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9화 (29/295)

< 여름방학 >

"선미야 왜? 왜 안 사귀는데?"

"내 맘이야. 일단 좀 빼고 이야기해."

"안 사귀어 주면 안 뺄 거. 악!"

이선미가 내 머리카락을 잡고 끌어당긴다. 지금 이 순간은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이다. 사랑스럽다는 말 취소다.

"아흣.."

하얀 액체가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걸 서둘러 수건으로 닦아줬다.

"하. 우리 현찬이 매너 많이 늘었네."

"웃기네 원래 매너 있거든."

"지랄. 담배 하나 줘. 아 몸에 힘 풀린다."

발가벗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이선미. 나를 보더니 살짝 웃는다.

두근두근.

젠장. 어떻게 저렇게 예쁘냐?

"뭘 봐?"

"예뻐서 그런다."

"진짜? 립서비스 감사요."

"선미야. 그런데 왜 나랑 안 사귀는 건데? 나 이제 고추도 커."

벌떡 일어나서 선미 앞으로 갔다.

덜렁덜렁.

"악!"

젠장. 망할 것. 졷 싸다구를 때리다니.

"현찬아. 내가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 건 실수였다고 사과 했잖아... 그런데, 너는 어떻게 20살이 넘어서 전부 다 성장하냐? 키도 고추도 저번보다 더 커진 거 같아."

"그러니깐. 앞으로 더 커질 거야. 어 때?"

"지랄한다."

"선미야. 나만큼 네 마음 잘 아는 사람도 없잖아."

"아하하!"

이선미는 소리 내 웃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뭐지?

"현찬아. 너는 아무것도 몰라."

왕좌의 게임인가? 존 스노우 너는 아무것도 몰라.

"현찬이 네가 고추를 내 입에 넣고 머리 강제로 잡아서 못 움직이게 한 뒤 억지로 오랄을 해서 화난 건 맞지만, 울었던 건 그것 때문이 아니야."

아씨. 미안하게 그걸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냐.

"그럼 왜 운 거야?"

"갑자기 서글퍼서. 너 SES랑 놀러 가서 재밌게 놀았지? 석훈이랑 간 거 보니 할 거 다 했을 거 아냐?"

귀신이냐? 그날 숲에서 보였던 게 진짜 있었던 건가?

"어. 그렇지..."

"그러고 나서 그 애들이랑 같이 안 놀잖아. 인사만 하는 정도고."

"그것도 그렇긴 하지."

"네가 내 머리 잡고 흔드는데, 나도 걔들처럼 너의 하룻밤 장난감이 된 기분 들더라고. 우리 석 달 동안 그래도 재밌게 친구처럼 지냈는데. 내가 너에게 장난감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드니깐 슬펐어."

충격이다. 전혀 생각 못 했다. 토르가 뮬니르로 내 뒤통수를 갈긴 기분이다.

"나는 외국에서 학교 다녀서 여기 친구가 없거든. 네가 한국에서 처음 사귄 친구야. 그날 운 건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 나도 미친년이지. 섹파, 섹파, 거리면서 막상 섹파가 되니깐 질질 짜고. 아씨. 또 눈물 나네.

그래도 이제 괜찮아. 내가 소중한 존재라면서? 그것 때문에 기분 좋아졌어."

울면서 웃는 이선미. 설렘과 미안함, 그리고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런 이유라면 나랑 사귀면 되잖아.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줘."

"지랄한다. 멜로영화 찍냐? 싫어."

"아! 왜?

"내 맘이야."

하.... 내가 일만시간의 법칙으로 공부해도 이선미 마음은 모를 거다.

"그냥 남자인 친구라고 생각해. 너도 석훈이랑 같이 목욕탕 가서 발가벗잖아."

"야.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그리고 우리는 섹스도 했잖아."

선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나를 진지하게 본다. 젠장 가슴만 보인다.

"현찬아. 석훈이랑 한 번 해봐. 어쩌면 너 그쪽."

"닥쳐!"

"꺄하하! 아 졸라 웃겨. 아하하하."

내 팔을 치며 해맑게 웃는다.

"나 여자친구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사귀어! 축하해줄게. 투투날 200원도 줄 수 있어. 너 투투 챙기잖아."

"망할. 투투는 아직도 안 잊었어?"

"그 반지는 아직 있어?"

"사우론 줬다. 왜?"

"임석훈 반지 원정대로 보내야겠네."

낄낄 웃는 우리 둘. 에라 모르겠다.

잠시만.

그런데... 이런 친구가 나만 있는 게 아니라면? 갑자기 마음 한 편에서 질투심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선미 가슴이 쌍둥이 태양처럼 내 앞에 떠오른다.

응?

어느새 내 앞에 선 이선미가 두 주먹 불끈쥐고 진짜 토르처럼 내 머리를 후려 갈겼다.

"아얏!"

"미친 새끼.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무슨 생각 했다고?"

"너 같은 친구는 한 명이면 충분 하니깐 걱정하지 마. 나는 씻으러 가야겠다~"

선미는 모텔 용품에서 이것저것 꺼내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도 씻어야겠다.

-딱. 딱. 딱.

"선미야. 문 열어. 같이 씻자."

-난 남자친구 아니면 같이 안 씻는데도."

"선미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친구 사이에 같이 목욕해. 나랑 석훈이도 같이 목욕하잖아."

-지랄. 뽑아 버리기 전에 꺼져."

별수 있나? 포기해야지.

***

"선미야. 도착했어."

"응? 아 피곤하다. 더럽게 머네."

아침 버스를 타고 대학교로 돌아온 우리. 버스 정류장을 나오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다.

"요! 형제들. 둘이 웃으면서 오는 거 보니깐 화해는 했나 보네?"

버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석훈이와 은미. 웃으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는 임석훈의 모가지를 이선미가 잡는다.

"자살했다는 새끼가 아직 살아있네?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죽여 줄게."

"켁.. 켁.. 선미야.. 야.. 잠시만. 나 네크로멘서라 부활한 거야."

"지랄한다. 잘됐네.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겠네."

갑자기 시작된 스트리트파이터. 이선미는 춘리가 되어 임석훈을 개 패듯이 팬다. 진짜 스트피트파이터 인지 보너스 스테이지로 차도 부술려고 한다.

그 광경을 보는데 하은미가 옆에서 빼꼼히 나를 바라본다.

"현찬아."

"응? 은미야 왜?"

"그런데 너희 둘이 어디서 잤어?"

깜짝이야. 그런데 얘는 왜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냐?

"우리 집에서 잤어. 누나 있거든. 선미도 우리 누나 앞에서는 순한 양이야."

"진짜? 누나 있었어? 다음에 나도 같이 가자."

"그래. 알겠어."

"그런데 오늘 월드컵 스위스전 어디서 볼 거야?"

"안 보고 잘 거야."

하은미 놀라서 나를 빤히 본다. 이선미와 발밑에 깔린 임석훈도 대결을 그만두고 나를 쳐다본다.

"어? 정말 현찬아?"

"이 미친놈아 왜? 너 프랑스전 같이 안 봐서 삐졌냐? 진짜 안 봐?"

"현찬아 너 어디 아파? 정말 안 본다고?"

어. 안봐. 왜냐고? 그 경기 보면 엄청 열 받거든.

***

월드컵이 끝났다. 이제 여름방학이다. 지금 내 자취방에는 동네 백수 네명이 모여있다.

"임석훈 미친 새끼야 차는 SUV 사야지."

"선미야. 차는 오픈카야. 아우디 TT로 가자.

"외제 차는 무슨. 국산 SUV로 가자. 우리 장 보러 갈 때 편하단 말이야."

"네 차도 아닌데 왜 너 장 보러 갈 때를 생각해?"

"임석훈 너는? 너도 네 차 아니잖아."

내 자취방 한쪽에서 임석훈과 이선미가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고 있다. 싸우는 이유는 내 차 때문에.

월드컵 때 또또로 많은 돈을 벌었다. 가장 재미를 봤던 경기는 가나 VS 체코와 프랑스 VS 스페인 경기. 법적 한계 금액을 무시하고 있는 대로 베팅했다.

8강 진출 국가를 알고 있으니 승부식도 적절히 조합해서 걸었다. 여튼 월드컵 동안 벌어들인 돈은 5억원 정도다. 미래를 알아서 다행이지, 몰랐으면 돈 다 날렸을 거다.

돈이 생기자 우선 차부터 사고 싶었다. 차를 몰고 다니는 대학생. 야타족!... 까지는 아니고 그냥 편하니까. 어제 차를 보기 위해 국내 5개사와 해외 대리점까지 돌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디자인이 별로다. 젠장. 2016년도 차의 디자인에 눈이 맞춰져 있다 보니, 2006년 나온 차들은 아무리 봐도 성에 안 찼다. 그렇다고 아예 비싼 외제 차를 살 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흥미를 잃고 대충 사야겠다는 말에 두 사람은 자기들이 골라 주겠다고 자동차 브로슈어를 침대에 깔고 난장 토론을 벌이고 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하은미는 내 앞에서 화가가 되어 있다.

"현찬아. 가만히 있어."

"은미야. 내가 이걸 왜 하는 거야?"

"내가 재밌으니깐. 후후후"

은미는 숨결이 닿을 거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눈 아래로 내려봐."

"알겠어."

눈을 내리자 하은미의 가슴골이 보인다. 얘들은 전부 다 자기 집처럼 짧게 입고 있다.

좋아! 너무 좋아!

"이제 다했다. 얘들아 와봐."

이선미와 임석훈이 우당탕 침대에서 달려와 내 앞에 선다. 둘 다 잠든지 확인해보는 귀신처럼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내 얼굴을 본다.

"오. 너 진짜 여자 같다. 화장 잘 받았어. 오늘 밤에 내 옆에서 자라."

"임석훈 미친 새끼. 현찬아. 너 정말 코 수술 한 거 아니야?"

"너희랑 붙어 있었는데 언제 수술했겠어."

수술이 아니라 구매를 했지. 월드컵 때 번 돈으로 코 변경을 구매했다. 그러자 하은미는 눈이랑 코랑 예쁘다면서 내 얼굴에 조금만 화장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는데, 하은미는 밥 아저씨가 되어서 '참 쉽죠' 라면서 몇 번이나 내 얼굴을 화장시켰다.

"안 그래도 화장 연습하고 싶었는데. 현찬아 고마워 앞으로 자주 애용할게."

"은미야. 내 얼굴은 도화지가 아니거든."

"아니야. 앞으로 내 도화지야."

하은미. 이번 생에는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건가?

"끄하하하. 역시 기사 민현찬. 이제 화장까지 받아주고 말이야. 다음 주부터 너희 둘 밖에 없으니 재밌게 놀아."

"어? 나랑 은미 밖에 없다니? 석훈이 너 어디가?"

"나. 템플스테이. 아빠가 양주 처먹은 거랑 티비 땐 거 때문에 빡쳐서 갔다 오래. 안 그러면 용돈 끊어버린단다."

결국은 유배를 당하는구나.

"선미 너는?"

"나는 엄마한테 가야지. 보름 정도 외국 갔다가 와야 해."

그럼 남은 건 두 사람인데. 나와 하은미가 단둘이? 어색한데. 모두와 함께 있을 때는 재밌지만, 단둘이만 있으면 불편하단 말이야. 그건 하은미도 마찬가진가 보다.

"그럼. 나도 다음 주에 단기 알바 해야겠어. 아는 언니가 피팅모델 해달라고 했거든. 현찬이랑 단둘이 있기도 그렇고."

"그러면 우리가 재미없어 은미야. 너랑 현찬이 같이 있어야 해."

"선미야. 너 무슨 말이야."

망할 이선미. 내 마음도 모르고 깔깔 웃는 나쁜 년.

"나도 그럼 여기서 혼자 게임이나 해야겠다. 차는 어떻게 결정 났어?"

"선미가 이겼어. SUV 사자."

"진짜? 임석훈 너 맨날 2인승 오픈카 외치더니 마음 바뀌었어?"

"현찬아. SUV 뒷좌석 접으면 침대처럼 된다고 어제 딜러가 말했다면서? 그렇다면 SUV지!"

아! 그건 생각 못 했네. 그렇다면 당연히 SUV 사야지.

"오케이. 콜. 대신 차 빌릴 때마다 3만 원씩 내라."

"왜?"

"대실비는 내야지."

"오케이. 그건 인정. 악!"

이선미와 하은미가 나와 임석훈을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걸린 초등학생처럼 팬다.

"이 새끼들은 진짜 맞아야 해. 우리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현찬아. 너 석훈이랑 놀지 마. 이상해진 거 같아."

이상해지다니. 이제 겨우 정상적인 남자가 된 거지!

***

저녁 8시. 친구들은 다 집에 갔다. 막상 있다가 다 가니깐 허전하다. 그런데 나 이렇게 여유 있게 살아도 되는 건가? 다시 태어난 삶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응. 아냐.

나는 천성이 야망이 없는 놈이나 보다.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는 거? 별로 안 끌린다. 대신 안 유명하면서 부자로 사는 삶. 그런 삶이 더 끌린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이 나이 때 즐길 수 있는 걸 즐기고 싶다. 어차피 졸업하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때는 야수처럼 달리고 지금은 일단 대학교의 재미를 즐기자.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니깐.

그렇게 생각하니 게임만 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서 티몬과 품바나 볼까?

- 디리리링

응? 박호빈이네? 웬일이지?

-현찬아. 뭐해? 너 다음 주 시간 돼?"

"다음 주 별로 할 일은 없는데."

-농활 안 갈래? 지금 두 사람이 비었어."

농활? 이전 생에서 농활을 못 갔었지. 가보고 싶다. 여사친은 없겠지만 나름의 재미는 있을 거 같다.

"호빈아. 콜. 갈게."

-오케이. 알았어. 다음 주 월요일 날 학교로 오면 돼. 자세한 건 메일로 보내줄게.

농활이라. 이전 생에서 갔다 온 친구가 재밌다고 꼭 가보라고 추천한 게 떠오른다. 몇 번이나 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꼬여서 못 갔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것도 겁이 났었고. 좋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의 인싸력이 밖에서도 먹히는지 시험해 보자.

- 디리리링

응? 하은미네?

-현찬아. 너 농활 간다면서? 호빈이가 그러던데?"

"어. 은미야.

-나도 알바 안 가고 같이 갈게. 애들도 없는데 둘이서 갔다가 오자.

아... 하은미?... 여왕 하은미가 농활을 간다고? 일이라고는 손가락도 안 움직이는 애가 농활을?

이거 시중만 들게 되는 거 아니야? 갑자기 피곤해진다.

< 여름방학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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