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학년 종강 >
박인혜. 하은미.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가사처럼 두 사람은 결국 만났다.
나는 은미에게 명함을 주었고, 은미는 다음날 바로 박인혜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그날 바로 계약을 맺었고 은미의 모델 생활은 시작되었다.
어느덧 1월 중순. 은미가 모델 한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간다.
이건 원래 은미의 운명일까? 아니면 바뀐 은미의 운명일까?
아니,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 가면 되니깐. 그리고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면 된다.
"야! 너 당구 치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금은 임석훈과 당구를 치는 중이다. 은미가 없자 할 게 당구 말고는 없다.
한 번씩 피시방 가서 카트라이더 하고. 심심한 인생이네.
"현찬아. 그런데 은미 정말 열심히 하지 않아?"
"어. 요즘 연락도 잘 안 돼. 새벽에 가서 매일 밤늦게 마친대."
"모델이면? 뭘 하는 거야?"
"운동하고, 연기 연습도 한다던데?"
"으하하! 은미가 연기를 한다고? 혹시나 배우로 데뷔하면 꼭 구경하러 가자."
그때 전화가 울렸다.
"어? 은미 전화 왔다. 여보세요."
-현찬아 어디야?
"석훈이랑 당구장이야. 오늘 일찍 끝났어?"
-어?... 아... 현찬아. 있잖아.
"응. 왜? 무슨 일 있어?"
- 나 그만둘래.
갑자기? 이 무슨 메시가 레알 마드리드 가는 소리지?
"그만둔다고?"
-응. 자취방에 있을게 석훈이와 당구 치고 와.
"뭐래?"
"은미 모델 그만둔대."
"왜?"
"몰라. 가보자."
"어. 선미한테도 연락해."
우리는 황급히 이선미까지 불러서 자취방으로 갔다.
*
"은미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은미는 팅팅 부은 눈으로 내 앞에서 해맑게 웃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왜 눈은 팅팅 부어 있는데?
이선미는 그런 은미를 보자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다.
"야! 박인혜인가 뭔가 그 쌍년이 너한테 이상한 거 시켰지?"
"선미야 아니야."
"그런데 너 왜 울었어? 하... 썅. 빡치네. 우리 가족 중에 변호사 있으니깐 내가 말 해놓을게. 진짜 뒤졌어."
너 변호사 있었어? 선미 조심해야겠다. '애승이 콩 먹어' 할 뻔했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도 화가 난다. 뭘 했기에 은미가 울면서 온 거지?
"은미야. 나한테 이야기해 줘.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아니야. 그냥 모델 하기 싫어. 그리고 박인혜 사장님 사기당했어."
"뭐! 사기?"
"응. 지금 돈 못 구해서 기획사 문 닫게 생겼어."
시불. 뭔가 엄청난 경영난 같은 거 생각했는데 고작 사기였어? 독사같이 냉정한 눈으로 사람 목 조르는 박인혜가 사기라니. 어이가 없다.
"그래서? 너에게 돈 벌어 오라고 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현찬아. 나 더는 묻지 말아줘. 부탁할게. 얘들아 미안한데 나 조금 자면 안 될까? 미안해."
하은미 또 울 거 같은 표정이다. 일단 우리 모두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는 말해 주겠지. 그때를 기다려 주는 게 친구들의 몫이다.
하지만, 남자친구인 나는 다르다. 박인혜 만나봐야겠다.
*
PIH 엔터테이먼트 사무실.
그리 큰 회사는 아니지만, 보통 때였으면 나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갓 20살인 대학생이 사장 보자면 누가 문 열어 줄까?
하지만 은미 때문에 왔다고 하니깐 대표인 박인혜가 바로 나를 부른다.
"현찬 씨라고 했죠? 반가워요."
내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는 박인혜. 사기당했다는 양반이 표정은 좋네.
"네. 민현찬입니다. 오늘은 은미 때문에 왔습니다."
"은미 지금 뭐 하죠?"
"제 자취방에 있습니다."
"왜? 당신 자취방에 있죠?"
"네? 제 여자친구니깐."
"왜 사귀고 있죠?"
이게 무슨 팔척귀신이 개구멍 지나가는 소리지?
"그게 무슨 말이죠?"
"저는 은미에게 분명히 말했어요. 제 밑에서 모델 하려면 연애부터 때려치우라고요."
"연애를 때려치우라고요?"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저는 사장님이 사기당했다고 해서 은미에게 이상한 거 시킨 줄 알고 왔습니다."
"네?.. 하.... 은미가 그렇게."
"아니요. 제 추측입니다."
기분 나쁜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박인혜. 그래도 말은 꼬박꼬박 존대한다.
"오해예요. 저는 연애 때려치우고 오라고 했어요. 그러자 은미는 연락이 끊겼고요."
상황 파악이 조금 되네. 삼류 드라마 같은 클리세가 나에게 펼쳐진 거였구나.
"왜 연애를 못하게 하는 거죠?"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즐기고 싶은 거 다 즐기면서 이쪽에 뛰어든다고요? 그러다가 이번처럼 마음이 흔들려 잠적하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기획사에서 리스크 관리해야죠."
박인혜 말이 맞다.
지금은 2006년. 아직은 연예인의 사생활이 물 밑에 있을 때다. 스캔들이 퍼지면 작은 가십이 확대되고 악의적인 루머가 뒤섞어 진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다. 유혹의 소나타를 불렀던 누나도 한 방에 갔잖아.
"은미는 뭐라고 해요?"
"모델 그만하겠다고 합니다."
"현찬 씨 남자친구죠? 여자친구의 꿈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은미랑 헤어지고 잘 달래 주세요."
"그 전에 PIH 엔터부터 정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네?"
"사기 당하셨다면서요. 저는 오히려 사장님이 돈에 눈이 멀어서 소속 모델을 나쁜 곳으로 돌리지 않을까 걱정되는데요?"
"너! 어디서 말 함부로 하는 거야?"
박인혜는 꼬박꼬박 존대하다가 반말한다.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씩씩거린다. 그렇다고 내가 쫄 거 같냐? 지금 박인혜 눈에는 내가 철없는 20살 꼬맹이로 보이겠지?
하지만 이 사람아. 전생에 은미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내가 모를거 같애? 그 문제 해결 못하면 내가 뭘 믿고 당신한테 은미를 보내줘야 하는데?
"화내신다고 사기꾼이 돈 들고 오는 거 아닙니다. 저는 돌아가서 은미랑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장님은 돈부터 해결하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PIH 엔터를 나왔다.
*
자취방으로 가는 길.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계왕권이라도 쓸 줄 알았다면 좋았을 건데.
엔터 회사를 내가 직접 차리는 것도 생각해 봤다. 돈은 문제가 안 된다. 지금은 돈이 주식에 전부 묶여 있지만, 몇 달 지나면 50억 정도를 벌 수 있을 거니깐.
문제는 내 능력이다. 엔터 회사에 인맥도 없고 생태계도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박인혜가 나보다 훨씬 잘 알 거다. 쫄딱 망하고도 대기업과 직접 계약을 맺을 정도로 다시 성장하는 사람이다.
망하지만 않는다면, 은미는 박인혜 밑에 있는 게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다.
많은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다. 일단 은미를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겠다.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미가 컴퓨터를 하면서 나를 본다. 싸이월드를 하고 있었나 보다. BGM이 내 방을 채운다.
"왔어?"
"괜찮아졌어?"
"응. 나 괜찮아. 어디 갔다가 왔어?"
"사람 만나고 왔어."
"헤헤헤. 우리 현찬이 어쩜 이렇게 잘 생겼을까?"
"그렇게 좋아?"
"응. 네가 제일 좋아. 우리 오래간만에 화장할래?"
"화장?"
"응 안한 지 오래되었잖아. 여기 앉아봐."
내 손을 잡고 방에 앉는 은미는 파우치에서 화장품을 꺼내서 내 얼굴에 묻힌다.
"예전에는 이렇게 안 잘생겼는데. 옛날 생각난다. 농활 때 민현찬은 내거라고 말 한 거."
"네가 계속 나 잡았잖아."
"응. 네가 좋거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은미는 싸이월드 BGM을 흥얼거리며 립스틱을 내 입술에 바른다.
"아무것도~ 난 해준 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
"왜 갑자기 노래야?"
"응? 온종일 들었어. 이 노래 좋다.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해~"
"...그 노래 좋아. 은미야 나 물어볼 게 있어."
"뭐?"
"모델 못 하더라도 괜찮아?"
툭. 내 말에 은미의 손이 멈췄다.
"어?"
"박인혜 대표 만나고 왔어. 헤어지라고 했다면서?"
"..."
"왜 말 안 해줬어?"
"헤어지기 싫으니까. 그리고 다 지난 일이야. 어차피 PIH도 망할거자나. 사장님 사기당한 금액이 10억이래. 그래서 열 받아서 한 말일 거야. 신경 쓰지 마."
10억.
2006년도에 10억이면 2016년 돈으로는 15억쯤 되려나? 하여튼 10억이라...
"알겠어. 은미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다 잘될 거야. 내가 항상 잘 되게 했잖아. 나만 믿어."
"칫! 네가 무슨 슈퍼맨이야? 그래도 말이라도 고마워."
은미는 내 품에 안겼다.
슈퍼맨이냐고? 슈퍼맨은 아니지만 너의 기사는 되어줄게.
*
PIH 엔터. 다시 박인혜를 만나러 왔다.
상황이 며칠 사이에 안 좋아졌나 보다. 독사 같은 눈이 풀려 있다.
"회사 사정 보러 왔는데, 여의치 않나 보네요. 이래서는 제가 은미와 헤어질 이유가 없네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요. 아니, 이제 말 놓을게.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대로 망할 거 같은데요?"
"야! 그딴 이야기 하려면 당장 나가."
"화내지 마세요. 저는 당신 구하러 온 사람이니깐요. 사기당한 금액이 10억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왜? 돈이라도 빌려주게?"
"지금 당장 4억. 그리고 올해 여름쯤에 6억. 어때요? 그 정도면 상황이 괜찮아지나요?"
"그게 무슨 말이죠?"
와우! 태세전환 보소. 리그오브레전드 우디르인줄 알았네.
"제가 10억을 해결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박인혜. 눈빛이 달라졌다. 손톱을 몇 번 물어뜯더니 나를 본다.
"정말인가요?"
"네."
"그럼 우리 회사에 투자하신다는 뜻인가요?"
훗. 지금 내 행동. 어떻게 보면 호구다. 여자친구를 위해서 10억을 쓰려고 하다니.
그래. 호구 맞지 뭐. 전생에도 호구. 이번 생에도 호구. 다만 차이점은 있다. 아무한테나 호구는 아니다.
"아니요. 회사에 왜 투자합니까? 법인 정리하면 한 푼도 못 받을 건데요. 박인혜 씨 개인에게 돈 빌려드리는 겁니다."
"개인요?"
"네. 기간은 1년. 최대 9년. 이자는 연 5%. 담보 하나 없이 이 정도 이자면 시중 은행에서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 아. 추가로 지분 10%를 저에게 넘겨주는 조건도 있습니다."
뭐 어차피 지분 대부분이 담보로 잡혀 있겠지만. 혹시 알아? 대박 터질지.
"투자는 안 되나요?"
"네. 갱신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특별한 일 없으면 매년 갱신해드릴 겁니다. 대신 특별한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작성한 차용증을 바로 채권 추심 기관으로 넘길 겁니다. 사채 아시죠? 아마 아침 점심으로 찾아올 겁니다."
"특별한 일은 뭐죠?"
"은미입니다. 이 바닥 더럽기로 유명하죠. 특히 정통 모델이 아닌 행사 모델 쪽은 더 하고요. 하은미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면 당신은 빚쟁이들에게 쫓기게 될 거예요. 그러니 목숨 걸고 하은미 지키고 키워주세요."
"하하하하!"
박인혜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는다.
"왜 웃는 거죠?"
"남자친구가 참 대단하네요. 이렇게까지 여자친구를 생각하다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더러운 꼴 안 보려고 차린 기획사니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어떤 거요?"
"가장 하은미 발목을 잡는 건 민현찬 씨예요. 연애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러다가 들키면요? 은미가 티비에 나오고 한창 인기가 치솟는데, 갑자기 열애설이 터지면요?
아시죠? 이 바닥은 팬들도 더럽다는 거. 온갖 헛소문을 다 낼 거예요. 구속하는 섹스를 즐긴다, 야동을 따라 한다. 뭐 이런 소문이 더해지면 걷잡을 수 없어요."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야? 시불 깜짝 놀랬네.
"저는 두 사람 연애에 전혀 관여 안 할게요. 저는 돈이 급하거든요. 대신 어떤 게 은미를 위한 일인지 잘 고민해 보세요."
"하... 독사 맞네요."
"네? 저요?"
"네. 앞으로 그런 별명으로 불릴 겁니다. 요 앞에 변호사한테 이야기해놨습니다. 공증, 차용증 작성하시면 오늘 4억 바로 보내겠습니다. 남은 금액은 6월에 보내 드릴게요. 가시죠."
박인혜와 PIH 엔터를 나와서 모든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은행에 가서 바로 돈을 입금했다.
오늘 박인혜를 준 4억. 주식을 판 돈이다. 그나마 주식이 12억까지 올라서 다행이다.
그래도 4억이면 6개월 안에 15억은 될 수 있는 돈인데 손해 보는 거 맞다.
아니, 병신 짓이다. 호구신도 어이가 없는지 돈을 보내자마자 나를 비웃는다.
- 너 병신이지? 전생에 너에게 잘해준 사람도 아니고, 이번 생에 사귄 사이잖아.
그러게요. 저도 미쳤나 봐요.
- 아직 늦지 않았어. 당장 가서 없던 일로 해.
미안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 왜지?
친구니깐요. 미웠던 전생도, 고마웠던 이번 생도 내 20살을 함께 해준 친구예요. 먼 훗날 은미가 잘못 된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 거 같아요.
- 죽었다 살아나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더니. 너는 다시 태어나도 호구구먼.
아니요. 저는 호구가 아니에요.
- 그럼?
킹갓엠페러제너럴충무공마제스티쇼군 호구입니다.
- 미친 새끼.
귓속에 들리는 호구신의 목소리. 욕하지만 기분 좋아 보인다.
*
내 자취방 앞.
은미가 캐리어를 들고 내 앞에 선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현찬아. 흑... 흑... 우리 헤어져."
"은미야..."
"나 사장님한테 이야기 들었어···네가 회사 문제 다 해결해줬다면서."
"응."
"사장님이 그러셨어. 남자친구가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대충 하면 되겠냐고. 그런 남자친구 막연하게 기다리게 하고 너는 모델 할 생각이냐고. 나 때문에 20대 초반에 다른 사람 못 만나는 현찬이 너는 무슨 죄냐고. 흑...."
어... 뭐 굳이 그렇게까지...
"사장님 말이 맞아. 현찬아 나 떠날게. 그리고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 그때 되면 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저기. 은미야 우리 바뀐 거 같지 않아? 그리고 무슨 해외로 파병 가는 것도 아니고.
"그때까지 너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고 다녀."
"진심이야? 만약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혼자가 아니면?"
은미는 눈물을 닦고 투지에 불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오래간만에 보는 여왕님 모습이다.
"나. 하은미야. 네 옆에 누가 있던지 너는 결국 내 꺼가 될 거야."
"하하하하."
"왜 웃어!"
"은미야. 그거 하나만 알아줘."
"뭐?"
"헤어지든 아니든, 우린 친구라는 거. 힘들 때는 언제든지 찾아와. 너 전화 한 통이면 나, 임석훈, 이선미는 언제라도 달려올 거야."
"현찬아···흑···고마워. 나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 잘 지내."
프렌치 키스. 그리고 은미는 눈물을 흘리며 내 뒤로 지나갔다.
*
자취방에 들어왔다.
슬프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눈물도 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박인혜에게 처음 들은 날부터 마음의 준비는 이미 했기에 견딜만 했다.
내가 어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30살.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선다.
뭐가 합리적인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이별이 최선인지는 불 확실하지만, 최악은 확실히 아니다.
내 방 구석구석에 은미가 묻어 있다. 나는 더 슬퍼지지 않기 위해 그 흔적을 하나씩 정리했다. 우선 은미를 구속했던 수갑을 한쪽 구석으로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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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보상으로 포인트와 크리스탈이 제공됩니다.
연애 200일 : +20000포인트
크리스탈 + 100
옷걸이에 걸려 있는 축구 유니폼. 은미가 자주 입었는데. 볼 때마다 웃는 은미가 떠오른다. 접어서 옷장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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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에 추가 ITEM이 등장합니다.
턱선 변경 : 2000포인트
입매 변경 : 2000포인트
피부 케어 : 1000포인트
책상 위에 있는 나와 은미의 커플 사진. 보자마자 마음이 아련해진다. 이것도 서랍 속에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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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섹스 판타지 만족으로 보상 지급됩니다.
크리스탈 +50
아씨! 보상 그만 좀 줘. 지금 감성적이잖아. 호구신 일부러 없는 보상 만들어서 주는 거 맞지? 나 지금 슬프단 말이야 이 호구신아!
띠링. 호구신의 권능 1
호구의 사랑으로 보상 지급됩니다.
실버 여사친 카드 +5
어···잠시만, 실버 여사친 카드를 다섯 개나 주신다고요?
호구의 사랑이라. 그래, 내가 은미에게 잘 해주기는 했지. 숙제도 다 해주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항상 데려다주고.
띠링. 호구신의 권능 2
여사친은 아니지만, 박인혜를 구원했기에 보상 지금 됩니다.
몸매 관리 한 달 : 30 크리스탈.
운동 효과가 4배가 됩니다. 운동 시작 전에 '나는 몸짱 호구다'라고 외치면 됩니다.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나도 배에 왕자 드디어 만드는 거야?
띠링. 호구신의 권능 3
자신을 희생한 이별을 했기에 보상 지급됩니다.
골드 여사친 카드 +2
와우! 골드 여사친 카드까지?
그렇구나. 등가교환의 법칙. 이별해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듯이, 골드 카드도 이별해야지 받을 수 있는 거구나.
골드 여사친 카드 두 개라. 잠시만, 내가 직접 만난 연예인이 있었나? 전생의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 너 일 분 전 만 하더라도 슬프다고 질질 짜지 않았어?
아차차. 그게 말이에요. 슬퍼요! 그래도 언제까지 힘들어 할 수는 없잖아요.
- 이번만 특별히 너의 호구짓에 감동해서 보상 준건데 이렇게 돌변하냐? 너 슬픔 어디 갔어?
아···슬퍼요. 슬프다고요. 이 눈물 안 보여요?
- 됐다. 이번만 특별히 준 거니깐 앞으로 이런 거 기대도 하지 마!
당연히 슬프지.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내가 슬퍼하는 소식을 은미가 들으면 얼마나 힘들까? 그래, 은미를 위해서라도 나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은미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나도 나의 길을 가자.
- 디리리링
어? 혜진 누나가 웬일이지?
"여보세요?"
-현찬아 어디야?
"저 자취방이에요."
-고향 안 갔지?
"네. 왜요?"
-선배들끼리 이야기해서 결정했는데, 너 과대 되었어.
"2학년 과대요?"
-아니 전체 과대. 너 내일 학과사무실 당장 달려와.
아니 이 사람들아. 슬픔 좀 정리할 시간을 줘.
-이제 신입생 받을 준비 해야지. 명단이랑 OT 이야기하게 내일 열 시까지 학과사무실로 와.
"벌써 후배 들어와요?"
-응.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
후배라. 몇 명 얼굴이 떠오른다.
전생에서 나는 후배들에게 겉절이였지. 존재감 없이 가끔 밥이나 사주던 선배.
뭐 그렇다고 그 애들을 원망하고 복수할 생각은 없다.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지금의 나는 전생의 내가 아니다. 잘생겨진 얼굴에, 커진 키. 게다기 이제 몸짱까지 될 예정이니깐.
다만,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어떻게 나를 대할지는 궁금하다.
이제 2학년 시작이다.
< 일학년 종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