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52화 (52/295)

< 피팅 모델 >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박인혜.

젊은 지금도 독사 같은 그 눈빛은 똑같네.

"어떻게 저를 아세요?"

"예전에 뉴스 같은 데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면 다른 곳에서 봤을 수도 있고요."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깐요. 그럼 꼭 연락 부탁드릴게요."

박인혜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내 옆에서 구경하던 임석훈. 명함을 뺏어간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그나저나 은미 대박이다. 이거 길거리 캐스팅 아니야?"

"석훈아. 부탁 하나만 할게."

"뭐?"

"은미에게 말하지 말아줘."

"왜? 너 말 안 하려고?"

"그런 이유가 있어. 묻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줘."

"너희 둘 사이 일이니깐... 알겠어."

"먼저가. 나 담배 하나만 더 피고 갈게."

"새끼. 갑자기 왜 이리 심각해? 알았다."

나는 담배를 하나 더 물었다.

박인혜.

전생에서 행사 때 우리 회사와 계약해서 모델을 보냈는데, 프로페셔널한 여자였다.

접대는 절대 없었고, 화려한 피피티와 자신감으로 계약을 따내었다.

어쩌면 은미가 박인혜 소속사로 간다면 성공할 수도 있다. 성공뿐만 아니라 어른의 세계에 물들지 않고 모델 활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2006년은 회사가 어려워서 한 번 망하는 박인혜다.

그럼 은미는?

그러고 보니 전생에 은미의 기억은 1학년 2학기까지 밖에 없다. 그 이후는 같이 안 다녀서 전혀 모르겠다.

은미는 1학년 마치고 휴학했고, 나는 2학년 마치고 군대로 갔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델을 하다가 소리소문 없이 잊혀지고 인생이 꼬인 건 아닐까?

젠장. 전생에 여사친들 근황 좀 물어보고 다닐걸.

머릿속에서 고민이 회오리 감자가 되었다. 한 입 먹자 마음속에서 결론이 나왔다.

일단은 말하지 말자. 박인혜란 사람은 믿을 수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시기가 아니다.

나는 명함을 지갑 속 깊숙한 곳에 넣었다.

촬영이 한 지 보름이 지난 날.

내 자취방 컴퓨터 앞에 촬영했던 네 사람이 모여있다. 은미는 마우스를 잡고 사진을 한 장씩 넘긴다.

"현찬아. 이거 잘 나왔다."

"응. 맘에 들어. 싸이월드에 올리자."

"이 사진은 어때?"

"선미가 잘 나왔네. 선미야 싸이에 올릴 거야?"

"난 됐어. 은미야 너 싸이에 올려줘."

"알겠어. 보자 다음 사진은 어? 임석훈 눈감았어."

"야 지워라."

"웃기네. 이거는 현찬이 싸이에 올려야지."

은미는 북쪽에 있는 수령처럼 사진을 우리에게 배식한다.

민현찬 폴더에 한 장, 임석훈 폴더에 한 장,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왜 내가 눈 감은 사진을 하은미 폴더에 옮기는 거지?

"이 사진은 웃겨서 내가 가지고 있으려고. 이제 끝났다!"

네 시간 정도의 사진 분류 작업이 끝나자 피곤한지 친구들은 기지개를 켠다.

이것들아! 과제를 이렇게 좀 하지!

"은미야. 고생했어."

"그래도 다 같이 하니깐 재밌다."

"그런데 쇼핑몰은 어때? 많이 팔렸어?"

"....."

"미안."

많이 팔리지 않았구나.

"사장 언니 지금 초상집이야. 주문이 안 들어와서 나보고 과 티로 가지고 가래."

"그 정도로 안 돼?"

"응... 나 예쁘지 않나 봐. 모델이 안 좋으니까 옷이 안 팔리는 거겠지?"

은미야. 그게 아니라 홈페이지가 문제야. 나우누리 같은 홈페이지에 옷이 올려져 있으니 팔리겠니? 그리고 홍보가 없으면 아무도 모르고.

"은미 네 탓 아니야."

"그래?... 하...."

한숨 쉬는 은미의 어깨는 축 쳐져서 땅끝 마을 해남까지 갈 기세다.

또 내가 나서야만 하는 건가?

"은미야. 내가 다 팔아줄게."

"아니야. 현찬이 네가 사면 아무 의미 없잖아."

"내가 안 살 건데? 내일 나랑 같이 옷 가게 가자. 사장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겠어."

"방법이 있어?"

"그럼. 나만 믿어."

별수 있나? 회사에서 굴렀던 짬밥 좀 이용해 줘야지.

다음날 옷 가게. 사장님이 내 앞에 앉아 있다.

"뭐? 홈페이지를 바꾸자고?"

"네. 사장님."

"왜? 디자인이 이상해?"

이상하죠.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은미보다 싱하형이 더 어울리는 디자인이에요.

팩폭 했다가는 장거한 같은 사장님이 김갑환과 최번개를 데려올 수도 있으니 돌려 말하자.

"네. 요즘 감성에 안 맞아요. 사장님이 만드셨죠?"

"응."

"홈페이지 맡겨서 만들어요. 그게 훨씬 나아요."

"굳이 그래야 할까?"

"저기 쌓인 옷들 정리하고 싶으시면 해야 해요. 누가 보면 창고정리 세일하는 줄 알겠어요."

말이 심했나? 눈물을 글썽거린다. 의외로 여리여리 하네.

"알겠어..."

"그리고 홍보는 우리가 할게요."

"어떻게?"

"나랑 은미 찍은 사진 있잖아요. 그 밑에 사장님 옷 가게 홈페이지 주소 붙여서 줘요. 그러면 우리 미니홈피에 올릴게요."

미래로 치면 인스타 마케팅 같은 거다. 실제로 이 시기에 몇몇 사람들은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회수가 깡패인 건 변함이 없다.

"아! 미니홈피 오는 사람에게 홍보하는 거구나. 그런데 너희 둘 다 조회수가 별로 안 높잖아."

"우리 둘 다 싸이 투데이 멤버 신청하려고요."

"어?.... 괜찮다! 좋아!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네. 대신 잘 되면 소고기 쏘세요. 누나."

"알겠어. 너희만 믿을게. 현찬아. 나 한 번만 살려줘."

"다 잘될 거예요. 은미야. 가자."

자. 이제 미니홈피 꾸미러 가보자. 스킨이랑 BGM 사려면 봄날의 다람쥐처럼 도토리 엄청나게 챙겨야겠다.

3주 정도 지나자 사장 누나로부터 홈페이지 리뉴얼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훨씬 낫네. 이것 봐. 은미 너도 훨씬 예쁘게 나오잖아."

"진짜네? 훨씬 예쁘게 보여."

새롭게 단장 한 홈페이지. 역시 돈과 시간이 최고다. 반공 포스트 같은 홈페이지가 은미가 확 살아나게 변했다.

"이제 우리 차례네. 싸이월드에 사진은 다 올렸고, 투데이 멤버 신청도 했고. 은미 너! 투멤 되면 인기 폭발하는 거 아니야? 방명록은 닫아놔."

"그럴 일 없어. 너야말로 투멤 되면 여자들 쪽지 엄청 오는 거 아니야?"

"설마."

"아니야. 석훈이는 투멤 아닌데도 쪽지 엄청 와. 더 놀라운 건 뭔 줄 알아?"

"뭐?"

"그 쪽지 보낸 여자들 다 만나러 다닌다. 아씨. 갑자기 불안하네. 현찬이 너도 임석훈처럼 만나고 다닐 거지?"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진짜?"

"응. 우리 엄마 걸고 약속할게."

"아하하. 왜 엄마를 걸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엄마를 왜 거냐고? 나는 여사친이 아니면 서지 않으니깐.

내 자취방 침대에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은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나저나 벌써 11월 말이다. 다음 주 기말고사 치면 이제 겨울 방학이네."

"그러게. 2학기는 정말 빨리 지나간다."

"겨울 방학 때 뭐할 거야?"

"나? 글쎄. 너는?"

"나도 별생각 없어."

"은미야.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뭐?"

"모델 하면 재밌어?"

"응! 사진 찍을 때 사람들이 나를 보면 가슴 두근거려. 그리고 내 모습이 예쁘게 나온 사진 보면 정말 행복해."

"그럼 진짜 모델 하고 싶겠다."

"그렇기는 한데, 내가 모델 비주얼로는 별로 인가 봐. 깡 마른 편은 아니잖아. 모델 치고는 키도 작은 편이고."

"그리고 가슴도 크지."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당연히 칭찬이지. 만약 모델 할 수 있다면 할 거야?"

"나? 당연하지. 꼭 하고 싶어. 내 꿈이거든!"

꿈이라.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니 진심인가 보다.

은미를 박인혜에게 소개해 줄까? 그게 운명이잖아. 그래도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는 거는 운명이 아닌가 보다.

내가 명함을 주지 않아도 호구신에게서 어떠한 경고도 안 온다.

-정해진 죽음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 없어.

축제 때 호구신의 말. 어쩌면 죽음이 아닌 운명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박인혜 사업이 잘 되게 할 수도 있는 거고.

아씨. 그런데 박인혜는 어떻게 망하는 거야? 이유라도 알면 어떻게 내가 해결해 주면 되는데.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띠띠띠띠디

투데이 멤버 신청한 지 며칠이 지났다. 정오에 겨우 눈을 뜨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서영 누나와 은미가 뛰어들어온다.

나 팬티만 입고 있는데?

"현찬아! 은미 투데이 멤버 되었어!"

"진짜? 은미야 진짜야?"

"응! 어서 일어나."

서영 누나와 은미 내 양손을 각각 잡고 일으켜 세운다. 이거 잠시 왕이 된 기분인데?

"꺅! 너 바지 입어!"

서영 누나는 눈을 가린다. 아차차 정신 차리자. 이거 누나가 성희롱한 거예요.

옷을 입고 컴퓨터로 가서 은미 미니홈피를 봤다.

TODAY:110233

"은미야 대박이야. 하루에 만 명이나 온 거야?"

"바보야! 다시 봐봐!"

"...11만 명?"

"응! 11만 명이야."

와씨. 이전 생에 내 싸이월드 조회 수는 하루에 3명이었는데.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뭐?"

"현찬이 너도 투멤 되었어!"

"진짜? 나도?"

내 싸이월드 미니 홈피를 눌렀다.

TODAY : 12003

"은미야 나는 12만 명이야!"

"아니야. 만 이천 명이야."

아씨. 잘못 봤네. 남녀 차별 엄청 심하네. 그래도 하루에 만이천 명이 어디냐!

"어제 너 공부한다고 정신없었잖아. 심심해서 미니홈피 열었는데 싸이월드에서 투멤때문에 쪽지 와있더라고. 커플로 선정했다고."

"은미야. 혹시 주문 들어 오지 않았는지, 사장 누나한테 전화해봐."

"잠시만. 네~ 언니. 정말요? 진짜요? 다행이다. 네네. 아하하. 다 현찬이 덕분이죠."

"뭐래?"

"잠시만. 네네 언니. 아 현찬이요? 네 바꿔 드릴게요."

"여보세요."

- 현찬아 고마워! 우리 대박 났어! 옷 주문 계속 들어와. 특히 은미와 선미 있잖아. 그 두 사람 옷은 계속 나가고 있어.

"것 봐요. 누나. 제 말 듣기 잘 했죠?"

-응. 너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나 두 달 동안 월세도 못 냈거든.

소고기를 사지 않기 위한 전략은 아니겠지?

- 시험 끝나고 가게 놀러와. 내가 소고기 사줄게. 친구들 다 데리고 와.

의심해서 미안해요.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아서요.

"현찬아!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미는 아기처럼 내 품에 안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나에게 키스한다. 은미야. 옆에 서영 누나 있어,

"참나. 야! 나는 안 보여?"

"아! 서영 언니 있었죠. 나 미쳤나 봐."

"좋을 때다. 다 잘 돼서 다행이야. 그런데 은미야 너 조심해야 해."

"왜요?"

"내 친구가 투멤 된 적 있거든. 그런데 막 이상한 데서 쪽지 온대."

"정말요?"

"응. 지금 한 번 쪽지 읽어봐."

설마. 그래도 싸이는 실명제인데.

- 너무 예쁘시네요. 그런데 옆에 남자분이 별로네요.

- 진짜 예쁘다. 옆에 남자는 뭐야?

- 옆에 남자 ㅂㅅ만 빼면 더 예쁠 거 같아요. 남자친구는 아니죠?

이것들아 왜 나를 욕해.

은미 싸이에서 내 욕한 사람을 자세히 보자 다 남자들이다. 너희들 부러운 거구나?

이것 말고도 만나자는 쓰레기 같은 쪽지가 넘쳐난다. 나와 은미가 보면 충격받을까 봐 서영 누나가 쓰레기 같은 쪽지는 지우기로 했다.

한참을 지우던 서영 누나가 갑자기 우리를 부른다.

"은미야 소속사라는데?"

"정말요?"

"응. 진짜야! 가수 할 생각 없냐고 와 있어."

"에이. 저는 가수는 관심 없어요."

"보자. 응? 모델도 있다!"

모델 소속사도 있다고? 은미에게 모델 제의를 하는 쪽지가 열 개 이상이 와 있었다.

"은미야. 여기도 아니야."

"하... 이게 뭐야."

세상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모델을 제안하는 소속사. 막상 인터넷을 찾아보면 홈페이지도 없고 뉴스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말만 소속사이지 어둠의 개자식들인 게 분명했다.

결국, 풀이 죽은 은미는 책상에 엎드린다. 서영 누나는 그런 은미를 위로해준다.

"은미야. 괜찮아. 이제 하루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하... 아니예요. 제가 무슨 모델 한다고요."

"어허! 우리 은미 왜 이리 풀 죽어 있어. 너 임석훈한테 들었는데 예전에는 당당했다면서. 현찬이 만나면서 얌전해 진거야?"

"임석훈 그 새끼가 그런 말 했어요? 진짜 이 새끼는 아우!"

입이 거칠어 진거는 기분 탓이겠지. 은미는 또 풀이 죽어 침대에 벌렁 눕는다. 나는 그런 은미 옆에 앉았다.

"은미야. 꼭 하고 싶어?"

"응. 한 번 꼭 해보고 싶어."

"만약에 했는데, 현실은 다르면 어떡할 거야?"

"응? 무슨 말이야?"

"실제로 해보니 힘들다던가, 아니면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진다던가."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해보고는 싶어. 아쉽다. 사장 언니만 잘 되고 나는 이게 뭐야."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내가 아는 사람 있는데 소개해 줄까?"

"응? 진짜?"

"응. 건너 아는 사람인데, 사실 자신이 없어서 소개 못 해줬어."

"왜? 이상 한 사람이야?"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내일 전화해보고 조만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정말? 정말!"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시간을 돌리는 돈데크만 처럼 빛나는 은미의 두 눈이 빛난다.

"응 진짜야."

"고마워! 현찬아. 정말 고마워."

이혜민도 운명이 바뀌었고, 이선미도 운명이 바뀌었고, 한서영 누나도 운명이 바뀌었다.

하은미 운명도 바뀌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겁내지는 말자.

< 피팅 모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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