 없다. 세 명으로 만족하자.

"알겠어요. 그리고 우리 과 후배는 나와 같은 조로 배정해 주세요."

"알았어. 그거는 쉬워. 그럼 협상 완료. 잘 부탁할게요. 암행어사님."

"암행어사는 무슨. 이제 일어나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미는 외국 집에 갔고, 임석훈은 군대 가고, 박호빈은 같이 가기 싫다.

진희, 현아, 성현이 데리고 가야겠다.

"오빠~ 나도~ 나도 갈래. 그런데 엄마 도와드려야 해요. 아아아아아 싫어!"

다음 날. 내 자취방에서 현아가 땡깡 부린다.

가고 싶지만, 어머님 도와드린다고 못 간단다.

"덤성아 너는?"

"햄 저는 갈게요."

덤성이는 오케이. 옆에 앉은 진희는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선배 저도 갈래요. 재밌을 거 같아요. 기타 들고 가도 돼요?"

해말게 웃으며 나를 본다.

우리 집에 쳐들어온 날은 잠시 미쳤었나 보다. 무대를 하지 않는 진희는 예전 그대로다.

"내가 장담하는데 30분 안에 노래 장르 헤비메탈로 바뀔 거야. 더워서 기타 바닥에 내려칠걸?"

"정말요? 그럼 덤성이 머리에 쾅! 선배 머리에도 쾅!"

"진희야. 닌 또 왜 그러는데? 나 현아 하나로도 힘들다."

"덤성이 머리에 기타를 쿵쿵쿵!"

"덩성이는 걸으면서 덤성, 덤성, 덤성성."

진희와 현아는 덤성이를 놀린다. 얘네들 조심해야겠다. 까딱 잘못하면 나도 저렇게 되겠다.

"좀 놔라! 햄. 그럼 저랑 진희만 갑니까?"

"아니. 한 명 더 데리고 가야지."

"누구요?"

"지금 데리러 가자."

히든카드가 아직 한 장 남아있다.

우리는 빌라를 나왔다. 현아는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로 갔고, 남은 우리는 아파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 딩동.

"세연아. 나 성현이야 문 좀 열어줘."

나는 엄성현과 진희를 현관 앞에 세우고 문 바로 옆에 숨었다.

이세연에게 국토대장정 가자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답은 없었고, 전화해도 안 받는다.

별수 있나? 엄성현으로 유인하고 침투하자. 문이 열리는 순간, 발을 밀어 넣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 딸깍.

문이 열리자마자 발을 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문이 다 열리지 않는다. 젠장. 걸쇠가 걸려 있다.

한 뼘 정도 열린 문틈으로 이세연이 우리를 노려본다.

"야. 엄성현! 너는 현찬 선배 부하야? 그리고 선배! 나 안 가요. 미쳤어요? 이 더운 날 걸어 다니게."

"세연아. 이 더운 날 서울은 왜 안 갔니? 심심하잖아. 잘 생각해봐. 네 속마음은 국토대장정을 가고 싶어 할지도 몰라. 악! 야! 발 좀 그만 밟아!"

이세연은 문을 닫아 내 발을 못 움직이게 한 뒤, 밟는다. 너 진화했구나?

"됐어요! 안 가요! 빨리 발 빼요! 진희야 너도 선배한테 낚이지 마. 가면 괜한 고생이야."

"세연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너 알바는 어쩌고? 공연한다면서?"

"보름 정도 허락받았어. 어차피 공연당 돈 받아서 괜찮아. 세연아 같이 가자~"

이세연은 고민하더니 다시 인상을 쓴다.

"...미안. 나 안가! 안 갈래! 못 가겠어. 선배 빨리 발 빼요!"

-쾅

문이 닫혔다. 직접 찾아오면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정말 가기 싫나 보다.

우리는 아파트를 내려왔다.

"선배. 이제 어떻게 해요? 저랑 성현이만 가는 거예요?"

"아니. 다 방법이 있어. 세연이는 무조건 갈 거야."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세연이 언니인 이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세인 누나. 안녕하세요."

- 민현찬 씨가 저에게 전화를 다 했네요?"

"저번에 주신 양주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려고요."

- 참 빨리도 연락했네요. 어쩐 일이죠?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이번에 국토대장정 하는데 세연이 좀 참가하게 해주세요."

- 제가 왜요? 의미 없이 걷는데 동생을 왜 보내야 하죠?

"동생이 고생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으세요?"

-... 계속 이야기해 봐요.

"이세연 말 잘 안 듣잖아요. 혹시 알아요? 이 땡볕에 고생하면 정신 차릴지.

누나, 언니, 오빠, 형 마음은 대부분 비슷하다. 말 안 듣는 동생 정신 차리게 한다면 양잿물도 먹일 거다.

-괜찮네요. 알겠어요. 제가 잘 말할게요.

"네. 세연이에게 아파트 놀이터에서 기다린다고 말해주세요."

뚝.

전화가 끊겼다. 이제 기다려보자. 우리 셋은 놀이터에 앉았다.

10분쯤 기다렸나? 갑자기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야! 민현찬! 언니한테 뭐라고 말한 거야!"

많이 화났나 보네.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세연이 화난 얼굴로 소리친다. 어찌나 크던지 아파트 전체에 울린다.

"선배 괜찮을까요?"

"아마도... 진희야. 일단 도망가자."

우리는 세연이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빌라에 도착하자마자 이세연이 쳐들어왔다. 추격자니? 깜짝이야.

지금은 화를 내다가 지쳐서 소파에 엎드려 있다.

"진짜... 선배 양아치예요?"

고개만 내 쪽으로 돌려서 투덜댄다.

"세연아. 이왕 가는 거 재밌게 가자."

"아 짜증 나. 왜 나야. 이학년 선배들은 안 가요?"

"박호빈."

"닥쳐요."

"응."

"아! 얄미워! 선미 언니는요?"

"선미 집에 갔어."

"그럼 금방 오겠네요?"

"응. 보름 정도 있으면 올 거야. 집이 외국이거든."

망연자실한 이세연, 포기했는지 얼굴을 소파에 묻는다.

진희가 그런 세연이 등을 토닥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선배도 있고 나도 있잖아."

"진희야.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너 선배에게 속고 있는 거야."

"음... 그런가? 선배 잠시만요. 우리 데리고 가면 혹시 뭐 받는 거 아니에요?"

너희 둘은 갑자기 왜 동맹이니? 진희와 세연이는 나를 노려본다.

"아무것도 안 받거든요. 자! 어서 마트 가자. 너희 갈려면 이것저것 사야 해."

"알겠어요! 짜증나아아. 에휴... 덤성이는요?"

"자취방 갔어. 오늘 고향 갔대. 집에 침낭이랑 다 있다고 챙겨서 모레 올 거라더라."

"그럼 우리 셋이 가야 하네요."

셋이 가야 한다는 말에 진희가 배시시 웃었다.

"헤헤헤. 선배 좋겠어요."

"왜?"

"이런 미인 두 명을 양옆에 두고 마트 가잖아요."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는 진희.

날카로운 고양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세연.

음... 갑자기 어깨가 펴진다.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드디어 출발이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이러니깐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 든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후배들과 서 있는데 인봉이 형이 다가왔다.

"현찬아. 준비 잘했어?"

"암행어사라면서요. 말 걸지 말아요."

"새끼. 은근히 즐긴단 말야. 이게 너희 조야. 그리고 조장은 너야."

"잘됐네요."

"웬일로 안 귀찮아 한다?

"형이 조교잖아요. 그렇다면 꿀이죠."

"아씨.. 왜 내가 더 고생할 거 같지. 버스 타자."

우리는 버스에 타서 출발지로 이동했다.

국토대장정에 참가한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발지에 모였다. 이렇게 보니 장관이구나.

버스 뒤쪽에는 스탭이 탄 차와, 텐트를 실은 트럭, 구급차도 따라왔다.

"각 조 조장들은 앞에 서주세요."

4조가 적힌 푯말을 들고 서 있자, 사람들이 내 앞에 모인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다행히 다들 인상이 나쁘지 않다.

그나저나 사전 모임도 없다니. 조금 불안하다.

"안녕하세요. 조장 민현찬입니다."

"저 사람 누구야?"

"4조 조장이래."

"잘생겼다."

다른 조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너희들 하루만 걸어봐라. 도와주는 사람이 제일 잘생긴 사람으로 변할 거다.

"다들 참가해줘서 감사합니다. 우리 조는 첫째도, 둘째도 안전입니다. 아프면 저에게 무조건 말해주세요. 참다가 크게 사고 나면 안 됩니다. 그럼 자기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민현찬 입니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우리 조는 두 학교가 절반씩 있고, 남녀 성비도 7:3으로 나쁘지 않다. 자기소개하는데 다들 첫인상도 좋다.

"그럼 출발전 까지 팀원들끼리 이야기 나누죠. 진희야, 세연아 너희 둘은 잠시만."

두 사람은 쪼르륵 나에게 왔다. 팔 토시에 모자까지 쓴 두 사람, 진희는 두근거리는 얼굴이고 세연이는 짜증이 가득하다.

"너희들 썬크림 여깄어. 그리고 힘들면 꼭 선배한테 말해.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도 미안한가 봐요? 썬크림 챙겨주는 거 보니."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죽겠다."

"선배는 진짜 끝나고 봐요."

"그런데 언니가 뭐라고 했기에 하러 온 거야?"

"...엄마한테 말해서 용돈 끊는데요."

이세연 언니 이세인.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네.

"출발합시다."

청춘을 불태우는 국토 대장정이 시작됐다.

청춘은 개뿔. 지금 당장 후배 세 명 데리고 도망가고 싶다.

군대 행군이랑은 다르다. 그때는 선택권이 없기에 포기하고 걸었지만, 지금은 당장 탈주하고 싶다.

일단은 덥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뜨거운 태양이 우리를 쏜다. 나그네가 옷 벗은 이유를 알겠다.

"10분 쉬었다 가겠습니다."

조교의 말에 우리는 그늘진 곳을 찾아 앉았다.

"다들 괜찮으세요? 아픈 사람 없죠?"

"네. 괜찮아요."

다들 아직은 얼굴이 밝구나. 특히 의외로 세연이는 웃고 있다.

"세연아 괜찮아?"

"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뭔가 고등학교 때로 돌아온 거 같아요."

"다행이네. 수학여행 다시 한다고 생각해. 진희는?"

"재밌어요. 선배는 안 힘들어요?"

"나는 괜찮아."

"저기요."

누구지? 갑자기 누가 내 등을 톡톡 쳐서 고개를 돌렸다. 키 166cm의 여자가 서 있다.

"6조 조장인데, 조교님이 조장 잠시 모이래요."

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아는 사람이다.

"...민아 아니에요?"

"네? 저 아세요?"

"나 현찬이야."

"현찬이?.... 민현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민아. 고등학교 때 내가 고백했던 동창이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믿기지 않아 우리는 계속 서로의 얼굴을 봤다.

고등학교 때 붕권 세 대 맞고 정신 차린 진아, 나, 민아 이렇게 세 명이 잠시 붙어 다녔다.

민아는 나에게 잘해줬고 나는 민아에게 고백했다. 그러자 민아는 내 머리에 연필을 꽂았다. 2학년 마치고 전학 갔었는데 여기서 볼 줄이야. 세상 좁구나.

"너 정말 민현찬이야?"

"어! 여기 어쩐 일이야? 진아가 너하고 연락 안 된다던데. 경기도 올라왔었어?"

"응. 어쩌다 보니, 그런데 정말 반갑다! 나 못 알아봤어. 너 너무 변했다. 얼굴도 잘생겨지고 키도 엄청 컸어!"

"고등학교 때랑은 다르지?"

"응. 이렇게 변할 줄 알았다면 고백받아 줄걸."

꺄르르 거리며 웃는다. 고백 이야기는 왜 해?

"선배 누구예요?"

"선배가 고백한 적도 있어요?"

진희와 세연이가 내 뒤에 서 있다. 다 들었는지 둘 다 얼굴이 안 좋다.

민아는 두 사람을 보더니 자랑스럽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현찬이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고2 때 현찬이가 제게 고백했어요. 교실에 사탕이랑 가지고 왔는데 제가 깜짝 놀랐잖아요. 그래서요."

어느새 제법 많은 사람이 우리 주위에 모여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민아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현찬아. 내 말 맞지? 너 나 좋아해서 고백했었잖아."

"맞아. 고등학교 때 너 좋아해서 고백했었어."

"뭐야? 벌써 핑크빛이야?"

"둘이 옛날에 사겼나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재밌어한다. 진희와 세연이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서서히 정리하고 조교한테 가자.

나는 목을 좌우로 한 번 까딱거리며 민아에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이라면 고백 안 했을 거야. 그때는 어렸거든. 다 옛날 일이지."

민아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진희와 세연이의 얼굴은 밝아졌다.

민아야. 우리의 추억도 중요하지만, 내 머리 위에 올라오는 건 싫단다. 날 팔아서 관심받으려고 하지 마.

여자들 틈에서 생활한 지 일 년 반이다. 예전에는 못 봤던 여자들의 심리가 이제는 보인다.

< 국토대장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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