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강 >
개강 날. 우리는 강의실 맨 뒷자리에 나, 은미, 선미, 석훈 순으로 앉아 있다.
선미를 신경 쓰는 은미.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몰라서 걱정되었다. 그건 은미도 마찬가진가 보다. 친구로서 선미가 좋지만, 나를 생각하면 신경 쓰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은미는 나와 선미 둘을 놓고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 난 듈다.
"응? 현찬아 왜?"
"아니야."
은미 네가 모토로라 휴대폰 들고 있는 베컴처럼 보여서.
은미는 둘 다 자기가 가져버렸다. 선미는 친구로서, 나는 연인으로서 옆에 뒀다. 칭기즈칸이 팡파르를 터트릴 정복욕이다.
뭐, 사실 결정적인 건 내 태도 때문일 거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곧추선 대나무가 되어 하은미에게 들어가 안심시켰다.
-어디에 들어간 건데?
은미 마음에 들어간 건데요.
여튼 별로 달라진 건 없다.
현재 우리는 2학기 1학년 대표를 뽑고 있다. 임석훈이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본다.
"현찬아. 이번에 너 1학년 대표 안 할래?"
"안 해."
학년 대표?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다. 이전 생에서 도와달라는 박호빈 말에 곁다리로 해봐서 안다, 애들 챙겨야 하지, 사람들 챙겨야 하지, 선배들한테 끌려다녀야 하지. 나는 안 합니다.
박호빈 밀어준 뒤 귀찮은 거 다 시키고 우리는 놀러 다니기로, 이미 우리끼리 이야기도 끝났다.
"석훈이 너 약속 위반이다. 내가 대표하면 부대표는 무조건 너야."
"미안. 그럼 없던 일로 하자. 하긴 호빈이가 하겠지. 걔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럴 거야. 호빈이 왔네."
강의실 교단에 선 박호빈. 이미 1학년 대표가 됐는지, 어깨가 머리보다 높이 솟아있다.
손담비 누나! 여기 와서 어깨 뽕 빌려 가세요.
"우리 이번 학기 대표 뽑을 거거든. 우선 후보 추천부터 할게. 추천할 사람 있으면 손들어."
박호빈 말에 눈을 마주치는 우리 넷.
"가위, 바위, 보!"
이선미가 졌다.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든다.
"박호빈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해라."
박호빈은 벌써 당선된 것처럼 웃는다. 그래. 뭐 호빈이 정도면 대표로는 나쁘지는 않다.
"민현찬을 추천합니다."
그때 앞에서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SES의 은진이다.
"어? 현찬이?"
"응. 호빈아. 현찬이 추천해. 잘할 거 같아."
나를 보며 웃는다. 은진아... 그건 나를 위한 게 아니야. 임석훈은 나보다 더 불안한 표정으로 손으로 X자를 그린다. 당연하겠지. 내가 학년 대표가 되는 순간 임석훈 너는 부대표로 나의 노예가 될 거니다.
"알겠어. 그럼 현재까지 나온 후보는 나와 현찬이. 더 없어?"
별수 있나? 같이 죽자. 임석훈.
"임석훈을 추천합니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욕하는 말투 보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카리스마입니다. 임석훈을 추천합니다."
"너 멍청이냐? 내가 대표 되면 현찬이 네가 부대표야."
아! 시불. 멍청이 인정.
깔깔 웃는 아이들. 가방을 나에게 집어 던지는 임석훈. 결국, 우리 세 명은 학년 대표 후보로 앞에 나왔다.
"그럼 후보들 한마디씩 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대표가 된다면."
박호빈이 일장 연설을 한다. 너 차라리 정치해라.
"그리고 민현찬을 부대표로 해서 같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 나를? 이 새끼 봐라. 이번 생에도 부대표 하라고? 해보자는 거지?
다음은 임석훈 차례다.
"저는 안 할 겁니다. 저 뽑으면 과가 어떻게 작살 나는지 보여 드릴게요."
임석훈의 말에 동기들이 깔깔 웃는다. 이제 내 차례인가?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1학년 대표 되어서 우리 과를 즐거운 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 뽑아주시면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임석훈.
손가락으로 머리를 돌리며 미쳤냐고 말하는 이선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하은미.
미안. 박호빈이 나를 건드렸어. 다 같이 고생 좀 하자.
투표는 바로 시작됐다. 박호빈이 종이를 한 장씩 펴면서 이름을 부른다.
민현찬. 민현찬. 민현찬. 임석훈. 박호빈. 민현찬. 민현찬.
계속 불리는 나의 이름에 박호빈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진다.
호빈아 내가 너 도와주는 거야. 저번 학기 고생했잖아. 이제는 좀 쉬어라.
결과는 나의 압승이다.
어차피 죽었다 다시 태어난 인생인데 학년 대표 한 번 해보지 뭐. 투표가 끝나자 교수님이 들어왔다.
교수님 첫날은 원래 10분 만 수업 하셔야 합니다! 들었나? 딱 10분이 지나니 강의를 끝낸다.
"그럼. 오늘은 첫날이니깐 이 정도로 하고. 여기 학년 대표 뽑았어? 누구야? 손들어봐."
"네! 교수님."
"이름이?"
"민현찬입니다."
"대표가 맨 뒤에 앉아 있어? 앞으로 내 수업 때는 맨 앞에 앉도록 해. 나중에 교수 방 찾아오도록."
안돼!!!!!! 맨 앞에 앉으면 은미 허벅지를 못 만진단 말이야!
"...네..."
교수님이 나가자 이선미가 나를 노려본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혼자 맨 앞에 앉아서 수업 열심히 들으세요."
"선미야 그거는 아니지. 우리는 패밀리잖아."
"어머? 민현찬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석훈아 너는 혹시 저 사람 알아?"
"민현찬이 누구야? 나 모르는 사람인데? 아! 은미는 알겠다."
나를 바라보는 하은미. 그런데 너 왜 몸을 점점 선미 쪽으로 당기면서 나를 피하니?
"미안. 현찬아. 앞에는 못 앉겠어..."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 심정을 알겠다. 어제만 해도 내 거라면서 만지작거리더니!
세 사람은 나를 버리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하은미 너 밤에 두고 보자!
*
다음 수업을 위해 강의실을 옮기는데, 그때 익숙한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은미야. 잠시만."
"어디가 현찬아?"
"나 인사할 사람이 있어서."
사물함에 혼자서 책을 넣는 여자. 짧은 머리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 키는 165cm 정도에 마른 몸매. 바로 한서영 누나다.
이전 생에서 유일하게 나를 호구라 생각하지 않고 잘해준 누나. 항상 1을 주면 최소 1을 돌려줬던 계산기 같은 누나. 이전 생에서 아마 나에게 마음이 있었겠지? 그런데 왜 고백하면 거절했을까?
- 그거 철벽이야.
닥쳐 호구신. 가불기로 팩트 때리지 마라.
여튼 여자이길 떠나서 사람으로서 좋은 누나였다. 아마 지금 누나는 두려운 상태일 거다. 혜진 선배와의 일도 있고,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내가 먼저 말 걸어 주자.
사물함에 책을 넣는 누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러자 서영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샤랄랄라라라라 널 좋아한다고.
어? 잠시만, 호구신 이 배경음악 아니에요. 취소해주세요.
인형같이 예쁜 얼굴과 하얀 피부. 예전 기억 그대로다. 선미, 은미, 서영 세 명이면 얼굴로는 메시 수아레스 네이마르로 불리는 MSN 라인에 버금갈 만하다.
"저...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아. 정신차리자.
"안녕하세요. 한서영 누나죠?"
"아. 네. 저 아세요?"
"제가 대표여서요. 제본 하려면 누나 연락처를 알아야 하거든요. 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휴대폰 주시면 제가 번호 적어 드릴게요."
휴대폰을 건네자 서영 누나는 번호를 적어준다.
"현찬아 누구야?"
깜짝이야. 어느새 옆에 은미가 서 있다. 아뿔싸! 나의 모든 걸 자기 걸로 하려는 은미인데. 질투 때문에 또 변하는 건 아닐까?
"안녕하세요. 이번에 복학한 한서영입니다."
누나는 하은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역시 예의는 그대로군요.
"어? 언니가 서영 언니예요? 예전에 혜진 선배랑...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옛일인걸요."
한동안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 하은미는 의외로 서영 누나와 이야기를 잘 한다.
"언니. 밥 먹을 사람 없죠? 우리 같이 먹어요."
"네? 아. 괜찮아요."
"왜요. 나중에 같이 먹어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해주세요."
"아.. 그럼 알겠어. 고마워 은미야. 나 점심때 연락할게."
"네~ 언니!"
서영 누나 가지 마요. 누나가 가면 나 죽을 거 같아요. 서영 누나가 고개를 돌리고 가자 은미가 내 팔짱을 낀다.
두근.두근.두근.
"현찬아. 선미랑 석훈이 기다려. 우리도 가자."
"은미야 괜찮아?"
"뭐가?"
"아니.... 아니다."
"응? 아! 서영 언니. 그냥 괜찮은 언니 같은데? 착한 거 같아."
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 너 내가 질투할까 봐 그러는 거야? 전혀. 내가 더 예쁘잖아."
캬! 이게 여왕의 품격이구나. 하긴, 혜진 선배랑 은하에게도 질투 안 했었지. 은미가 자신 있는 이유도 있다.
예쁘고 늘씬한 몸매에 청순가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하얀 피부를 가진 서영 누나다.
하지만, A컵이다.
"현찬아. 너 왜 갑자기 가슴 봐?"
"그냥. 좋아서."
"으그. 가자."
물컹. 팔짱을 끼자 가슴이 그대로 내 팔에 닿는다.
고... 고맙습니다.
*
어느덧 점심시간.
나와 임석훈은 한솥 도시락을 양손에 들고 과 건물 계단을 오르는 중이다. 자동차 괜히 샀다. 오토바이나 살걸. 주차할 곳이 없어서 결국 걸어서 갔다 왔다.
"현찬아. 너 교수님한테 갔다 왔어?"
"....석훈아. 한솥 들고 먼저 가라."
"미친놈. 교수님 식사하고 계시겠다."
"가서 한솥 드리고 오는 건 어떨까?"
"실제로 하면 형님이라 부를게."
"네가 잘도 그러겠다. 비웃기나 하겠지. 들어가자."
과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렌지카라멜이 까탈리나를 부르고 있다. 은미, 선미, 서영 누나는 어느새 친해져서 깔깔거린다.
"현찬아 왔어? 잠시만. 신문지 깔게. 선미야 여기 좀 깔아줘."
"은미야. 알겠어. 언니는 오늘 처음이잖아요. 가만히 계세요."
"아니야. 나도 할게."
세 사람은 책상 위에 신문지를 깐다. 왜 벨런스가 맞는 기분이 들지?
밥을 다 먹을 때쯤, 이선미가 젓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친다.
"민현찬 과대표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줘야지. 내가 대표고 너희들은 부하잖아."
"지랄한다. 너 때문에 못산다 진짜."
"일단은 행사부터 정리해보자. 개강총회, 엠티, 체육대회. 이 정도가 전분가? 아 개강총회는 안 한다더라. 2학년 안 온다고. 우리끼리 금요일 날 개강 주나 마시자. 석훈아 너는 제본 집 좀 알아봐 줘."
"제본이야 책 들고 발품 팔아서 싼대서 해야지. 우리 얼마 해 먹을 거야?"
듣고 있던 하은미가 나무젓가락을 임석훈 이마에 꽂는다. 나... 나루토세요?
"야! 너는 돈도 많은 놈이 뭘 해 먹어?"
"하은미! 나도 민현찬처럼 잘 해줘!"
"지랄. 꺼져. 언니. 쟤 조심하세요. 위험한 놈이에요."
"아. 임석훈이라고 했죠? 안녕하세요."
"누나 안녕하세요. 말 편하게 해요. 맞다! 나 물어볼 거 있어요!"
"그래. 어떤 거?"
"혹시 자취해요?"
"응."
"혹시 잘 취해요?"
석훈아. 제발. 임석훈은 젓가락 세 개를 맞았다. 그 모습을 보더니 서영 누나도 웃는다. 아이들이 착해서 그런가? 아니면 파라오의 공포를 체험해봐서 그런가? 서영 누나를 잘 챙겨 준다.
다행이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럼 제일 빠른 행사는 개강주 구나. 서영 누나 올 거죠?"
"미안 현찬아. 나는 못 갈 거 같아."
"왜요?"
"1학년 개강주 여도 선배들 몇 명은 오잖아. 혜진 언니 보기 좀 그래서."
은미가 서영 누나 손을 잡았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현찬이만 믿어요."
"어? 왜?"
"현찬이 혜진 누나랑 엄청 친하거든요. 맞지 현찬아?"
"네. 어쩌다 보니 농활 때 그렇게 됐어요."
"진짜?"
"진짜?"
임석훈 이선미 쌍둥이냐? 똑같이 말하네.
"그렇게 됐어. 농활 때 둘이서 잘 이야기해서 풀었어."
터널에서 몸의 대화로 풀었지.
"누나. 개강주 오세요. 계속 피한다고 될 거 아니잖아요. 어차피 한 번은 만날 건데 그냥 빨리 만나요. 제가 잘 말해드릴게요."
"알겠어. 그럼 개강주 갈게."
서영 누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지만, 나는 별걱정 안 된다. 나를 믿어요. 전생의 민현찬이 아닙니다.
***
이번 주 금요일 개강주 날. 내가 일일이 한 명씩 전화했기에 우리 과 아이들 모두가 모였다. 맥줏집에 일렬로 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스무 명의 친구들은 너무 조용하다. 정장만 입히면 바로 장례식장이 되어서 사장님이 맥주 대신 육개장 들고 올 거 같은 표정이다.
너희들 한 학기 동안 도대체 어떻게 지낸 거니?
혜진 누나와 서영 누나 사이를 푸는 건 두 번째 문제다. 혜진 누나는 파라오답게 아직 오지도 않았다. 일단 여기 엘사가 얼려놓고 간 듯한 분위기부터 풀자. 임석훈도 마찬가지 인지 내 옆에 선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대표님 좋은 생각 있으십니까?"
"임석훈 너를 믿는다. 원래 대표는 뒷짐 지고 봐야 하는 거야."
"지랄. 절반은 내가 띄울 테니까, 남은 절반은 네가 분위기 띄워."
"오케이 일단 조금 섞어서 앉히자.
지금 가족오락관처럼 남자팀 대 여자팀으로 앉아 있다.
"그건 나한테 맡겨. 내가 대충 섞이게 앉혀 놓을게."
역시, 임석훈은 허참 선생님의 제자가 맞았어. 절묘하게 사람을 섞어 앉힌다.
이제 내 차례인가? 농활에서 틴틴파이브와 이글파이브를 컨트롤 한 나다. 이 정도는 껌이다.
< 개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