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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못했던 여사친들-72화 (72/295)

< 시험 기간 >

지금 이세연에게서는 평소에 싸가지 없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가녀린 팔로 내 양손을 붙잡고는 집에 데려다 달라고 빌고 있다.

"세연아 일단 진정해봐. 현아야. 세연이 왜 이래?"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길에서 택시 잡고 있길래 옆에 가보니 펑펑 울고 있었어요. 같이 택시 잡는데 안 잡히니깐, 선배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서 같이 왔어요."

"흑흑흑. 저.... 집에 좀... 흑흑. 데려다주세요.."

울다 지쳤는지 이제는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싸가지가 있고 없고를 따질 때는 아닌 거 같다.

나는 방에 가서 차키를 들고 왔다.

"너희들끼리 먹고 있어. 선배 금방 갔다 올게."

나는 이세연의 가녀린 팔을 붙잡고 빌라를 뛰쳐나왔다.

차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수석 문을 열고 이세연을 넣었다.

나는 서둘러 운전석에 들어갔다. 시동을 켜고 네비에 손을 올린 뒤 이세연을 바라봤다.

"세연아. 너희 집 어디야?"

"흑흑흑. 서.. 서울 으아아앙."

"서울 어디?"

"엉엉.. 청... 흑흑흑 ..."

울면서 말하니깐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젠장 일단 서울로 가자.

"세연아 안전벨트 매."

"어어엉.. 흑흑흑."

"하. 가만히 있어."

나는 이세연 앞쪽으로 몸을 밀어 넣은 후, 어린아이에게 해주는 것처럼 안전벨트를 착용 시켜 줬다.

그리고 글로브박스 문을 열어 물티슈를 이세연에게 건넸다.

"이걸로 눈물 닦아.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 조금만 진정해."

- 차에 물티슈가 왜 있어?"

호구신님 지금 그런 거 물어볼 때 아니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바로 엑셀을 밟았다.

금요일 밤 11시. 현재 110킬로 달리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이세연은 여전히 울고 있다.

눈물이 어디서 계속 나오는 걸까? 저러다가 내일 실신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세연아. 집에 무슨 일 있어?"

"흑흑...제발... 선배 조금만 더 빨리.... 야가 죽었대요. 으아아아앙."

다시 이세연의 눈물이 폭발했다.

그런데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세연이 마지막에 한 말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흐느끼면서 한 말이라 정확하게는 안 들렸지만, 분명히 누군가 죽었다고 했다.

"죽었다고?"

"으아앙... 흑.... 네... 흑흑흑."

젠장. 그런 건 미리 이야기 했어야지. 110킬로로 달릴 때가 아니잖아.

차선을 일 차선에 올리고 비상등 깜빡이를 켰다. 그리고 액셀을 세게 밟았다.

점점 올라가는 속도. 나는 160킬로까지 속도를 올렸다. 교통 단속 카메라가 있었지만, 다 무시하고 밟았다.

비상등 깜빡이 덕분인지 앞에 있는 차들 대부분이 알아서 비켜줬다.

덕분에 나는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 할 수 있었다.

서울 청담동.

정신을 조금 차린 이세연이 집 주소를 불러줘서 다행히 쉽게 찾아왔다.

이세연의 집은 청담동에 있는 빌라다. 딱 봐도 비싸 보인다.

"세연아 주차는 어디에 해야 해?"

찰칵.

대답 대신에 안전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세연은 안전벨트를 풀더니 차 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나갔다.

"세연아."

그리고 고급 빌라로 들어갔다.

뭐지? 이렇게 버림받는 건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나를 부른다.

"아저씨 차 빼세요."

시불. 21살한테 아저씨라니.

"네. 알겠습니다."

하. 아 몰라. 여기까지 했으면 나는 할 일 다 했다. 이 정도면 천사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움직였다. 빌라가 있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 도로에 차를 올렸다.

디리리리링.

그때 울리는 벨 소리. 이세연인가?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건 아니겠지?

"여보세요."

- 네. 혹시 세연이 선배님인가요?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다.

"네. 그런데요?"

- 저. 이세연 언니입니다. 제 동생이 갑자기 집에 왔길래,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니 선배가 데려다줬다고 하더라고요."

"아... 네."

- 밤에 고생하셨습니다. 이대로 보내기 죄송해서 그러는데, 잠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요?"

-상황을 보니 세연이가 아무 말도 안 했을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설명은 해야 할 거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가족상인데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아... 그게 가족상이 아니라서요.

가족상이 아니라니? 나 낚인 거야? 일단 만나서 이야기 들어봐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뵙고 갈게요."

- 주소 문자로 넣어드리겠습니다. 그 앞에서 뵙죠.

나는 차를 유턴시켜서 다시 빌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세연 집 근처 커피숍.

이세연의 언니라는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다.

"반갑습니다. 이세인입니다."

"안녕하세요. 민현찬 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거 같은데,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럴까요? 그럼, 말 편하게 할게.

이세연의 언니인 이세인

신기하게도 이세연과는 완전 정반대의 분위기다.

외모는 우아한 분위기인데, 나이는 대충 봐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뭐. 중요하지는 않다. 내가 궁금한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우선 제가 오늘 일어난 일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갑자기 세연이가 펑펑 울면서 저보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급하게 달려 온 거고요. 저에게는 야가 죽었다고 했는데, 야가 누구죠?"

"나야라고 세연이가 어릴 때부터 키웠던 고양이야."

"아... 고양이요?"

"응. 한 10년 넘게 키운 애완 고양이야."

그랬구나. 나야가 고양이 이름이었구나.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네. 이제 집에 가자.

"당황하지 않네?"

"네?"

"가족이 죽었다고 오해하고 왔을 건데, 막상 죽은 게 고양이라는 걸 알면 많이 당황할 줄 알았거든."

"이세연에게는 그 고양이가 가족이나 마찬가진 보죠. 그냥 세연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튼, 바쁘실 텐데 이렇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어떤 거요?"

"세연이 대학교에서는 친구 있어?"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이세인은 이세연의 언니지만, 상식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지금도 딱 잘라 말하는 내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인다.

아마 자기 동생 성격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고 있는 거겠지. 우리 누나가 디아블로라는 걸 내가 아는 거와 같은 거다.

"그렇구나...."

"대학교에서는 이라고 말씀하신 거 보니 고등학교 때도 친구는 없었나 보네요?"

"응. 중학교 때 까지는 친구가 많았어.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는 친구가 없게 되었지. 세연이는 중학교 때 어울렸던 몇몇 친구들 말고는 없어. 왜인 줄 알아?"

"죄송하지만, 듣지 않겠습니다."

이세인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아마 동생이 걱정되어서 저에게 사연을 이야기하려는 거 같습니다만,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는 언니분에게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런 사연이 있다면 세연이에게 직접 들어야죠. 대충 예상은 됩니다. 세연이는 제가 명품 옷을 입으니깐, 저에게 말할 급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로 미루어 보아 돈 때문에 친구들과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맞아. 정확히 아네? 이야기 들은 적 있어?"

"흔한 이야기잖아요."

"후훗. 그래. 세연이는 돈 때문에 친구들하고 멀어졌어. 친구 한 명도 없이 학교 다니는 세연이가 불쌍하지 않아?"

"전혀요.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제 주위에는 더한 사람도 있어요. 10년을 넘게 주위 사람 뒤치닥 거리만 하고 보답 하나 못 받은 사람도 있고요. 정말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친구로 생각 안해서 상처받은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도 있어? 바보인가 보네."

그래. 나 바보였다.

"여튼. 그런 어설픈 사연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학교에는 이세연이 돈 많다고 색안경 끼는 사람 없어요. 세연이가 학교에서 친구 만들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행동을 바꾸라고 하세요."

"민현찬이라고 했지? 말이 조금 까칠하다?"

"네. 지금 언니분이 저 보모 시키려고 하니깐요. 저에게 이 이야기 한 이유는 세연이 챙겨 달라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죄송하다는 말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세연이가 돈 많은 선배라더니, 맞나보네. 보통은 콩고물 떨어질까 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데. 용돈 주면서 부탁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당연하죠. 우리가 시간이 없지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와.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갑부 놀이 재밌네.

하지만, 진심이다. 돈을 아무리 준대도 보모가 되어서 이세연을 챙길 생각은 없다. 그래서는 바뀌지 않는다.

"알겠어. 고등학교였으면 선생한테 말하면 되는데, 대학교는 교수가 생활을 챙겨줄 수 없으니 아쉬워. 여튼 우리 세연이 잘 부탁해."

"저는 안 챙길 겁니다."

"지금 우리가 편하게 말한다고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 내가 너보다 열 살은 많아."

"협박인가요?"

"아니. 그만큼 사람을 많이 봤고 잘 안단 말이지. 내가 보기에 너는 모질지 못해. 진짜 모진 사람이라면 여기 있지도 않고, 나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겠지."

나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세인의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른다.

한동안 20살, 21살 아이들하고만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건방져졌구나.

어떤 의도로 한 말일까 고민하는데, 이세인은 할 말을 끝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다행이야. 세연이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네?"

"걔가 싸가지는 없지만, 양심은 있거든. 내 동생 좀 챙겨줘."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이만 일어나자."

이세인은 웃은 채, 나는 떨떠름한 채 커피숍을 나왔다.

빌라에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 세 시다.

후배들은 내가 없는 집에서 놀기 미안해서인지 집으로 돌아갔다.

아오, 쓰러질 듯이 피곤하다. 폭풍 같은 하루에 진이 다 빠진다.

- 디링

집에 도착하자마자 온 문자 메시지.

- 선배. 내일 찾아갈게요.

이세연이다.

언니에게 한 소리 들었나? 내일 집 앞에서 전화 안 하고, 이 시간에 찾아온다고 미리 말하다니. 별일이 다 있네.

갑자기 서울에 갔을 때, 집 앞에서 이세연이 아무 말도 없이차에서 내린 게 떠오른다.

아니, 언니가 안 나왔으면 나는 말 그대로 운전기사가 된 거잖아?

속에서 화가 끓어오른다.

다음 날 오후. 빌라에 오고 있다는 이세연의 문자가 왔다.

과연 이세연은 나에게 어떻게 행동할까?

고맙다고 말할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말할까?

그것도 아니면 수고했다고 돈을 주고 끝낼까?

여튼 조금만 싸가지 없게 행동하면, 이번에는 단단히 뭐라고 할 생각이다.

- 딩동.

"누구세요?"

- 선배 저예요.

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너... 풉... 크하하하하!"

맨투맨 티에 머리에는 검은 모자를 쓴 이세연.

눈이 팅팅 부어 있다. 어찌나 불었는지 눈이 아니라 입술이 두 개가 붙어 있는 거 같다. 너 앞은 보이니?

"왜요?"

내가 웃자 이세연은 싸가지 없게 나를 바라본다.

팅팅 부어 있어서 눈빛을 읽을 수는 없지만, 말투로 보니 그런 거 같다.

나는 웃음을 겨우 참고 이세연을 봤다.

"어제 언니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괜찮아?"

"네. 이거 고맙다고 언니가 전해 주래요."

이세연은 한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헤네시 리차드예요. 어제 보답이에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대요."

"언니가 준 거야?"

"네."

"미안하지만, 안 받을게."

이세인이 보낸 고가의 양주. 이걸 받는 순간 나는 이세연 보모 확정이다. 물론 받아먹고 입 닦아도 되지만, 그러기에는 찜찜하다.

내가 거절하자 이세연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본다.

"너 때문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 언니가 너를 잘 봐달라고 부탁했거든. 이거 받으면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줘야만 해서 그런 거야."

"아씨. 언니는 괜한 소리 하고 지랄이야. 알겠어요. 가져갈게요."

"너는 언니가 네 걱정해서 말한 건데 지랄이 뭐야?"

"선배가 뭔데 신경 쓸... 하... 아니에요. 어제는 고마웠어요. 돈이든 선물이든 대가는 치를 테니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필요한 거 없어."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사면 돼. 네 말대로 나는 거지가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어제 네가 아니었어도 달려 갔을 거야. 좋든 싫든 나는 선배니깐."

"컨셉이에요? 아니면 일부러 멋진 척 하는 거예요?"

"태생이 그렇다 왜."

내 말에 이세연은 슬쩍 웃는다.

"훗훗훗. 참나."

"왜 웃어?"

"신기해서요. 이만 가 볼게요."

이세연은 현관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선배. 중간고사 끝나면 축제죠?"

"그렇지. 왜?"

"선배 스타일 대로 보답할게요. 축제 때 도와주면 되죠? 그걸로 퉁 치죠."

"세연아. 미안한데, 축제 때 일할 사람 많다. 너 없어도 돼."

"아. 진짜!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씩씩거리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너는 왜 내가 보답받기를 원한다고 생각해?"

"네?"

"네가 뭘 하던 나에게 필요한 건 없어. 그러니깐 그냥 누군가가 너를 위해 고생 한번 했다 생각하고 잊어. 네가 뭔가를 나에게 하려면, 나는 오히려 부담만 될 뿐이야."

"내가 안 편해서 그래요."

"나는 더 안 편하거든. 축제 때 네가 나에게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일하면, 내가 마음이 편하겠어?"

"...아니네요."

"그래. 알았으면 가봐. 멀리 안 나갈게."

이세연은 말없이 현관문을 조용히 닫는다.

나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이세연을 불렀다.

"세연아."

이세연은 다시 현관문을 열고 나를 봤다.

"축제 말야. 보답한다는 마음 말고, 그냥 놀고 싶은 마음 있으면 언제든지 와."

"네?"

"말 그대로야. 대학교 축제 때 동기들, 선배들이랑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면 언제든지 와. 그런 마음으로 참가하는 후배는 언제든지 환영이야. 어때? 축제 때 올 거야?"

이세연은 딱 3초간 나를 바라봤다.

"생각해 볼게요."

-쾅!

그러고 문 닫고 갔다.

아이고. 저 싸가지는 진짜. 나는 할 만큼 했다.

오든 안 오든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겠지.

움직이는 만큼 얻는 것, 그게 대학 생활이다.

< 시험 기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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