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70화 (70/295)

< 시험 기간 >

"선배. 감사합니다."

"오빠! 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놀러 갈게요. 성현이도 불러도 돼요?"

"덤성이?"

"네? 덤성이가 누구예요?"

엄성현의 새로운 별명이다. 당구를 같이 쳤는데 한큐에 두세 개를 먹고, 한 열큐를 쉬더니 다시 두세 개를 먹었다. 그날 당구를 하도 듬성듬성 쳐서 나와 임석훈이 덤성이라 부르기로 했다.

"엄성현 별명이야. 덤성이도 불러. 아! 마침 저기 온다. 덤성아!"

"햄! 덤성이라뇨. 너무 합니다. 안녕 현아야 진희야."

"덤성아! 너도 다음 주에 오빠 집에서 공부 하자!"

동기들끼리는 편한가 보다.

이현아는 덤성이 팔을 덤성덤성 치면서 깐죽거리고, 엄성현은 그런 현아의 머리를 잡고 슬쩍 민다.

"니는 보자마자 덤성이라 하냐? 근데 햄 집에서 공부하자고? 햄. 괜찮습니까?"

"응 너도 와서 해. 우리 보드게임 멤버잖아."

"햄. 저는 좋습니다. 오늘 당구 한 겜 어떠십니까?"

"왜 또 듬성듬성 치려고?"

"아! 햄! 저 연습해 왔습니다."

"오늘은 형 바빠. 당구는 내일 치자."

"알겠습니다. 햄 저는 가보겠습니다."

"오빠 우리도 갈게요."

"선배님 가보겠습니다."

세 사람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강의실 쪽으로 갔다.

이제 나도 수업 들으러 가자.

4월 초. 드디어 주식을 정리할 순간이 왔다.

루X 사태. 이야기로 들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미친 광풍이다.

지금도 초록창 게시판에는 10만 원이 넘어간다는 글이 넘쳐난다.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4만 원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조금씩 정리했다. 사흘에 걸쳐서 주식을 전부 매도한 결과 최종 평가액은 41억 정도가 되었다.

현재 나는 크리스탈은 181개, 현금은 42억, 포인트는 12000포인트 정도 가지고 있다.

에헴. 나도 이제 부자다!

차를 외제 차로 바꿀까? 개뿔. 지금 사봤자 의미가 없다.

사실 차는 외제 차로 바꾸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딱히 끌리는 차가 없다.

지금은 2007년. 디자인이 크게 마음에 안 든다. 차 안에 있는 네비도 손바닥만 하다.

물론 전통의 스포츠카들은 이때도 예쁘긴 예쁘다. 그래도 굳이 빌라에 살면서 스포츠카를 몰 필요는 없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크리스탈로 능력치는 하나 사야겠다.

내가 사기로 마음먹은 능력은,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님의 손길이다. 매번 JYP를 외치느라 쓴 돈이 작년에만 6000만원이다. 이제 자유롭게 씨 없이 살자.

나는 우장춘의 손길을 꾹 눌렀다.

- 항상 씨 없는 수박이 됩니다. 상대방도 무의식적으로 알기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항상 ON 상태이며 해제를 원하실 경우에만 '나는 씨가 있다' 외치면 됩니다.

구매 완료.

이제 남은 크리스탈은 81개.

현금을 포인트로, 다시 포인트를 크리스탈로 바꿔서 100개를 채웠다.

다음에 살 아이템은 조금 더 지내다가 부족한 게 생기면 사자.

그나저나 현금 40억. 이걸로 주식 투자나 더 해볼까? 혹시 알아? 내가 투자의 귀재일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하지 않는 게 맞는 거 같다.

2008년이면 바겐 세일 시작인데, 그냥 참고 있다가 그때 사는 게 더 이득이다.

막상 많은 돈이 생기니 기분이 묘하다.

부자가 되면 들떠서 여기저기 돈 쓰고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40억이라는 돈이 생기자 지금 당장 이 돈을 쓰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앞으로 뭘 사던지 돈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좋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뭐, 대학교 때는 이걸로도 충분하다.

다음 주 금요일 도서관.

톡.톡.톡

혼자 도서관에서 외롭게 공부 중인데 누군가 책상을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서영 누나가 서 있다.

"누나 왔어요?"

"응. 커피 마시자."

서영 누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흔들더니 나에게 건넨다.

우리는 도서관을 나와서 각자 손에 커피를 든 채, 근처 벤치에 앉았다.

"누나 요즘 왜 안 보여요? 어디 갔다 왔어요?"

"나 요즘 아팠어."

"진짜요? 감기 걸렸어요?"

"아니. 여기가 아팠어."

내 손을 잡더니 슬쩍 자기 허벅지 위로 올린다.

아니, 이렇게 감사한... 정신 차리자.

나는 놀라서 손을 떼고 주위를 봤다. 다행히 우리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제발. 누나는 전생에 나에게 청순가련 손예진이였어요.

"아! 진짜. 누나! 계속 그러면 나도 안 참을 거예요."

"누나는 언제든지야. 참지 않아도 돼."

"됐습니다. 그냥 참을게요. 그런데 진짜 요즘 왜 안 보였어요?"

"나 공연 하나 잡혀서 연습한다고 정신없었어. 그런데 선미랑 석훈이는?

"선미는 친척이 아파서 서울 병원에 갔고, 석훈이는 절에 들어갔어요."

"절에는 왜?"

"우리 빼놓고 아빠 양주 훔쳐먹다가 걸렸거든요. 나보고 담배 사 오라고 난린데 무시하고 있어요."

"훗. 임석훈 답다. 오늘 아쉽네. 연습만 아니면 너희 집 놀러 갔을 건데."

춤 연습이라.

"누나 혹시 파트너 안 필요해요?"

"킥. 필요 없거든요. 너 되게 음흉하다."

"뭐가요! 무슨 생각 한 거예요?"

"글쎄? 누나 젖는 생각?"

"드립 자제 좀 해주세요.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킥킥. 왜~ 좋잖아~"

"무섭거든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뭐 누나도 진짜 할 마음이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닐 거다. 섹드립 날리면 내가 당황하는 게 재밌는 거겠지.

나는 장난치며 웃는 누나에게 파일 하나를 건넸다.

"이거 뭐야?"

"족보랑 필기 노트에요."

"진짜? 고마워 현찬아!"

참나. 이거는 진짜 고마운가 보다. 서영 누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그런데 이거 나 주면 어떡해?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너보다 성적 잘 나오면 미안한데."

"그럴 일 없는 사람한테만 주는 거예요. 이거 한 번이라도 보면 다행입니다."

"너! 누나 너무 무시한다."

"이거 준 거 자체가 높게 봐준 거예요. 그래도 공부는 한다고 생각하고 준 거니깐요."

"그럼 내기할래?"

내기라는 말에 서영 누나를 봤다. 누나는 이미 양귀비로 변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누나의 이마를 두 손가락을 슬쩍 밀었다.

"됐습니다. 누나."

"이게. 어디 누나 이마를 밀어. 아~아~아~"

"아. 좀! 이상한 소리 내지 마요."

"그럼 손가락 조심해줘."

킥킥 거리며 웃는 서영 누나. 기 빨린다.

5분쯤 지나자 서영 누나는 볼일을 다 봤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 안 하고 가요?"

"응. 잠시 너희 얼굴 보러 온 거야. 내려갈게."

"같이 내려가요."

"응? 너도 가려고?"

"네. 오늘 성현이랑, 현아, 진희 놀러 오기로 했거든요."

"그래? 그럼 같이 내려가자."

나는 도서관에서 짐을 챙겨 누나와 같이 학교를 내려갔다.

띵동.

"잠시만 문 열어줄게."

저녁 6시쯤 울리는 초인종 소리. 현관문을 열자 성현, 진희, 현아가 있다.

"오빠. 우리 왔어요~"

"선배. 안녕하세요."

"햄! 왔습니다."

펑퍼짐한 상의에 츄리닝을 입고 있는 진희.

바람막이 잠바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온 현아.

험멜 츄리닝을 입고 양손에 무거워 보이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엄성현.

성현아. 밑에 바지통이 좁아서 부정맥 생기겠다.

"덤성아 너 뭐 사 왔어?"

"햄. 현아가 요리한다고 해서 장 보고 왔습니다."

"오빠.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아이고. 일단 들어와."

세 사람은 병아리처럼 들어왔다.

현아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성현이에게 비닐봉지를 받아서 주방으로 갔다.

"오빠. 주방 좀 써도 되죠?"

"현아야. 너 요리 할 줄 알아?"

"그럼요. 놀라지 마세요."

불안한데. 요리하다가 주방을 폭파하는 건 아니겠지?

"성현아, 진희야 너희 티비 보고 있어."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소파를 두 사람에게 넘겨주고 현아 옆에 섰다.

현아는 바람막이 잠바의 팔을 걷고 이미 요리를 시작한 뒤였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한쪽에는 통 새우 크림파스타를, 다른 쪽에는 목살 스테이크를 능숙하게 만드는 현아.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

가다라 가~다라 아주 가나

맙소사. 대장금이다. 지금 당장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물어보고 싶다.

"오빠 한 번 먹어봐요. 아~"

나는 이현아가 건네는 목살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 맛은 가히 요리왕비룡을 넘었으며, 부드러움은 미스터 초밥왕과 필적했다.

"와! 현아야 진짜 맛있어."

"헤헤헤. 나 요리 잘 한대도요. 이거는 이제 되었고, 오빠 거실에 좀 놓아줘요."

"네. 마님."

"꺄하하. 오빠 마님이라뇨!"

"네 요리 먹으니깐 마님이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온다. 진짜 대박이야. 덤성아 상 좀 펴줘."

"네 햄."

거실에 상을 펴는 성현이와 진희. 나는 현아가 한 음식을 하나씩 상 위에 올렸다.

조금 있자 현아가 마지막으로 크림파스타를 가지고 왔다.

"헤헤. 맛있게 먹어주세요."

"잘 먹을게 현아야."

목살 스테이크는 먹어봤고, 크림 파스타를 한 번 맛보자.

나는 크림파스타를 젓가락에 돌돌 말아서 입에 넣었다.

와. 장난 아니구나. 선미도 요리 잘하지만, 그건 아마추어 수준이다.

이현아는 프로다.

"오빠 내가 잘한다고 했죠?"

"와. 진짜 너무 맛있어."

"그렇게 맛있어요? 아닌데. 오빠 지금 너무 환하게 웃는 게 장난 같은데."

왜 웃냐고?

이현아. 내 동료가 돼라!

너 축제 때 주점에서 주방장 확정이다.

이 정도 요리 실력이면 주점이 아니라 맛집이 되겠다.

이현아가 해준 음식을 우리는 싹 다 먹었다.

나와 엄성현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테라스로 나왔다.

"햄. 여기 불입니다."

칙.

"후~~. 덤성아. 현아 요리 정말 잘한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애가 말괄량이만 아니면 참 좋을 텐데."

"크크크. 너 현아 좋아하냐?"

"아입니다. 햄."

"그럼 진희 좋아하나 보네. 그러니깐 같이 붙어 다니는 거 아냐?"

"에이. 그런 이야기 하면 저 난감해집니다. 현아는 몰라도 진희는 확실히 햄 좋아합니다."

정글러냐? 갑자기 갱킹 들어오네.

"응? 갑자기? 너 이제 형 놀린다?"

"진희는 확실히 햄 좋아합니다."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현아는 사실 긴가 민가 합니다. 걔는 햄 한테 장난치는 것처럼 우리한테도 장난치거든요. 그리고 현아 고등학교 동창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남녀공학 때도 장난 많이 쳤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남자애들 엉덩이도 팡팡 때리고 갔다네요."

원래 말괄량이였구나.

"그런데 진희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말 한마디도 안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햄이랑 있으면 애가 재잘재잘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 웃고 그럽니다."

"지랄. 니 기분 탓이겠지."

"햄. 백프로 맞습니다. 진희는 확실히 햄 좋아합니다."

진희가? 아닐 거다.

전생에도 진희는 나와 있을 때는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 웃었다. 그냥 나와 진희가 성격이 잘 맞는 것 일 거다.

"웃기네. 네가 여자를 아냐? 진희는 나에게 그냥 귀여운 후배야. 현아도 마찬가지고."

"햄. 두 사람 얼굴은 어떤데요? 둘 다 예쁘지 않습니까?"

"글쎄? 예쁜 것 보다는 그냥 귀여워."

"햄은 진짜. 눈 수술 해야 합니다. 햄 옆에 있는 사람이 선미 선배랑 서영 누나 이런 사람이니 현아랑 진희가 평범해 보이지, 둘 다 번호만 세 번 넘게 따였습니다."

그런가? 눈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나?

그런데 이놈은 왜 이리 두 사람을 칭찬하지? 슬쩍 떠보자.

"야. 형은 사실 두 사람보다 네가 궁금하다. 너 좋아하는 사람 없어?"

"저... 사실... 지연이 좋아합니다."

"지연이가 .. 메뚜기 말야? 하민이하고 붙어 다니는 지연이?"

"네. 저는 키 큰 여자가 좋습니다."

지연이가 키는 168cm로 현아와 진희 보다 크기는 하지.

그래도 지금 뱉은 말은 아무리 봐도 미끼 상품 같은데.

"진짜? 그럼 형이 지연이랑 밥 먹을 때 너 불러줄까?"

"햄! 진짜요? 그래 주면 제가 은혜 꼭 갚겠습니다!"

진짠가 보다.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남의 연애사가 보는 재미가 있다.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작교는 한번 놓아주자.

"알았다. 원래 걔들은 밥 안 사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사줘야겠다. 조만간 먹자."

"알겠습니다. 역시 햄이 최곱니다."

"이만 들어가자."

우리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 누워 있는 현아와 진희가 보인다.

"애들아. 이제 공부하자."

"오빠. 나 배가 너무 불러요."

"선배~~. 공부하기 싫어요~"

너희들 다음 주 시험이야.

나도 놀고 싶지만,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후배들이 성적 망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억지로 좌식 책상을 펴자 후배들은 마지못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한 지 30분쯤 지난 거 같다.

진희와 엄성현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현아는 이미 정신을 다른 세계로 보낸 거 같다. 한쪽 팔을 책상에 기대고 엎드린 채, 볼펜만 돌리고 있다.

그것도 잠시. 현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빠. 노래방 갈래요?"

"공부해라."

그래도 다음 주 시험인데, 최소한은 공부하자.

우리 집에서 공부하고 F 받으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저 다했어요."

"웃기네."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현아는 엄성현을 톡톡 쳤다.

엄성현은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면서 고개를 돌렸다.

"덤성아. 노래방 콜?"

"노래방?.... 콜!"

"나도 콜!"

어느새 진희까지 끼어들었다.

동시에 나를 보는 세 사람. 눈에서는 간절함이 빛나고 있다.

"너희 공부는 언제 하려고?"

"오빠. 우리 밤새기로 했잖아요. 노래방 갔다 온 다음에 공부하면 돼요."

그거 안 좋은 방법인데. 그러다가 정신 차리면 시험 날이야.

"선배~ 가요~~"

"햄. 인간적으로 소화는 시키고 공부하죠."

세 사람의 눈은 간절하다 못해 불타고 있다.

"현아야 오늘 금요일이지? 아직 우리에게는 토요일, 일요일이 남았지?"

"그럼요 오빠."

"성현아. 오늘 밤 샐 거니깐, 노래방 갔다가 와도 열 시지?"

"네 행님. 박카스도 잔뜩 사놨습니다."

"진희야."

"네! 선배. 다 괜찮아요."

아직 말도 안 했다.

"그래. 가자 애들아!"

우리 넷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빌라를 나갔다.

< 시험 기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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