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입생 오티 >
2월 초. 나는 학과사무실에 와 있다.
"여기 일학년 명단이야."
박호빈과 일학년 명단을 받기 위해 서다.
원래 우리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교가 신입생들에게 연락을 다 돌리라고 한다. 카톡도 없는데 문자 값도 안 주면서.
박호빈도 불만인지 투덜거린다.
"조교님. 일학년 사진은 없어요?"
미친놈. 사진을 왜 찾아? 물론, 나도 애들을 몰랐다면 사진 달라고 했겠지? 일단 말리자.
"호빈아. 사진이 왜 필요해? 조교님 이걸로 오티 일정 통보하면 되죠?"
"응. 부탁할게. 너희 사전 모임 할 거야?"
"오티 삼 일 전에 할까 생각 중이에요. 그래도 얼굴 한 번 보고 가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그것도 그렇네. 고생해."
일학년 명단을 받은 우리는 과방에 앉았다. 박호빈은 일학년 리스트를 보더니 웃는다.
"이현아. 이름 예쁘다. 어떤 아이일까?"
"모르지. 왠지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캐릭터랑 비슷할 거 같아."
"뭐?"
"아비터."
이현아. 별명 아비터. 밥을 사주면 항상 친구들을 네다섯 명 데리고 오는 후배다. 나를 포함한 많은 선배가 지갑을 탈탈 털렸었다.
그래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아싸'라서 밥 못 얻어먹는 친구들 데리고 온 거니깐.
막상 07학번 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현찬아 04학번 선배들한테는 연락했어?"
"복학하는 형들? 연락 드렸어. 학생회장 됐다니깐 자기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하래."
"재밌는 형 한 명 있다면서?"
"진호형이라고 있는데, 내가 전화했을 때는 잘 모르겠던데?"
"그래?"
"만나 보면 알겠지. 일정 정리해보자."
나는 총학생회에서 받은 스케쥴표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2월 20일이 오티니깐, 2월 15일 날 사전 모임 하는 거로 하고. 연락은 누가 할래?"
"여자는 내가 하고, 남자는 네가 해."
박호빈이 호떡 같은 얼굴로 음흉하게 웃는다. 고맙다. 한결같아서. 네 맘대로 해라.
"알았어. 남자 쪽은 내가 돌릴게. 이번에 총학에서 단과대별로 오티 간다고 하더라고."
"그럼 인문계열만 가는 거야?"
"거기에 예술대까지 우리랑 같이 가."
"잘됐네. 오티때 과 소개는 어떻게 할 거야?"
"작년처럼 몸 짓하고 그러지는 말자. 이거는 내가 준비할게. 너는 오티때 신입생들하고 할 게임 준비해."
"게임? 어떤 거?"
"됐다. 그냥 내가 준비할게. 너는 플랜카드랑 다른 물건들 좀 챙겨줘."
게임 준비에 과 소개 준비까지. 해야 할 게 많다.
박호빈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나를 본다.
"우리 기합 같은 거 안 해?"
"기합?"
"응. 오티가 '오지게 터진다'의 줄임말이잖아. 애들 얼차려 시켜야지."
"미친놈아. 혜진 누나 때문에 우리 블랙리스트인거 몰라?"
"왜? 얼차려 태워야지 일학년끼리 돈독해져."
"너 그러다가 07학번에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 있으면?"
"그게 뭐 중요해? 대학은 학번제야."
네. 대단하십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어떻게 군대 마인드를 머리에 박고 있는 걸까?
안 말렸다가는 소주병 뚜껑에 일학년들 머리 박게 하겠다.
"난 안 할 거니깐 하고 싶으면 개강하고 나서 해. 후배들 대학 첫 추억인데 맞는 거로 꾸며주게?"
"알았어. 그럼 이번에는 안 하는 거로 하자."
이제 큰 틀을 짜졌다.
자취방으로 돌아가 나의 왼팔, 오른팔과 본격적인 의논을 하자.
*
왼팔로 내 목을 조르는 이선미, 오른팔로 내 목을 조르는 임석훈.
이... 이래서 왼팔 오른팔인가?
자취방에 돌아가 우리가 할 일을 말하자마자 나를 죽이려 든다.
"대단하십니다. 민현찬님. 왜 아예 이벤트 회사를 하나 차리시죠? 은미 불러와서 같이 하면 되겠네."
"켁. 선미야 일단 들어봐. 이거 생각보다 안 빡셔."
"지랄. 저번, 과 티 패션쇼처럼 공연 준비해야 하지, 신입생 할 게임 만들어야 하지."
임석훈이 손에 힘을 주면서 거든다.
"너 솔직히 말해. 농활 가서 혜진 누나한테 사상 교육받고 왔지? 마인드가 완전 혜진 누나와 똑같이 독재야."
"야. 잘 생각해봐. 이거는 우리 추억을 만드는 거야. 10년 후에는 이때를 생각하며 재밌었다고 나에게 감사할걸?"
"약 좀 그만 팔아. 약을 그렇게 잘 판다고 온 동네 소문나서 우리 엄마가 너 찾더라. 약국에서 일 좀 하라고. 왜 이렇게 열정적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내가 준비하는 과 행사 수준은 황금색으로 도장한 아반떼 골드에디션처럼 과하게 하는 건 맞다. 게임이야 그렇다 치고 굳이 공연까지는 할 필요 없다.
나도 대충 하고 싶지만,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의욕이 샘 솟는다. 과거의 사막 같았던 대학 생활 때문인지, 이번 생에는 아마존 밀림 같이 울창한 데학 생활을 보내고 싶다.
특히 신입생 오티는 더 신경 쓰인다. 1학년 때는 축구 전문가가 되어 끝났고, 2학년 때는 한쪽 구석에서 다크템플러가 되어서 끝났다.
이번에는 학생회장이 되었는데, 그렇게 끝낼 수 없다. 그렇다고 친구들에게 나 리셋 인생이니 이해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고.
서영 누나가 내 욕심을 이해했는지 웃으며 선미 팔을 잡고 내린다.
"현찬이가 하고 싶나 봐. 너희들 어차피 말은 그렇게 해도 도와줄 거잖아. 우리 다 같이 해보자."
"그렇긴 해도 욕은 해야겠어요. 뭔가 민현찬 다단계에 들어온 거 같아요. 언니도 욕해요. 저번처럼 안무 만들어야 하잖아요."
"나? 나는 하고 싶은데? 노래도 생각해놨어."
벌써요? 감사합니다. 서영 누나!
"누나 어떤 거 생각해놨어요?"
"배치기 노래 '반갑습니다'. 어때 딱 맞지 않아? 개사해서 부르면 좋을 거 같은데?"
누나는 래퍼처럼 자세를 취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는 경영입니다. 우리 과는 죽여 줍니다. 어때?"
억! 손발이 출타하여 브레이킹 댄스를 추지만, 왜 하고 싶지? 오그라들지만 나쁘지 않다.
"괜찮아요! 그럼 누나가 준비해 주세요. 저는 선미, 석훈이랑 게임 준비할게요."
"그래 알겠어. 석훈아 너도 괜찮지?"
"네. 갑자기 확 끌리는데요? 초록색 노란색 정장 입고 하자."
"콜. 맘에 든다. 이선미 너는?"
"하... 해야지. 하자. 그래 하자!"
선미야. 아직 한 발 남았다.
"너 한다고 했지? 아직 말 안한 게 있어 네가 총무야."
"야 이! 개새끼야!"
이선미가 나를 발로 찬다.
미안.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믿음직해. 혹시나 박호빈이 돈으로 장난치면 조선 시대 망나니가 되어 칼춤을 출 사람은 네가 최고거든.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사전 모임 날.
호빈아 왜 정장을 입고 왔니. 임석훈 너도!
"너희 둘 미친 거야?"
내 말에 박호빈이 시계를 슬쩍 보여주며 말한다.
"왜?"
"누가 보면 면접 보러 온 건 줄 알겠어."
정장에 주름이 날카로워서 손이 베일 정도다.
다만 2007년이다 보니, 아빠 정장이다. 아니면 정말 아빠 정장이던가.
"신입생 오는데 선배 모습을 제대로 보여줘야지."
"그래서 시계도 샀어?"
"응. 이 브랜드 알지?"
알지. 롤렉스. 그리고 짝퉁이라는 것도.
전생에 나에게 다가와서 짝퉁인데 전부 다 진짠 줄 안다고 어찌나 자랑해댔던지.
그 말에 나도 50만 원 주고 샀는데, 알고 보니 20만 원 이었지. 30만 원은 네가 먹었고.
"롤렉스네. 그래. 예쁘다. 나는 이제 신입생들 안내하러 갈게."
"어디에 가려고? 너 얼굴 알아?"
"대충 보면 알 수 있어."
전생에 다 봤던 얼굴인데 보면 기억나겠지.
나는 과 건물 일 층에 섰다. 사전 모임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남았다.
담배 하나 피우며 기다리자.
칙.
"저기요..."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키 165 정도의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
아비터 이현아다.
귀여운 외모에 활발한 성격. 활동력이 좋아서인지, 운동해서인지 탄력 있는 몸매... 정신 차리자!
"안녕하세요. 이현아죠?"
"어? 어떻게 아세요."
"경영과 선배입니다."
"진짜요? 반갑습니다. 선배님."
아이고 귀야. 건물 떠나가겠다.
이현아는 90도로 인사한 후 고개를 들며 웃는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 편하게 할게.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선배님 여기서 뭐 하세요?"
붙임성도 예전 모습 그대로네.
"일학년들 헤맬까 봐 기다리고 있었어. 4층 맨 왼쪽에 가면 돼. 먼저 올라가. 나는 다른 아이들 기다려야 하거든."
"네! 그럼 나중에 뵐게요!"
이현아는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담배를 다 피울 때쯤 이번에는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걸어왔다.
지연이와 하민. 둘 다 키는 168 정도에 별명은 메뚜기다.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면서 모든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은 전설의 두 사람이다.
전생에 밥 몇 번 사준 게 다여서 어떤 성격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임지연 씨와 최하민 씨죠?"
"아. 네. 저희 아세요?"
"네. 선배입니다. 이 건물 4층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슬쩍 숙인 뒤 올라갔다. 이거 무슨 시상식 안내 요원 같네.
한동안 얼굴만 아는 후배들이 왔다. 슬쩍 인사를 한 후 4층으로 보냈다.
이제 오늘 오는 사람 중에서는 마지막 한 명 남았다.
10분쯤 지났나? 후배 중에서 나와 제일 친했었던 아이가 걸어왔다.
한진희. 키 165 정도에 하얀 피부의 귀염상인 후배다. 그리고 눈웃음이 박보영과 비슷하다.
반갑다 진희야.
유일하게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후배.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농담을 했던 후배.
전생에 내가 한 농담은 '지뉘~ 너 없는 동안에~' 라며 하이디 진이를 부르는 쓰레기 같은 농담이었는데, 그래도 그 농담에 '오빠 하지 마요'라며 착하게 웃어줬던 아이다.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항상 과에서 겉돌았다. 그래서 나랑 친했던 건가? 여튼 제일 반갑다.
"안녕 진희야."
"누구세요?"
"아. 경영과 선배야. 길 못 찾을까 봐 기다리고 있었어."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배 이거 드세요."
응? 조그마한 사탕을 나에게 건넨다.
"이게 뭐야?"
"어제 밸런타인데이였잖아요. 혹시나 해서 챙겨왔는데 사람 많아서 못 주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선배님 혼자 계셔서 드리는 거예요."
사탕을 주며 해맑게 웃는 진희를 보자 기분이 묘하다.
사랑? 좋아하는 감정? 이런 건 아니다.
정말로 전생의 21살로 돌아온 거 같은 기분이 든다. 흡사 옛날 사진을 보고 추억에 빠지는 기분이다.
"잘 먹을게. 네가 마지막이니깐 같이 올라가자."
"정말요? 네. 선배님."
우리는 같이 4층으로 올라갔다.
*
4층 강의실에 들어가자 이미 박호빈은 교수님이 되어서 후배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호빈아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저 중에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거든.
"흠. 호빈아 이제 내가 할게."
"어? 왔어. 아니야 내가 마저 설명할게."
후배들 표정 봐라. 졷같은 군대 선임을 본 신병의 모습이잖아. 지금 당장 따블백 들고 탈영할 기세다.
"됐어. 내가 할게.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나를 보는 후배들의 눈은 두려움에 물들어 있다. 일단 분위기 풀어주자.
칠판에 내 이름과 약력을 적었다.
민현찬.
당구 300
싸이월드 투멤 1회
몇몇 아이들은 웃고, 몇몇은 바보인가 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이번에 경영 학회장을 맡은 민현찬 입니다. 반갑습니다."
- 짝짝짝짝짝
"이게 제 약력입니다. 보다시피 놀기 좋아하는 잘생긴 선배죠. 저 잘생겼죠?"
"아하하하. 네!"
"네!"
"진희야. 너는 어이없는 표정 같은데?"
진희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어이없으라고 한 말이야. 혹시 신입생 중에 당구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몇몇 남자 후배들이 손을 든다.
"너희는 내가 무조건 밥이랑 술 사줄게. 연락해."
"오오오오! 알겠습니다~"
"네~ 선배님."
남자 후배들이 웃으며 환호한다.
"그리고 여기 싸이월드에 도토리 쓰는 사람들 손 들어 보세요."
이번에는 몇몇 여자 후배들이 손을 들었다.
"너희는 집에 가자마자 일 촌 신청해. 선배 이래 봬도 투멤이었어."
"알겠습니다."
"아하하하. 일 촌 신청하면 도토리 주실 거예요?"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후배님. 도토리는 소중한 겁니다. 대신 모르죠? 일 촌이면 밥 사줄지?"
"오~~오~~~"
내 말에 모든 후배가 환호하며 웃는다.
정치인 마음을 알겠다. 지킬 듯 말 듯한 약속을 막 던지는 게 최고다.
밥이야 사주겠지만, 전부를 다 챙겨가면서 사주지는 않을 거다.
하여튼 분위기는 좋아졌다. 나는 본격적으로 오티와 신입생들 수강 신청에 관해 설명했다.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오티 날 뵐게요."
"네. 선배님!"
후배들은 인사를 하고 병아리처럼 빠져나간다. 첫날이니 일찍 집에 보내자.
후배들을 보낸 우리는 앞으로 준비할 거를 이야기하기 위해 과방으로 모였다.
쇼파에 앉자마자 이선미가 나를 빤히 본다.
"왜?"
"너. 얼굴 좀 바뀐 거 같다?"
이제 눈치챘어?
"그래? 더 잘생겨졌어?"
"이상하네. 턱이 매끄러워졌는데. 마사지 받아? 다음에 나도 같이 가."
"그런 거 없어."
"아까 후배들 잘 다루더라. 말 빨 많이 늘었어."
"그래? 후배들이 나 좋아하나 보지 뭐. 우리 게임 준비는 다 끝났지?"
"응. 너희 무대 준비만 하면 돼."
"임석훈은 어느 정도 준비되었고. 서영 누나 우리 언제 연습할래요?"
"그게. 나 며칠 동안 용인에 있어야 해."
"진짜요?"
"응. 아니면 용인으로 와. 거기에 내가 아는 연습실 있으니깐, 거기서 연습하자."
용인이라. 그렇게 멀지는 않으니.
"알겠어요. 제가 시간 맞춰서 갈게요. 오늘은 여기서 끝내죠. 호빈아 수고했어."
"어. 너도 고생했어."
과 소개 행사.
오티에 참여한 모든 단과대가 다 보는 곳에서 과별로 나와서 소개를 하는 행사다.
누구는 춤을 추고, 누구는 몸짓하고. 하여튼 많은 사람이 본다.
이번에는 아이템 사서 제대로 춤춰야겠다.
나도 간지 선배 한 번 되어봐야지.
< 신입생 오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