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30화 (30/295)

< 여름방학 >

농활. 괜히 가기로 했나? 출발도 안 했는데 더워 죽을 거 같다. 학교 정문에서 하은미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오는 게 보인다. 시체가 들어있을 것 같은 커다란 캐리어에 눈에는 선글라스, 머리에는 원피스에서 루피가 썼을 거 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은미야 너 공항 가는 거야?"

"왜? 이상해?"

이상하지. 농활은 일하러 가는 건데. 지금 하은미 패션은 김유정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너그집엔 감자 없제? 라고 외치면 딱 어울리는 패션이다. 그러고 보니 성격도 점순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고. 혹시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건가?

"편한 옷은 챙겨 왔지?"

"응. 일할 때 입을 옷은 챙겨 왔어."

"그럼 됐다. 올라가자."

"너 그런데 또 키 컸어?"

응. 자존감 세우려고 키 샀거든. 이제 키는 181cm. 그러고 보니 하은미가 내려 보인다.

"어. 이제는 내 아래에 있네?"

"웃기네. 힐 신으면 너보다 크거든."

"나도 구두 신으면 너보다 크거든."

"나는 힐 더 높은 거 신으면 되거든."

"너 잘났다."

"헤헤헤."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는 하은미. 귀엽긴 하네.

"캐리어 줘. 내가 들어줄게."

"아니야. 괜찮아."

머뭇거리는 하은미에게서 캐리어를 받아서 끌었다.

"고마워 현찬아."

고맙다라. 이전 생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했으면 아직도 어색하냐.

학교 본관 앞. 한명 두명 모이는 사람들. 30명은 되겠는데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나와 하은미는 한쪽 귀퉁이에 덩그러니 왕따처럼 섰다. 그때 여자들 무리에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박호빈이다.

"야! 박호빈!"

"어? 현찬아!"

시불. 왜 이리 반갑냐. 호빈이도 내가 반가운가 보다. 서둘러 달려온다.

"안녕 은미야. 덥지 않아?"

"아니."

박호빈은 나를 보지도 않고 하은미에게 달려간다. 그럼 그렇지. 저 새끼가 나를 반가워할 리가 없지. 하은미가 딱 잘라 말하자 박호빈 얼굴이 붉어진다. 꼬시다 이 새끼야.

"이 사람은 누구야?"

"예쁘시다."

박호빈의 뒤를 따라 하은미에게 남자들이 모여든다. 여왕이다. 여왕이 부활했다. 그러나 하은미는 아무 말 없이 인사도 안 한다. 여왕이 노하셨다. 모두 다 입을 다물어라. 시불. 진짜 기사가 된 거 같지? 혼자 기사 놀이하는 나에게 여자 한 명이 손을 내민다.

"안녕. 너희가 늦게 합류한다는 1학년이구나. 나는 2학년 유민이야. 반가워."

"아예. 안녕하세요. 민현찬 입니다."

"경영 이번에 인물 다들 괜찮다. 호빈이 보고 실망했는데."

"뭐예요 누나. 나 보고 왜 실망해요."

"이번에 오는 애 너랑 비슷하다면서. 전혀 아닌데? 키도 크고 잘 생겼네. 현찬이라고 했지? 잘해보자."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내 주위에도 몇몇 아이들이 와서 인사한다. 농활 오기 잘했네. 지금까지는 분위기 좋다. 그때 누군가가 본관 정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집행부 온다."

본관 정문에서 관상의 이정재처럼 등장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 둥 두둥 둥 두두둥 과아아앙

남의 약점인 목을 잡아 뜯고, 절대 놔주지 않는 잔인한 거유. 이자가 정녕 파라오의 상이다.

망할. 각목 심혜진이다.

지금 당장 탈주 닌자가 되자. 닌자 대장인 호카케도 이해해 줄 거다.

"애들아 출발하자. 아! 그전에 사전 모임에 못 왔던 두 명 있지? 앞으로 나와서 인사해."

심혜진은 빠지고 대신에 기생오라비 같은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얌전히 내려와 무리 속에 들어가는 심혜진을 보자 탈주하려는 마음이 바뀌었다. 우리 과에서는 날아다니더니 여기서는 별거 아니구나.

우리의 등을 미는 박호빈. 나와 하은미는 사람들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경영 하은미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반갑습니다. 경영 민현찬입니다."

여자 쪽에서 나오는 큰 박수 소리. 괜찮은 기분이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골로 출발했다.

***

시골에 도착한 우리.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마을 회관에 짐을 풀었다. 남자들은 마을 회관이 숙소가 되었고, 여자들은 할머니 한 분이 계신 집이 숙소가 되었다. 그리고

"너희들 이거 좀 매달아."

파라오는 건재했다. 출발 전에 탈주 안 한 게 후회된다. 심혜진은 우리에게 기다란 플래카드를 준다. 우리들은 군말 없이 마을 회관 옥상에 올라가 플래카드를 달았다.

그래도 좋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에 조용한 시골. 30명 정도 모여있는 대학생들. 한편의 청춘 드라마다.

플래카드가 달렸으니 이제 본격적인 농할 시작이다. 학생회장이 사람을 전부 모았다.

"이번에는 일 할 곳이 많아서 조를 나눴어. 지금부터 조 불러 줄게. 우선 배나무밭 조원들은 말이야."

한 명씩 이름이 호명되자 하은미가 내 옆에 와서 초조한 표정으로 본다.

"현찬아. 우리 다른 조 되는 거 아니야?"

"설마. 호빈이에게 듣기로는 이번에 못 온 두 사람 친구여서 같은 조였다던데?"

"그렇겠지? 나 너랑 다른 조 되면 어떡해. 아는 사람도 없어."

그때 학생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혜진, 민현찬 까지 배나무 팀이야."

나와 은미는 마주 봤다. 젠장 망했다. 하은미와 갈라지고 파라오와 한 조가 되었다. 놀란 건 심혜진도 마찬가진가 보다. 학생회장에게 가서 따진다.

"선배. 조 왜 바뀌었어요? 내가 아니라 하은미잖아요."

"저 쪽팀에 리더가 없어서 그랬어. 혜진아 네가 가서 신경 좀 써줘."

한동안 계속되는 실랑이. 심혜진은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다.

"현찬아. 나 어떡해."

"은미야. 걱정 마. 호빈아 은미 잘 챙겨라."

"알겠어. 은미야 나만 믿어."

"박호빈.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현찬아 이거 챙겨가."

응? 뭐지? 한 손에 조그마한 치약 튜브 같은 걸 준다.

"선크림이야. 일하기 전에 발라."

"네 거는? 나 주면 너는 어떡하려고?"

"나 열 개 가지고 왔어."

역시 하은미. 여왕님의 피부는 소중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챙겨주는 하은미 고맙다. 호명된 대로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뉘었다. 고개를 돌려 우리 조원을 한번 둘러보고 나는 깨달았다.

학생회장. 개새끼다.

조를 어떻게 나눴는지 알겠다. 저쪽이 젝스키스, HOT, 핑클이라면 이쪽은 이글파이브, 틴틴파이브에 그냥 팬클럽 같은 여자애 네 명이다. 한쪽에는 인싸들을, 다른 한쪽에는 아싸들을 배치해 자기들 쪽을 재밌게 보이려는 전략이다.

이전 생에서 아싸의 위치에서 인싸쪽 무리를 동경하면서 많이 겪어 봤다. 젠장, 이번에도 마찬가지구나.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죠."

심혜진 선배의 주도로 인사가 시작되자 틴틴파이브 정체가 밝혀졌다. 공대 복학생 다섯 명인데, 나는 낯선 형들에게서 예전의 내 냄새를 느꼈다. 왜냐? 다섯 명 전부 다 축구 유니폼을 입고 왔다. 공 하나 주면 바로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될 거다.

저 형들은 아마 여자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농활을 온 거겠지. 잘나가는 공대 형들은 지금 여자랑 바닷가에 있을 거다.

"자. 그럼 이제 일하러 출발하죠."

인사가 끝나자 파라오가 노예들을 끌고 간다. 그 노예 무리 속에 나는 맨 마지막에 서서 걸었다. 심혜진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깐 나중에 화장실 가서 합체권 사야겠다. 지랄하면 방망이를 휘둘러... 아씨. 이거 아닌데.

조용한 시골길 저녁. 우리 모습은 딱 패잔병이다.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한다. 과수원에서 배에 봉지를 감싸는 일을 했는데, 우리는 호주 농장에서 워킹홀리데이 하는 사람들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만 했다.

"현찬아."

마을 회관 앞에 도착하자 하은미가 달려 나온다.

"현찬아. 너희 이제 끝났어? 늦게 끝났다."

"어. 방금 끝났어. 너희는? 일 안 힘들어?"

"우리는 빨리 끝났어. 별로 안 힘들던데?"

부럽네. 한동안 내 앞에서 수다를 떨더니 자기 조에서 부르자 다시 돌아갔다.

"누구야?"

고개를 돌리자 틴틴파이브 표인봉 같은 형이 머리를 들이민다. 노래 가사처럼 '머리치워 머리 앞좀보게 치워'라면서 당장 하은미에게 달려갈 기세다.

"아. 형. 과 동기예요."

"여자친구야?"

"여자친구는 아니고 그냥 친구요."

"부럽다."

부럽기는. 지금 참고 있는 거지 본 모습 직접 겪어봐라.

***

이틀째 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조그마한 배에 봉지를 감싸는 반복되는 작업. 웃지 않고 일하자 다들 예민해져 간다. 특히 어제저녁 일과 보고에서 우리 조와 상반된 옆 조의 즐거운 모습을 봐서 그런지 다들 표정이 더 안 좋다.

"저기요! 이거 좀 제대로 하시라고요!"

"아니, 너도 제대로 못 하잖아. 그리고 왜 명령만 해?"

"내가 팀장이니깐요!"

결국은 터졌다. 표인봉 형님과 파라오 심혜진이 붙었다. 배나무밭에는 고성이 오간다. 교성이 오가야 할 나이에 저게 뭔 짓이람.

"현찬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여자 팬클럽 중 한 명인 은주가 내 등을 민다. 하. 어쩔 수 없지.

"혜진 선배. 잠시만요. 진정하세요. 그리고 형도 잠시만 참으세요."

"야. 민현찬 너는 빠져."

"선배. 여기 사람들도 다 보잖아요."

"빠지래도!"

"아. 진짜! 선배! 나한테 화 안 내기로 한 거 기억 안 나요?"

돌려 말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날 학과사무실에서 일을 일부러 머리에 떠올리게 했다.

"하... 일단 알았어."

"고마워요. 선배. 그리고 미안해요. 잠시만 머리 식히세요. 그리고 형. 형도 잠시 저쪽으로 가세요."

"하. 미안하다 현찬아. 알겠어."

겨우 분위기가 진정 되는 순간 고함이 우리를 때렸다.

"야! 너희들 봉사활동 와서 왜 싸우는 거야! 다들 나가!"

배 과수원 주인 어르신에게 쫓겨났다. 농활 괜히 왔다. 시불.

쫓겨나서 마을 정자에 앉아 있는 열 댓 명의 우리. 겉에서 보면 희극이지만, 안에서 보면 비극이다.

"오빠가 제대로 했어야죠."

"내 방법이 더 효율적이야."

두 사람은 2차전을 시작했다. 차라리 섹스해라. 그럼 바로 서로를 이해할 건데. 젠장 그리고 나는 왜 이 사이에 끼어 있는 건데. 한참을 싸우더니 나를 본다. 심판 봐달라는 뜻인가?

"둘 다 잘못했어요. 물론 싸울 수도 있죠. 그런데 다른 사람 안 보이는 데서 싸웠어야죠. 지금 두 사람 때문에 여기 분위기 이게 뭐예요?"

손을 들어 이글파이브를 가리켰다.

"쟤들은 이제 일학년인데 싸우는 거 보면 다신 오고 싶겠어요?"

"너도 일학년이잖아."

"혜진 선배.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하여튼. 두 사람 화해하고 있어요. 나 잠시 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데?"

"어르신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와야죠."

이전 생에서 몸에 배긴 사회생활 경험이 나를 가만히 있게 못 한다. 과수원에 돌아가자 어르신이 평상 위에 앉아 계신다. 혹부리 영감님처럼 인상이 안 좋다.

"안녕하세요."

".... 얘들은?"

"마을 정자에 있어요."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어르신 옆에 앉았다.

"할멈. 여기 식혜 좀 가지고 와."

"지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아! 좀 가지고 와."

투덜 대면서 식혜를 가져다주는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식혜를 마시는 동안에도 어르신은 아무 말이 없다.

"어르신. 배 봉지는 지금 싸면 좀 늦지 않았나요? 6월에 싸야 했는데."

"늦었지. 내가 병원 안 갔으면 진작 쌌을 거야."

"요즘 까치 때문에 난리죠?"

"까치가 옛날 까치가 아니다. 다 쪼고 간다.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어?"

5000만 원 날린 거 때문에 부장 주말농장 가서 일했거든요.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어르신 기분이 풀렸는지 말씀을 하신다.

"싸울 수도 있지. 다만, 여기서는 싸우지 마라. 이거 우리가 해도 다 할 수 있다. 너희들 와서 하면 젊은 애들 보는 게 우리는 좋은 거다. 웃으며 일하는 모습. 그런 거 보는 게 좋은 거다.

일 못 해도 된다. 다만 웃으면서 좀 해줬으면 한다. 애들 불러 모아라. 밥은 먹어야지."

"알겠습니다. 어르신."

마음이 풀렸는지 어르신은 껄껄 웃으신다. 이제 다시 정자로 돌아가자.

오늘 내 활동량으로 정글 돌면 리그오브레전드에서 바로 첼린저 찍었을 거다. 정말 바쁘다. 그나마 정자에서 이글파이브와 팬클럽 네 명이 웃고 있는 거 보니 한 숨이 놓인다.

"어르신이 밥 먹으러 오래요."

"현찬아. 그전에 잠시만."

나를 바라보는 표인봉 형과 심혜진. 무슨 일이지? 심혜진이 나를 보며 입을 연다.

"너 어르신에게 가 있는 동안 우리끼리 이야기했는데. 네가 팀장 해."

"저요?"

"응. 지금 우리 둘 중 한 명이 해도 다시 싸울 거 같아서."

그건 맞는 말이지. 드디어 왕관을 내려놓는 파라오. 거유에 얼룩진 통치가 드디어 끝났다.

"알겠어요. 대신 두 사람 다 내 말 무조건 들어야 해요."

이제 나의 시대다.

< 여름방학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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