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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못했던 여사친들-17화 (17/295)

< 축제 >

파라오다. 내 앞에 파라오가 있다.

축제 시작인 목요일. 우리는 4층 과방에 있는 책상을 축제에 쓴다고 들고 내려가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만들 때 이랬겠지? 나이아가라 파마를 한 심혜진 선배는 파라오가 되어 주둥이로 우리를 채찍질한다.

"일학년들 빨리 안 움직여!"

훈수 두는 사람이 제일 밉다더니. 팔짱 낀 채 명령하는 게 스타크래프트 훈수처럼 얄밉다.

"애들아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 옆에서 미안한 표정으로 있는 종수형. 과대표지만, 실제로는 각목 심혜진의 오른팔에 불과하다. 왜 이놈의 학교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제사상처럼 여자들이 센 게 전통일까?

"오빠 얘네들 일부러 힘든 척 하는 거야. 빨리 움직여."

이년아 이집트 파라오도 피라미드 지을 때 월급은 주고 시켰다. 땀범벅이 된 채 드디어 일 층에 책상을 내려놓았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다. 과방에서 운동장까지 100m 거리를 들고 가야 한다. 우리는 다시 낑낑대면서 책상을 들고 옮겼다.

잔디밭 운동장에 책상을 내려놓자 숨이차오른다. 망할! 스탠드는 왜 보통 계단보다 두 배는 높은 거야!

운동장은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이 운동장에 피라미드를 짓나 보다. 많은 학생, 아니 노예들이 미네랄 들고 있는 SCV처럼 책상을 들고 오는 게 보인다.

나, 임석훈, 박호빈은 스탠드 구석으로 가서 나란히 앉아 담배를 물었다.

"석훈아. 힘들어 죽겠다."

"현찬아. 나도 죽겠다. 호빈아 너도 고생했다."

"아 진짜. 저년은 너무한다. 우리가 무슨 노예도 아니고."

박호빈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에 나와 임석훈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박호빈이라면 파블로스의 개처럼 선배들 목소리만 들어도 헥헥 거리는 놈인데?

"나 축제 하기 전에 끌려가서 욕먹었어. 일학년 한명이라도 빠지면 각목으로 맞을 거래. 미친년."

그렇구나. 우주인이 쳐들어오면 한,중,일이 하나가 된다더니. 심혜진이라는 강력한 적에 우리는 순식간에 동맹이 되었다.

"아 맞다. 현찬아 내일 내 친구들 오기로 했는데, 너 안다던데?"

"응? 호빈아 나를 안다고?"

"응. 너랑 고등학교 동창인데, 이름은 이야기하지 말아달래."

"나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어서 내 고등학교 동창을 네가 알 리가 없을 건데?"

"저기 옆에 대학교 간호학과야. 여튼 너 이야기하니깐 좋아하더라. 너 고등학교 때는 엄청 조용했다면서. 학교 공식 동정남이었다던데. 여자 손도 못 잡아 봤다면서?"

시불. 동맹 파기. 역시 이 미친놈에게는 천벌을 내려야 한다. 옆에 있던 임석훈이 배가 째지라 웃는다.

"으하하하! 미친. 학교 공식 동정남은 뭐냐? 여자애들한테 말해줘야겠다."

"석훈아. 오늘 아침에 뭐 먹었어? 그게 네 마지막 밥으로 해줄게."

"나? 은진이."

"미친놈. 야! 박호빈 너는 뭘 또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봐. 저 새끼 헛소리하는 거야."

"아...? 아! 그.. 그렇지. 나도 그냥 본 거야."

세 명이서 낄낄대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야! 박호빈, 임석훈, 민현찬. 너희 뭐하냐?"

각목 심혜진 선배다. 우리 세 명은 심혜진 선배에게 달려가 땡땡이치다 걸린 일병처럼 고개를 숙였다.

"왜? 너희만 쉬어? 너희만 일했어? 여기 선배들 일 하는 거 안 보여?"

젠장. 군대 가서 상병만 10년 하고 제대했나? 갈구는 게 일품이다. 그러고 보니 나 다시 군대 가야 하네. 시불.

"꼭 내가 일일이 말해야지 너희는 일하지? 책상 가져왔으면 의자 가져와야 하고, 작년 축제 때 썼던 물건도 챙겨오고. 너희들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어?"

상병 10년하고 행보관 10년 했나 보다. 당신은 이 시대의 꼰대 유망주입니다.

"정신 차리자. 오늘은 축제니깐 이 정도로 끝나는 거야. 다들 돈 줄 테니까, 여기 적힌 물건 사와."

노예들 기분이 이랬겠구나.

링컨 잘 계시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우리 좀 해방 시켜주세요.

스탠드 한쪽 구석, 여기가 노예 창고구나. 우리와 마찬가지인 각 과의 노예들이 모여서 담배 피우고 있다.

입석훈은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몇시야?"

"다섯 시 되었어. 호빈아 이제 우리 더 살 거 없지?"

"그럴걸."

망할 심혜진. 꼭 하나씩 빼놓고 주문한다. 고의가 아니라면 나이아가라 파마 할 때 뇌까지 볶았나 보다.

"야! 애들 온다."

와우! 걸 그룹인가? 교복을 입은 이혜민, 하은미, 이선미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아니 학교 운동장에 있는 모든 남자의 시선이 집중된다.

"현찬아 나 왔어."

"혜민아. 교복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살쪄 보인다는 거야?"

"아니. 그 뜻은 아니고..."

세 명 다 일진이었나? 셋 다 앉으면 팬티가 보일 정도로 교복이 짧다. 게다가, 스타킹도 안 신은 맨다리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특히 저런 놈! 임석훈이 대놓고 쭈그려 앉아 치마에 시선을 맞춘다. 이선미가 무릎으로 그런 임석훈 얼굴을 쳤다. 짜슥, 업계 포상받았네.

"임석훈 미친놈아. 안에 속바지 입었어."

"선미야! 너희 그거 반칙이야."

"지랄하네. 야! 박호빈 너도 그만 쳐다봐."

"어? 내가 뭘? 아! 은미야 너 엄청 예쁘다."

박호빈. 이 한결 같은 놈.

하은미. 이 한결 같은 년.

하은미는 말대꾸도 안 하고 나에게 왔다.

"현찬아. 너희 준비한다고 고생했겠다. 수고했어."

"어? 아... 아니야. 선배들이 고생했지."

얘가 낮술로 전설의 양주 캡틴큐를 마셨나? 왜 말하는 게 다정하지?

그나저나 하은미 교복 핏이 예술이다. 은미의 늘씬한 각선미를 보는데 이선미가 발로 찬다.

"초대 가수 도착했대. 보러 가자!"

초대가수? 마침 각목 심혜진도 없다. 우리는 서둘러 운동장 한쪽의 무대로 뛰었다. 박호빈은 심혜진이 무서운지 주점으로 갔다.

무대에 도착하자 초대가수 노래가 막 시작되었다. 오래간만에 들어도 경쾌하고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래에 신났는지, 여자 3인방과 임석훈은 열렬히 환호하며 따라부른다.

나는 그냥 하늘만 봤다. 나는 미래를 아는데...

- 정해진 죽음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는 없어.

그때 호구 신의 문자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래...어쩔 수 없는 거구나.

"현찬아. 뭐해? 왜 하늘 보고 있어?"

"파란 하늘 위로 비행기가 훨훨 날아가서."

"어? 비 올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아니야 혜민아."

혜민이와 깍지 손을 끼고 노래에 맞춰서 흔들었다. 한참을 따라 부르자 노래 클라이막스가 나온다. 우리 다섯명은 신난 어린아이가 돼서 손을 흔들었다.

"나 웃어보리라 나 바라는대로~ 빙고!"

노래가 끝나자 솟구치는 환호성. 다시 볼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라이브 죽인다. 장난 아니야."

"진짜야. 우리 다음에 콘서트 가자!"

친구들은 공연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연신 엄지를 치켜세운다. 들을 수 있을 때 감사히 들어. 즐거운 대학 축제는 여기까지다. 과 주점 천막에 도착하자 심혜진 선배가 피의 축제를 준비 중이다.

"너희들 어디 갔다가 왔어?"

석훈, 선미, 혜민, 은미는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초대가수 보고 왔는데요."

"뭐?"

내 말대답에 모두가 놀란다. 특히 혜민이는 내 팔을 잡고 당긴다.

호빈이와 엠티 때 한바탕하고 느낀 게 있다. 내 친구이고 선배이긴 하지만 다들 20대 초반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나는 서른 살, 사회생활도 4년이나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혜진 선배도 그냥 같잖다.

"하... 참나. 민현찬 다시 이야기해봐. 뭐라고?"

"초대가수 보고 왔습니다. 별로 멀지도 않잖아요."

"야! 너 요즘 잘나간다던데 겁이 아예 없어졌나 보내?"

심혜진은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내 머리를 톡톡 민다.

"이러지 맙시다. 선배."

"이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 봐라!"

"둘 다 그만해!"

착한 종수형이 우리를 말린다. 각목 심혜진은 빡친 얼굴로 종수형에게 잔소리 기관총을 날린다.

"오빠! 아니 얘들 봐봐. 공연 보고 왔대."

"얘네들 고생했잖아. 잠시 쉬고 올 수도 있지."

"고생은 얘네들만 했어? 다른 애들도 다 고생했어."

와... 싸우려는 마음 취소다. 말이 무기라면, 심혜진은 바바리안이다. 휠휜드를 돌며 종수형을 때린다.

"이 정도만 해."

"하.... 알겠어요. 야! 일학년 너희들 요즘 잘나간다면서? 오늘 한사람당 10만원씩 주점에서 팔아 와."

아니! 대학생이 잘나가는 게 뭐가 중요해? 심혜진은 정신 성장이 고등학생에서 멈췄나?

"그냥 50만원 기부 할게요."

"아니. 민현찬 이새끼가 진짜!"

한동안 이어진 실랑이는 결국 다른 선배들까지 나서고야 끝났다.

잠시 다른 데 가 있으라는 종수형의 말에 나와 임석훈은 구석진 스탠드에서 담배를 물었다. 임석훈은 담배를 물자마자 뭐라고 구시렁거린다.

"아디~두디~땀발라, 아디~두디~땀발라."

"너 뭐라고 중얼거리냐?"

"사탄의 인형4 안 봤어? 백마 거유가 처키 부르는 주문이야. 처키 불러서 심혜진 대가리 깨야겠다."

"미친놈."

"이야. 그나저나 우리 현찬이 많이 변했네. 이제 진짜 기사 다 되었어. 애들 앞에 촥! 각목 심혜진한테 선배 이러지 맙시다. 촥!"

"우리보다 두 살 많은 선배야. 뭐 무섭다고. 그나저나 비 오겠다."

흐린 하늘 때문에 운동장이 어둡다. 운동장 곳곳의 천막에는 어느새 백열전구가 대롱대롱 매달려서 빛을 내고 있다.

"그러게. 심혜진 존나 문란한 거 아니야? 과 행사 때 비 오면 과대가 문란해서 그렇다던데."

"그럼 종수형이 문란해야지."

"종수형은 너의 레벨업 판인데 문란하겠냐? 동정남 민현찬군. 혹시 아직도 동정은 아니지? 여자 손은 잡아 봤어?"

"야. 그건 고등학교 때 별명이야."

낄낄대는데 여자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현찬아!"

헉! 고개를 들자 늘씬한 세 명의 다리가 보인다. 그 위로 있는 교복 치마는 뇌를 자극 시킨다. 혜민, 선미, 은미 압도적으로 감사합니다. 혜민이는 내 옆에 앉아서 팔짱을 낀다.

"현찬아 괜찮아?"

"어? 괜찮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한 칸 더 옆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이선미, 일진이 요기 있네. 담배 연기를 뿜으며 나를 본다.

"너 방금 좀 멋있더라. 혜진 선배한테 개기고. 나도 못 개기는데."

"멋지긴 개뿔. 한 번만 더 시비 걸면 진짜 대판 싸울 거야."

하은미가 그런 나를 말린다.

"그러지 마 현찬아. 그 선배랑 얽히면 좋을 거 없어."

부드러운 하은미는 아직도 어색하다. 담배 하나 피우자 주점이 시작되었다. 오늘 바쁘다 바빠!

밤 열시.

주점 천막 바로 아래에 있는 일학년들. 그중에서도 빛나는 혜민, 선미, 은미. 교복 입은 세 명은 그 누가 봐도 한눈에 눈 돌아갈 비쥬얼이다.

"야. 혜진 선배가 접잔다."

비를 뚫고 주점으로 들어온 박호빈이 입을 연다. 그래. 접어야지. 저 정도의 비쥬얼인 세 명을 놓고도 파리 날리고 있으니. 아무리 지방 구석에 있는 학교라지만, 사람이 너무 없다. 스콜처럼 내리는 비 때문인가?

링컨 이렇게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나요?

손님 없이 보낸 시간만 세시간, 다들 지쳤는지 주점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제 부스타랑 냄비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대야만 과 방에 놔두면 끝이다. 종수형이 대야를 양손으로 든다.

"오빠 놔둬. 내가 현찬이랑 과방에 올려놓을게."

어? 왜? 심혜진 선배가 도끼눈으로 나를 본다. 불안한데...

"낮에 둘이 싸운 거 이야기도 좀 하려고요."

"혜진아. 너 뭐라고 하려는 거 아니야?"

"종수 오빠! 아니야. 둘이 좋게 풀려고 하는 거야. 현찬아 가자."

파리의 연인 박신양이랑은 다르게 눈에 독기를 품고 가자고 한다. 갑자기 손깍지를 끼는 이혜민, 눈이 걱정에 가득 차 있다. 선미, 은미, 석훈이도 마찬가지다.

"걱정하지 말고 먼저 내려가 있어 바로 갈게."

"현찬아. 그 대사 하고 나면 보통 죽어."

임석훈 고맙다. 아이들은 걱정의 눈빛을 남기고 내려갔다. 선배들도 다 내려가고, 이제 나와 혜진 선배만 남았다.

"현찬아. 고생 조금만 더 하자. 이거 들어."

화가 조금 풀린 건가? 말이 아주 조금 부드럽다.

플라스틱 대야를 양손으로 들고 열 걸음 걷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전혀 화가 안 풀렸다. 비 오는데 자기 혼자 우산 쓰고 간다. 나는 비에 온몸이 젖었다.

"무거워?"

"아니요. 선배 우산 좀 씌워 주면 안 돼요?"

"과 건물 바로 코앞이잖아."

100m가 코앞이라니. 달리기를 체력장 이후로 한 적이 없나 보다. 과 건물 도착하니 온몸이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 망할 건물은 엘리베이터도 없다. 낑낑대며 과방에 도착해서 플라스틱 대야를 땅바닥에 던졌다.

"정리는 선배가 하실 거죠?"

내 태도에 심혜진은 빡쳤다. 파라오가 노하셨다. 나이아가라 파마는 메두사 뱀 머리가 되었다.

"야! 이야기 좀 하자. 너 선배를 뭐로 아는 거야? 아까전에 모두다 보는 데서 선배 엿 먹이니 좋았어?"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손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친다.

"너 사회생활 그따위로 하면 안 돼. 어디 가서 병신 소리밖에 못 들어."

사회생활? 이제 대학교 3학년, 22살인 네가 사회생활을 이야기해?

"선배 죄송한데요,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뭐? 지금 선배 이야기 중인데? 어딜간다고?"

선배가 아니라 파라오겠지. 나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번 했다.

나와라. 스마트폰.

합체권을 길게 눌렀다.

합체권 : 손가락을 한번 띵 팅군 후 마음속으로 '합체권 사용' 외치면 됩니다. 사용 시 상대방은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완벽한 복종 상태는 아닙니다.

링컨. 당신의 뜻을 알겠어요. 해방은 말과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죠. 총으로 이루어지죠. 제가 가지고 있는 물총으로 해결할게요.

< 축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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