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들이 >
빌라에 돌아오자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임석훈이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일어난다.
"아하~ 왜 이렇게 늦게... 너희들 뭘 그렇게 많이 사 왔어?"
"살 때 많이 사야지."
선미는 쇼핑한 걸 하나씩 꺼내서 거실에 늘어놓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임석훈은 이 상황이 웃긴지 소리 내 웃는다.
"으하하. 미치겠다. 이제 민현찬 난리 나겠네. 여왕들이 달려드는 거 아냐?"
"몰라 인마. 선미야 우리 너무 많이 샀어."
"음...많이 사기는 했네. 그래도 예쁘잖아."
- 띵동
그때 울리는 현관 벨 소리.
"누구야? 서영 언니야?"
"누나 용인에 갔잖아. 후배들일걸? 아차차! 선미야! 이거 어서 다 치워."
"왜?"
"후배들 보겠다."
"후배들에게 자랑해야지."
"그건 천천히 하면 돼. 어서 정리해서 옷방으로 옮겨 놓자."
자랑은 무슨. 만약에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세연, 박호빈, 메뚜기라면 자랑했을 거다.
아니, 자랑으로는 부족하지. 세 사람을 소파에 앉혀 놓고 패션쇼를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오는 사람은 현아, 진희, 성현이다. 평소에 나를 잘 따르는 아이들이다.
그런 후배들에게 대 놓고 자랑하는 건 긁어 부스럼이다. 괜히 나에게 없던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자랑은 사람 봐가면서 하자.
내 재촉에 선미와 석훈은 쇼핑한 물건을 정리해서 옷장에 넣었다.
이제 후배들을 맞이하자.
- 딸각
"미안. 선배들 정리 좀 한다고. 어?"
현관문 앞에는 현아, 성현, 진희가 양손 가득히 짐을 들고 서 있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하세요."
"행님. 저 왔습니다."
"너희 뭐 사 온 거야? 일단 들어와."
병아리처럼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오는 후배들. 거실에 짐을 내려놓더니 각자 자기 것 앞에 앉았다.
"애들아 그냥 오지. 뭘 이렇게 사 왔어?"
"헤헤헤. 오빠 집들인데 그냥 올 수는 없죠. 저 먹을 거 가지고 왔어요."
현아가 웃으며 아이스박스를 열자 김치와 불고기 그리고 각종 밑반찬이 보였다.
"현아야 이거 산 거야?"
"아니요. 집에서 가지고 온 거예요. 저희 집 식당 하거든요."
"너무 고마워 현아야. 그런데 어머님 힘드시겠다. 어디야? 오빠가 가게 가서 직접 인사드려야 겠어."
"그러면 미리 말해주셔야 해요. 평소에는 예약이 많아서 못 가거든요."
맛집이구나. 불고기가 두 배는 빛나는 거 같다.
현아 차례가 끝나자 성현이가 선물을 꺼냈다.
"햄. 저는 보드게임 사 왔습니다."
"보드게임?"
"네. 햄이랑 선배님들 자주 모이잖습니까. 그때 해라고 보드게임 사 왔습니다."
"이거 어디서 팔아?"
"저희 자주 가는 보드 게임방이 있습니다. 거기서 싸게 샀습니다."
임성현은 종이상자에서 보드게임을 하나씩 꺼낸다. 뱅, 할리갈리, 옛날옛적에, 루미큐브 그리고 고스톱도 들어있다.
"고스톱도 사 왔어?"
"네. 햄. 이거 빠지면 섭하죠."
"정말 고맙다 성현아. 형이 다음에 밥 살게."
"아입니다. 햄이 우리 많이 챙겨 줬잖습니까. 저희끼리 모여서 같이 생각해서 사 온 겁니다. 진희야 이제 니 거 꺼내면 된다."
크흑.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선물을 준비한 후배들 모습에 감동이 밀려온다.
"저는 레모나랑 여명 그리고 얼굴에 바르는 팩 사서 왔어요. 항상 과 생활한다고 힘드시잖아요. 술 많이 드셨을 때는 레모나랑 여명 드시고, 햇빛 많이 받고 나면 항상 팩 붙이세요."
진희는 선물을 꺼내고 귀여운 눈웃음을 짓는다.
"진희야. 고마워. 술 마시면 항상 챙겨 먹을게. 너희들 정말 고마워."
진심으로 후배들이 고맙다.
이사했다는 말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뭘 살까 고민했을 거다. 그리고 각자 나눠서 선물을 사 왔겠지.
나는 과 생활하면서 챙겨준 게 다인데.
아직 20살인 후배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 고마움의 표시는 정확하게 하자.
나는 첫 번째로 현아를 바라봤다.
"현아야. 정말 고마워. 이 선물도 고맙지만, 네 마음이 정말 고마워. 너 혼자서 오빠 생각하며 어머니 가게까지 갔다 왔을 거잖아. 그 모습이 떠오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오빠. 아니에요. 좋아해 주니깐 저도 좋아요."
현아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다음으로 엄성현을 바라봤다.
"성현아. 형이 별로 챙겨준 것도 없는데. 네 덕분에 이제 선배들 모여서 할 거 생겼어. 정말 고맙다. 형이 맛있는 거 꼭 사줄게."
"햄 저 부탁 할 게 있습니다."
"뭐? 말만 해."
"저 당구 좀 가르쳐 주세요."
"당구? 그래 내일 당장 가자. 대신 당구는 내기 당구야."
"햄 너무 합니다. 저 이제 100 칩니다."
성현아. 걱정하지 마! 형이 설마 너 돈 빼앗으려고 치겠니. 잘 가르쳐 주면서 쳐줄게.
성현이에게 말을 끝내고 진희를 봤다. 진희는 눈에 웃음이 가득하다.
"진희야."
"네."
"내 간은 항상 네가 챙겨주는구나. 내가 행사하는 모습 보고 많이 걱정되었어?"
"네... 힘드시잖아요. 밖에도 많이 서 계셔야 하고."
"이제 진희 너 때문에 힘들다는 핑계는 못 되겠다. 내가 힘들어하면 선물 안 먹은 거로 생각할 거 아니야?"
"아.. 아니예에요."
"농담이야 진희야. 힘내서 더 열심히 할게. 정말 고마워."
고마움을 표현하고 세 사람을 보았다.
세 사람은 다 같은 표정이다. 선물을 받은 건 나인데 오히려 기쁘게 웃고 있다.
"너희들 전부 다 정말 고마워. 현아야 요리는 다음에 하자. 오늘 오빠가 맛있는 거 안 사면 잠을 못 잘 거 같아."
"알겠어요!"
"뭐 먹고 싶어? 아니다. 피자, 통닭, 족발 다 시켜 먹자.
내 말에 기뻐하는 세 사람. 돈 쓰는 게 아깝지 않다.
*
치킨, 피자, 족발 전부 다 시켰다. 술도 맥주, 소주 가리지 않고 사 왔다.
음식이 오기 전 테라스에서 혼자 담배 피우는데 이선미가 집에서 나왔다.
"음식 왔어?"
"아직. 나 불 좀 줘."
-칙.
바람이 선미 머리카락을 날리자 얼굴이 보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현찬아. 네가 나보다 낫다."
"풉.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리고 원래 내가 훨씬 나았어."
내 나이가 서른한 살이야.
"아니... 진짜로. 아까 후배들 대하는 거 보고 놀랐어."
"선물 사 온 거 고맙다고 한 거?"
"아니. 후배들 온다고 쇼핑한 거 치웠잖아. 나는 후배들에게 자랑할 생각만 했거든. 내가 골라준 옷에 네가 입으면 얼마나 멋있겠어? 내가 골랐다. 자랑하고 싶었어."
여자들은 쇼핑하면 당장 입혀 보는 게 기본 스케줄이라고 들어 본 거 같다.
"그런데 후배들이 선물 들고 왔잖아. 그거 보고 깜짝 놀랐어. 만약에 거실에 비싼 명품이 깔려 있었으면 얼마나 위축되었을까? 그거까지 생각하고 쇼핑한 거 치우라고 했지? 너는 한 번씩 마음이 깊은 행동을 한단 말이야."
선물은 나도 예측 못한 건데. 비슷하니깐 넘어가자.
"당연하지. 우리끼리야 돈 쓰고 하는 거 많이 봤지만, 후배들은 못 봤잖아. 애들 보면 괜히 어색해질까 봐 일부러 치운 거야. 그런데 그걸 보고 생각한 너도 마음이 깊은 사람인 거야.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선미는 씩 웃더니 엉덩이를 친다.
"우리 현찬이 어른이네 어른. 내가 오히려 너에게 오빠라고 불러야겠어."
"그럼. 어서 오빠라고 해 봐."
"오빠~~~"
선미는 예쁜 얼굴로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며 오빠라고 부른다.
"미안. 하지 마. 징그러워."
"왜~ 오빠~~"
"내가 잘 못 했어."
"오빠~~~ 선미는 있잖아요~~"
볼에 뺨은 왜 넣냐?
"야! 하지 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왜요 오빠~~"
애교 부리며 달려드는 이선미. 하지 마! 소름 돋아. 한동안 테라스에서 런닝맨 추격전이 벌어졌다.
"야! 너희들 뭐해. 음식 왔어! 먹자."
임석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말을 툭 던지고는 다시 들어갔다.
그 찰나 같은 순간 이선미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선미야. 들어가자."
"알겠어."
"선미야. 오빠라고 안 해?"
"오빠앙~~~"
"미안. 하지 마."
"그렇게 징그러워?"
"누나앙~~~"
"미안. 안 할게. 먹으러 가자."
우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
배부르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배부르다. 거실에는 배부른 후배들 세 명과 나, 이선미가 앉아 있다. 임석훈은 지렁이처럼 소파에 누워 있다.
그런 우리를 슥 보던 이현아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오빠 우리 보드게임 해요."
"보드게임? 그러자! 임석훈 내려와 보드게임 하자."
"오케이. 뭐 할 건데?"
"글쎄? 성현아 뭐가 쉬워?"
"햄. 쉽기는 할리갈리가 쉬운데, 이 인원수면 '뱅'이 재밌습니다."
"그래? 그럼 '뱅' 하자. 너 할 줄 알지?"
"네 햄.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뱅 이라는 보드게임. 기본적으로 마피아와 비슷하다.
보안관, 부관, 무법자, 배신자가 있는데, 보안관 부관이 힘을 합쳐 무법자와 배신자를 찾아내 죽이는 게임이다. 보안관만 처음에 정체가 드러나고 나머지는 누군지 모른다.
죽이는 방법은 총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상대방에게 사용하면 된다.
공격을 당한 사람은 빗나감 카드로 총을 피할 수도 있고, 맥주 카드로 깎인 체력을 채울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게임 카드가 있다.
"햄. 이거 그냥 하면 재미없습니다. 총 쏠 때는 실제로 총 쏘는 척하고, 빗나감 쓸 때는 입으로 '휙' 말해야 합니다. 총 맞으면 '악!' 비명도 내야 하고요."
"성현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헤엠. 그래야지 재밌습니다. 몇 번 해보면 이해되니 바로 하죠."
그래 한 번 해보자.
*
재밌다. 미친 듯이 재밌다.
7인용 게임인데 6명이 하는데도 재밌다.
"오빠 무법자죠?"
"현아야. 아니야! 나 부관이야. 너 보안관이잖아. 나 없으면 안 돼."
"아닌데. 씁. 그럼 선미 선배가 무법자인가?"
"현아야. 학교생활 편하게 하고 싶지?"
"악! 게임에 이러는 게 어딨어요."
"봐봐! 이선미가 무법자래도. 아니면 저릴 리가 없잖아."
"나 진짜 아니야."
전부 다 죽고 세 명만 남았다. 고민하는 현아. 결국 이선미에게 총을 돌린다.
"선미 선배 뱅!"
"휙~ 빗나감. 이제 내 차례지? 이현아 뱅!"
"으악! 아씨. 나 이제 생명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오빠 차례예요."
"그래? 이현아 뱅!"
"어? 잠시만. 설마?"
"그래. 나와 이선미 둘 다 무법자야. 이미 게임은 끝난 거였어."
"킥킥. 현아야 미안."
하이파이브하는 나와 이선미. 땅을 치는 이현아.
시작하자마자 죽은 임석훈은 억울한 표정으로 현아를 본다.
"현아야. 내가 부관이라고 했잖아. 엄마까지 걸었는데."
"죄송해요. 진짜 아닌 줄 알았어요. 아씨! 그리고 이제 엄마 못 걸게 하죠."
인정. 나도 임석훈을 나무랐다.
"그래. 너 엄마 가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너는 전 판에 아빠 걸었잖아."
나도 인정. 이게 뭐라고 한번 시작하니깐 진실 일 때는 모든 걸 다 걸게 된다.
엄성현은 발가락 꼬았으니 건거 아니라고 우기고. 난리다 난리.
"자 벌써 열시야 이제 막판 하자! 이제 가족 걸기 없기다."
"네. 그럼 시작할게요."
현아가 카드를 섞어서 우리에게 나눠줬다.
첫 번째 내 앞에 온 역활 카드. 과연 뭘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뒤집자 보안관이 보인다.
"내가 보안관이야."
무조건 자신을 공개해야 하는 보안관. 내 정체를 공개하고 사람들 얼굴을 봤다.
초조한 표정의 이현아와 엄성현.
포케 페이스 이선미와 임석훈.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보는 진희. 왠지 나를 도와주는 부관 같다.
시작된 게임. 임석훈이 엄성현을 노려본다.
"너 무법자지?"
"성현 햄. 아입니다."
"그런데 다리는 왜 떨어?"
"아. 그게."
"뱅!"
임석훈을 시작으로 성현이를 공격하는 사람들. 한 바퀴 돌자 성현이는 아웃되었다.
한동안 계속된 난타전에 배신자인 이현아도 아웃.
이제 다들 목숨이 하나씩밖에 안 남아 있다.
서서히 보안관이 나설 차례군. 나는 손으로 석훈을 가리켰다.
"뱅!"
"어? 이 미친놈아! 나 부관이야."
"눼눼~ 그러시겠죠."
"내가 방금 무법자 잡은 거 못 봤어?"
"너 아까도 같은 무법자 잡고 아이템 다 뺏은 다음에 이겼잖아.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면 바보지."
"현찬아. 나 진짜 부관이야."
"눼~ 눼~"
나를 따라서 공격하는 이선미와 진희. 임석훈은 아웃되자 머리를 긁적인다.
"안 통하네."
"내가 바본 줄 알아?"
이제 남은 사람은 이선미와 진희다.
하나는 무법자고 하나는 부관인데, 생명은 다들 한 개밖에 없다.
"현찬아. 나 부관이야! 진희가 무법자야."
"저 부관이에요. 선미 선배가 무법자예요."
"어머. 진희 너!"
"자자. 둘 다 진정해.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
"뭐?"
"뭐예요?"
"둘 다 뱅!"
광역 무기를 사용했다. 두 사람 다 회피 카드로 피 한다.
두 사람은 공격 카드가 없나 보다. 공격 없이 다시 한 바퀴 돌아서 내 차례가 되었다. 이선미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본다.
"현찬아. 나 진짜 부관이야. 만약에 아니면."
"아니면?"
이선미는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귓속말했다.
'나 오늘 자고 갈게. 나 죽이면 바로 집에 갈 거야.'
"이선미 뱅!"
"어? 야!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 말 두 번째야. 또 속을 거 같아?"
"아씨. 나 진짜 부관이야!"
"또 당하면 바보지. 이선미 뱅! 어서 죽어라!"
"나 부관이래도."
이선미는 역할 카드를 내 앞에 놓았다.
딩딩딩 과연?
"어? 부관이네?"
"부관이라고 했잖아!"
잠시만 그렇다면.
고개를 진희에게로 돌렸다. 진희는 양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나를 겨냥하고 있다.
너 공격 카드 없는 거 아니었니? 이 순간을 위해 참은 거야?
"헤헤헤. 선배 뱅!"
"으아아! 진희 너! 너무 한다."
"헤헤헤. 왜요~"
"나 상처받았어. 울 거야"
"아아아~~ 그러지 마요~ 게임이잖아요~"
혼난 강아지처럼 나를 바라보는 진희. 장난도 못 치겠다.
"진희야 농담이야. 오늘 끝! 다들 즐거웠어!"
"네. 저도 재밌었어요."
"오빠 다음에 또 올게요."
임석훈과 후배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집을 나갔다.
현관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자 이선미가 소파에 누워있다.
"선미야? 안 갔어?"
"응? 나 오늘 자고 간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이선미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오래간만에 둘이서 맥주 한잔하자."
"콜."
나는 맥주캔을 가지고 거실로 왔다.
< 집들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