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말 고사 >
다시 들어간 아파트.
공포에 떨게 했던 존재가 없어져서인지 이세연은 당당하게 거실로 들어갔다.
"세연아. 이제 안 무섭나 봐?"
"네. 선배가 다 잡았다면서요?"
"뭐... 어... 그렇긴 하지. 아! 안방에 옷 있더라. 왜 반납 안 했어?"
"어떤 옷요?"
"고양이 코스프레 옷. 안방 한쪽에 걸려 있더라고."
"안 그래도 반납하려고... 안방까지 들어갔어요?"
"응. 벌레가 거기로 들어갔거든."
"그럼 혹시 빨래 건조대에 널려 있는."
"속옷? 보라색? 악!"
이세연은 내 다리를 걷어차더니 씩씩거리며 노려본다.
"야! 내가 보고 싶어서 봤어? 벌레 잡다가 봤지!"
"선배 진짜 변태다. 성희롱으로 고소 할 거예요."
"밥은 주고 고소해라. 나 진짜 안 먹으면 죽을 거 같아."
배를 잡고 소파에 누웠다. 이세연은 불쌍하게 보더니, 주방으로 걸어갔다.
"지금 밥하려고 하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져.
"너 그런데 요리할 줄 알아?"
"선배보다는 잘하겠죠. 잠시만 기다려요. 아줌마가 보내준 소불고기 있어요. 구워 드릴게요."
잘하겠지?
이세연은 요리를 시작했다. 사실 요리라고 해봤자 양념이 된 불고기를 굽는 게 전부다. 그런데 냄새가 심상찮다. 저 불고기. 맛있는 고기다.
조용히 도둑 걸음으로 이세연 옆에 붙은 뒤, 갑자기 머리를 내밀었다.
"세연아 나 한 젓가락 만 줘."
"꺄! 깜짝이야!"
으하하. 역시 이세연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피하는 이세연. 나를 노려보더니 다 익은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내 입에 넣어준다.
"고기 진짜 맛있다!"
"일 인분에 4만 원이에요.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이제 다 됐어요."
세연이가 고기, 햇반, 밑반찬을 식탁에 올리자, 한 상이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졌다.
"세연아. 잘 먹을게."
"맛있게 드세요. 물 가져다드릴게요."
"왜 이리 친절해? 무섭다."
"그럼 하지 말까요? 고마운지 아세요."
하여튼. 싸가지 하고는. 요즘 얌전해졌다 싶었더니 또 사나워졌네. 아니면 나한테 뭔가 화난 게 있나?
일단 배고프니깐 밥부터 먹자.
*
"잘먹었습니다."
맛있네. 손에 물 한번 안 묻힌 부잣집 딸내미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설거지하는 모습이 처음 해본 건 아닌 거 같다. 의외의 모습도 있구나.
이세연은 설거지하면서 식탁에 앉은 나를 흘깃흘깃 쳐다봤다.
"왜? 선배가 불편해?"
"안 도와줄 거면 소파에 앉으세요. 커피 마실래요?"
"땡큐."
이세연은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나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는 이세연. 우리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막상 이렇게 둘이 있으니 민망하네.
그나저나 세연이에게 사과해야겠다. 어찌 되었든, 그날 내가 세연이를 덮친 건 사실이다. 강제로 한 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 것도 아니다.
예전의 이세연이었으면 사과할 생각을 손톱만큼도 안 가졌을 거다. 그러나 지금의 세연이는 말은 툭툭 쏘아붙여도 행동은 나를 잘 따른다. 어느덧 정말 싫은 후배에서 귀여운 후배가 되었다. 밥도 챙겨 줬고, 놀리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세연이를 볼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 첫 단추를 잘못 채웠을 때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세연아."
"네?"
"그날. 선배가 미안했어. 너를 너무 함부로 대한 거 같아."
"그날이라면? 아.... 저 덮친 날요?"
"덮쳤다기보다는... 그래. 선배가 갑자기 덮쳐서 놀랐지? 그날 네가 놀려서 홧김에 선배가 실수했어."
"뭐야! 지금 저랑 한 게 실수란 말이에요?"
"아오! 시끄러워. 귀 떨어지겠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라. 너랑 한 게 실수란 게 아니라 술김에 너를 덮치듯이 한 게 실수라고...
하려면 조금 더 로맨틱하게 해야 했는데. 그날 너랑 해서 좋기는 엄청 좋았.... 말이 좀 이상하다?"
"아 뭐야. 변태도 아니고."
"네가 오해하니깐 그렇지. 여튼. 그날 이후로 너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불편했어. 세게 덮치듯이 하는 게 아니라 다정하고 부드럽게 해야 했었는데. 미안해."
나는 사과를 한 건가? 아니면 그날의 후기를 말한 건가? 말하다 보니 내 말이 이상하게 변했다.
변태 새끼야 하면서 내 얼굴에 커피를 쏟는 건 아니겠지?
"알았으면 됐어요. 고마워요."
"그래. 나 변태 맞.. 어? 뭐라고?"
고맙다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세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다정하게 바라본다.
"네. 미안하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한 번 봐줄게요."
"아픈 거 아니지?"
"아 진짜. 뭐래. 그날 선배가 저에게 과격하게 하긴 했지만, 뭐 저도 선배한테 지랄했으니깐요. 저도 미안했어요."
아까 뽀뽀한 개가 이상한 게 틀림없다.
이세연은 순한 양이 되었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 비밀 지켜주세요. 저... 사실 선배가 두 번째에요... 그런데 처음 했을 때도 비슷했거든요."
"비슷했다면?"
"처음 할 때 술 마시다가 저 좋다고 하는 오빠랑 했어요. 저도 좋아하기는 했었지만... 그런데 그 오빠가 아침에 그냥 떠나버렸거든요. 자고 일어나니 없었어요. 나중에 미안하다고 빌기는 빌었는데... 정말 슬펐었어요."
"...그랬구나."
"네. 그날 아침에 선배가 저 밥해준다고 반찬 사러 갔잖아요. 그걸 몰랐던 저는 일어났는데, 선배가 없어서 너무 비참했어요. 나는 이런 남자밖에 못 만나는 운명인가?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아침에 울었던 거야?"
이세연은 바닥을 보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다시 오니깐 너무 기뻤어요. 게다가 아침 반찬까지 사서 왔잖아요. 아직도 울다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선배가 한 손에 아침거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 선배에게 조금 더 다가간 거 같아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가식이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그래. 섹스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당연히 그래야지. 너는 그래도 내가 아끼는 후배니깐."
"고마워요. 선배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뭐?"
"저번에 제가 누구랑 싸우면 일단 내 편이 되어 준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그 사람 욕 좀 해줘요."
"그 사람이라면?"
"네. 저 놔두고 간 사람요."
모르는 사람을 욕해 달라고? 뭐 돈 드는 것도 아니니 해주자.
"잠시만. 음! 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허공에 있다 생각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야! 너는 어? 인간이 쓰레기네? 이렇게 예쁜 애를 혼자 놔두고 가? 너 박호빈이지? 좀 맞자!"
입으로 쉭쉭 소리 내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발차기도 하고, 헤드락도 걸고, 혼자 쇼를 했다.
"아하하!"
고개를 돌리니 이세연이 손뼉을 치며 깔깔 웃고 있다.
"아하하하. 선배 그게 뭐예요!"
"이런 거 원하는 거 아니었어?"
"유치하게 뭐야 진짜. 그래도 속 시원하네요."
"너도 때려."
"네?"
"자! 선배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때려. 악!!!"
명존쎄. 명치 존나 세게 맞았다.
"윽... 세연아. 119 빨리. 선배 죽는다."
"때리라면서요. 에잇!"
"아! 아프대도! 발까지 밟아?"
"엄살은. 살살 때렸어요."
"네가 명치 맞아봐! 나 방금 할아버지 보고 왔어."
"거짓말. 아 후련해! 넌 개새끼야!"
왜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거니?
그래도 웃으니깐 보기 좋다.
우리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제 시간은 7시. 벌레도 잡았고, 밥도 먹었고, 사과도 했으니 집에 가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출장비는 받아야지.
"세연아. 너 아까전에 한 말 기억나?"
"뭐요?"
"벌레 잡아주면 뭐든지 다 한다고 했잖아."
"제가요? 언제요?"
"와! 아무리 화장실 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지만 너무하네."
"진짜 기억 안 나요. 그럼 했다 쳐요. 그런데 왜요?"
"뭐든지 다 해야지."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이세연을 봤다. 이세연은 불안하면서도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뭐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봐."
안방에 들어가서 축제 때 입은 고양이 코스프레 원피스와 머리띠, 망사 스타킹을 가지고 왔다.
"우리 이거 입고 학교 앞에 가자."
"뭐라고요?"
"너 이거 입었을 때 엄청 귀여웠어. 놀리는 재미도 있고. 같이 학교 앞에 가자. 내가 꼬리 잡고 돌아다닐게. 이랴~ 이랴~ 어때?"
"선배. 잠시만요. 옷 좀 줘봐요."
"어! 입으려고? 자 여기 있어."
고양이 코스프레 옷을 양손에 드는 이세연.
"선배."
"그래. 입으면 되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내 얼굴에 던졌다.
"나가!"
"아! 깜짝이야!"
"나가! 나가라고!"
"너 왜 갑자기 반말이야?"
"나 원래 싸가지 없거든. 당장 들고 나가!"
아오. 망할 것. 장난도 못 쳐?
이세연은 정말 화났나 보다. 장난이라고 말해도 발로 차면서 나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쾅.
현관문이 세게 닫혔다. 나는 고양이 옷을 들고 쫓겨났다.
세연아. 말 안한 게 있는데, 아직 벌레 한 마리 남았어. 안방에 쫓아갔다가 놓쳤지 뭐야. 모르는 게 약이라고, 어차피 몰랐던 거니깐 알아서 하겠지. 뭐.
*
내 자취방.
들어오자마자 고양이 옷을 소파 위에 던졌다.
내가 진짜 이세연 성질머리 언젠가는 고치고 만다.
샤워하고 티비를 틀었다. 1박2일에서 강호동이 뛰어다닌다.
낄낄. 오래간만에 보니깐 재밌네.
티비를 본 지 한 시간쯤 지났다.
-쾅쾅쾅
익숙한 충격음이 현관문에서 들렸다.
문을 열자 잠옷 바람으로 도망 온 이세연이 서 있다.
"선배..."
"아이고~ 누구 십니까! 먼 길을 가서 벌레 잡아 줬더니, 농담 한 번에 쫓아낸 이세연 씨 아닙니까?"
"선배에~~또 나왔어요!"
"그래서? 또 가서 잡아 달라고?"
"으으응~"
귀신을 본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세연.
"저 거기 못 있겠어요. 오늘 하루만 선배 집에서 잘게요. 세 마리가 나왔어요! 내일 세스코 온다는데 하루만요. 제발!"
"아까전에 누가 쫓아냈더라?"
"아. 선배 제발요."
이세연은 손까지 벌벌 떨면서 나에게 애걸복걸 빈다.
이렇게 떨어서는 서울 집까지 운전해서도 못 가겠다.
별수 있나. 재워 줘야지.
"알았어. 대신 조건이 있어."
"네. 상관없어요. 뭐든지 말해요. 거기는 도저히 못 있겠어요."
나는 소파에 가서 고양이 옷을 들고 왔다. 그러자 이세연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 찼다.
"세연아. 대신 이거 입어야 해. 뭐. 입기 싫으면 벌레가 있는 집에서 주무셔도 되고요."
"아. 진짜. 변태예요?"
"재밌잖아. 그리고 너 이거 입으면 엄청 예뻐. 정말 귀여워."
"귀엽다고요?"
"응. 우리 같이 본 강아지 있잖아. 그 강아지보다 네가 훨씬 귀여워. 딱 두시간만 입고 있어. 더 이상 입으라고 안 할게."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하는 이세연. 그것도 잠시다. 내 손에서 고양이 옷을 확 채갔다.
"이게 뭐야. 알았어요. 어디서 갈아입으면 돼요?"
그러면서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
옷방 문이 열렸다.
검은색 짧은 원피스에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아래에는 망사 스타킹을 신은 이세연이 나왔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 꼬리를 잡았다.
그래 이 느낌이야. 꼬리를 잡고 당기자 이세연의 몸이 뒤로 쏠렸다.
"아! 하지 말래도요! 이게 뭐가 재밌어요!"
"너니깐 재밌어. 이랴~ 이랴~ 가자 야옹아!"
"진짜! 하지 말래도!"
나는 때리러 오는 이세연을 피해 테라스로 도망갔다.
- 찰칵.
어? 문 잠그는 소리인데?
"세연아! 문 열어 줘! 여기, 내 집이야."
"안 들리는데요?"
"안 들리는데 어떻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하니?"
"다신 안 한다고 말하면 열어 줄게요."
"다신 안 할게. 제발!"
- 딸깍.
문이 열리자마자 이세연 뒤로 가 꼬리를 잡았다.
"이랴~ 이랴~ 야옹~~"
"아~ 진짜!"
이세연이 내 명치를 친다.
미안 세연아. 사실 별로 안 아파.
*
소파 양 끝에 앉은 우리.
장난을 심하게 쳤나? 세연이는 소파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나를 노려본다.
"물 마시러 갈거거든."
"...선배 저도 한 잔만 줘요."
"알겠어."
유리잔에 물을 담아서 이세연에게 갔다.
나를 쏘아보는 이세연. 하긴 장난을 많이 치기는 했지.
그래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진짜 싫어했으면 이세연 성격상 집에 안 있었을 거다. 아마 쌍욕을 하고 혼자 모텔 가서 잤을 거다.
"자 세연아. 물."
"웬일로 순순히 줘요? 잘 마실게요."
이세연의 분홍빛 입술에 유리잔이 닿는 순간, 나는 고양이 머리띠 사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끝난 줄 알았지? 이제 머리 차례다.
"우리 야옹이 잘 마신다."
"풉!"
"으악! 야! 선배 다리에 물을 뿜어?"
"야이. 선배, 뭐 하는 거예요?"
"물 마시는 야옹이 머리 쓰다듬어 줬는데."
"아 짜증 나. 물 한잔 더 줘요. 선배 때문에 마시지도 못했어."
나는 다시 물을 가져다 줬다.
"진짜 하지 마요."
"알았어."
다시 물을 마시는 이세연.
"야옹아~ 물 많이 먹어~"
나도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만히 마신다.
슥. 슥.
꿀꺽. 꿀꺽.
머리를 만져도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물을 마시는 이세연. 물을 다 마시고는 나에게 잔을 건넨다.
"감사합니다."
"너 왜 갑자기 얌전 해졌어?"
"네?"
"머리 만져도 뭐라고 안 하네?"
"그냥.... 기분 나쁘지 않네요. 귀염받는 기분도 들고요. 비켜요. 티비 볼 거예요."
기분 나쁘지 않다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세연아."
"네?"
"가까이 와서 티비 봐."
이세연 팔을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선배 다리에 머리 눕히고 봐. 그게 더 편해."
"...알겠어요."
이세연은 얌전히 내 다리를 베게 삼아 누웠다.
나는 티비를 보면서 이세연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쓰다듬다 보니, 목도 쓰다듬고. 귀도 쓰다듬고.
실수로 꼬리도 쓰다듬고.
"선배... 꼬리는 짜증 나요."
진짜 고양이니? 꼬리만 건드리지 않으면 가만히 있네.
5분 정도 이세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티비를 봤다.
- 덥석.
갑자기 내 손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
이세연은 내 손을 잡더니 자기 배 쪽으로 당겼다.
위에는 산이 있고 밑에는 물이 있는 배산임수에 올라가 있는 나의 손.
배를 만지게 해주는 것은 여자나 고양이나 같은 의미인데? 매우 친밀하다는 의미이다.
나는 놀란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이세연은 뺨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 기말 고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