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7화 (27/295)

< 월드컵 >

이선미가 화를 낸 지 이틀이 지났다. 그날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이선미는 끝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결국 새벽에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강의실. 마지막 기말고사 시험을 치기 위해 앉아 있다. 나와 이선미 사이의 공기는 그날 이후로 한겨울의 시베리아와 같다. 지금도 네 명이 일렬로 앉는 책상에 우리는 한 자리를 놔두고 떨어져 앉아 있다.

강의실 문이 열리며 하은미와 임석훈이 들어온다. 우리 둘 사이가 시베리아가 맞나보다. 임석훈은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옆에 앉는다.

"미친놈 안 덥냐? 여름에 무슨 패딩이냐?"

"너희 사이에 앉으니깐 존나 시원한데. 너랑 선미 사이가 시베리아 같아서 입고 왔다."

"그렇다고 패딩을 입고와? 너 더워 죽는다."

"그러니깐. 제발 둘이 화해 좀 해라. 나 더워죽겠다. 아니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라도 좀 해주라. 그래야지 내가 화해를 시키든 말든 뭘 할 거 아냐?"

고개를 돌려 이선미를 보는 임석훈.

"선미야. 왜 싸운 건데? 이유 좀 말해주라."

"안 싸웠어."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 쉬더니 이번에는 나를 본다.

"현찬아. 너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둘이 왜 싸웠어?"

"됐어."

오랄을 하다가 내가 흥분해서 입을 벌리게 한 뒤 목이 막힐 때까지 허리를 움직이다가 붕알을 맞았어.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하은미도 뭐라고 하지만, 이선미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앉는다. 하.... 불편하다.

시험이 끝나자 이선미는 제일 먼저 강의실에서 나갔다. 그런 이선미를 따라 나가자 사물함에 책을 넣고 있는 게 보인다.

"선미야."

이선미는 아무 말도 안 한다.

"선미야. 잠시만 둘이서 이야기 좀 하자."

"무슨 말?"

"사과하려고 그래."

".... 알았어. 담배 하나 피자."

"야! 너희 둘이 담배 피우러 가? 나도 같이 가자."

고개를 돌리자 박호빈이 손을 흔들고 있다. 아 밉상 새끼. 그럴 분위기 아니야.

"미친놈. 너 저 둘 사이에 끼면 나처럼 패딩 입고 다닌다. 나랑 같이 일 층으로 가자."

다행히 임석훈이 그런 박호빈을 끌고 간다. 나랑 이선미는 사람들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칙.

라이터 소리.

이선미는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나를 보지 않고 먼 산만 본다.

"선미야. 그날은 미안했어."

"뭐가?"

"그날. 너에게 강제로 한 날. 장난이 과했던 거 같아. 미안해."

화가 안 풀렸는지, 아무 말 없이 마동석 형님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계속되는 침묵. 담배 타들어 가는 소리만 가득하다.

"갈게."

"선미야. 미안하대도."

"알겠어. 갈게."

선미는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옥상을 내려갔다.

"하...."

그래.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한다.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데 사과를 하면 좀 받아주지. 김구라 형님 불러서 문희준 형님이랑 화해 한 것처럼 '절친노트'라도 찍어야 하는 건가? 어렵다 어려워.

- 디리리링.

"여보세요."

"야. 너 내 번호 스팸 처리해놨냐?"

이 목소리는. 나의 친누나? 스팸처리 해놓기는 했지. 돈 빌려달라고 전화 오니깐.

"어. 왜?"

"엄마 아빠 교통사고 당하셨어. 빨리 내려와."

"뭐? 진짜?"

"어. 끊는다."

부모님이 교통사고 당하셨다고?

잠시만.... 아 맞다. 이전 생에서도 이맘때쯤 사고당하셨지. 섹스하고 다닌다고 깜빡했구나···.

***

고향 가는 버스 안. 임석훈이차를 빌려준다는 걸 마다하고 버스를 탔다. 사고 결과는 다행히 이전 삶이랑 똑같다. 뒤에서 살짝 치는 가벼운 사고였지만, 싸가지 없는 상대방의 행동에 드러누우셨고 나일론 환자로 한 달을 병원에 계셨었다.

그러고 보니 섹스에 열중한다고 가족을 너무 신경 안 썼다.

이전 생에서 여자친구도 없이 혼자 축구만 보면서 살다 보니, 주말마다 집에 갔었다. 그게 아쉬워서 이번 생에는 고향 안 가고 신나게 놀았다. 불효자는 웁니다. 부모님.

그리고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우리 누나. 키 173에 긴 생머리에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다. 하지만 성격은 이선미, 하은미 합친 거보다 더럽다. 우리 누나는 된장녀를 넘어 된장 바를 여자다.

아!

시발. 이제 깨닫다니. 내가 호구로 산 게 누나 때문이구나. 어릴 때는 나보다 큰 키에 맞고 자랐고, 내가 175cm 됐을 때는 누나가 일진이어서 맞고 자랐다. 그 뿐이랴? 심부름이란 심부름은 다 했었다. 이제야 깨닫다니. 그러고 보니 누나 친구들도 여사친일까? 머리 한쪽 구석에서 누나 친구들을 떠올려 봤다.

오래된 기억이다. 내가 19살 때 집이 빈다고 누나 친구들이 온 적이 있었다. 여대생인 누나 친구들이 온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나 친구들이 들어오자, 그날 게이트가 열렸다.

한 마디로 누나와 누나 친구들은 디아블로2 였다. 우리 누나는 디아블로, 그옆에는 메피스토 와 바알.... 여기까지만 떠올리자.

아씨.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려도 잠시다. 이선미만 생각난다.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강한 이선미가 눈물을 글썽이다니. 그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쪽이 아파진다. 이건 불편함이 아닌 고통이며, 나는 이 고통에 이틀 내내 시달리고 있다.

***

부모님이 입원해 계신 병원에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병실에 들어가려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 현찬아 도착했냐?"

"어. 석훈아. 방금 도착했어."

- 괜찮으시데? 내려갈까?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크게 안 다치셨어. 너 도착할 때쯤이면 주무실 거야."

- 그래? 알겠다. 일 있으면 연락 주고.

임석훈 의리 있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반가워요. 엄마.

"아들 석 달 만이네."

"네. 엄마. 못 와서 죄송해요."

"괜찮다."

"아빠는요?"

"술 마시러 갔을걸?"

대단하다. 아들이 온다는데 술 마시러 가다니. 그것도 환자가 말이야. 아빠 친구가 이 병원 의사여서 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주위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더니, 호들갑을 떤다.

"아이고. 잘 생겼네. 그, 말 하던 아들이에요?"

"네.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용돈도 보내준다고."

엄마... 그만 해주세요...

"부럽다. 부러워. 우리 딸은 미쳐서 술만 마시는데. 20살밖에 안 된 아들이 용돈도 보내주고."

"아이고. 용돈만 보내줍니까. 등록금도 됐다고 합니다. 지가 벌어서 낸다네요."

"효자네. 효자야."

엄마... 그 돈.. 섹스랑.. 토토해서 번 돈이에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지만, 섹스로 벌어서 정승처럼 쓰다니.

한동안 이어지는 엄마의 자랑에 쥐구멍이 있다면 전세 내고 싶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딸로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네. 반갑습니다."

"아고. 둘이 동갑이지?

아주머니들의 레이다에 걸려 들었다. 한동안 둘이 잘 어울린다니, 키도 딱 맞다니.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아주머니의 딸, 일단 내 스타일이 아니다. 솔직히 이선미, 하은미, 이혜민을 보고 지내다 보니 눈에 안 찬다. 그리고 친해져봤자 서지도 않을 건데 뭐.

엄마 옆에서 계속 병실에 있었다. 드디어 주무시는 엄마,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9시다. 주무시는 엄마를 뒤로하고 병실을 내려왔다.

병원 로비에 앉았다. 집에 가고 싶지만, 이미 디아블로, 메피스토, 바알이차지했다는 누나 문자에 가지 않았다. 디아블로2에 나왔던 아이템 중에 조던링, 윈드포스, 할배검 정도만 있었어도 한번 붙어 봤을 건데.

대학교로 돌아가려고 하니 차가 이미 끊겼다. 월드컵 끝나면 또또해서 번 돈으로 차부터 사야겠다.

"저기요."

고개를 돌리자 아까 병원에 있던 아주머니 딸이 서 있다.

"아. 네. 집에 안 가셨어요?"

"네. 이제 가려고요. 저기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여자친구가 있어서요."

"그래도 친구로 지내죠. 여기 제 번호니깐 연락 주세요."

아주머니 딸은 끝내 나에게 번호를 준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갔다. 나는 아주머니 딸이 병원을 나가자마자 번호가 적힌 쪽지를 구겨서 버렸다. 미안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선미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다.

이선미에 대한 지금 내 감정은 전주비빔밥처럼 복잡하다. 우선 미안한 감정이 제일 밑에 깔려있다. 다음은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감정이 위에 올라가 있다. 그러면 이선미의 글썽이는 얼굴이 계란 노른자처럼 제일 위에서 나를 바라본다. 싹 다 비벼서 한 입 먹어보니, 어떻게든 풀고 싶다는 생각만 입에서 느껴진다.

하... 그러기 위해서는 이선미가 화난 명확한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일단 그날로 돌아가 보자.

역지자지.

성대 방과 나의 처지를 바꿔서 섹스하면 이해된다는 뜻.

내가 이선미 앞에 꿇어앉아 있고, 이선미가 내 앞에 서 있다. 이선미가 내 머리를 잡고 자신의 소중이로 억지로 끌고 간 다음에 허리를 흔든다. 나는 너무 밀착되어서 숨이 캑캑거리고 있고...

이거 포상인데? 콜. 저 바로 할게요. 시불. 정신 차리자! 이 방법도 아니다. 그럼? 임석훈이 내 앞에 서 있다고 생각....

아!

알겠다. 이선미가 화가 난 이유를. 내 앞에서 덜렁이며 장난치는 임석훈을 떠올리자 바로 이해되었다. 내 앞에서 강제로 내 머리를 잡는 임석훈을 떠올리자 바로 죽빵을 한 데 날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시발. 내가 개새끼였구나."

선미야 미안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겠다.

"민현찬!"

갑자기 이선미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 미안한지, 환청이 들리나 보다.

"야! 민현찬."

"어?"

고개를 들자 선미가 숨을 헐떡이고 있다. 님 귀신 아니죠?

"선미야. 너 여기 어쩐 일이야?"

학교에서 내가 있는 고향까지는 세 시간이 걸리는데 어떻게 왔지? 선미는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부모님 교통사고 나셨다면서? 괜찮으셔? 아이들 늦게 시간 되어서 나 먼저 내려왔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오전에 화내서 미안해."

그러지 마. 내가 더 미안해.

"아니야. 선미야. 괜찮아. 그때는 사고 나기 전이었어."

"부모님은?"

"어. 괜찮으셔. 걱정 안 해도 돼."

"지금 깨어나지 못하셨다면서?"

"응. 지금 깨울 수는 없을 거 같아."

"어떻게 해. 중환자실에 계셔?"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데...

"아니. 일반 병실에 계셔."

"다행이다. 부모님 얼굴은 봤겠다. 어서 깨어나셔야 할 건데."

"방금 주무셨으니 내일 아침이면 일어나실 거야."

"의식은 돌아오실 거니 너무 걱정... 어?"

나만 느낀 게 아닌가 보다. 우리는 인상을 살짝 찡그린 서로를 마주 봤다. 화난 인상은 아니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표정이다.

"선미야. 너 누구한테 뭐라고 들었어?"

"석훈이가 지금 못 깨어나신다고 했어. 현찬아 너는 누구한테 뭐라고 말했어?"

"나는 석훈이한테 지금 주무신다고···."

우리는 동시에 눈을 감고 한 손을 머리에 올렸다. 임석훈! 나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들어서 임석훈한테 전화했다.

-여보세요.

"야! 너 선미한테 뭐라고 말 한 거야?"

- 선미 병원에 도착했어?"

"그래. 뭐라고 말."

-뚜뚜뚜

개새끼. 하은미에게 전화하자.

"현찬아. 부모님 교통사고 당하셨다면서. 내려 갈려고 했는데 석훈이가 괜찮다고 못 가게 해서. 부모님은 괜찮으셔?"

"응. 은미야. 괜찮으셔. 신경 써줘서 고마워. 옆에 석훈이 있어?"

-응. 우리 지금 종강주 마시고 있거든. 석훈아! 뭐? ..... 진짜? 그렇게 말하라고?

"임석훈 뭐라고 해?"

- 방금 자살했다고 말해 달라는데?

이 새끼. 올라가서 보자.

"알겠어. 은미야.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보자.

상황파악 완료다. 이선미도 마찬가진지 어이없어한다. 그것도 잠시 부모님이 괜찮다는 걸 알자마자 우리는 다시 어색해졌다.

"현찬아. 나 올라갈게.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선미야. 지금 버스 없어. 끊겼어."

"...."

"그러지 말고. 여기서 방 잡고 자고 가자."

"야! 너는 아직도."

"너 손끝 하나 안 건드릴 거야. 방만 잡아주고 나는 갈게."

"하... 임석훈 개새끼 진짜. 알았어."

우리는 병원을 나와 근처의 모텔로 들어갔다.

< 월드컵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