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44화 (44/295)

< 동창회 >

"현찬아. 이 옷 입어봐."

추석 이틀 전. 쇼핑한 나와 은미. 지금은 자취방에서 패션쇼 중이다. 은미는 옷을 갈아 있느라 브래지어에 팬티만 입은 채 나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다.

"아! 우리 현찬이 예쁘다. 맘에 들어."

"괜찮아?"

"응. 마음에 들어. 오래간만에 집에 가는데 예쁘게 가야지."

"고마워. 너도 옷 사 온 거 입어봐."

"알겠어."

은미는 반 팔 티와 치마, 그리고 얇은 잠바를 입고 내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어때?"

"예쁘다! 이렇게 입고 유럽 가면 연예인이겠어."

"그치? 역시 마음에 들어 잘 골랐어."

"혼자 간다면 나도 따라갔을 건데, 부모님이랑 같이 가서 아쉽다."

"그러게. 다음에 우리 둘이 가자."

은미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명절 때 부모님과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한다. 반대로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다. 그것도 보통 제사가 아니라 어동육서, 홍동백서 등 다 챙겨서 제사상을 차렸다. 민속촌 갈 필요가 없네. 명절날 고향 가면 바로 조선 시대 된다.

"현찬아 너희 동네에 황남빵 있지 않아?"

"황남빵? 그거는 경주에 팔걸? 우리 집은 경남이라서 없어."

"아 그래?"

"왜? 갑자기?"

"어제 티비에 나왔는데 맛있어 보여서. 근처면 사달라고 했지. 멀면 괜찮아."

"황남빵 대신 다른 거 줄 거 있어."

"뭐?"

"비상약이야. 너 안 챙겼지?"

"아! 맞다. 고마워. 보자~~ 어쩜 이렇게 필요한 것만 딱 챙겨놨어?"

훗. 저번 생에서 회사 선배들 해외 출장 때 약 심부름했거든. 정말 가 족 같은 팀원들이었지.

"너 아프면 안 되니깐 내가 챙겼어."

"고마워 잘 갔다 올게. 선물 뭐 사 올까? 아니다. 기대하고 있어! 내가 좋은 거 사 올게."

"알겠어 은미야. 잘 갔다 와."

"응. 현찬아 너도 고향 잘 갔다 와."

일주일 동안 은미와 이별이구나. 오래간만에 집에서 푹 쉬다 와야겠다.

고향 내려가는 길. 뒷좌석에는 티몬과 품바가 잠들어 있다.

망할 것들. 내가 택시냐? 차에 탈 때 에티켓은 안드로메다에 놔두고 탔나 보다. 아니면 티몬과 품바여서 하쿠나마타타 정신으로 모든 게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거든가.

룸미러로 뒷좌석에서 자는 티몬과 품바를 보자 고등학교 생각이 난다. 우리 고등학교는 조금 독특한 실업계였다. 노는 아이들이 70%, 공부하는 아이들이 30%인 학교였다. 뭐 공부하는 쪽도 좋은 대학을 가지는 않았다. 나는 공부하는 쪽이었고, 티몬과 품바는 노는 쪽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대해서 큰 추억이 없다. 축구하고 공부한 게 전부다. 그런 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최진아. 공부도 꽤 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친구다. 하은미의 싸가지에, 이선미의 까칠함을 합친 캐리건 같다. 두 사람이 그냥 커피면 최진아는 TOP다. 얼굴이 예뻐서 인기가 많은 것도 똑같다.

신기한 건 고3쯤 되자 철이 들었는지, 아니면 집에서 엄마한테 똑같이 하다가 폴 피닉스 붕권 세 대 맞고 KO 됐는지 얌전해졌다.

진아는 나에게 10년 전 사람이다. 막상 이번 명절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갱끼데스까 와타시와 만나러 갑니다.

- 너 일본어 할 줄 아냐?

카와이, 야메떼, 다이죠브 정도 알아요.

명절 당일 저녁. 나는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명절을 편하게 지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아들. 이번 명절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현찬아.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어. 푹 쉬어."

"형.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형은 쉬고 계세요."

엄마, 작은 엄마, 사촌 동생.

용돈을 넉넉하게 드리자 노예였던 삶에서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되어 어른들의 정치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젠장 그런데 이쪽이 더 힘들다. 무슨 고향에 누가 어떤 정당에 있는데 뽑아줘야 하니 마니. 난리다 난리.

"현찬아. 너 오래간만에 내려왔는데 친구들 만나고 와."

그런 나에게 아버지가 자유를 주신다. 이게 용돈의 위력인가? 나는 어른들께 인사하고 집을 나왔다.

- 6시까지 대학가 앞 로바다야키로 와.

낮에 온 품바 지민의 문자.

- 너 안 와? 애들 다 너 기다리고 있어.

방금 온 품바 지민의 문자. 간다 가. 이것들아. 어디 비싼 얼굴 내밀어 볼까?

- 딸랑.

대학가 앞 로바다야키에 도착해서 문을 엮었다. 명절 당일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보인다.

"현찬아! 여기야."

"어? 민현찬이다!"

"와. 쟤 키가 왜 이리 컸어?"

훗, 너희들 본다고 키를 1cm 더 샀지. 게다가 옷도 은미가 골라준 대로 입었고.

테이블에는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앉아 있다. 남자 다섯, 여자 다섯. 그런데 진아는 안 보인다. 내가 티몬인 은하 옆에 앉자, 은하는 마치 자랑하듯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한다.

"맞지? 내 말 맞지? 현찬이 엄청 변했지?"

동창들은 내 얼굴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정말 변했다. 너 성형 수술했어? 그리고 키는 어떻게 컸어?"

"안 했어. 너희들도 잘 지냈어? 정말 오래간만이다."

"야 아직 일 년도 안 됐는데. 우리야 그냥 지냈지. 지금 동창들 사이에서는 너 때문에 난리야. 모델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연예인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정도란 말이야? 좋아. 좋아. 계속 이야기해봐. 이 기분 좀 즐기자.

"너 여자친구도 엄청 예쁘다면서?"

동창들의 말에 은하가 나 대신 대답 했다.

"현찬이 여자친구 엄청 예뻐. 그런데 벌써 다른 예쁜 여자로 갈아탔다. 얘 대학가고 완전 카사노바 됐어."

"은하야. 갈아탔다가 뭐냐."

"맞잖아. 저번에 혜민이 인가? 그 아이도 예뻤는데, 이번에도 예쁜 애 만난다면서. 나 싸이보고 깜짝 놀랐어."

"진짜? 사람은 대학 가면 변한다더니. 대박이네. 너 과에서도 인싸겠다."

"응. 현찬이 과에서도 엄청 인싸야. 쟤 지금 과대하고 있어."

은하야. 너 왜 갑자기 내 변호사가 되었니? 나에게 오는 모든 질문을 은하가 대신 대답한다. 뭐 고맙기는 하다. 사실 지금 내 앞에 있는 동창들,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전혀 기억 안 난다. 별로 친했던 아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현찬이 술집 화장실에서 섹스 하고 싶다고 말했대."

"진짜? 와. 그 순진한 민현찬이 섹스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잠시만. 은하야.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응? 호빈이가 이야기 해주던데?"

박호빈. 주둥이가 짐바브웨 달러 같이 저렴한 새끼. 너는 물에 빠져도 괜찮겠다. 주둥이만 물 위에 떠올라서 건지기 쉬울 거니깐. 너 올라가서 보자.

"그건 그냥 술 먹고 실수한 거야."

"민현찬! 섹스 하고 싶다고? 너 변태야?"

갑자기 지랄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몸의 DNA 염기 서열에 기록 되어있는지 목소리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겠다. 고개를 돌리자 진아가 서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 키는 166cm 정도에 고양이 얼굴.

드디어 동창회에 친했던 사람이 나타났다. 10년 만인가? 진아의 얼굴을 보자 콰이강의 다리를 건넜던 전우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진아야!"

"민현찬 많이 컸다. 내가 왔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일어나는 거 못 하겠냐.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내. 제가 일어나 줘야죠. 진아야 키 작아졌어? 왜 이리 밑에 있어?"

"야! 너 키 컸다고 들었는데 진짜네. 아이씨."

"옛날의 민현찬이 아니야. 이제 오빠라고 해야겠다."

"오빠는 무슨. 예전에 내 꼬봉이었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나지. 네가 전자저울 올라가서 부셔놓고는 선생님께 내가 그랬다고 했잖아."

"아. 그건 미안. 현찬아. 다음에 내가 술 살게. 같이 앉자."

어? 미안? 이 구역의 미친년이 누구냐면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나가야 하는 최진아가 미안하다는 단어를 썼다고?

"너 왜 멀뚱히 보고만 있어?"

"아니. 네가 미안하다니깐."

"그때는 어렸잖아. 나도 철 들었어."

"그래서 키가 작아졌나?"

"아씨! 진짜!"

진아는 내 배를 팡팡 쳤다. 힘이 안 들어 간 거 보니 장난인가 보다. 나와 진아는 나란히 앉았다.

다시 시작된 술자리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현찬이 고등학교 때 조용하고 얌전했잖아. 거의 왕따 아니었어?"

남자 동창들이 갑자기 방망이 깎는 노인이 되어서 나를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랬나? 나는 현찬이 착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여자 동창들은 나를 방어해 준다. 치열한 공성전이 펼쳐졌다.

계속 내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 동창들을 보자 화는 안 나고 유치하기만 하다. 아직 아이들이구나. 나는 그냥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현찬아 무슨 생각해?"

"응? 아니 그냥."

진아가 갑자기 내 귀를 잡아당긴다.

"너 말이야. 졸업하고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해? 얼굴 잘생겨졌으면 다야?"

이번에는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흔든다. 그러자 남자 동창들 눈에 불이 난다.

아. 여기는 동창회가 아니구나. 세렝게티 정글이구나. 이제 고작 20살인 수컷들. 암사자인 진아가 나만 바라봐서인지 머리에 뿔이 나 있다.

"민현찬! 너 내 말 안 듣고 무슨 생각해?"

"응? 다 듣고 있어. 우리 진아 이야기 잘 들어 줘야지."

조금 더 열 받아봐라. 나는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쭈?"

"왜? 싫어?"

"아니. 그냥."

진아는 환화게 웃었다. 그러자 게이트가 열렸다. 남자애들은 나도 기억 못하는 고등학생 시절 사소한 흑역사까지 꺼냈다.

"현찬이 예전에 찬수한테 맞아서 코피 나지 않았어?"

축구 하다고 공으로 맞았지. 페널티킥에서 내가 키퍼로 잠시 섰으니깐.

"그리고 교실에서 운 적도 있잖아."

어... 그건 흑역사 맞다. '그놈은 멋있었다' 보고 울었으니깐. 나는 왜 그걸 보고 울었을까?

"진아한테 고백하지 않았나?"

진아한테? 그런 기억은 없는...

"아! 민아! 야 그거 민아였어! 나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진아야 너 민아랑 친했잖아. 민아는 어떻게 지낸대?"

고2 때 사탕 들고 가서 고백했었다. 내 고백에 민아는 붉어진 얼굴로 내 머리에 연필을 꽂았다.

데마시아! 그때 민아는 LOL 자르반 그 자체였어요. 그러고 한 달 후에 전학 갔는데 내 고백 때문에 전학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제야 기억나다니. 정말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나 친하기만 한 여자들은 정말 많았구나. 어쩌면 나는 피지컬만 부족했던 건가?

"몰라. 나도 연락 안 돼."

진아는 술을 한잔 마셨다. 그런데 너 왜 그리 화난 것처럼 보이냐? 진아가 화난 듯이 행동하자, 남자들은 나를 물고 뜯고 맛보기 시작했다. 다들 술 먹기 전에 이가탄 먹고 왔나 보다.

계속되는 술자리. 이제 끝날 시간이 다 됐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화장실을 갔다가 담배 하나 피우러 나왔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제법 차다.

찬 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최진아. 어? 너 왜 내 옆에 있니? 삼립호빵이 있어야 하는데.

"뭐하러 나왔어?"

"나? 너 따라 나왔지. 너는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화 안 나?"

"뭐가?"

"애들이 너 놀리잖아. 바보도 아니고."

"진아야. 네가 예전에 내 괴롭힌 거에 비하면 장난이야."

"내가? 뭐 그렇지. 그건 미안."

"됐어. 옛일인데. 그리고 화내봤자 아무 의미 없어. 내가 애들도 아니고. 어른이 어떻게 하는지 보여줄까?"

"어떻게?"

"따라와 봐."

다시 가게로 들어와서 계산대 앞으로 갔다.

"저 안쪽 테이블 계산 해주세요."

"27만 원 나왔습니다."

"여기 카드요."

계산 완료. 진아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네가 왜 계산해?"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가워서. 그리고 얼마 나오지도 않았잖아. 나 먼저 갈게."

"벌써 갈려고?"

"응. 집에 들어가 봐야 해."

"잠시만. 휴대폰 좀."

진아는 번호를 적어준다.

"내가 다음에 연락할게."

나는 술집을 나왔다. 뭐 굳이 계산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오래간만에 보니 반가웠다. 희미하지만 1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인데 이 정도야 뭐.

그리고 사회에서 경험이 한몫하기도 했다.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잘생긴 친구가 계산하고 집에 가버리자, 남은 남자들은 바보가 되었다. 여자들은 뒷담화 깐 남자들을 욕했다.

- 디리리링.

"여보세요?"

- 현찬아. 나 진아야. 어디야?

"나 아직 근처야 왜?"

- 지민이랑 나랑 한잔 더 하자.

"너희 어딘데?"

- 우리가 술집 잡고 연락해줄게. 꼭 와.

아직 10시니깐 집에 가기는 이른 시간이네. 딱 한 잔만 더하자.

진아가 문자로 보내준 술집에 들어갔다. 이 시절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룸식 술집인데, 방음이 잘 되어서 밖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드르륵.

"현찬아! 왔어?"

"잘 찾아 왔다. 여기 앉아."

진아는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마련해준다. 나는 옆에 앉았다. 다시 시작된 술자리. 우리는 한동안 추억에 빠졌지만, 그것도 잠시다. 우리 우정은 습자지 같구나. 너무 얇다.

이제 무슨 이야기 하지? 일단 술을 한잔 마시자.

"현찬아. 그런데 너 섹스 엄청 좋아하나 봐."

갑자기 지민의 핵 펀치가 훅 들어왔다.

"풉! 야 깜짝이야."

"뭘 부끄러워 해. 다 성인인데. 너 설마 우리를 여자로 보는 거야?"

"그럼 너희가 여자지. 남자냐?"

내 부끄러운 모습이 재밌는지 진아가 옆에서 깔깔 웃는다.

"얼굴 벌게졌네. 너 순진한 건 여전하다. 지민아 너 최근에 언제 했어?"

"나? 얼마 전에 클럽 갔다가 만난 사람이랑 했어. 너는?"

"꺄! 너 원나잇 했어? 나는 두 달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한 번도 못 했어. 나는 원나잇은 못 하겠어."

애들이 캡틴큐를 마셨나? 테이블을 보자 이유를 알겠다. 추억이 얇은 만큼 술을 많이 마셨구나. 우리가 마신 술은 어느덧 소주 7병이다. 나도 정신이 혼미하다. 일단 이 재미난 이야기에 끼어들어 보자.

< 동창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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