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방학 >
유민 선배와 동맹이 체결되었다. 손제리처럼 뒤통수치지는 않겠지. 일단 나는 하은미를 찾아서 이야기해보자.
"현찬아."
언제 왔지? 내 뒤에 하은미가 서 있다.
"깜짝이야. 은미야."
"너 담배 피는거 같아서 찾으러 왔어."
"안 그래도 잘 됐다. 할 말 있었는데."
"할 말? 뭐?"
"너 우리 조에 안 들어올래?"
"어? 진짜? 나야 좋지. 그래도 돼?"
"유민 선배가 허락받아 올 거야. 대신 나 부탁 하나만 할게."
"뭐? 아. 일 열심히 해라고?"
무슨 소리. 우리 조 규칙은 즐겁게 일하자 인데.
"너 아침에 향수 뿌리지. 그거는 뿌리지 말아줘."
"어떻게 알았어?"
너 향수 귀신이잖아. 프랑스 배경인 소설 향수도 네가 모티브라는 말이 있어. 나를 계속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게 내 몸에서 향수를 뽑기 위한 밑밥은 아니겠지?
"항상 뿌리니깐. 과수원 어르신이 향수 냄새 싫어하시거든. 우리도 한 명이 뿌리고 와서 혼난 적 있어."
"아? 진짜. 알겠어."
예쁘게 포장하고 말해서 그런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일단 이쪽은 완료. 유민 선배 쪽을 기다려보자.
"뭐? 하은미를 다른 조로 보내자고?"
기다릴 필요도 없구나. 나와 하은미는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학생회장과 유민 선배의 일기토를 지켜봤다.
"네. 은미도 현찬이랑 일하는 게 편하다고 하고. 어차피 저쪽 사람 한 명 작잖아요."
"아니. 왜 일 잘하고 있는 애를 보내자는 거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텁.
"현찬아 왜 내 귀 막아?"
너 욕하는 거니깐 그냥 가만히 있어. 한동안 계속되는 일기토. 유민 선배의 화려한 잔소리가 회장의 옆구리를 찌르면, 회장은 슬쩍 피한 뒤 변명으로 가슴을 찌른다. 벌써 30 합이 넘어가고 있다. 지루하다 이것들아.
어르신들이 지나가면서 보는데 뭔 짓이람. 내가 나서자.
"회장 형. 하은미 우리 조로 데리고 갈게요."
"하. 야 너 일학년 아냐? 네가 뭔데 데려가냐 마냐 해? 너 몇 살이야? 너희 선배 불러와!"
서른 살이다. 이 새끼야. 여자에 눈 돌아가서 날뛰기는.
"선배 왔어요. 왜요?"
응? 고개를 뒤로 돌리자 심혜진 선배가 거대한 가슴 아래로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틴틴파이브와 이글파이브. 아씨. 이게 뭐라고 감동적이지? 반지의 제왕처럼 '세오덴 왕이 홀로 일어섰구나'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라며 말 타고 뛰어올 거 같다.
"야. 너 후배 관리 어떻게 하는 거야?"
"내 후배가 친구 챙긴다는데 오빠가 무슨 상관이에요?"
"뭐?"
"아. 진짜 짜증 나네. 오빠가 여기 왕이에요? 전부 자기 회비 내고 온 사람이에요. 뭔데 이래라저래라 예요? 그리고 원래 하은미 이쪽 조였어요. 오빠 멋대로 바꾼 거잖아요. 괜히 바꿔서 분위기 개판 만들고는 뭐라는 거야 진짜."
혜진 선배님. 제가 막대기 한 번 휘둘렀다고 건방졌네요. 잠시 전투력을 잊고 있었습니다. 안 깝칠게요.
옆에서 추임새 넣는 다른 남자 선배들까지 말로 두드려 팬다. 결국 학생회장이 백기를 들었다.
"하. 알겠다. 마음대로 해."
"은미야. 현찬아 가자."
"아. 네 선배."
"네. 선배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혜진 선배는 나를 슬쩍 본다.
"너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존경스러워서요."
"지랄한다."
파라오여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넷째 날. 내일이면 농활도 끝이다. 그러니깐 학생회장도 포기했겠지. 10일짜리 농활이었으면 파라오 발목 잡고 빌었을 놈이다.
우리 조는 여전히 분위기 좋다. 시발 거리며 일하면 농장 주인이 찾아와 어색한 한국어로 '시발 안 돼요'라고 말하는 호주 농장과는 완전히 이별했다.
"현찬아. 여기 재밌다."
"배 봉지 싸는 거? 너 저기 다 싸고 가."
"말고. 사람들 말이야. 다들 편해."
그렇지. '아싸'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개성이 없다는 뜻이다. 저쪽이 개성 강한 세모 네모 별 모양이어서 서로 부딪힌다면, 우리는 다 동그라미다. 물에 물 탄 듯 굴러간다.
"현찬아. 여기 잠시만."
이글파이브와 은하가 나를 부른다.
"은미야. 잠시만 있어. 갔다가 올게."
은미를 잠시 놔두고 그쪽에 갔다. 한동안 웃으며 농담과 이상한 걸 물어본다. 나 역시 웃으며 대답해주고는 다시 돌아왔다.
"너 인기 많네."
"그래. 은미야. 내가 여기서 이런 존재야. 선미랑 석훈이에게 꼭 말해줘."
"네가 말해라."
은미는 고개를 픽 돌렸다. 점순이다. 동백꽃의 점순이가 소설 속에서 튀어나왔다. 근처에 있는 닭들을 다 치워 버리자. 소설처럼 패 죽일지도 모른다.
"크하하. 민현찬도 별거 아니네."
"뭐요? 인봉이 형."
"너 내 이름 뭔지 알아?"
"주짓수?"
"아오. 이 얄미운 새끼. 그래도 너 고생하는 거 보니깐 속이 시원하다."
"뭘 고생해요."
"웃긴 놈. 하은미 신경 쓴다고 다른 조원들은 거의 신경 못 쓰고 있으면서."
시불. 눈치는 빨라요. 첫날에 그렇게 빠르지. 하은미 너는 왜 귀를 쫑긋 세우는 건데?
"그런 거 아니에요."
"웃기네. 은미야! 걱정하지 마. 현찬이 너만 신경 쓰고 있어."
"정말 현찬아?"
"그래. 너 신경 쓰느라 정신없다. 그러니깐 우리 재밌게 놀자."
"알겠어. 표인봉 오빠는 무슨 과예요?"
"나 표인봉 아니야!"
"아 정말요? 진짜예요?"
내 목덜미를 잡는 표인봉 형. 깔깔 웃는 하은미. 그래 이게 진짜 농활이지.
***
마지막 농활 일도 끝났다. 우리 모두 샤워를 하고 마을 회관에 모였다. 의미 없는 보고대회도 끝. 이제 술 파티다. 일단 다들 섞여서 앉았다. 하은미 옆은 고맙게도 파라오가 지키고 있다.
"현찬아. 너희 조 재밌어 보이더라."
"아. 유민 누나. 그러게 누나도 우리 조 오지 그랬어요. 대신 우리 조는 자격 조건이 있어요."
"참나. 뭔데?"
"만화 주제가 다섯 개는 알아야 해요. 모르면 안 돼요."
"아하하하. 너희 만화 주제가 부르고 놀았어?"
"네. 엄청 재밌어요. 세일러문 기억 안 나요?"
"누나도 엄청 봤지. 다음에 국토 대장정 같이 가자. 자 여기 짠."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유민 선배님. 저는 이번 걸로 충분합니다.
궁서체로 속으로 말했다. 너나 가라. 총학생회 행사는 이제 안 간다.
주고받는 술자리에 오가는 웃음꽃. 여기저기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메뚜기처럼 뛰어다녔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신기하게 조별로 앉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조만 다 모였다. 그런데? 하은미 상태가 왜 이렇냐? 고개를 꾸벅꾸벅하고 있다.
"혜진 선배. 은미 많이 마셨어요?"
"응. 너 없는 동안 엄청 마셨어."
"누가 먹였어요?"
"남자 선배들이 몇 명 와서 먹였는데, 내가 말려도 계속 먹더라."
하은미는 긴 생머리를 앞으로 풀어헤치고 고개를 꾸벅인다. 김경호 형님처럼 헤드뱅잉 하지 마. 금지된 사랑 불러 달라 하고 싶으니까.
"은미야. 은미야!"
"어? 현찬이 왔다. 현찬아~~ 나 졸려."
"자러 가자. 데려다줄게."
"알~~ 겠어."
하은미를 한쪽 어깨에 부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민현찬. 너 하은미 데리고 어디가?"
그러자 박호빈이 입구를 막았다.
"재우러 간다."
"너를 어떻게 믿고 보내?"
"이 미친 새끼야. 나랑 은미, 석훈이, 선미 사이 몰라? 그딴 생각하는 네놈 대가리가 이상하다."
"그래도 못 보내."
2AM인가? 죽어도 못 보내. 진심인지 눈이 투지로 빛난다.
"그럼 내가 같이 갈게. 가자 현찬아."
"어? 혜진 선배?"
"야 호빈아."
"네. 선배."
"죽을래? 각목 챙겨 올까?"
아. 나도 정신이 번쩍 든다. 각목 심혜진 잊고 있었다. 05학번 엉덩이를 보리타작 하듯이 팼던 그 역발산기개세를... 항우와 다이다이 하면 누가 이길까?
"아... 아니에요. 선배."
"현찬아 가자."
나는 하은미를 부축한 채 혜진 선배와 마을 회관을 나왔다.
***
한 20m 걸었나?
"나는 여기서 돌아갈게. 둘이서 갔다가 와."
"네? 선배? 왜요?"
"피곤해서 그래."
혜진 선배는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빙긋 웃는다. 고맙습니다.
하은미를 부축하고 여자 숙소 쪽으로 계속 걸었다. 어두운 밤의 시골길. 사람들 없이 풀벌레 소리만 고요히 들린다. 검은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난다.
"현찬아~~"
이 목소리는 술주정인데?
"은미야. 술을 왜 그리 많이 먹었어?"
"너언 아무것도 몰라아~"
또 존 스노우 되었네.
"내가 뭘 모르는데?"
두근. 두근.
향수 냄새? 아니구나. 샴푸 냄새다. 내 코에 하은미의 긴 생머리가 찰랑거린다. 내 목에는 가녀린 팔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가슴. 내 가슴에는 하은미의 가슴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은미는 나를 마주 보며 끌어안았다.
"오늘 나 놔두고오~ 혼자 술 마시러 가고오~ 현찬아! 왜 너언 아무것도 몰라아~?"
알지.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 다만 내 머릿속에는 예전의 은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교통사고 한번 나면 차를 피하듯이 나도 모르게 피해진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이선미가 있기도 하다.
"은미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거 알아."
그래도 마음은 받아주자. 피하지 말자.
"아니이이~ 안 좋아 하는데에~ 내에가 왜 너를 좋아해에~"
그래. 술 취한 사람 상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한 내가 미친놈이지.
"아! 그럼 뭐?"
"그런 게 있어~ 헤헤. 넌 아무것도 몰라아~~"
"은미야 내가 모르는 건 알겠는데... 왜 내 가슴 만져?"
"내꺼니깐. 헤헤헤."
하은미는 내 가슴을 더듬는다. 나는 연약한 남자니깐 자기방어를 하자. 나도 만지자. 내 손을 하은미 허리에 올렸다.
-탁.
"아!"
내 손을 '탁' 치더니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현찬아. 나는 너어 만져도, 너어는 나 만지면 안 돼에~"
샴푸 냄새가 아니라 꽃향기구나. 머리에 꽃 달았다.
"그런 게 어딨어?"
"내 맘이지롱. 헤헤. 내꺼 계속 만져야지."
망할 년. 이왕 만질 거 아래쪽으로 내려가 주지. 허리를 삼팔선으로 위쪽만 만진다. 동무 북쪽에서 왔습네까?
"은미야 그만 만져. 계속 그러면 나도 만진다."
"싫어! 다음에 내가 만지게 해줄 게~."
"언제? 언제? 언제?"
해맑게 웃는 하은미.
"조만간? 저어어언부 다 만지게 해줄게. 나 업어줘."
하. 너 내일 보자. 기억 못 하면 진짜 뒤졌다. 하은미를 등에 업었다. 생각보다 안 무겁기는 개뿔 엄청 무겁다. 고요한 밤의 시골길을 하은미를 업고 걸었다.
"현찬아. 있잖아. 넌 아~~무것도 몰라."
"네~ 네~ 알겠습니다."
"너어! 썬크림 가져다준 거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너어는 몰라아~."
어. 진짜 몰랐다. 그리고 가슴이 왜 이리 터질 듯이 쿵쿵 뛰냐? 나도 좋아하는 건가?
"말하지 그랬어."
"안돼에. 그거는 안돼. 그리고 너어는 몰라."
"또 뭐?"
"유민 언니가아, 내 욕할 때! 나서준거."
"...듣고 있었어?"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몰라아~"
"친구잖아. 누가 욕하는 걸 어떻게 참아."
"코....."
아오! 지 말만 하고 잔다. 가슴 두근거린 내가 미친놈이지. 숙소에 도착하자 몇몇 여자 선배들이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인다."
"현찬아 뒤에 누구야?"
"은미에요."
"어서 방에 눕혀."
하은미를 방에 눕히고 숙소를 나왔다. 하. 너 내일 두고 보자.
고요한 시골길 밤. 맑은 공기가 내 속을 깨끗하게 한다. 담배 하나 물고 걷는데 멀리서 혜진 선배가 보인다.
"은미 데려다줬어?"
"네! 혜진 선배님! 은미 데려다주고 오는 길입니다."
"야. 너 어제부터 왜 그렇게 징그럽게 굴어?"
어제 3000년 동안 이어진 이집트 왕조의 위력을 봤거든요.
"그냥요. 뭐해요?"
"응. 너 기다리고 있었어."
"저요?"
"조금 걸을까?"
나와 심혜진은 나란히 시골길을 걸었다.
"현찬아. 너 되게 어른스러운 거 알아?"
"제가요?"
"응. 축제 때는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스러운 거 같아."
서른 살 이니깐요.
"그냥 사연이 많아서 그래요."
"그래? 악!!"
"선배, 왜요?"
"저기. 저기."
혜진 선배는 내 품에 눈을 감고 안겼다. 뭐가 있길래? 자세히 보자 흰 비닐이 벽에 걸려 날리고 있다.
"선배. 비닐봉지예요."
"아? 진짜? 나 귀신 너무 싫어."
조금 놀려 볼까?
"선배. 그런데 아까 할아버지 봤어요?"
"어? 어디에?"
"우리 뒤에요."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지금은 선배 옆에 있."
"진짜 하지 마. 현찬아."
계속 내 품에 안겨있다. 이렇게 보니 그냥 귀여운 22살 여자아이구나.
"이제 진짜 안 할게요."
"너 진짜 한 번만 더 하면 각목 든다."
"알겠어요. 누나."
"누나?"
"왜요 싫어요?"
"참나. 아니. 그렇게 불러."
우리는 잡담 하면서 정자까지 걸어갔다. 정자에 걸터앉자 넓게 펼쳐져 있는 논이 보인다.
"현찬아. 이번 농활 고마웠어. 덕분에 재밌게 보냈어."
"아니에요. 저도 누나 덕분에 편했어요."
혜진 선배. 이번에 확실히 친해졌다. 그리고 어제 은미 쟁탈전에서 대신 싸워줄 때 정말 고마웠다. 그러자 저번에 과방에서 합체권을 이용한 섹스가 떠올랐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누나. 저. 있잖아요."
"응? 왜?"
혜진 선배, 아니 혜진 누나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저번에 죄송했어요. 미안해요."
고개를 숙였다. 내 진심이 혜진 선배에게 닿기를...
"현찬아."
"네? 누나?"
"오늘은 안 미안해도 되는데..."
혜진 선배가 내 손을 잡는다.
내 이름은 섹키호테.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 자지.
< 여름방학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