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육 대회 >
담배를 피우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서영 누나는 바닥에 누워 절반은 두꺼운 이불에 갇혀 있다. 잠시 옆에 앉아서 하얀 얼굴을 보았다.
단발 머리에 하얀 얼굴. 분홍빛 입술.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공깃밥을 건네주던 그 누나.
공깃밥 한 그릇이라도 꼭 제가 더 먹길 바랬나요? 뭐 옛일이니. 유치한 복수는 그만하자. 얇은 여름 이불로 바꿔주고 은미 옆에 누워 잠들었다.
*
- 야 민현찬 일어나. 안 되겠다. 석훈아 발로 차.
- 오케이 그 말 기다렸어.
꿈인가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데
퍽!
꿈이 아닌가 보다. 내 엉덩이에 느껴지는 충격. 눈을 떠보자 선미와 석훈이가 와있다.
"임석훈 이 미친. 야 너희 지금 몇이신데 와서 난리야?"
"지금? 아침 열한 시야."
벌써? 진짜네. 창밖을 보자 해가 환하게 들어온다. 은미는 옆에서 자고 있고, 서영 누나도 자고 있다.
"근데 너희 둘 왜 왔어?"
이선미가 너구리를 한 손에 들고 웃는다.
"우리, 라면 먹으러 왔지. 아침 먹을 게 없어서. 현찬아 라면 끓여줘~~. 술 먹은 다음 날은 네가 끓인 라면을 먹어야 한단 말이야~~."
"선미야. 애교 안 부리면 끓여줄게."
"그래. 뒤지기 싫으면 빨리 끓여라. 은미야 일어나!"
"음.... 선미야 왔어?"
침대에서 은미가 부스스 일어난다. 이제 서영 누나만 남았나? 시끄러워서 그런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서 우리를 본다.
"애들아... 여기가 어디야?"
"누나 여기 제 자취방이에요."
"아... 미안 현찬아. 나 어제 필름 끊겼나 봐. 별일 없었어?"
많은 일이 있었죠.
"누나. 어제 혜진 누나에게 피오나 공주라고 했어요."
"진짜? 정말?"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머리 위에 올리는 서영 누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본다.
"어? 나 멀쩡하네? 혜진 언니 가만히 있었어?"
"그냥 넘어갔어요. 술 취해서 그런 거라면서요."
"하... 미안해 죽겠네. 서영아 서영아 진짜 왜 이러냐."
서영 누나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친다. 임석훈이 옆에 가서 말린다.
"누나. 너무 자책하지 마요."
"하... 아니야. 나 혜진 언니 어떻게 봐."
"어제 누나가 혜진 누나에게 슈렉 같은 년이라고 했는데도 참았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캬! 임석훈 저 새끼! 막타 내가 날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킬 딸 하네. 서영 누나는 소환사의 협곡에 쓰러진 챔피언처럼 뒤로 벌러덩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다.
임석훈 악의를 가지고 한 건 아닐 거다. 술 먹고 실수한 사람은 다음 날 놀려야지 다시는 안 하니깐 일부러 말 한 걸 거다. 이제 내 차례인가? 달래주자.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임석훈 저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어제 그 정도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진짜? 다행이다. 현찬아. 나는 그냥 갈게."
"라면 먹고 가요. 제가 끓여 줄게요."
"아니야. 너희들한테 미안해서 그래."
"누나 미안하면 라면 먹고 가세요."
"오~~ 민현찬. 여자친구 있는데 누나한테 라면 먹고 가라고 한다. 오~~"
"임석훈 너는 라면 먹지 마."
"내가 햇반 사 올게. 누나 라면 먹고 가요. 현찬이 라면 한 번 먹으면 잊을 수가 없어요. 너 물 어떻게 맞추냐?"
"대충 발목 잠길 정도면 라면 세 개정도 물 나와. 나 라면 끓일게."
경악하는 아이들. 그러게 라면 어떻게 끓이는지 봤어야지 이것들아. 걱정하지 마 농담이니깐.
*
라면을 다 먹은 친구들. 이선미와 하은미는 침대에 누워서 잔다. 서영 누나는 그 모습을 보더니 신기하게 쳐다본다.
"너희 항상 이렇게 붙어 다녀?"
"네. 어쩌다 보니깐요. 석훈이는 가끔 다른데 놀러 가요."
"나는 바쁘잖아. 그나저나 우리 다음 주 체육대회다. 서서히 준비해야 해."
"뭐한데?"
"남자는 축구하고, 여자는 피구하고. 이번에 과티 패션쇼도 한다던데?"
"과티 패션쇼?"
어?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그리고 마음 한 편이 왜 불쾌해지지? 저번 생에서 나빴던 기억인가?
"너 표정 왜 그래?"
"아니야.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여자 피구가 문제네. 우리 누가 나가지? 선배들 안 나가서 우리 동기로 인원수 채워야 할 건데."
"내가 나갈게."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영 누나다. 기지개를 하늘로 켜면서 말한다.
"누나, 피구 나간다고요?"
"응. 나 운동 잘해."
보통 여자애들은 피구 같은 거 엄청 싫어하는데. 나한테 미안해서 나가려는 건가? 그건 아닌가 보다.
아침 해가 빛나는. 끝이 없는 바닷가.
단발머리를 흔들며 웃는 서영 누나는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저 표정은 피구왕 통키에서 유학 갔다 온 타이거의 모습이다.
"혹시 어릴 때 피구부였어요?"
"피구부가 어딨어? 중학교는 배구 했었고, 고등학교 때는 댄스 동아리였어."
크흑. 이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누나는 양파군요. 까면 깔수록 새로운 게 나오면서 절 눈물 흘리게 하네요. 임석훈이 옆에서 듣더니 누나에게 장난을 친다.
"그래서 누나가 종아리가 굵군요."
"그래? 그런가 봐."
"어? 나 장난으로 말 한 건데. 진지하게 받으면 제가 쓰레기 되잖아요."
"응? 진짜로 한 말 아니었어? 농담이었다면 미안해."
누나는 얇은 종아리를 보고 말한 임석훈에게도 철벽을 친다. 원래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성격인가 보다.
***
다음 주 월요일 학과 사무실. 혜진 누나와 종수 형. 그리고 모여있는 우리들. 파라오는 관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럼 현찬아 네 말대로 축구는 일, 삼 학년들로 팀 만들어서 나가는 거로 하고, 여자 피구는 일학년들로 나가는 거로 하자."
"네. 혜진 누나. 우리 어차피 축구는 못 이기니깐 상금 포기하고 여자 피구에 승부를 걸어보죠."
"둘 다 상금은 50만원 정도니깐 여자 피구만 이겨도 우리 술 마실 돈은 나오겠다. 여자 피구는 자신 있나 봐?"
"서영 누나가 고등학교 때 운동해서 자신 있대요."
"아 맞다! 서영이 운동 잘했었지."
"어? 누나 알고 있었어요?"
"응. 서영이 일 학년 때 과대했었어. 그때 하도 나한테 덤비길래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가 싶었더니 고등학교 때 운동해서 자신감 있던 거더라고. 응? 너 표정 왜 그래?"
방금 양파가 하나 더 까져서 그래요. 왕좌의 게임에서 존 스노우 기분을 알겠다. 보는 사람마다 '넌 아무것도 몰라' 라고 들으면 이런 기분이겠지?
"혜진 누나 과티 패션쇼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거? 몸짓해야지. 과티 입고 몸짓하는 거로 하려고."
아! 시불! 과티 패션쇼 이야기 들었을 때 마음이 왜 꺼림칙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바로 몸짓!
몸짓은 응답하라 1988에 나온 것처럼 민중가요에 춤을 추는 건데, 우리 학교는 지방에 있는 학교여서 그런지 아직 그 문화가 남아 있었다.
몸짓이라는 단어에 저번 생의 과티 패션쇼 기억이 떠오른다. 전생에서 남자들 몇 명이 여장하고 나가서 몸짓했었다. 결과는? 우리가 무슨 패드립 한 사람인 줄 알 정도로 사람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특히 공대의 야유는 리버풀 훌리건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거칠었었다.
"누나 혹시 여장 같은 거 생각 하는 거 아니죠?"
"어? 어떻게 알았어? 너랑 석훈이랑 몇 명 더 해서 여장시킬 생각이었는데."
"키 180이 넘는 남자들이 여장하고 나가면 폭동 일어날걸요?"
"재미있지 않을까? 현찬아 다시 생각해봐."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혜진 누나. 오래간만에 장판파 장비의 모습이다. 이럴 때는?
"누나~~~ 제발~~~"
"웩. 너 미쳤어? 각목 든다."
"토하라고 한 거예요. 제발 그거는 하지 말죠."
"일단 해보고 아니면 안 할게. 아이들 다 모아봐. 몸짓은 대부분 할 줄 알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배우긴 했는데... 일단 알겠어요."
좋아. 누나. 우리가 얼마나 최악인지를 보여줄게요. 보면 마음 바뀌겠지.
*
과 건물 앞에 모인 나와 임석훈, 박호빈. 지금 우리는 오래간만에 동맹 상태다. 은미, 선미, 서영 누나는 그런 우리에게서 열 걸음 물러나서 구경하고 있다.
"호빈아. 알겠지? 무조건 병신 같아야 한다."
"알겠어. 현찬아. 이거는 진짜 죽어도 하지 말자."
"석훈아 너도 무조건 병신 같아야 해."
"걱정하지 마. 나는 원래 병신이니깐. 저기 혜진 누나 온다."
조그마한 엠프를 들고 오는 혜진 누나와 종수형. 무언가를 설치하더니 아이리버 MP3플레이어에서 음악을 튼다. 아이리버 오래간만이네.
-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시작된 노래. 우리는 노래 가사처럼 바위가 되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웃는다. 노래는 클라이맥스로 갔다.
-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니.
저 가사 다음에는 이 노래 최고의 수치플 동작이 나온다.
"아싸아싸아싸 예!"
아싸아싸 마다 양손을 날카롭게 세워 무릎을 찌른 후, 예~에서 하늘로 손을 올리는 동작이다. 우리 세 명은 각자 다른 무릎을 찌르고 엇박자로 하늘 위로 손을 올렸다.
"아하하하. 너희들 일부러 이러는 거지?"
"현찬아. 너 무릎이랑 손이랑 안 맞아."
빵 터져서 웃는 선미, 은미, 서영 누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흔드는 혜진 누나. 좋다. 계획 대로다.
-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노래가 끝났다. 하얗게 불태웠어. 위풍당당하게 선 우리 셋에게 혜진 누나가 다가온다.
과연 누나 점수는요?
두근, 두근, 두근,
"이거 안 되겠다. 포기하자. 현찬아 그냥 네가 알아서 준비해."
예스! 0점 0점 0점입니다. 잠시만?
"제가 알아서 준비 해라고요?"
"응.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요?"
"안 나서 줄게."
혜진 누나는 빙긋 웃었다. 그렇긴 하죠. 안 나서는 게 제일 도와주는 거기는 하죠. 이거 예상 밖의 시나리오인데. 과티 패션쇼를 어떻게 준비하지?
혜진 누나와 종수형 그리고 호빈이는 장비를 정리하고 과 건물로 돌아갔다.
이제 어떻게 하냐? 일단 아이디어를 위해서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활동을 높여야겠다.
바로 담배 타임이다. 우리는 건물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었다.
"현찬아. 어떻게 할 거야?"
"은미야. 옷에 담배 냄새 배겨."
"괜찮아."
건물 대리석에 앉은 나, 석훈, 은미. 앞에 는 선미와 서영 누나가 서 있다.
서영 누나?
"누나! 댄스 동아리 했다고 안 했어요?"
"응. 고등학교 때 했었어."
역시. 현자타임에 버금가는 담배 타임이다.
"누나! 우리 댄스 만들어 줘요."
"어? 댄스?"
"네! 몸짓 대신에, 이렇게 누나, 선미, 은미 과티 입고 춤추는 거 어때요?"
"나야 상관없는데, 다른 아이들은? 선미야 너는 어때?"
"언니 재밌겠는데요? 현찬아 나는 할게. 은미 너는?"
"나도 괜찮아. 재밌겠어."
그래. 이거다. 은미, 서영, 선미 세 명이 한번 걷고 와도 되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세 명이 춤춘다면? 해볼 만하다.
들떠있는 나를 향해 서영 누나가 웃으며 본다.
"너희도 해야지. 임석훈. 민현찬."
어? 잠시만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가나요?
"그래. 현찬아. 나 너랑 같이 커플 댄스 할게."
"은미야. 나 다리 다쳐서 못 출 거 같아."
"응? 축구는 어떻게 하려고?"
젠장.
"나는 괜찮은데 석훈이가 안 한다고."
"나 할 건데? 다 추억 아니겠어?"
"너 솔직한 마음 말해봐."
"네가 하기 싫어하는 거 보니깐 어떻게든 하고 싶다. 내가 망해도 네가 더 망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거야. 과티 패션쇼 상금 100만 원이래. 이걸로 과 애들이랑 술이나 먹자."
망할. 상금 100만 원 그냥 내가 낼게. 뭐 그래서는 의미가 전혀 없지만.
나를 가운데 놓고, 왼쪽은 은미, 오른쪽은 석훈. 앞에는 선미가 나를 압박한다. 아쉽게도 이 압박 수비를 빠져나갈 틈은 없다.
"그... 그러자. 알겠어. 누나 안무 언제 짜줄 수 있어요?"
"내일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 노래는 뭐로 할래?"
"채연의 '둘이서'로 하죠. 이왕이면 쉽게 짜주세요."
"알겠어. 현찬아."
그래. 이렇게된 거 열심히 해서 전생의 외상후 스트레스를 치료해보자.
*
다음날 오후. 과 건물 복도.
한쪽에서 채연의 둘이서 가 흘러나온다. 서영 누나는 치마와 바람막이 잠바를 입은 채 그 노랫소리에 맞춰서 춤을 춘다.
난. 나나나. 난난 나나나 나
서영 누나는 저 부분에서 팔을 흔드는 원래의 동작 대신에 웨이브를 넣었다. 만약 여자 세 명이 무대에서 저 동작을 한다면? 공대 형들 바로 코피 쏟아서, 학교 앞에 엠뷸런스 올 거 같다.
서영 누나가 짜온 안무는, 처음에는 나와 임석훈 두 사람만 춤을 춘다. 그렇게 춤추다가 일절 끝날 무렵에 나와 임석훈이 빠지고 세 사람의 무대가 시작되는 구성이다. 반전 드라마 같은 구성. 마음에 든다.
누나의 안무를 따라서 우리는 모두 같이 연습을 시작했다.
은미는 서영 누나만큼은 아니지만 잘 춘다. 일단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가 원피스 핸콕이다.
선미. 춤은 조금 부족하지만 아무 의미 없다. 예쁜 얼굴과 싸가지 없는 카리스마가 콜라보레이션을 하자 별풍선을 가져와서 바치고 싶어진다.
석훈. 뭐 워낙 놀기 좋아하고 다재다능한 아이니깐 춤도 제법 잘 춘다.
이제 마지막 한 명 남았네.
모두가 춤을 추는 나를 바라보더니 선미, 은미, 석훈 순으로 한마디씩 던진다.
"야! 민현찬. 너 제대로 안 해? 서영언니 어제 안무 짠다고 밤새웠데."
"현찬아 정말 어디 다쳤어? 괜찮아?"
"이 새끼 왜 이래? 너 무슨 목각 인형이냐?"
고백할 시간이 온 건가?
"애들아. 나 솔직히 말할게. 어제 몸짓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춘 거였어."
경악하는 아이들.
"미안 애들아. 나 몸치야."
서영 누나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갑자기 풀썩 주저앉아서 고개를 숙인다. 그 정도로 절망적인가?
< 체육 대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