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별 과제 >
내 자취방. 명절이 보름 정도 지났고 중간고사도 끝났다. 어느덧 10월 후반이 되었다.
아쉽게도 섹스 판타지에 관한 연구는 시험 때문에 진전이 없었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자.
옛말에 지피지기면 백섹백승 이라는 말도 있듯이 가장 중요한 건 정보다. 섹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먼저 취합하자.
수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전문 지식 창고인 PRUNA 와 WEBHARD를 이용했다. 내가 찾는 건 일본과 서양 쪽 전문가들의 정보. 나는 검색창에 전문가들의 키워드를 입력했다.
SOX. BANGUBUS. NOODYZ. TOKYOHOTHOT.
내 하드에 차곡차곡 쌓이는 전문 자료들. 하의를 벗은 경건한 자세로 영상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봤다.
호구신 말대로 나의 제약은 섹스에만 해당하는지 다행히 영상은 여사친이 아니어도 곧휴가 섰다.
잠시만. 그렇다면? 여사친이 아닌 사람의 영상을 본다면? 젠장. 그게 뭔 의미가 있겠냐. 게다가 불법이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자.
- 시간아 멈춰라.
- 게임에서 패배한다면.
- 여자가 다섯인데 나 혼자 동정이면
-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 그녀가 나의 주인이 된다면.
- 완벽한 몸매에 완벽한 얼굴
......
영상의 신뢰성을 파악하기 위해 Dance Dance Revolution을 했다.
내 머리에 한발! 머신건. 한 발 쏘고 나자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진다.
아직 못 본 영상은 200개 정도 된다. 과연 이 중에서 정답이 있을까? 일단 한숨 자야겠다.
*
다음 주 오후 학교 도서관.
시험 기간은 아니지만, 조별과제 때문에 도서관 매점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은미, 석훈, 서영 누나는 아직 수업 중이다. 지금 내 앞에는 이선미가 과제를 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다.
긴 생머리에 예쁜 얼굴.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이선미. 나는 그런 이선미를 보며 섹스 판타지가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 잘 한다. 친구한테.
아니. 궁금하잖아요! 섹스 판타지가 더 있다니깐.
"야! 왜 나를 음흉하게 쳐다봐?"
헉. 역시 이선미는 귀신이다. 전문 격투 선수들은 어깨만 움직여도 주먹이 어디로 날라오는지 안다는데, 이선미는 내 눈빛만 봐도 내 곧휴의 흐름을 아나 보다.
"아니야. 어... 아니다."
"뭐 궁금한 거 있어? 빨리 말해."
"너 지금 내 머릿속에 있어? 어떻게 알아?"
"지금 네 눈빛 봐라. 가만히 놔두면 나를 잡아먹겠다. 뭔데? 뭐가 궁금한 건데?"
이선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가슴골이 슬쩍 드러난다.
"선미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
"말해봐. 뭐?"
"너... 혹시 섹스 판타지 있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어제 뉴스에서 봤는데, 여자들도 섹스 판타지가 있다고 하더라고."
"예를 들면?"
"음... 쓰리섬? 뭐 그런 거? 아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런 게 있다고 해서."
"훗."
어? 선미는 슬쩍 웃더니 갑자기 의자를 당겨서 내 옆으로 왔다.
"현찬아. 나도 섹스 판타지 있어."
"어? 진짜? 뭐?"
"말하기 부끄러운데..."
"말해봐 선미야. 그냥 판타지잖아."
"가까이 와봐."
우리 둘은 서로의 머릿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붙었다. 선미는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 쓰리섬 하고 싶어. 은미랑 같이 너하고 하고 싶어."
"정말?"
"조용히 말해. 응. 나랑 은미가 같이 누워있고, 현찬이 네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 거야. 사실... 은미랑도 이야기됐어. 너만 괜찮다면 상관없데."
"진짜? 나는 괜찮아! 어! 정말 괜찮아!"
"현찬아. 잠시 눈 감아 볼래?"
"알았어. 악!"
눈을 감자마자 내 머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다시 눈을 뜨자 이선미가 파일을 돌돌 말아서 두더지 잡듯이 내 머리를 두드린다.
"이 새끼는! 명절날! 뭘! 했기에 또 발정 나서 그래! 어? 야! 야! 황남빵 100만 원어치 사 올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너 고향 가서 뭐 하고 왔어? 나이트 가서 쓰리섬 하고 왔지! 그래서 은미에게 미안해서 사 온 거지?"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귀신이네. 오래간만에 건수를 잡아서 그런지 신나는 표정으로 계속 때린다.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선미는 때리는 걸 멈추고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불안한데. 생각이 끝나자 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는다.
"웃기네. 솔직히 말해봐. 그러면 내가 다 들어줄게. 혹시 메이드복 같은 거 입고 복종해주는 그런 거 좋아하는 거야?"
귀신 맞네. 이선미는 수위를 한 단계 내리면서 나를 유혹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달콤한 함정이다. 저기에 넘어가면 황정민이 '선미는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너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하면서 나를 비웃을 거다.
"됐어.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냥 잊어버려."
"말 못하는 거 보면 원하는 게 있나 보네. 뭔데~ 궁금하잖아. 말해줘 현찬아~~~"
이제는 가슴을 흔들며 애교를 부린다.
진짜 이선미가 구미호 중의 구미호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태어났으면 연합군 스파이는 싹 쓸었을 거다.
"됐거든. 애들 올 때 안 되었어?"
"칫. 재밌다가 말았네. 이제 올 거 같은데? 어 저기 온다."
고개를 돌리자 은미, 석훈, 서영 누나가 매점으로 들어온다,
은미는 내 옆에 앉았고, 석훈과 서영 누나는 맞은 편에 앉았다.
"현찬아. 나 배 아파."
은미가 내 팔을 꼭 잡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 오늘 마법에 걸렸다고 했지. 그런데 섹스 판타지나 생각하다니. 나는 쓰레기였어.
진돗개 하나. 진돗개 하나. 오늘은 은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쓰자. 한 손으로 은미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자 고개를 흔들면서 내 팔에 뺨을 비빈다. 서영 누나는 그런 우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은미는 남자친구가 자상해서 좋겠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더 나쁜 놈 되니깐요.
"그런데 우리 조별과제는 어떻게 할 거야?"
"아. 우리 조별과제 있었죠."
조별과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비효율적인 문제 해결 방법. 오죽하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조별과제도 60명이 찌르기로 했는데 칼자국은 23개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조원이 우리 다섯 명이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제사가 한주에 두 번 열릴 일은 없겠다.
"서영 누나. 일단 은미 아프니까, 주말까지 각자 조사만 하죠. 기업 조사 리포트죠? 의류 계열 회사로 하죠."
"저번에 말한 그 회사?
"네. 석훈이랑 선미는 현재 브랜드 조사해주고, 누나는 연혁 조사해주세요,"
"그러자. 은미야 좀 괜찮아?"
"언니. 나 너무 아파요."
"어서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너희 둘 먼저 내려가. 나는 석훈이하고 선미랑 조사하고 내려갈게."
"언니 나도 도서관 가야 해요."
"왜?"
"저 다른 수업 리포트도 있거든요. 아. 너무 아프다. 그래도 가서 해야죠."
내 옆에서 배를 잡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은미. 그 모습을 보자 숨겨왔던 나의 힘이 올라온다.
"은미야. 내가 해줄게. 걱정 하지 마."
"아니야. 현찬아. 내가 할게."
"오늘 아프잖아. 나만 믿어."
은미야. 이전 생에서도 너 과제 내가 다 해줬어.
"진짜? 고마워. 내가 꼭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런데 현찬아 너 빛나는 거 같아."
응. 지금 킹갓엠퍼러제너럴 호구사이어인 상태거든.
"그래? 지금 내가 구세주 같아서 그런가 봐. 우리 내려가자."
"도서관 안 가도 돼?"
"응. 집에서 다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우리 먼저 갈게요."
"언니, 석훈아 선미야 우리 먼저 내려갈게."
나와 은미는 짐을 챙겨서 도서관을 나왔다.
*
내 자취방. 지금 시간은 밤 11시.
저녁 먹고 시작된 은미 과제는 다섯 시간 정도 하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과제가 세 개였다니. 어차피 했을 거지만, 진작 말해 줬다면 마음의 준비는 했을 텐데. 뭐. 수만은 허위 보고서에 길들어 있는 나에게 어렵지는 않았다.
기지개를 한번 켜고 의자를 침대로 당겼다.
은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내 침대 위에 쓰러져 있다. 어젯밤에 아파서 한숨도 못 잤다는데, 다행히 지금은 약을 먹고 배에는 장수 돌침대 같은 찜질기를 올리고 잠들어 있다.
새근새근 잠자는 모습을 보니 귀엽다. 나는 그런 은미의 이마에 뽀뽀했다.
"응... 현찬아... 몇시야?"
내 뽀뽀에 은미가 일어났다.
내가 백마탄 왕자님이었다니. 백마를 타보고 싶기는 한데... 아차차! 물러나라 음란마귀. 정신 차리자. 워싱턴 보살 가서 굿이라도 해야겠다.
"지금 11시야."
"어? 정말. 나 다섯 시간이나 잤어?"
"응. 몸은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 이제 아픈 거는 거의 없어졌어. 거의 끝나 가거든."
"다행이다. 조금 더 누워있어 은미야."
"아니야. 나 일으켜줘 현찬아."
은미는 어린아이처럼 양팔을 나를 향해 흔든다. 그런 은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주자 나를 끌어안았다.
코끝에 들어오는 은미의 화장품 냄새. 내 마음을 누르는 은미의 가슴. 기분 좋은 따뜻함을 느끼는데, 은미가 내 등을 토닥토닥했다.
"현찬아. 고마워."
"응? 왜?"
"챙겨줘서. 찜질기도 나 아프다고 해서 사 온 거잖아."
"너 아픈데 당연하지."
"우리 현찬이가 최고야."
"더 최고인 것도 있는데."
"뭐?"
"과제 다 했어."
"정말!? 진짜?"
은미는 크리스마스 선물 받은 아이가 되어 기뻐했다. 뭐 이 정도는 당구로 치면 파이브앤 하프 시스템 기본 가락구지.
"응. 그것도 세 개 전부 다 했어. 바탕화면 은미 폴더 안에 과제 있으니깐 확인해봐."
"고마워. 내가 꼭 맛있는 거 사줄게."
"별말씀을요. 나 담배 하나만 피우고 올게."
컴퓨터에 앉아 과제를 확인하는 은미를 뒤로하고 나는 자취방을 나왔다.
-칙.
피워오는 담뱃불.
전생에서도 은미 과제는 내가 다 해줬는데 이번 생에서도 내가 해주다니.
그래도 이전 생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강제로 한 거고 지금은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거다.
은미도 그때는 당연하듯이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사소한 것 하나를 해줘도 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변하지 않은 듯 변한 거 같은 재미난 상황이다.
담배를 다 피우고 다시 자취방에 들어갔다.
은미는 모니터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야. 민현찬. 이거 뭐야?"
"어? 왜?"
"너 지금 뭐 한 거야?"
차가운 은미의 말. 전생의 모습이다. 갑자기 왜? 과제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과제? 별문제 없을 건데?"
"아니. 과제 말고. 이거 말이야."
과제 말고?
은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옆에 서서 모니터를 봤다. 화면을 보자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모니터에서는 한 남자가 모두가 아는 시계를 들고 있고, 여자 두 명이 나체로 시간이 멈춘 채 서 있었다.
"너. 나 생리라고 야동 보는 거야?"
젠장. 전생에서 혼자 컴퓨터 쓰던 버릇에 버젓이 섹스 판타지라는 이름의 폴더를 바탕화면에 놔뒀다. 여자친구가 있어 봤어야 야동이 있는 폴더를 숨겨야 한다는 걸 알지. 이렇게 야동을 보고 안 지운 적은 처음이기도 하고.
"뭐가 이렇게 많아? 와! 200개가 넘어?"
"은미야 그게 아니라."
"여자가 다섯인데 나 혼자 동정이면? 민현찬! 너 진짜!"
도깨비가 되어서 나를 노려보는 하은미. 전생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일단 침착히 내 말 좀 들어봐."
"잠시만 있어 봐. 이거는 뭐야? 완벽한 몸매에 완벽한 얼굴?"
은미가 더블클릭으로 동영상을 재생시키자 진짜 완벽한 몸매에 완벽한 얼굴의 배우가 나왔다. 화면의 누님은 가슴도 D컵에 뱃살 하나 없다.
망할. 다운받을 때 판매자가 자기가 안 친 거는 안 올린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였구나. 쓸데없이 신뢰도 높은 새끼.
은미는 자신의 가슴을 한 번 보더니 눈물을 글썽거린다.
"나로는 만족이 안 되는구나. 흑....흑...."
은미야. 차라리 화를 내. 이게 뭐라고 울고 있니. 일단 달래 보자.
< 조별 과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