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팅 모델 >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박인혜.
젊은 지금도 독사 같은 그 눈빛은 똑같네.
"어떻게 저를 아세요?"
"예전에 뉴스 같은 데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면 다른 곳에서 봤을 수도 있고요."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깐요. 그럼 꼭 연락 부탁드릴게요."
박인혜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내 옆에서 구경하던 임석훈. 명함을 뺏어간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그나저나 은미 대박이다. 이거 길거리 캐스팅 아니야?"
"석훈아. 부탁 하나만 할게."
"뭐?"
"은미에게 말하지 말아줘."
"왜? 너 말 안 하려고?"
"그런 이유가 있어. 묻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줘."
"너희 둘 사이 일이니깐... 알겠어."
"먼저가. 나 담배 하나만 더 피고 갈게."
"새끼. 갑자기 왜 이리 심각해? 알았다."
나는 담배를 하나 더 물었다.
박인혜.
전생에서 행사 때 우리 회사와 계약해서 모델을 보냈는데, 프로페셔널한 여자였다.
접대는 절대 없었고, 화려한 피피티와 자신감으로 계약을 따내었다.
어쩌면 은미가 박인혜 소속사로 간다면 성공할 수도 있다. 성공뿐만 아니라 어른의 세계에 물들지 않고 모델 활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2006년은 회사가 어려워서 한 번 망하는 박인혜다.
그럼 은미는?
그러고 보니 전생에 은미의 기억은 1학년 2학기까지 밖에 없다. 그 이후는 같이 안 다녀서 전혀 모르겠다.
은미는 1학년 마치고 휴학했고, 나는 2학년 마치고 군대로 갔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델을 하다가 소리소문 없이 잊혀지고 인생이 꼬인 건 아닐까?
젠장. 전생에 여사친들 근황 좀 물어보고 다닐걸.
머릿속에서 고민이 회오리 감자가 되었다. 한 입 먹자 마음속에서 결론이 나왔다.
일단은 말하지 말자. 박인혜란 사람은 믿을 수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시기가 아니다.
나는 명함을 지갑 속 깊숙한 곳에 넣었다.
*
촬영이 한 지 보름이 지난 날.
내 자취방 컴퓨터 앞에 촬영했던 네 사람이 모여있다. 은미는 마우스를 잡고 사진을 한 장씩 넘긴다.
"현찬아. 이거 잘 나왔다."
"응. 맘에 들어. 싸이월드에 올리자."
"이 사진은 어때?"
"선미가 잘 나왔네. 선미야 싸이에 올릴 거야?"
"난 됐어. 은미야 너 싸이에 올려줘."
"알겠어. 보자 다음 사진은 어? 임석훈 눈감았어."
"야 지워라."
"웃기네. 이거는 현찬이 싸이에 올려야지."
은미는 북쪽에 있는 수령처럼 사진을 우리에게 배식한다.
민현찬 폴더에 한 장, 임석훈 폴더에 한 장,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왜 내가 눈 감은 사진을 하은미 폴더에 옮기는 거지?
"이 사진은 웃겨서 내가 가지고 있으려고. 이제 끝났다!"
네 시간 정도의 사진 분류 작업이 끝나자 피곤한지 친구들은 기지개를 켠다.
이것들아! 과제를 이렇게 좀 하지!
"은미야. 고생했어."
"그래도 다 같이 하니깐 재밌다."
"그런데 쇼핑몰은 어때? 많이 팔렸어?"
"....."
"미안."
많이 팔리지 않았구나.
"사장 언니 지금 초상집이야. 주문이 안 들어와서 나보고 과 티로 가지고 가래."
"그 정도로 안 돼?"
"응... 나 예쁘지 않나 봐. 모델이 안 좋으니까 옷이 안 팔리는 거겠지?"
은미야. 그게 아니라 홈페이지가 문제야. 나우누리 같은 홈페이지에 옷이 올려져 있으니 팔리겠니? 그리고 홍보가 없으면 아무도 모르고.
"은미 네 탓 아니야."
"그래?... 하...."
한숨 쉬는 은미의 어깨는 축 쳐져서 땅끝 마을 해남까지 갈 기세다.
또 내가 나서야만 하는 건가?
"은미야. 내가 다 팔아줄게."
"아니야. 현찬이 네가 사면 아무 의미 없잖아."
"내가 안 살 건데? 내일 나랑 같이 옷 가게 가자. 사장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겠어."
"방법이 있어?"
"그럼. 나만 믿어."
별수 있나? 회사에서 굴렀던 짬밥 좀 이용해 줘야지.
*
다음날 옷 가게. 사장님이 내 앞에 앉아 있다.
"뭐? 홈페이지를 바꾸자고?"
"네. 사장님."
"왜? 디자인이 이상해?"
이상하죠.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은미보다 싱하형이 더 어울리는 디자인이에요.
팩폭 했다가는 장거한 같은 사장님이 김갑환과 최번개를 데려올 수도 있으니 돌려 말하자.
"네. 요즘 감성에 안 맞아요. 사장님이 만드셨죠?"
"응."
"홈페이지 맡겨서 만들어요. 그게 훨씬 나아요."
"굳이 그래야 할까?"
"저기 쌓인 옷들 정리하고 싶으시면 해야 해요. 누가 보면 창고정리 세일하는 줄 알겠어요."
말이 심했나? 눈물을 글썽거린다. 의외로 여리여리 하네.
"알겠어..."
"그리고 홍보는 우리가 할게요."
"어떻게?"
"나랑 은미 찍은 사진 있잖아요. 그 밑에 사장님 옷 가게 홈페이지 주소 붙여서 줘요. 그러면 우리 미니홈피에 올릴게요."
미래로 치면 인스타 마케팅 같은 거다. 실제로 이 시기에 몇몇 사람들은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회수가 깡패인 건 변함이 없다.
"아! 미니홈피 오는 사람에게 홍보하는 거구나. 그런데 너희 둘 다 조회수가 별로 안 높잖아."
"우리 둘 다 싸이 투데이 멤버 신청하려고요."
"어?.... 괜찮다! 좋아!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네. 대신 잘 되면 소고기 쏘세요. 누나."
"알겠어. 너희만 믿을게. 현찬아. 나 한 번만 살려줘."
"다 잘될 거예요. 은미야. 가자."
자. 이제 미니홈피 꾸미러 가보자. 스킨이랑 BGM 사려면 봄날의 다람쥐처럼 도토리 엄청나게 챙겨야겠다.
*
3주 정도 지나자 사장 누나로부터 홈페이지 리뉴얼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훨씬 낫네. 이것 봐. 은미 너도 훨씬 예쁘게 나오잖아."
"진짜네? 훨씬 예쁘게 보여."
새롭게 단장 한 홈페이지. 역시 돈과 시간이 최고다. 반공 포스트 같은 홈페이지가 은미가 확 살아나게 변했다.
"이제 우리 차례네. 싸이월드에 사진은 다 올렸고, 투데이 멤버 신청도 했고. 은미 너! 투멤 되면 인기 폭발하는 거 아니야? 방명록은 닫아놔."
"그럴 일 없어. 너야말로 투멤 되면 여자들 쪽지 엄청 오는 거 아니야?"
"설마."
"아니야. 석훈이는 투멤 아닌데도 쪽지 엄청 와. 더 놀라운 건 뭔 줄 알아?"
"뭐?"
"그 쪽지 보낸 여자들 다 만나러 다닌다. 아씨. 갑자기 불안하네. 현찬이 너도 임석훈처럼 만나고 다닐 거지?"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진짜?"
"응. 우리 엄마 걸고 약속할게."
"아하하. 왜 엄마를 걸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엄마를 왜 거냐고? 나는 여사친이 아니면 서지 않으니깐.
내 자취방 침대에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은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나저나 벌써 11월 말이다. 다음 주 기말고사 치면 이제 겨울 방학이네."
"그러게. 2학기는 정말 빨리 지나간다."
"겨울 방학 때 뭐할 거야?"
"나? 글쎄. 너는?"
"나도 별생각 없어."
"은미야.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뭐?"
"모델 하면 재밌어?"
"응! 사진 찍을 때 사람들이 나를 보면 가슴 두근거려. 그리고 내 모습이 예쁘게 나온 사진 보면 정말 행복해."
"그럼 진짜 모델 하고 싶겠다."
"그렇기는 한데, 내가 모델 비주얼로는 별로 인가 봐. 깡 마른 편은 아니잖아. 모델 치고는 키도 작은 편이고."
"그리고 가슴도 크지."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당연히 칭찬이지. 만약 모델 할 수 있다면 할 거야?"
"나? 당연하지. 꼭 하고 싶어. 내 꿈이거든!"
꿈이라.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니 진심인가 보다.
은미를 박인혜에게 소개해 줄까? 그게 운명이잖아. 그래도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는 거는 운명이 아닌가 보다.
내가 명함을 주지 않아도 호구신에게서 어떠한 경고도 안 온다.
-정해진 죽음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 없어.
축제 때 호구신의 말. 어쩌면 죽음이 아닌 운명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박인혜 사업이 잘 되게 할 수도 있는 거고.
아씨. 그런데 박인혜는 어떻게 망하는 거야? 이유라도 알면 어떻게 내가 해결해 주면 되는데.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
띠띠띠띠디
투데이 멤버 신청한 지 며칠이 지났다. 정오에 겨우 눈을 뜨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서영 누나와 은미가 뛰어들어온다.
나 팬티만 입고 있는데?
"현찬아! 은미 투데이 멤버 되었어!"
"진짜? 은미야 진짜야?"
"응! 어서 일어나."
서영 누나와 은미 내 양손을 각각 잡고 일으켜 세운다. 이거 잠시 왕이 된 기분인데?
"꺅! 너 바지 입어!"
서영 누나는 눈을 가린다. 아차차 정신 차리자. 이거 누나가 성희롱한 거예요.
옷을 입고 컴퓨터로 가서 은미 미니홈피를 봤다.
TODAY:110233
"은미야 대박이야. 하루에 만 명이나 온 거야?"
"바보야! 다시 봐봐!"
"...11만 명?"
"응! 11만 명이야."
와씨. 이전 생에 내 싸이월드 조회 수는 하루에 3명이었는데.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뭐?"
"현찬이 너도 투멤 되었어!"
"진짜? 나도?"
내 싸이월드 미니 홈피를 눌렀다.
TODAY : 12003
"은미야 나는 12만 명이야!"
"아니야. 만 이천 명이야."
아씨. 잘못 봤네. 남녀 차별 엄청 심하네. 그래도 하루에 만이천 명이 어디냐!
"어제 너 공부한다고 정신없었잖아. 심심해서 미니홈피 열었는데 싸이월드에서 투멤때문에 쪽지 와있더라고. 커플로 선정했다고."
"은미야. 혹시 주문 들어 오지 않았는지, 사장 누나한테 전화해봐."
"잠시만. 네~ 언니. 정말요? 진짜요? 다행이다. 네네. 아하하. 다 현찬이 덕분이죠."
"뭐래?"
"잠시만. 네네 언니. 아 현찬이요? 네 바꿔 드릴게요."
"여보세요."
- 현찬아 고마워! 우리 대박 났어! 옷 주문 계속 들어와. 특히 은미와 선미 있잖아. 그 두 사람 옷은 계속 나가고 있어.
"것 봐요. 누나. 제 말 듣기 잘 했죠?"
-응. 너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나 두 달 동안 월세도 못 냈거든.
소고기를 사지 않기 위한 전략은 아니겠지?
- 시험 끝나고 가게 놀러와. 내가 소고기 사줄게. 친구들 다 데리고 와.
의심해서 미안해요.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아서요.
"현찬아!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미는 아기처럼 내 품에 안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나에게 키스한다. 은미야. 옆에 서영 누나 있어,
"참나. 야! 나는 안 보여?"
"아! 서영 언니 있었죠. 나 미쳤나 봐."
"좋을 때다. 다 잘 돼서 다행이야. 그런데 은미야 너 조심해야 해."
"왜요?"
"내 친구가 투멤 된 적 있거든. 그런데 막 이상한 데서 쪽지 온대."
"정말요?"
"응. 지금 한 번 쪽지 읽어봐."
설마. 그래도 싸이는 실명제인데.
- 너무 예쁘시네요. 그런데 옆에 남자분이 별로네요.
- 진짜 예쁘다. 옆에 남자는 뭐야?
- 옆에 남자 ㅂㅅ만 빼면 더 예쁠 거 같아요. 남자친구는 아니죠?
이것들아 왜 나를 욕해.
은미 싸이에서 내 욕한 사람을 자세히 보자 다 남자들이다. 너희들 부러운 거구나?
이것 말고도 만나자는 쓰레기 같은 쪽지가 넘쳐난다. 나와 은미가 보면 충격받을까 봐 서영 누나가 쓰레기 같은 쪽지는 지우기로 했다.
한참을 지우던 서영 누나가 갑자기 우리를 부른다.
"은미야 소속사라는데?"
"정말요?"
"응. 진짜야! 가수 할 생각 없냐고 와 있어."
"에이. 저는 가수는 관심 없어요."
"보자. 응? 모델도 있다!"
모델 소속사도 있다고? 은미에게 모델 제의를 하는 쪽지가 열 개 이상이 와 있었다.
*
"은미야. 여기도 아니야."
"하... 이게 뭐야."
세상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모델을 제안하는 소속사. 막상 인터넷을 찾아보면 홈페이지도 없고 뉴스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말만 소속사이지 어둠의 개자식들인 게 분명했다.
결국, 풀이 죽은 은미는 책상에 엎드린다. 서영 누나는 그런 은미를 위로해준다.
"은미야. 괜찮아. 이제 하루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하... 아니예요. 제가 무슨 모델 한다고요."
"어허! 우리 은미 왜 이리 풀 죽어 있어. 너 임석훈한테 들었는데 예전에는 당당했다면서. 현찬이 만나면서 얌전해 진거야?"
"임석훈 그 새끼가 그런 말 했어요? 진짜 이 새끼는 아우!"
입이 거칠어 진거는 기분 탓이겠지. 은미는 또 풀이 죽어 침대에 벌렁 눕는다. 나는 그런 은미 옆에 앉았다.
"은미야. 꼭 하고 싶어?"
"응. 한 번 꼭 해보고 싶어."
"만약에 했는데, 현실은 다르면 어떡할 거야?"
"응? 무슨 말이야?"
"실제로 해보니 힘들다던가, 아니면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진다던가."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해보고는 싶어. 아쉽다. 사장 언니만 잘 되고 나는 이게 뭐야."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내가 아는 사람 있는데 소개해 줄까?"
"응? 진짜?"
"응. 건너 아는 사람인데, 사실 자신이 없어서 소개 못 해줬어."
"왜? 이상 한 사람이야?"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내일 전화해보고 조만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정말? 정말!"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시간을 돌리는 돈데크만 처럼 빛나는 은미의 두 눈이 빛난다.
"응 진짜야."
"고마워! 현찬아. 정말 고마워."
이혜민도 운명이 바뀌었고, 이선미도 운명이 바뀌었고, 한서영 누나도 운명이 바뀌었다.
하은미 운명도 바뀌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겁내지는 말자.
< 피팅 모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