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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못했던 여사친들-64화 (64/295)

< 2학년 1학기 개강 >

"네...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어요."

"그것도 괜찮아. 후배들 마음 다 받아주는 좋은 선배. 얼마나 좋아? 능력 있고 여유 있으면 하면 돼지. 너는 능력도 있고 여유도 있고. 충분히 좋은 선배 될 수 있어. 그런데 한 단체에는 좋든 싫든 악역은 무조건 필요해."

"그렇긴 하죠."

"네가 착한 역을 맡으면 누가 악역을 맡게 될까?"

"호빈이요?"

"아니. 걔는 병신역이고."

누나 알고 계셨군요. 역시 파라오는 위대하다.

"그럼 누구요?"

"이선미야. 내가 그랬거든. 종수 오빠가 과 대푠데 좋은 사람이었잖아. 그래서 내가 악역을 했어. 현찬이 너도 마찬가지야. 오늘 만약 그 자리에 선미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할 말이 없다. 선미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욕하고 내가 말리는 그런 모습이 나왔겠지.

"너는 후배가 중요해 선미가 중요해?"

"저요? 저는 선미가 중요하죠."

"그렇지? 네가 악역을 안 하면 아마 선미가 악역을 하게 될 거야. 악역이 더 힘든 거 알지? 선미가 중요하다면 네가 악역까지 해줘. 나는 악역 하느라 너무 힘들었어."

말을 끝낸 혜진 누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학생회가 다 끝나서 그런가 후련해 보인다.

"누나 4학년 되니 오히려 편해 보이네요."

"그래? 살 빠져서 얼굴이 좋아진 거 아닐까? 편하기는 무슨. 취직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작년이 그리워."

"나중에 제가 술 한잔 사드릴게요.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저 불러요."

"후후.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후배님. 나 이제 가볼게. 힘내! 화이팅 민현찬."

누나는 토익책을 들고 걸어갔다.

혜진 누나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이전 생에서 나는 진희를 제외하고는 친한 후배 거의 없었다. 끽해야 밥 잘 사주는 선배?

밥을 먹기 위해서 나에게 연락하는 후배가 있었을 뿐, 마음으로 따르는 후배는 없었다.

다시 태어난 생에서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후배들이 생기자 마냥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그냥 다 넘겼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깐.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을까?

회사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 게 현실인데.

대학 생활도 다를 거 하나도 없지. 그 사람들이 커서 되는 게 직장인이니.

그렇다고 후배들이 갑자기 밉거나 꼴 보기 싫은 건 아니다.

선배로서 적절한 선을 정해주자. 혜진 누나처럼 과하지도 않고, 종수 형처럼 말랑하지도 않은 선으로.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것이 될 거다.

그러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 상태로 공원에서 일어나 자취방으로 갔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은 체조경기가 있나 보다. 많은 사람이 술 취해서 굴러다닌다.

얼씨구나. 한 명은 올림픽 메달을 땄나 보다. 자취방 가는 길에 여자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다.

그런데 이현아다.

"이현아!"

"흑...아. 선배."

"뭐해?"

"...선배 기다렸어요. 흑흑."

눈물을 닦으며 내 앞에 서는 이현아. 이미 눈은 퉁퉁 부었고, 어깨는 계속 떨고 있다.

"선배... 죄송해요."

"현아야. 조금만 진정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나를 쳐다본다.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나쁜 놈 아니에요!

일단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우리 어디 가서 좀 앉자."

편의점에서 생수를 한 통 사서 현아와 근처 놀이터로 갔다.

놀이터에 앉은 우리 둘.

"선배... 여기요."

이현아는 내 앞에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뭐지? 자퇴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현아가 꺼낸 종이를 봤다. 다행히 평범한 편지지였다.

- 선배, 저는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선배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그렇지 않을게요. 그리고 술에 취해서 동기들을 챙기지 못했어요.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요. 다시 선배랑 잘 지내고 싶어요. 오늘 미안했어요.

"하하하하. 너 뭐야?"

"흑흑.. 이렇게 안 하면 선배가 진심을 안 믿어 줄 거 같아서요. 저 울면서 온 게 벌써 두 번째잖아요. 흑흑.."

눈물에 범벅이 된 편지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선배의 비밀' 이 부분은 수정이 조금 필요할 듯 한데?

일단은 넘기자.

고개를 들어 현아를 봤다. 양손으로 계속 눈물을 닦고 있다.

눈물이 많은 아이였구나. 전생에서는 항상 활기찬 모습만 봐서 몰랐다.

"현아야. 일단 조금 진정해."

"흑..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예...."

"왜 편지까지 쓴 거야? 그냥 내일 미안하다고 해도 되잖아."

"선배 웃는 얼굴을 다시 못 볼까 봐 무서웠어요."

"웃는 얼굴?"

"흑... 네... 항상 우리를 보며 웃어줬던 선배잖아요. 흑흑.. 갑자기 화내서.. 그리고 다시는 우리 보면서 안 웃을까 봐... 죄송해요. 으아앙."

아이고. 이걸 어째야 하냐.

그래 이현아는 이제 20살이다. 22살만 되었어도 선배 미안해요 라고 문자 한 통 날리고 끝냈겠지. 아직 고등학생의 순수함이 남아 있다.

편지를 다시 읽자 혼자 자취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쓰는 이현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를 생각하는 이현아의 마음이 정말 고맙다.

나는 이현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 줬다. 그러자 현아는 아기처럼 내 품에 꼭 안겼다.

한동안 계속 우는 이현아. 5분쯤 지나자 눈물을 그쳤다.

"좀 괜찮아?"

"네... 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눈물 이제 안나?"

"네..."

그럼 이제 포옹을 끝내야 하지 않을까? 타이밍 못 잡겠네. 갑자기 밀쳐 버릴 수도 없고.

이현아는 내 품에 안긴 채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배... 나 양동생 할래요."

안 해주면 또 울 기세다.

"우리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꼭 하고 싶어?"

"네... 하면 눈물 그칠 거 같아요."

"알았어. 양동생 해."

"네. 오빠~~"

웃으면서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이현아. 현자가 되었지만 귀엽다.

"이제 좀 놓아 주는 게 어떨까요? 동생님."

"싫어요. 오빠한테 조금 더 안겨 있을래요."

나를 더욱 꼭 앉는다.

참. 이런 상황에서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다니. 서글프다.

이현아를 여사친으로 등록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깜짝이야! 엄성현이다.

"현아야. 엄성현이야."

"네? 오빠 진짜요?"

이현아는 화들짝 놀라면서 떨어졌다. 엄성현은 다행히 포옹이 끝나고 나서, 우리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성현아!"

"행님! 안 그래도 행님 자취방 가고 있었습니다. 현아 너도 여기 있었네?"

"내 자취방은 왜?"

"여기 카드입니다. 아이들 아이스크림 다 먹였습니다."

"잘했어. 손에는 뭐야?"

"아. 이거 우리가 돈 모아서 산 겁니다."

엄성현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나에게 건넸다. 봉지 안에는 여명, 헛개수, 가루약, 우유 그리고 담배가 들어 있다.

"이게 뭐야?"

"다들 행님한테 미안해서 돈 모아서 산 겁니다. 저희한테 잘 해줬는데... 죄송합니다. 행님."

조폭처럼 고개를 숙이는 엄성현. 너 일진이었지? 그나저나 기특하다.

"하하하. 진짜? 누구 생각인데?"

"전부 똑같은 생각입니다. 현아 너도 이제 행님 한테 잘해라. 이상한 소문 내지 말고."

"성현아. 걱정하지 마. 현아가 말이야 다시는 소문 안 낸다고 여기 편지를."

"악! 오빠! 말 하지 마요. 야! 임성현 너 절로 가."

편지를 흔들자 이현아는 나에게 달려든다.

이 편지 후배들 오면 '너희 선배가 말이야 하면서' 그대로 보여 줄게.

결국 편지는 내 호주머니에 들어갔고, 이현아는 차마 손을 못 넣는지 발만 동동 굴렸다.

이런 우리 둘을 보던 임성현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아! 행님. 맞다! 이세연이 행님 자취방 물어봤습니다."

"내 자취방? 왜?"

"모르겠습니다. 대답해 주니깐 바로 끊던데요?"

시불. 왜? 혹시 닌자를 보내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오빠..."

"괜찮아. 현아야. 그냥 물어본 거겠지. 이제 집에 가자."

나는 후배들과 놀이터에서 헤어졌다.

내 자취방 바로 앞. 빨간색 BMW Z4가 서 있다.

차 속에서 나를 계속 보고 있었는지 근처에 가자마자 조수석에서 이세연이 내렸다.

운전석에서 닌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표창을 던지지는 않겠지?"

차에서 내린 이세연은 짜증이 가득 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왜? 할 말 있어?"

"...."

"없으면 들어간다."

"욕 안 할게요. 대신 선배들도 제대로 하세요."

할 말 다 했나 보다. 이세연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차에 올라탄다.

"이세연!"

"...."

"술 먹고 운전하는 건 아니지?"

"대리 기사 옆에 타고 있어요."

돈은 저렇게 쓰는 거구나. 대리기사를 불러서 하루 동안 자기 기사로 쓰다니.

"알았다. 내일 보자."

이세연은 대꾸도 안 하고 차에 타고 갔다.

나한테 욕 먹은 게 자존심 상해서 온 건가? 에라. 역시 이세연은 피하는 게 답이다.

대학교 3월은 정말 술 잔치다.

이틀 전 일 학년 개강주를 한 곳에서 오늘은 우리과 전체 개강총회를 하고 있다.

우리를 손절 했던 사장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소주를 나눠주고 있다.

개강총회 하기 전에 걱정이 많았다. 내 잔소리에 후배들이 위축되지는 않았을까? 내가 꼰대는 아니었을까? 고맙게도 헛 걱정이었다.

후배들은 오늘도 신발놈의스키가 되어서 술을 마시고 있다.

그래도 현아는 적당히 조절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왜요. 오빠?"

"현아야. 오늘은 술 마셔도 돼."

"싫은데요? 또 잔소리할 거잖아요."

"안 해. 오늘은 선배들 있잖아. 우리가 챙기면 돼. 마음 놓고 마셔."

그때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임석훈.

"민현찬. 후배한테 계속 술 마시라고 하고. 너 뭐 하려고 하는 거야?"

"지랄. 후배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요."

"그래요. 석훈 선배. 그리고 저 현찬 오빠 양동생이에요."

"뭐? 양동생? 내가 잘 못 들은 거야? 양동생? 진짜?"

"네!."

"으하하. 선미야 여기로 와봐."

"왜?"

"현찬이 양동생 생겼데."

"뭐? 양동생?"

아이고 머리야. 내 이럴 줄 알았다. 나와 현아를 둘러싸는 친구들.

이현아는 자랑스럽게 보지만 나는 손발이 사라져서 도라에몽이 되었다.

그런 거는 비밀로 해야지!

"야. 나 담배 하나 피고 올게."

"양동생 놔두고 어디가?"

임석훈에게 중지를 들어주고 술집을 나왔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진희가 술집 문을 열고 나온다.

데자뷔구나. 이번에도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다.

"진희야. 또 가지고 왔어?"

"네. 선배. 이거 드세요."

"땡큐."

진희는 아이스크림을 건네더니 내 옆에 섰다.

"선배. 현아하고 양동생 했어요?"

"응. 너도 양동생 하고 싶어?"

"아니요."

"오해하지마. 양동생이든 아니든 너나 현아나 나에게는 소중한 후배야."

"전혀 오해 안 해요. 저는 선배가 양동생 하자고 해도 안 할 거예요."

"그래? 하긴 유치하기는 하지."

"다른 이윤데요?"

나는 진희를 바라봤다.

"다른 이유?"

"네."

"뭔데?"

"동생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친구?"

"비슷한 거예요. 담배 다 피우셨으면 우리 이제 들어가요."

진희는 내 팔을 잡고 술집으로 끌었다.

개강총회가 끝나고 내 자취방으로 온 선미, 석훈, 서영 누나, 나.

네 명이 맥주를 한잔하고 있다.

선미는 맥주를 홀짝 마시면서 나를 본다.

"현찬아. 너 이틀 전에 후배들 잡았다면서?"

"응. 누구한테 들었어?"

"호빈이한테. 자기가 잡으려고 했는데, 네가 나서서 참았다던데?"

참 한결같은 놈. 제발 좀 변해라.

"그러게 말이다. 그 새끼 언제 군대 간데?"

"2학년 하고 안 갈까? 왜?"

"빨리 보내버리고 싶어서."

"너는? 너도 가야지."

나는 면제 살 거야.

한동안 계속 맥주를 마시는 우리. 시간이 1시를 넘기자 이선미가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나 집에 가야겠다."

"왜?"

"아. 죽겠어. 너무 피곤해."

따라서 일어나는 임석훈.

"나도 집에 가야겠다."

"그럼 오늘 여기서 마무리하자."

"나는 더 마실 건데?"

우리 모두 서영 누나를 봤다.

"누나 더 머신다고요?"

"응. 현찬아. 나 두 병밖에 안 마셨어."

"누나는 어떻게 술을 마셔도 살이 안 쪄요? 대단하십니다."

"운동하니깐 그렇지. 너희 먼저가."

"네 언니. 우리 먼저 갈게요."

"누나. 나도 갈게요. 현찬이 조심해요."

임석훈은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이선미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끌려갔다.

이제 내 자취방에는 나와 서영 누나만 남았다.

꿀꺽.

오티때 누나한테 들었던 말 때문인지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너 왜 그래?"

"네? 왜요?"

"아니 긴장한 거 같아서."

"아니에요. 기분 탓이에요. 맥주나 먹죠."

비워지는 맥주들. 한 캔, 두 캔, 하이네켄.

술이 비워지는 만큼 누나의 눈도 풀린다.

"누나. 이제 그만 먹죠. 잠 와서 죽겠어요."

"그럼 잠 깨는 이야기 해 줄까?"

"됐어요. 안 들을래요."

"왜~ 화들짝 놀랄 이야기인데."

"뭐예요?"

"현찬아. 우리 작년에 개강주 마셨을 때 있잖아. 혜진 언니 온 날."

"네. 누나 그날 기억 끊겼잖아요."

"너랑 은미랑 할 때 나 중간에 잠에서 깼다."

소오름! 레알? 갑자기 술이 확 깬다.

"뭐라고요?"

"응. 더 놀라게 해 줄까?"

"네?"

"다하고 담배 피우러 나가면서 내 치마 올리고 갔잖아. 그때 나 깨어 있었어. 왜 누나 치마 들어서 팬티 보고 갔어?"

현자가 되어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그랬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누나는 씨익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 2학년 1학기 개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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