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 >
이선미.
자기가 말하고도 미안했는지 고개를 숙인다.
첫 연애에 작아서 차였다니. 나도 믿기지 않아 계속 쳐다봤다.
"정말···. 그 이유가 다야?"
"응···. 아씨! 솔직히 말할게. 나 되게 개방적이야. 외국에서 살다가 왔거든."
진짜로 외국에서 살다 온 거야? 사귀기 전에 속궁합부터 본다는 독일인가. 여튼.
"너와 처음 한 날 그냥 하고 싶었던 날이었어. 그런데 마침 너도 나 데려다줬고. 얼굴도 나쁘지 않고 착해 보이기도 해서 한 거야. 나 사람으로서는 네가 너무 좋아."
어디서 많이 듣던 패턴인데.
"그런데···. 만족이 안 돼. 너와 하면···. 라면 한 입만 먹은 기분이야."
인정할 수 밖에 없네. 라면 한입 먹은 기분이라니. 개떡 같은 비유에 찰떡처럼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
"미안해. 그래도 우리 친구로 지내자. 싫으면 안 그래도 돼."
"알겠어. 나 이만 갈게."
"현찬아! 조금만 더."
"아니야 갈게. 내일 웃으며 인사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나를 잡는 선미를 뿌리치며 냉정히 돌아섰다.
밤거리가 차다. 차가운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내린다. 이 눈물을 보여 줄 수는 없다. 나는 남자니깐.
다시 태어났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이것이 이별이란 말인가?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아픔을 겪지 않았을 텐데.
망할 모나리자.
소주 한 병 사서 집으로 들어가 깔끔히 원샷 했다. 소주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지금쯤이면 내 위 속으로 들어갔겠지. 흘러 흘러 내려가 내 소중이로...
소중이가 막대기가 되었다.
머릿속에서 이선미와 함께한 합체가 계속 떠오른다.
하고 싶다! 하고 싶다! 하고 싶다! 섹스.섹스.섹스.
젠장! 차라리 경험하지 않았으면 이런 기분 안 들었을 텐데! 진심으로 소중이를 따뜻한 계곡 속에 다시 넣고 싶다!
그 순간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피의 개념을 깨달았을 때도 분명히 발딱 선 상태였을 거다.
유레카!
그래! 사랑은 중요하지 않다. 이선미도 사람은 좋다고 했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해서 싫다니. 중요한 건 섹스다.
섹스<사랑 NO!NO!NO!
섹스>사랑 YES!YES!YES
매슬로의 욕구 5단계 이론도 마찬가지 아닌가?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3단계인 애정과 소속의 욕구까지 갈 수 있다.
생리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되자.
그래! 자기 합리화를 끝낸 나는 A4용지 한 장을 꺼냈다. 굵은 매직을 한 손으로 들고 A4용지에 비장하게 적었다.
- 나는 사랑하지 않겠다. 섹스에 내 인생을 바치겠다.
- 나는 이제부터 섹무새다.
굳은 결심. 이거는 내 삶의 가치관이자, 향후 우리 집 가훈이다.
섹무새가 되자.
피로 지장을 찍기 위해 커터칼을 꺼냈다. 오른손 엄지를 베었다. 칼이 안 닿았네. 아니면 엄지가 생명이 있어서 피했던가. 잠시만, 이럴 필요까지는 없구나.
아니다!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다시 예전처럼 호구로 살 수는 없다. 용기 내어 칼로 엄지를 그었다. 흐르는 피. 그 피를 A4 용지에 찍었다.
나는 이제 섹무새다.
*
상처는 사람을 성장하게 해준다던데, 이선미와 헤어지고 나는 성장했다.
"내가 변해야 한다."
이전 삶과 같은 마음이면, 나는 이번에도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내 성격을 변화시키고, 내 통장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우선 첫 번째는 내 마음이다.
나는 A4용지에 내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글자를 적었다.
나는 이제부터 섹무새다.
아침마다 거울 보고 세 번 외칠 거다. 예전 자기계발서에서 본 적이 있다. 거울을 보고 세 번 외치면 그러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이런 용도로 적은 건 아니겠지만 여튼 습관처럼 몸에 새기자.
두 번째 내 몸뚱아리다. 나는 살찐 돼지는 아니지만, 뱃살이 조금 있는 평범한 체격이다. 체격은 운동하면 되지만, 문제는 소중이다.
한번 재어보자.
바지를 벗고 30cm 플라스틱 자를 치골 위에 올렸다. 막대기가 풀로 섰을 때 기준으로 플라스틱 자가 2/3가 남는다.
9cm
선미가 그래서 만족 못한 건가? 분명히 인터넷에서는 5cm면 된다고 했는데.... 망할 사기꾼들.
A4 용지에 목표를 적었다. 목표는 15cm. 두께는 휴지심. 이거는 상점으로 사자.
마지막은 통장. 현재 포인트는 730포인트, 돈으로는 730만 원이다. 우선 10년 뒤 죽지 않으려면 100만 포인트인 100억을 모아야만 한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아는 건 있다. 바로 주식이다. 2년 뒤 2008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터지면 주가는 폭락한다. 그때까지 최대한 돈을 모아놓고 주식을 사면 된다. 또한 데박 회사를 몇 개 안다. 돈은 주식으로 벌자.
그러려면 우선 종잣돈을 모아야 한다.
섹스하자. 첫 여사친과 하면 1000만 원, 그다음부터는 10만 원, 특별하게 하면 100만 원이다.
물론 돈 때문에 섹스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정말 미친 듯이 하고 싶다. 그 환상적인 아나스타샤를 다시 느끼고 싶다. 그런데 누구랑 하지? 다음 주 월요일에 학교를 가봐야지 알겠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옷부터 사러 가자.
나는 변하는 거다.
***
나이키 매장.
옷 하면 나이키. 신발 하면 나이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나이키를 선택한 것도 우승을 위해서다. 리버풀은 아디다스니깐 우승 못 하지. 나는 나이키 매장 투어를 시작했다.
학교에 입고 다닐 저지, 편하게 입을 운동복, 바람막이, 모자, 신발까지 샀다.
대략 나온 돈은 50만 원. 이 정도면 나도 킹카다. 이제 모든 친구가 나를 우러러볼 거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오는데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모자를 쓰고 후드티를 입은 여자인데, 밑에는 내가 벗긴 적이 있는 익숙한 츄리닝이다.
바로 이선미다.
"야! 민현찬!"
선미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팔을 흔들었다. 옆에 다가가자 보드라운 손으로 내 팔을 '탁' 쳤다.
"아직 화난 거 아니지? 우리 그래도 친구야~. 오전부터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이야 쇼핑했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거야? 아니면 나 놀리는 거야?
"응. 옷이 없어서 옷 샀어."
"왜? 이제 다른 아이들 따먹으려고?"
얘는 성 개방 정도가 나루토에서 팔문 개방하고 마다라 두드려 패는 밤가이와 동급이다.
그나저나 배시시 웃는 이선미. 역시나 예쁘다. 그러자 마음이 아려온다.
아니다. 독해지자 민현찬!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샀어."
"한번 보자. 이 누나가 옷은 또 잘 고르잖아."
이선미는 종이 가방에서 옷을 하나씩 꺼냈다. 그런데? 하나씩 들어서 돌려 볼 때마다 표정이 썩는다. 모든 옷을 다 보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 체대야?"
"왜?"
"누가 이딴 옷을 학교 다닐 때 입어. 지금 몇 시지? 11시니깐, 12시까지 여기로 와. 돈 더 있어?"
"나? 응."
"아니다. 돈 더 있어도 츄리닝이랑 신발만 놔두고 다 가져와. 환불하러 가자."
아니 이것은? 연애 모드? 다시 나에게 마음 있는 건가?
"네가 너무 한심해서 그런다. 옷 골라 줄 테니까, 밥이나 쏴. 그럼 조금 이따 보자~"
웃으며 원룸으로 들어가는 이선미. 츄리닝에 윤곽 잡힌 엉덩이를 보자 소중이가 막대기가 된다. 화생방에 들어간 군인처럼 내 머릿속이 외친다.
섹스.섹스.섹스.
이래서 어설프게 해본 사람이 더 위험하구나. 그래도 따라 들어갈 수는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자.
*
12시. 이선미 집 앞에 도착했지만, 나오지 않는다.
12시 10분. 문자가 왔다.
- 5분만 기다려.
12시 20분. 이제야 나온다. 코리아 타임이 아직도 있구나.
"늦었지? 미안해. 가자."
검은 스키니 진에, 펑퍼짐한 블랙 맨투맨 티. 깔끔하면서도 세련돼있다. 내 기억으로는 저런 패션은 2010년 넘어야 유행할 건데, 이선미의 패션 감각은 시대를 뛰어넘었다. 역시 내 여자였던 사람. ...사랑했었다.
우리는 마치 연인처럼 쇼핑하러 갔다.
대학교 앞 보세거리. 백화점 가기에는 돈이 부족해서 여기로 왔다. 물론 포인트가 있기는 하지만, 소중이에 써야 해서 막 환전할 수는 없다.
처음 해보는 여자와의 쇼핑. 힘들다.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선미는 같은 청바지를 몇 번이나 나에게 입혔다. 밥 먹고 다섯 시간쯤 돌았나? 드디어 이선미가 원하는 옷이 세팅되었다.
깔끔한 청바지에 하얀 신발. 위에도 깔끔한 맨투맨. 거기에 몇 벌의 남방을 샀다.
"현찬아. 다음에 옷 사러 갈 때도 이렇게 사서 입어. 남자들이 착각하는 게, 여자들이 화려한 옷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깔끔한 게 최고야. 카고바지 사면 똘똘이 다 뜯어 버린다. 어디 한번 보자. 예쁘네!"
지금 이선미의 표정은 게임 캐릭터에 마음에 드는 옷을 입혔을 때와 같다. 만족해하는 표정이다. 내가 여자 캐릭터 얼굴 커스터마이징을 완료한 거와 같은 표정이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맥주도 한잔하고. 네가 쏴!"
"아까 밥 쐈잖아."
"쪼잔하게 굴지 마. 가자!"
젠장. 하지만 맥주? 혹시나 다시 합체를? 나는 거부하지 않고 선미와 맥주 마시러 갔다.
*
대학가 앞의 치킨집.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지방이어서 주말에는 사람이 없다. 여기도 마찬가지, 한산하다.
우리는 치킨에 맥주 한잔시켜놓고 먹었다.
사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게 정상적인가?
첫 만남에 원나잇.
나의 고백으로 시작된 연애.
23일 만에 헤어진 두 사람.
다른 여자한테 잘 보이라고 옛 남자친구 옷 사주러 오는 여자.
치킨집 천장에 할리우드라고 적힌 영어 간판이 보인다. 그래 여기는 할리우드구나.
"너 표정이 왜 그래?"
아차차. 잠시 넋 놓았다. 아니다, 이렇게 된 거 물어보자.
"왜 나한테 잘해줘?"
"응? 그게 무슨 말···. 아? 하하하."
한참을 웃는 이선미.
"그냥. 좋아서."
장난치나.
"좋아하면 다시 나랑 사귀면 되잖아."
"좋아는 하는데 사랑은 안 하거든."
무슨 고등어에 오메가3가 없는 이야기야?
"그러니깐 너는 친구로서 좋아. 아니 너 보면 솔직히 가슴도 두근거려."
가슴! 가슴! 가슴! 가슴 만지고 싶다.
"그런데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어. 생각해보면 우리 인연이 보통은 아니잖아. 첫 만남에 섹스하고 바로 사귀고, 헤어지고. 아! 작아서 헤어졌다는 말 취소할게. 그 말은 미안해. 그것보다는 그냥 친구로 남았으면 하는 게 내 본심이야."
솔직한 이선미의 마음. 착한 아이구나.
"넌 원래 성에 개방적이야?"
"저번에 했던 말? 응. 있으면 써야지!"
"풋!"
이선미는 자기 가슴을 양손으로 슬쩍슬쩍 올리면서 말했다.
미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있으면 써야지 라니. 친구에게 할 말은 아니잖아.
맥주를 내뱉자 이선미는 깔깔깔 웃는다.
"대신 선택은 내가 해. 배고프다고 똥을 먹지는 않잖아. 네가 똥이라는 건 아니야. 생물학적으로도 여자가 남자를 먹는 구조고."
내 막대기가 계곡으로 쑥쑥 들어갔던 게 떠오른다.
"너 나랑 했던 거 상상하고 있지?"
망할. 들켰구나. 아닌 척하자.
"아니야. 그러다가 너 이상한 소문 돌면 어떻게 하려고?"
"뭐? 걸레라고?"
"풋."
오승환인가? 말하는 거 하나하나가 돌직구다. 여기서 맥주 한 번만 더 뱉으면 삼진 아웃이다.
사실. 전생에 이선미의 자판기라는 별명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나도 안 좋게 봤었다.
"야! 솔직히 한번 사는 삶인데. 즐길 거 다 즐겨야지. 그런 별명 조금 붙으면 어때? 그렇다고 해도 나란 사람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으니깐 신경 안 써."
"미래에 네 남자친구가 들으면 어쩔 거야?"
"그런 거로 안 좋아할 사람이면 다른 거로도 헤어지게 돼 있어. 우리 현찬이 누나 걱정해 주는 거야?"
"누나는 무슨."
선미는 자존감이 에베레스트인 사람이구나. 역시 사람은 그냥 평가해서는 안 된다. 보고 듣고 넣고는 아니고 겪어야 한다.
이전 세계에서 내 머릿속에 이선미는 솔직히 자판기였다. 그런데 막상 같이 있으면서 대화해보니, 자신만의 소신으로 살아가는 아이다. 자존감도 높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다.
그래. 결심했다. 나도 친구로 남자.
"오늘 한 번 넣게 해줄까?"
"풋!"
미친년. 재밌는지 깔깔웃는다. 맥주 세 번 뱉었으니 나는 삼진 아웃이다.
"됐어!"
"왜~~ 진심인데~ 현찬아~"
"거짓말하지 마."
"하하하! 내 동생 많이 컸네. 이제 가자."
우리는 맥줏집을 나왔다.
*
이선미 집 앞. 혹시나 하는 마음이 머릿속에 가득 하다. 둘이서 같이 걸어가면서도 슬쩍슬쩍 가슴만 봤다.
맨투맨 티와 쇄골 사이로 있는 검은 틈. 그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고 싶다.
"그럼 이만 들어갈게."
"맥주 한잔 더 안 할래?"
"야! 민현찬! 너 내 얼굴 다시는 안 볼 거야?"
내 마음을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닌가 보다. 내 검은 속내를 다 아는 듯한 선미는 냉정히 거절한다. 어쩔 수 없지. 집에 가자.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서 오른손은 동영상을 스킵스킵 하면서, 왼손으로 소중이를 잡았다.
슥삭슥삭슥삭...
젠장! 만족이 안 돼! 나와라. 스마트폰!
아이템 상자가 보인다.
-합체 이용권.
젠장! 써야만 한다.
< 변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