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학년 1학기 개강 >
컴퓨터실에 가자 이세연이 혼자 앉아 있다.
"세연아. 선배 찾았다면서."
"예."
내가 옆에 앉자 흘깃 쳐다본다.
노란 머리에 짙은 화장. 가슴골이 조금 보이는 상의. 짧은 치마에 검은색 스타킹.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다. 얼핏 보면 20대 중반인 줄 알겠다.
"수강 신청한 거 확인해주세요."
이세연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툭 던졌다.
이놈의 싸가지를. 내가 디아블로 같은 우리 누나한테 익숙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우리 누나랑 이세연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날 전국에 딸을 둔 어머님들은 고혈압으로 쓰러질 거다.
지금 당장 노란머리를 카레국에 넣어서 끓여 먹고 싶지만, 세 번의 기회는 줘야지. 세면대 한번, 오늘 두 번째. 너 이제 한 번 남았다.
일단 이세연 수강 신청표를 봤다.
아름답구나. 완벽하다. 이대로면 이세연은 이번 학기 아침에 등교해서 저녁에 마치고, 대학교 끝에서 끝으로 걸어 다녀야 한다.
"이거 네가 짠 거야?"
"네."
"꼭 들어야 하는 수업 있어?"
"아니요."
"그럼 내가 다시 짜줄게. 수강정정 기간이니깐 지금 정정하자."
전공은 원래대로 놔두고 교양 수업을 바꿨다. 멀리 있는 교양 과목들은 가까이 옮기고 시간도 바꿨다.
"이제 한 과목 남았는데, 주말까지 계속 틈틈이 확인해봐. 잘하면 비는 곳 생길 수도 있거든. 대부분 현아나 다른 아이들이랑 겹치는 교양이니깐 혼자 안 들어도 될 거야."
"알겠어요."
이세연은 남이 해주는 거는 익숙한가 보다. 아무런 고마움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호빈 선배랑 친해요?"
"어. 나름 친하지. 왜?"
"그럼 문자 그만 보내라 하세요. 병신같이 쌩까도 보내고 지랄이야."
와. 이거는 선 넘었다. 아무리 박호빈이지만, 그래도 선배인데.
"아침이랑 밤마다 문자 보내는 거 미친 거 아냐. 졷같으니깐 그만 보내라 하세요. 내가 말해도 되지만, 마지막으로 선배 체면 차려 주는 거예요."
너희 둘 사이는 너희 둘 사이고. 그걸 왜 나한테 뭐라 해? 서서히 화가 올라온다
"너 그런데 원래 욕 많이 해?"
"네. 왜요? 욕하지 말라고 하려고요?"
"네 입으로 네가 욕하는 거지만, 내 앞에서는 하지 말지. 듣기 안 좋거든."
나를 노려보는 이세연.
"선배도 마음에 안 드는데,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그래도 말은 통하니깐. 가볼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회사 부장님처럼 어깨를 툭툭 치고 간다.
빠직.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선 자체를 모르는 이세연. 웬만하면 넘어가려고 했다. 얽히는 것도 싫지만,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데 내가 애써서 이래라저래라 말하기 싫다.
뭐 이쁘다고 충고해줘?
내 옆에 있는 친한 사람 신경 쓰기도 바쁜데 괜한 일에 스트레스 받기 싫다.
하지만, 내 선을 넘어 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면 문제없지만, 이거는 명백한 공격 행위. 맞고 가만히 있는 건 호구가 아니라 바보다.
기어 서드. 꼰대 변신이다.
"이세연."
컴퓨터실을 나가던 이세연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선배가 싫은 소리 할게. 나는 네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든 관심 없어. 누구한테 욕하고 다니던, 짜증 내고 다니던 그건 네 학교생활이니깐."
"...."
"하지만, 너 때문에 내가 짜증 나는 건 싫어. 내가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 도와주고 욕먹을 필요는 없잖아?"
이세연은 기분 나쁜지 얼굴이 붉어졌다.
"하. 선배 어이없는 거 알아요? 이현아가 선배 이상한 소문 내고 다니는 거는 괜찮고, 내가 이거 조금 부탁 한 건 기분 나쁜 거예요?"
"현아는 잘하니깐. 그래, 이현아가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 냈지. 뭐 어때? 그만큼 잘하는데. 과 생활 열심히 하고 내 친구들한테도 잘하고. 이현아가 소문낸 거? 나에게는 그냥 귀여운 장난이야."
언젠가는 증명하면 되고. 잠시만. 뭔가 이상하네.
"그럼 저는요?"
"너는 나에게 자기 필요할 때 선배 찾는 후배에 불과해. 그것도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찾는 후배."
"제가 무슨 예의를 안 지켰죠?"
"오티때 너는 이선미를 끌고 나를 찾아와서 부탁했지? 오늘은 이현아가 대신해서 부탁했고. 최소한 자기 일을 부탁할 때는 네가 직접 와서 해."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이세연. 뭐 인마?
"아 시발. 짜증 나. 알겠어요. 다음에는 직접 찾아갈게요."
-쾅!
이세연은 문을 닫고 나갔다.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대답이네. 잘하겠다는 거야 안 하겠다는 거야?
아. 몰라. 지금까지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나도 컴퓨터실을 나갔다.
*
땅-따따따-땅
"에쓰! 에쓰! 에~~~~스!"
"뭐야. 야! 마지막 가락구를 쫑으로 빼는 건 아니지."
"꺼져. 어때? 민현찬. 발린 기분이?"
저녁 7시쯤 집에서 풋볼매니지먼트 하고 있는데, 당구 치자는 임석훈의 전화가 왔다.
임석훈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5판 3선승을 하자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폐관 수련한 건가? 실력이 엄청 늘었다. 이제 200은 되겠다.
"너 누구한테 배웠어?"
"너한테 하도 발려서 다마 1000에게 배우고 왔다. 당구 졷밥. 어서 가서 돈 내라."
으아!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게임을 못 한다고 말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시불. 얼마 전에 위닝도 발렸는데.
"현찬아 혹시 고자라서 당구 실력 준 거야? 어? 이 당구공이 혹시 너···"
"미친놈. 그래 내 알이다. 됐냐? 칠 때마다 움찔움찔해서 못 쳤다."
"크크크. 미치겠다. 그런 이유라면 네 실력이 안 나온 거 인정."
계속 깐죽거리는 임석훈. 너 두고 보자. 나도 특훈해서 오겠다.
임석훈은 당구장을 나오자마자 집으로 갔다.
목적의식 명확한 놈. 정말 당구만 이기고 집에 가다니. 심심해서 맥주나 한잔 마시려고 했는데.
선미는 전화하니 잔다고 바로 끊고. 후배들은 자기들끼리 술 마시고 있을 거고.
지금 시각은 밤 열 시. 심심하지만 놀 사람이 없다. 일단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는 길. 새 학기 초여서 그런지 길거리에 많은 대학생이 있다. 굴러다니는 사람, 잡아채 가려는 사람. 여긴 대학가 술집이 아니라 정글이구나.
"야! 선배 자취방 가서 한 잔만 더 하자."
"제가 거길 왜 가요. 저 친구 만나러 가야 해요."
"왜~ 조금 더 놀자. 친구 누구? 친구도 오라 해"
술집 앞에서 실랑이하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왜 둘 다 아는 사람이니? 연영과 학회장과 이혜민이다.
연영과 학회장은 사마천인지 오늘 밤에 기필코 역사를 이루고 싶어 하는 눈빛이다.
참 아직 어린 중생이구나. 섹스는 갈구하는 게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거늘.
길가면서 쓱 보는데 이혜민과 눈이 마주쳤다.
"현찬아! 선배! 친구 왔어요. 먼저 가볼게요."
"뭐? 어? 현찬이네. 혜민이가 만나기로 한 친구가 너야?"
잠시만 갑자기 나를 왜 끼워 넣어?
뭐라고 말하려는데 연영과 학회장이 내 앞에 서더니 노려본다.
붉게 물든 얼굴. 술 많이 마셨네.
주위에 후배들이 지켜보자 가오가 정신을 지배했는지, 양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오늘 육상 대회 있나? 선 넘는 사람들이 많네. 그리고 내가 지배당해봐서 아는데 너 후회할걸?
"야! 너 왜 남의 과 애들까지 건드리고 다녀?"
학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글 한복판에 사자 두 마리가 싸우는 걸 구경하기 위해서인지,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우리를 구경한다.
그 모습을 보자 당황하는 이혜민. 나와 학생회장 사이에 끼었다.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현찬아 미안. 그냥 가."
"그래 가던 길 가. 남의 과에 끼지 말고."
가던 길 그냥 보내려면 아예 시비를 걸지 말았어야지.
"가던 길 갈 건데 말이 좀 그렇네요."
"뭐?"
"말이 그렇다고요. 내가 가든 말든 뭔 상관이에요?"
"뭐? 이 새끼가 돌았나?"
주먹을 드는 연영과 학회장. 당장이라도 한 데 칠 기세다.
싸울 생각은 없다. 맞을 생각은 더 없고. 애들 장난 같은 싸움 빨리 끝내자.
"잠시만요. 전화 한 통만 할게요."
"뭐?"
"있어 봐요. 얼마 안 걸리니깐."
- 여보세요?
"네 박인혜 대표님. 저 민현찬 입니다."
- 아. 현찬 씨 어떤 일이죠?"
"연영과에 교수님 아신다고 하셨죠?"
- 네. 마침 지금 같이 있어요. 무슨 일이죠?
"여기 학교 앞인데 연영과 학회장이 술 먹고 사고 치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 네? 일단 잠시만요. 야. 너희 과 학생이 학교 앞에서 사고 치고 있다는데? 뭐? 알았어. 바꿔줄 게
- 민현찬 씨죠? 인혜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제 친구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 학생이 사고 치고 있다고요?
"네. 술 취한 일학년을 자취방에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거든요. 전화 바꿔 드릴 테니 이야기 좀 잘 해주세요."
당황하는 연영과 학회장.
뭐해? 어서 너희 교수님 전화 받지 않고?
내가 건넨 휴대전화를 들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았다.
"여보세요. 예? 아... 아닙니다. 그게. 교수님 사실은."
뭐라고 변명을 하지만, 통하지 않나 보다.
"네.. 네. 들어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한숨을 쉬면서 전화기를 나에게 건네는 학생회장. 열 받는지 노려본다.
"왜요? 더 할 말 있어요?"
"아씨. 다들 뭐 봐!"
학회장은 전봇대를 발로 팡 차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너 백프로 내일 절뚝거릴 거다.
아직 해결해야 할게 하나 더 남아 있지.
바로 내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혜민. 이 기회에 이야기 좀 해야겠다.
"혜민아. 이야기 좀 하자."
"···알겠어."
나와 혜민이는 번화가를 나왔다.
*
시간도 늦었고 혜민이 자취방 앞 공원에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멀리도 자취방 잡았다."
혜민이 자취방은 우리 자취방과 정반대였다. 다시 내 자취방 가려면 20분은 넘게 걸어야겠다.
"그냥. 이쪽이 저렴해서."
"뭐. 그게 더 편했겠지. 오늘 무슨 일인데?"
"그 선배가 계속 자취방 가서 술 먹자고 해서. 저 선배 소문 안 좋아. 연기 연습할 때 키스신 있으면 혀 집어넣고 그런데."
나쁜 놈은 맞네.
"그래서 갑자기 길 가는 나를 부른 거야?"
"응. 미안."
"진짜 미안해야 할 건 다른 거지. 재입학 하면서 어떻게 연락 한 번 안 해?"
"그냥···"
"네 마음도 이해해. 나랑 사귄 게 너에게는 부담이겠지. 그래도 선미한테는 연락했어야지. 너 재수하면서도 선미 가끔 만났잖아. 수능 끝나고도 보고."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럼?"
"아씨··· 재수해서 같은 학교 왔다는 게 쪽팔리잖아. 너희들 보기 쪽팔려서 그랬어."
"나랑 사귄 거 때문이 아니고?"
"그래! 그런 거 신경 안 써. 재수해서 같은 학교 왔는데 너희들 어떻게 봐? 나 돌머리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안 해본 사람은 몰라. 재수하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주위에서도 재수하고도 같은 학교밖에 못 갔냐고 얼마나 뭐라 하는데. 그런 이야기 들으니 너희들 보기 쪽팔렸어. 아씨. 미안. 흑···."
왜 우냐?
울면서도 계속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혜민. 집에서도 욕 많이 먹었다고 한다.
예체능은 전과가 안 된다고 말했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학교 이름이 중요했다.
남들이 물어봤을 때 학교 이름만 이야기하면 아무 차이가 없으니 혜민이를 아주 달달 볶았단다.
혜민이는 그 스트레스 때문에 우리까지 피하게 된 거고.
"고생 많이 했네."
"흑. 아니야. 미안해. 선미한테도 미안하다 해야겠어."
"그래. 선미한테 꼭 이야기 해."
"응. 미안···진짜 미안···"
"알겠으니 그만 울어."
"으아아앙."
왜 울지 말라면 더 우는 거야?
이혜민은 길에서 한참을 울었다.
*
"여기 물."
"고마워."
공원에 앉은 우리. 이혜민은 다 울었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연영과 생활은 어때?"
"별로야. 예전 경영처럼 그런 분위기는 없어. 아무래도 다들 개성이 강하니깐. 너는?"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얼굴도 많이 잘 생겨졌네. 처음에는 몰라볼 뻔했어. 성형한 거야?"
"아니. 자고 일어나니 점점 잘생겨지더라."
"치. 그게 뭐야. 미안 현찬아."
이혜민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한 거."
"괜찮아. 지난 일인데. 후회 돼?"
"전혀. 솔직히, 나 그냥 네가 잘 해주는 게 좋았던 거지 너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어. 그러니깐 너에게 아쉬움 없이 통보하고 헤어졌지."
이혜민의 말 이해 된다. 예전에는 몰랐다. 하지만 연애를 하고 사랑을 받으니 알겠다.
그때 당시 이혜민은 내가 이것저것 사주는 게 좋았던 거다.
혜민이는 이별할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웃으며 갔었지. 사랑했다면 그럴 수 없다.
"지금도 그 마음은 그대로야. 현찬이 너는 친구로서는 좋지만, 남자친구로서는 아닌 거 같아. 좋은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르거든. 헤어지니깐 알겠더라. 정말 마음이 하나도 안 아팠어."
그래.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기 전에 섹스부터 하고 사귄 우리였으니.
그 당시에는 마음이 아주 아팠지만, 지금은 이혜민의 말에 마음이 편해지는 거 보니 나 역시 마음이 정리됐나 보다.
그나저나 얼굴이 잘생겨도 많은 여자가 좋아하지 모든 여자가 좋아하지는 않나 보네.
"그래도. 친구로는 네가 좋아. 나 이기적인 년인가?"
이선미랑 비슷한 말을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선미의 말에서 나를 아끼고 좋아하는 기분이 느껴진다면, 이혜민은 그것보다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말하고 있는 기분이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나도 마음 편해졌어."
"다행이다."
"응. 나 이제 갈게."
-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 당구를 너무 오래 치기는 했지.
꼬르륵 소리에 이혜민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배고파?"
"아니. 괜찮아."
"현찬아. 라면 먹고 갈래? 오늘 미안해서 그래. 라면 먹고 가."
라면 안 땡기는데.
"괜찮아. 라면 별로 안 먹고 싶어."
"그럼 짜파게티 먹고 가. 계란후라이 해서 올려줄게."
"그래 짜파게티 먹자."
솔직히 짜파게티에 계란후라이는 먹고 가자.
< 2학년 1학기 개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