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75화 (75/295)

< 축제 >

축제날 아침.

강의실에 일학년들이 절반 정도 모여있다.

작년과는 다르게 축제 참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열 명 정도의 후배들만 축제에 참여 했다.

"야. 드래곤볼 누구야? 나와."

엄성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왔다.

"야이 새끼... 덤성아. 이거 구한다고 서울까지 갔다 왔다."

"햄. 원하는 거 다 적으라면서요."

"진짜 적을 줄은 몰랐지. 자 가져가."

엄성현에게 주황 색깔 손오공 도복을 던졌다.

"세일러문 누구야."

"선배! 우리예요."

메뚜기인 지연이와 하민이가 꺄르르 거리며 튀어나왔다.

"자. 가지고 가."

"감사합니다."

"재밌겠다."

다음은 고양이 코스프레. 씩 웃으며 이세연에게 건넸다.

"세연아. 여기 있어"

"흠... 이상한 거 아니죠?"

"이상할 게 뭐 있어. 싫으면 안 입어도 돼."

"일단 주세요."

이세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옷을 받아 갔다.

"간호복은 호빈이가 조금 있으면 가져올 거야. 나중에 보자."

의상도 다 나눠 줬겠다, 이제 축제를 시작하자.

학교 운동장. 작년과 익숙한 풍경이 나를 반긴다.

천막이 곳곳에 처져있고, 각 과의 학생들이 분주하게 책상을 나르고 있다.

우리 과도 마찬가지다. 운동장 한쪽에 테이블이 11자로 정렬되어 있고, 천막 위에는 경영과 주점이라는 플랜카드가 매달려 있다.

목장갑을 낀 임석훈은 땀을 닦으며 내 등을 툭툭 친다.

"담배 하나 피자."

우리 둘은 운동장 구석에 가서 담배를 물었다.

"가요제 준비는 다 했어? 결국 듀엣 하는 거야?"

"응. 진희가 듀엣 해야지만 나간대."

"뭐. 보는 우리가 불안해서 그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어 후배들 온다."

운동장 스탠드를 내려오는 후배들. 교복, 코스프레, 간호복을 입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세연이다.

"와... 야. 저기 이세연 봐라. 장난 아니다. 밑에는 가터벨트야?"

"아니 그냥 망사스타킹이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이세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성난 황소처럼 달려온다.

"쟤 왜 또 화났어? 이쪽으로 오는데?"

"저 옷 내가 골라 줬거든."

"크크크. 미친놈아. 어서 도망가라."

"선배!"

씩씩거리는 이세연이 내 앞에 한 걸음 떨어져 섰을 때, 나는 서둘러 스탠드 위로 도망갔다.

"아니. 진짜. 뭔 이딴 옷을 줘요? 선배 변태예요?"

"왜? 세연아 네가 지금 여기 주인공이야. 예쁘기만 한데 왜? 얼마나 귀여워!"

그런데 진짜 예쁜데?

세연이는 지금 노란 머리 위에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있고, 옷은 검은색 숄더 드레스를 입고 있다.

세연이 가슴이 커서 그런지 옷이 조금 야해 보이기는 한다.

"짜증 나! 이거는 뭐예요?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몸을 돌려 엉덩이에 달린 꼬리를 나에게 보여준다.

나는 스탠드에서 뛰어 내려가 꼬리를 잡았다.

"너 말 안 듣던가 도망가면 이걸로 잡으려고."

"아 진짜. 하지 좀 마요!"

"어? 너 손오공이야? 꼬리 잡으니깐 얌전해지네. 악!"

이세연은 내 발을 밟고는 씩씩거리며 우리 과 주막으로 갔다.

임석훈은 재밌는지 내 팔을 치면서 낄낄 웃는다.

"크하하하. 야! 너희 둘이 부쩍 친해진 거 같다?"

"그런가? 뭐 세연이도 알고 보니 착하더라고."

"네 옆에 있어서 착해진 거 아니야? 예전부터 성격 까칠한 사람 길들이는 게 네 전공이잖아. 혜진 선배도, 은미도, 이번에는 세연이까지."

"웃기네. 어? 야... 저기 진희 아냐?"

"진희 맞네. 와! 대박이다."

이세연도 눈에 띄지만, 진희도 만만찮다.

간호복을 입은 진희. 상의는 가슴골이 보이고 하의는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가 있다. 옷의 재질이 부드러운 면인지 몸매 라인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진희야!"

"선배..."

"너 괜찮아?"

"아. 부끄러워요. 못 입겠어요."

"아니야. 엄청 예뻐."

"정말요? 아, 그런데 진짜 못 입겠어요. 일단 현아가 나가보자고 해서 나왔는데..."

"잠시만, 그러면 선배가 차에서 하나 가져올게. 조금 편해질 거야."

나는 차에 뛰어가서 빨간색 망토를 가져왔다.

"이게 뭐예요?"

"슈퍼맨 망토. 잠시만 있어 봐."

망토를 씌워 주기 위해 진희 뒤로 갔다. 어깨 너머로 가슴골이 슬쩍 보이자 내 막대기가 딱딱해진다.

진희야. 전생에 이런 몸매를 왜 숨기고 다녔니?

"어때 진희야? 이제 편하지?"

"헤헤헤. 네. 감사합니다."

진희는 망토로 몸매를 가리고는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현찬아."

"왜?"

"여왕은 누구로 할 거야?"

"무슨 소리야?"

"크크크. 이제 서서히 새로운 여왕을 뽑아야지."

"미친놈아. 학회장 하기도 바쁘다. 가자 이선미 열 받기 직전이다."

주막에서 이선미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하고 있다.

"어? 진짜네? 어서 가자."

나와 임석훈은 서둘러 주막으로 돌아갔다.

오후 다섯 시. 초대가수의 공연이 끝났다.

올해는 돈이 없나 보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가수가 와서 공연하고 갔다.

"네. 다음으로 대동 가요제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시작된 가요제.

나와 진희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이미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 순서를 기다리는데, 진희가 내 앞에 서서 벌벌 떨고 있다.

"진희야 괜찮아?"

"네? 아... 괜찮아요... 선배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한쪽 건물로 뛰어가는 진희. 나도 같이 들어갔다.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자 진희가 여자 화장실에서 나왔다.

"으아. 선배. 안 오셔도 괜찮은데."

"걱정돼서 왔다. 그렇게 떨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처음이어서요..."

"선배 손 잡아."

하얀 진희의 손이 내 손위에 포개진다.

"어때? 마음이 조금 진정되지?"

"아니요. 전혀요. 선배 잠시만 안아도 돼요?"

"그럼."

진희는 슬쩍 나에게 안겼다. 말캉한 진희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다. 고개를 숙이자 가슴골이... 정신 차리자.

나는 손을 들어 진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진희야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그냥 재밌자고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이 안 돼요. 잘 못 하면 선배에게 피해 주는 거 같아요. 선배는 뭐든지 이때까지 다 잘했는데 저 때문에 못 하면..."

"네가 선배 일학년 때를 못 봐서 그래. 일학년 때는 완전 바보였어."

"정말요?"

"그럼. 자! 어깨 힘 빼고! 우리 그냥 재밌게 하자."

"네... 손은 계속 잡고 있어도 되죠?"

"그럼."

우리는 손을 잡고 무대 뒤로 돌아갔다.

다들 한 과의 대표답게 잘 부른다.

실음과는 말할 필요가 없다. 저런 사람들이 왜 가수가 되지 않는지 신기할 정도다.

"다음은 경영과 차례입니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 나는 진희의 손을 꼭 잡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사회자는 진희를 보더니 웃으며 멘트를 날렸다.

"아니, 경영과 여학생분은 간호복에 슈퍼맨 망토를 입으셨네요. 어떤 노래를 할 생각이십니까?"

"네?.. 아. 저 그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진희. 그러자 사회자는 일부로 마이크를 진희 얼굴까지 들이민다.

나는 진희 앞으로 가서 마이크를 뺏은 뒤 관객석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경영과 학회장 민현찬 입니다."

-오~~~~~~

곳곳에서 나오는 환호성.

나도 제법 유명 인사가 되었나 보다.

"사회자님 제가 오늘 일일 매니저여서요. 제가 대답해도 될까요?"

"경영과 학회장님이 매니저라고요? 이거 매니저 몸값이 너무 비싼 거 같습니다. 오늘 무대 설명 부탁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별 노래를 할 생각입니다. 너무 슬프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매번 신나는 무대를 보여줬던 경영과가 이별 무대라니요? 여러분! 이 복장에 이별 노래면 실망이 크지 않나요?"

-네!!!!

어쭈. 사회자 이놈 봐라.

분위기를 이상한 쪽으로 몰아간다. 지금 당장 진희에게 섹시 댄스를 춰달라고 할 기세다.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를 따라간다.

허튼소리가 나오기 전에 정리하자.

"여러분 간호복을 입은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입니다."

"학회장님 변명이 너무 궁색합니다. 지금이라도 노래를 바꿀 기회를 드릴까요? 아니면 커플 댄스 한 번 어때요? 가산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이라이트는 경영과 주막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시면 저희 주막에 오시면 됩니다."

"주막에서만 볼 수 있다라."

"정확히는 주막에서 돈 내고 먹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우~~~ 우~~~

야유가 빗발친다.

격렬하게 야유하는 사람 중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 야유하시는 분들 다 기억했습니다. 특히 저기에 서 있는 사람. 인봉이 형! 반니형! 와! 작년 농활 때 내가 챙겨줬더니 이렇게 배신해요?"

두 사람은 손사래 치며 웃더니 주위 사람들한테 야유하지 말라고 큰소리친다.

좋다. 흘러가는 분위기는 끊었다. 결국 사회자도 포기했다.

"좋습니다. 얼마나 좋은 무대인지 기대 하겠습니다. 그럼 경영과 무대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나와 진희에게 모든 게 달렸다.

떨고 있는 진희의 손을 다시 잡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대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혹시 니가 다시 돌아올까 봐~"

-오~ 잘한다.

-노래도 잘했어?

-우~~~~

내가 노래를 부르자 환호와 야유가 같이 튀어나온다.

"여자는. 다 똑같나 봐~~"

윤민수 파트가 끝났다.

진희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양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채 나를 올려다본다.

- 하하하. 뭐야. 분위기랑 복장 너무 안 어울려.

- 슈퍼맨 망토 입고 발라드가 뭐야.

"혹시 네가 다시 돌아올까 봐~"

- 어?

- 뭐야?

진희가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연습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진희의 노래를 듣자 지금 당장 소주 한 병 까면서 울고 싶다.

"다 믿었었어 바보 같이~~"

-오~~~~

-와~~!!!

-쟤 누구야?

관객들의 반응이 완전히 변했다. 섹시 댄스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다들 진희 노래에 흠뻑 빠졌다.

이제 듀엣을 할 차례다.

"우린 미치도록 사랑했었지!!!"

갑자기 진희가 슈퍼맨 망토를 벗었다.

-와!!!!!!!!!!!!!!!!!

-대박!!!!!!!!!!!!

하얀 간호사 코스프레 복장만 남게 되자, 사람들이 폭발적인 환호를 보낸다.

진희는 저 환호성이 들리지 않나 보다.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계속 노래를 부른다.

"내 마음하나 몰라 주는 그~~ 남자~~~"

젠장. 오히려 내가 너무 놀라서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지금 타이밍에는 들어가면 안 될 거 같다. '다 된 밥에 민현찬을 끼얹나' 하면서 10년 동안 놀림 받을 거 같다.

"다 믿었었어 우리 둘이...."

고개를 숙이며 노래를 마무리하는 진희.

- 와!!!! 대박!!!!!!!

- 경영과! 경영과! 경영과!

폭발적인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

"정말 대단한 무대를 꾸며준 경영 과에 박수 부탁합니다!"

사회자도 흥분했는지 무대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린다.

"아니. 학회장이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경영과는 무슨 엔터테인먼트 과 입니까? 어디서 이렇게 재능있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까?"

"아... 잠시만요. 지금 저도 놀란 상태거든요."

"어? 학회장님도 처음 보는 장면인가요?"

"네... 저랑 연습 할 때는 안 이랬... 모르겠어요."

"그럼 이번에는 직접 여학생분과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사회자가 다가가자 진희는 내 뒤에 숨었다.

- 귀여워~~

- 와! 민현찬은 무슨 복이냐!

인봉이 형. 나중에 두고 봐요.

남자들의 따가운 눈총이 내 피부를 찌른다.

"하하하. 쑥스러움이 많나 봅니다. 그럼 감동적인 무대를 보여준 경영과에 다시 한번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진희야. 너 오늘 너무 잘했어."

"죄송해요..."

"괜찮대도. 내가 잘 못 해서 그런 건데. 너 우는 거야?"

"아니에요..."

실음과의 벽은 높았다. 우승은 결국 못 했다.

아니 애초에 심사위원이 실음과 교수였으니 당연한 결과다.

뭐 딱히 아쉽지는 않다. 우리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 시킨 걸로 만족한다.

하지만, 진희는 다른가 보다. 어깨가 축 처져있다.

나는 뒤에서 진희 머리를 잡고 좌우로 슬쩍슬쩍 움직였다.

"진희야~ 선배가 네 소원 들어줄 테니 힘 좀 내~~"

"정말요?"

"어떻게 바로 힘을 내냐?"

"헤헤헤. 선배 감사합니다."

"소원은 뭔데?"

"나중에 이야기해드릴게요. 쉬운 거예요. 걱정 마세요."

"보증 서 달라면 머리털 다 뽑아 버린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 이제 가요."

그렇게 좋아?

진희는 환하게 웃으며 주막으로 갔다.

주막에 도착 한 우리 두 사람. 이선미와 임석훈이 뛰쳐나온다.

"진희야 너무 잘했어."

달려 나와서 진희를 안아주는 이선미. 임석훈은내 얼굴을 손으로 민다.

"야! 임석훈! 나도 불렀어!"

"그래. 그래. 너도 불렀어. 와. 정.말.잘.했.어. 됐지? 진희야 너 가수 안 할래?"

"네? 석훈 선배 아니에요."

"여기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쉽다."

뒤이어서 후배들도 몇 명이 나오더니 진희를 둘러싸고는 꺅꺅거린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었지만, 그래도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뿌듯하다.

- 툭

갑자기 이세연이 다가와서 내 팔을 쳤다.

"선배도 잘했어요."

"네가 웬일이야? 선배 노래에 감동 받았어?"

"혼자 왕따처럼 보여서 온 건데요?"

툭 쏘고 돌아서는 이세연. 나는 엉덩이에 매달린 고양이 꼬리를 잡았다.

이세연은 더는 앞으로 안 가지자 고개를 돌려서 나를 노려봤다.

"아! 뭐해요?"

"이상하다. 손오공은 이거 잡으면 얌전해 지던데. 허잇"

"아. 짜증나. 이거 놔요."

"허잇. 허잇."

계속 내 발을 밟으려는 이세연. 탭댄스를 추면서 피하는 나.

이세연은 결국 발로 나를 한 데 차고는 씩씩거리며 주막으로 돌아간다.

이세연. 은근히 놀리는 게 재밌다.

"야. 너 이세연 저년이랑 언제 친해졌어?"

"응? 야. 호빈아. 너는 후배한테 년이 뭐야."

"쟤가 네 말은 잘 듣나 보네."

"잘 듣겠냐? 그냥 조금 얌전해진 거지. 아. 너 앰프 어딨는지 알지? 과방에 가서 좀 가져와 줘라."

"왜?"

"분위기 보고 주막에 노래나 틀려고."

"클럽처럼 꾸며도 재밌겠다."

"클럽은 가 봤어? 여튼 빨리 가져와 줘. 네가 어딨는지 알잖아."

"알았어. 갔다 올게."

과방으로 가는 박호빈 머리 위로 저녁 해가 지는 게 보인다.

주막의 천막에 대롱대롱 매달린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축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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