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제 >
시험 기간이 끝났다. 이제 5월 중순, 축제 기간이다.
지금 나, 선미, 호빈, 석훈은 축제를 논의하기 위해 과방에 모여있다.
이선미는 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면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식은 어떻게 할 거야?"
"너랑 현아가 하는 거로 하자."
"현아? 현아 음식 잘해?"
"장난 아니야. 대장금 뺨 때릴 정도야."
"좋아. 그럼 나는 편하겠네."
이번에는 한쪽에 앉아있던 임석훈이 나를 본다.
"너 가요제에 후배 내보낼 거라면서?"
"응. 진희 노래 진짜 잘해. 박정현 뺨 때릴 정도야."
"그놈의 뺨은 몇 대를 때릴 생각이야? 그런데 진희가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 앞에 서면 벌벌 떨 거 같은데."
"내가 꼬셔봐야지. 정 안되면 나도 같이하려고."
"크하하하. 야. 참아라. 우리 과 망할 일 있어? 네 노래 실력은 내가 아는데, 그냥 얌전히 있어 줘."
"형 재능 몰라? 춤도 바로 배우는 거 못 봤어?"
"어? 그건 그렇네. 씁. 갑자기 기대된다. 듀엣 해. 두 사람 듀엣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일단 진희랑 이야기해 볼게."
한동안 계속된 회의.
한 시간쯤 지나자 큰 틀이 다 정리되었다.
이제 마지막 하나를 남겨놓고, 나라의 운명을 건 사람처럼 나, 석훈, 호빈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야! 의상은 교복이야. 누가 뭐래도 교복이야."
교복 파인 임석훈이 강하게 주장한다. 나 역시 질 수 없다.
"지랄. 작년에 교복 했잖아. 올해는 코스프레로 간다. 머리에 고양이랑 토끼 모자 쓰는 거야. 어때?"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거절한다. 교복이 주는 감동을 포기할 생각이야?"
한동안 나와 임석훈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옆에서 듣고 있던 박호빈이 가세했다.
"야. 그러지 말고 간호복 어때?"
"미친놈아. 남자들은 뭐 입힐 거야? 교복으로 하는 게 무난하대도."
"간호복은 빼자. 코스프레가 좋대도. 남자들은 배트맨 같은 거 입히면 돼."
"돈은 어떻게 하려고? 의상 대여비 장난 아니야."
"내가 낼게."
"간호복은 간호학과에 아는 사람 있어서 구할 수 있어."
"미친놈아. 네가 생각하는 간호복은 간호학과에 없어."
우리 세 명은 계속 티격태격 싸웠다.
이선미는 그런 우리를 한 참 구경하더니 지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배들에게 입고 싶은 옷에 동그라미 치라고 해."
"어?"
"꼭 다 같이 입을 필요는 없잖아. 누구는 교복 입고, 누구는 코스프레 하고, 누구는 간호복 입으면 되지."
그렇네? 다양한 게 더 보기 좋겠다.
"오케이. 콜. 내가 현아한테 조사해 오라고 할게."
"괜찮네. 적어도 동그라미 친 아이들은 참여할 거잖아. 어차피 교복이 많겠지만."
"선미 너 의외로 똑똑한대? 혹시 간호복 입을 생각 없어?"
이선미는 박호빈에게 중지를 들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너희들이 바보 같은거야. 오늘 회의는 끝. 다들 수고했습니다."
우리는 과방을 나왔다.
*
삼일 뒤 과방.
이현아, 진희, 엄성현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내 앞에 있다.
나는 회사에서 결제받는 임원의 표정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씁...현아야 의외로 교복이 많네?"
"네. 아무래도 무난해서 그런가 봐요."
"현아 너도 교복이야?"
"헤헤헤. 편하잖아요. 교복 오빠가 한 거 아니에요? 설마! 코스프레가 오빠인 건 아니죠? 우리 변태 같다고 엄청 욕했는데."
"헌아야. 오빠를 뭐로 보고. 당연히 나 아니야."
일단 아닌 척하자.
"그럼 교복은 각자 학교 때 입던 거 가지고 오라고 하면 돼. 코스프레랑 간호복은 선배들이 준비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오빠 우리 이만 가볼게요."
"아. 잠시만. 진희야. 선배랑 이야기 조금만 하자."
이현아와 엄성현 뒤에 가려져 있던 진희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선배 저요?"
"응. 두 사람은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줘."
이현아와 엄성현은 나갔다.
진희는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진희야 가요제."
"싫어요."
아직 끝까지 말 안 했다.
"선배랑 듀엣으로."
"좋아요."
이번에도 끝까지 말 안 했다. 어?
"좋다고?"
"네. 선배랑 듀엣이면 저 할래요."
"괜찮겠어?"
"네. 선배하고 둘이면 괜찮아요. 노래도 하고 싶은 노래 있어요."
"뭐?"
"음... MC 몬 홈런 어때요?"
MC몬 노래라.
랩도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라서 내가 부르기 무난한 곡이다.
진희가 이 노래를 고른 이유는, 아마도 노래를 잘 못 부르는 나를 배려한 걸 거다.
"다른 노래 하자."
"네? 왜요?"
"음. 그냥. 그 노래 마음에 안 들어서. 차라리 내일 같이 노래방 가서 불러 보면서 결정하자."
"네. 선배. 저는 좋아요."
"그럼 가요제 나가는 거다. 자! 화이팅."
진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웃으며 내 손을 잡는 진희. 환한 표정으로 악수를 한 뒤, 배꼽 인사를 하고 과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과방에서 나는 잠시 고민을 한 뒤 마음을 먹었다.
크리스탈로 노래 실력을 사야겠다.
어차피 노래 잘하면 앞으로의 삶에 손해가 되는 건 없다. 오히려 춤보다 더 도움이 된다.
나는 크리스탈을 사기 위해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와라 스마트폰.
- 크리스탈로 노래 실력을 구매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리듬, 박자, 음정을 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고음은 3옥타브 내에서 컨디션에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음색이 평범해서 김나박이 수준은 될 수가 없습니다. 티비에 나와도 '오 잘한다' 하고 묻힐 정도입니다.
안 해! 안 해! 연예인 안 한다고!
망할 호구신, 그놈의 조건 좀 그만 달아! 뭐 살 때마다 '다만'이 있어? 나도 유명해지기 싫어서 연예인은 안 한다고!
"선배 뭐해요?"
깜짝이야. 들킬 뻔했네. 옥상 입구를 등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고개를 돌리자 이세연이 서 있다.
그런데 평소랑 좀 다르다. 노란 머리는 그대로인데, 옷은 여성스럽게 변했다.
검은 가죽 잠바에 블랙진을 입었던 옛날의 패션에서, 하얀색 후드티에 나풀거리는 치마로 바뀌었다.
"너 웬일이야? 되게 여성스러워졌다."
"원래 이랬어요. 학교에서는 그냥 입기 싫어서 안 입었어요."
"훨씬 낫다. 이제 20살로 보인다."
"그럼 그전에는요?"
"25살?"
"훗. 뭐 저도 선배 복학생으로 봤으니 쌤쌤이네요."
하여튼, 이세연 한 마디를 안 진다.
이세연은 쪼르륵 걸어와 내 옆에 섰다.
"할 말 있어?"
"네. 그날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한 거 같아서요."
"응? 하지 않았나?"
"음. 아... 여튼, 그날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네가 고맙다는 말을 다 하고 별일이네. 세연아 혹시?"
"네?"
"음... 오해하지 말고 들어. 혹시 만족해서 그런거. 악!"
이세연은 내 발을 밟았다.
"아 뭐야. 변태도 아니고. 진짜 저질이야."
"야! 네가 그날 서니 안 서니 하면서 놀린 건 저질 아니고?"
"그날은 술 마셨잖아요."
음주 감형이 섹드립에도 해당하는 구나.
"선배는 그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죠?"
"어? 그냥 술 마시니깐 분위기가.."
"참나.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 같아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
존 스노우 잘 지내요? 미드에 당신이 있다면 한국에는 제가 있어요.
"그럼 왜?"
"고등학교 때 내 뒷담화를 깐 애를 쌍년이라 불렀잖아요. 묻지도 않고 내 편 들어준 게 고마웠어요. 그래서 선배... 아 몰라. 여튼 그랬어요."
"그래? 그건 지금도 변함없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잘해준 사람 뒤에서 욕하는 건 쌍년이야."
"킥킥킥. 아 속 시원해! 그 일이 있었을 때 언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내가 잘 못 했대요. 수준에 안 맞는 사람이랑 논 제가 잘 못 했다고, 어차피 그런 사람이랑은 멀어지니깐, 지금이라도 맞는 사람이랑 놀라고 하더라고요."
이세인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이세연과 10살 차이 이상 나는 이세인. 그 말을 했을 때가 아마 20대 후반 정도였겠지? 사회를 경험해본 입장에서는 인간관계에서 효율을 따질 수 밖에 없다. 어차피 멀어질 사람이면 친해질 필요 없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너희 언니 말도 틀린 건 아니야. 다만 언니 말을 따르면 네 인생이 아니라 언니 인생이 되잖아? 내 말도 따를 필요 없고, 네가 결정해서 움직여. 그래야지 후회를 해도 덜 억울해."
"참나. 선배 몇 살이에요? 툭툭 던지듯이 말하는데 괜히 어른스럽네요. 내가 싫을 텐데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요."
"나는, 네가 과 밖에 있는 사람이랑 싸우면 언제든지 네 편을 들어서 그 사람이랑 싸울 거야."
"훗. 싸가지 없는 후배도, 후배이긴 한가 봐요?"
"아니. 조져도 내가 조져야지! 남이 뭐라고 하는 건 보기 싫거든. 일단 네 편을 들고, 다 끝나면 너에게 엄청 뭐라고 하려고. 악!"
이세연은 또 내 발을 밟았다.
"너는 이제 말이 안 되니깐 몸을 쓰냐?"
"참나. 원하신다면 다시 싸가지 없게 말 해드릴 수도 있어요."
"됐다. 없던 일로 하자. 축제 때 뭐 입을지는 정했어?"
"네. 고양이 코스프레에 동그라미 쳤어요."
"고양이 코스프레?"
나는 이세연을 봤다.
노란 머리에 고양이 귀를 쓰면 어떨까? 갑자기 예뻐보인.. 정신차리자.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니 신기해서. 너 그냥 평범한 거 할 줄 알았거든."
"간호복은 죽어도 싫고, 교복도 별 추억이 없어서 싫으니 남는 게 코스프레 뿐이더라고요.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 선배가 너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해줄게."
이세연은 팔짱을 끼고는 나를 노려봤다.
"어떤 거로 할 거예요?"
"확실한 건 꼬리는 해야 해. 절대 양보 못 한다. 허잇!"
이세연이 재빠르게 내 발을 밟으러 움직였다. 세 번 당하면 홍진호 형님이지. 나는 더 빠르게 발을 뺐다.
"아이씨! 꼬리는 무슨! 안 할 거니깐 그렇게 알아요. 저 갈게요."
돌아서서 옥상을 내려가는 이세연.
"세연아. 꼬리 보고 결정해. 예쁠 거야!"
이세연은 돌아서더니 오른손을 한 번 들어주고 다시 갈 길 간다.
방금 모습이 변한 이세연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기지만, 중지는 들지 않는다. 그게 어디야?
조금은 귀여워졌다.
*
다음 날.
진희와 가요제 연습을 하기 위해 노래방에 왔다.
어두컴컴한 노래방에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았다.
"진희야 노래 뭐 부를래?"
"아... 잘 모르겠어요..."
고민하는 진희. 그럴 수밖에 없다.
왠만한 남녀 듀엣곡은 가창력이 필요 하다.
내가 노래 실력을 산 지 모르는 진희 입장에서는, 유명한 듀엣 곡을 말하기가 미안할 거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 알아?"
"네. 알기는 아는데... 선배 그 노래 여자 부분이 너무 힘들어요. 다른 노래 해요."
진희는 내가 음치인 줄 알고 자기 핑계를 대면서 계속 배려한다.
"일단 한 번 불러보자."
나는 그냥 시작 버튼을 눌렀다.
"오래동안 기~ 다려 왔어~~"
진희가 박정현 부분을 부르자 감미로운 음색에 내 마음이 빠져든다.
이제 내 차례다.
"너의 눈물 속에 내 모습~~"
암재범 형님처럼 허스키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확한 리듬, 박자, 음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추억을 버리긴~"
나는 노래를 부르며 진희를 바라봤다. 진희는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크리스탈 아이템의 능력은 대단하다. 마이크를 타고 내 귀로 흘러들어 오는 소리에 내가 반하겠다.
"너 떠나고~~ 너의 미소~~"
화음 파트가 시작됐다.
나와 진희는 이별하는 사람처럼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진희는 내 팔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선배! 노래 너무 잘해요! 원래 잘했어요?"
"그럼. 그날은 너희들 재밌게 해준다고 일부러 그런 거야."
"진짜요? 와. 선배 우리 다른 노래도 해봐요."
서둘러 노래방 책을 펼쳐서 노래를 찾는 진희. 이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본다.
우리는 그 뒤로도 몇 개의 듀엣곡을 불렀다.
바이브 장혜진의 그 남자 그 여자
별 나윤권의 안부
박선주 김범수 남과 여
김동률 이소은 욕심쟁이
....
"진희야. 바이브 그 남자 그 여자로 하자."
가요제 노래는 우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노래야 한다. 그리고 나보다는 진희가 더 부각되었으면 좋겠다. 이 조건으로는 바이브 노래가 딱이다.
"우리 몇 번만 연습 해보자."
"네. 선배."
진희는 내 옆에 허벅지와 허벅지가, 팔과 팔이 붙을 정도로 가까이 와서 앉았다.
우리는 연인처럼 찰싹 달라붙은 채, 서로를 바라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도 나지만, 진희는 노래를 정말 잘한다. 나와 진희의 차이는 간단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잘 부르는 거고, 진희는 기계적 스킬에 감정이 들어가 있다.
"내~ 마음 하나 몰라주는 그 남자~"
"워오오오오 헤에~~ 아임 크레이즈, 아이 크레이지~"
나는 진희를 겨우 따라가면서, 윤민수 형님의 애드립을 넣었다.
"진희야 너 노래 정말 잘... 울어?"
"네? 아니에요... 선배 저 잠시만요."
감정이입 했나 보다. 진희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는다.
나는 진희의 머리를 감싸주며 내 쪽으로 슬쩍 끌어안았다.
"진희야. 괜찮아?"
"네. 그냥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헤헤헤. 이제 괜찮아요 선배."
"그래. 오늘은 여기 까지 하자. 이제 가자."
"네 선배."
나와 진희는 노래방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에는 몇몇 사람이 웅성웅성하며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와 진희를 보더니, 민망한지 고개를 돌리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왜? 우리 방 앞에서 무슨 일 있었나?
진희와 노래방 복도를 지나가는데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야 대박이다. 저 사람 경영과 학생회장이잖아. 가요제 나오나 봐?"
"우리 학교 매년 실음과 애들이 대상 탔잖아. 이번에는 다르겠다."
"경영 학회장도 잘하는데, 옆에 여자애는 더 잘해."
에이. 설마. 그래도 음악을 전문으로 배우는 실용음악학과 에게는 우리가 안 되지.
진희는 부끄러운지 어깨를 움츠리고 내 앞으로 숨는다.
"진희야. 저 사람들 그냥 한 말이니깐 괜히 부담 느끼지 마. 그냥 우리 둘이서 재밌게 논다고 생각해."
"선배. 만약에 대상 받으면 어떡할 거에요?"
"응?"
아기 고양이처럼 나를 올려다보는 진희. 그래 승부욕 좀 불타게 해주자.
"진희야 우리가 대상 받으면 선배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런 거 말고 저 소원 들어주세요."
"소원? 뭐 콩팥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헤헤헤 아니에요~ 어려운 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래. 알겠어. 소원 들어줄게."
"진짜요? 감사합니다."
진희의 어깨가 다시 올라갔다.
이제 가요제 준비도 끝났다. 축제 시작이다.
< 축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