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타락의 씨앗
복돌이 죽은 날 루시는 포션상점을 닫고 온종일 슬픔을 삭이며 쉬었다.
복돌의 죽음은 루시에게 7년 전 도적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7년 전 사건은 루시에게 가족의 죽음에 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남겼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정신적 충격을 수반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적 외상을 받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며 전쟁이 끝난 이후 군인들이 많이 겪는 병이다.
복돌의 죽음은 도화선이 되어 끊임없이 루시의 정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루시는 7년 전의 악습관이 다시 살아나서 계속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었다.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우울함이 치솟기도 했다.
친구들과 엘빈이 루시에게 카페에서 음료를 사주고 저녁도 사주면서 계속 달랬지만, 루시의 불안과 우울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루시는 기본적으로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평소라면 친구들과 엘빈과 함께 놀고 밥을 먹으면 어느 정도 기분이 나아져야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엘빈과 있다 보면 어떤 불쾌함이 느껴졌으며 동질감이 생기질 않았다.
무엇인가 자신과 적대적인 존재들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친구들이 공짜로 비싼 술을 사준다고 할 때도 루시는 거부하였다.
마을의 어른들이 루시에게 위로의 말을 해줄 때도 고마움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착한 루시는 주변 사람들이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애써 표정과 마음을 숨기면서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엘빈이 루시랑 함께 걸어갔다.
“루시. 오늘 저녁도 맛있었다. 그치.”
“으응….”
“오늘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으으응….”
“마음 풀어. 복돌이도 네가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거야.”
순간 루시의 마음속에 ‘네가 뭘 알아!’라는 분노가 솟아나서 얼굴이 찡그려졌다.
루시가 얼굴을 펴고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그렇겠지.”
루시는 엘빈과 있어도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루시도 자신이 왜 엘빈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몰랐다.
어쩌면 7년전 사건의 아픔이 아직 치유되지 않아서 오늘만 이런 걸지도 몰랐다.
루시는 엘빈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예의상이라도 계속 대답해주었다.
사실은 당장 혼자가 되고 싶었다.
루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엘빈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오늘 너희 집에서 같이 자줄까?”
루시의 칼같이 대답했다.
“아니. 오늘은 정말 혼자 있고 싶어.”
엘빈은 아쉬운 듯한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멀어졌다.
“알겠어. 네가 가장 심적으로 힘들겠지.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그림 갈게. 안녕~”
루시는 오늘따라 자신이 너무 심한 것 같다며 씻고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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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루시는 정말 행복한 꿈을 꾸었다.
자각몽 같은 꿈이었다.
루시는 꽃과 잔디가 피어있는 넓은 들판에 서 있었다.
루시에게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였다.
루시의 주변에는 강아지, 고양이, 토끼 등 귀여운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아름다운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루시가 뒤를 돌아보니 나무로 지어진 2층 주택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7년 전 자신이살았던 집이었다.
저택의 1층은 식당을 해서 문이 뻥 열려있었고 그 앞에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2층은 가족들이 사는 곳이다.
문 옆의 기둥에는 루시가 10살일 때 돌로 그려놓은 낙서가 그대로 있었다.
루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1층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카일~”
“무슨 일이니? 우리 귀여운 루시?”
“엄마?”
“응. 루시 잘 지냈어?”
“엄마! 엄마!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우리 루시 이리 오렴. 엄마가 안아줄게.”
루시의 어머니가팔을 활짝 벌리자 루시가 어머니의 품으로 펄쩍 뛰어들었다.
루시가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비볐다.
“엄마. 엄마. 다행이야. 아직 살아있었구나. 흑흑흑. 너무 좋아. 흑흑.”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루시를 쓰다듬기만 했다.
“루시. 잘 지냈냐?”
“아빠!”
주방에서 요리하던 아버지가 나와서 루시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185cm의 거한에 팔뚝이 루시의 얼굴만큼 굵었는데, 젊었을 때 도축 일을 하면서 몸집이 커졌다고 했다.
누군가가 2층에서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왔다.
“누나앗!”
남동생 카일이었다.
“카일!”
카일은 7년 전 17살이었을 때 그대로였다.
루시는 행복에 겨워서 말했다.
“너무 다행이야. 가족을 다시 만나서 너무 행복해.”
아버지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네가 좋아하는 양고기 스튜를 했다. 가족끼리 먹자꾸나.”
양고기 스튜는 루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토마토소스에 양고기, 버섯, 양파를 넣고 끓인 후 빵에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루시가 대답했다.
“네!”
저녁은 너무 맛있었다.
루시는 7년 전 일은 언급하지 않고 자신이 모험가를 하면서 일어난 일, 브래돈 마을에서의 일을 즐겁게 얘기했다.
루시는 엘빈에 대한 얘기도 했다.
루시가 엘빈의 외형을 자세히 소개할 때 가족들의 얼굴에 잠깐 불안과 분노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시는 말하는 것에 빠져서 자세히 확인하지는 않았다.
루시와 가족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루시가 가족들한테 물어봤다.
“엄마, 아빠, 카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었던 거야?”
아버지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루시. 우리가 사실을 말해도 너무 충격받지 말렴.”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의 손을 꽉 쥐자 루시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버지가 얘기했다.
“여기는 꿈이란다.”
“네?”
루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대화하면서 어느 순간 잊어버린 사실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때 7년 전 모두 죽었단다.”
루시는 눈물을 흘리며 되물었다.
“정말? 카일. 엄마. 진짜야?”
카일과 어머니가 슬프고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내 꿈에는 어떻게있는 거야? 왜 이렇게 진짜 같아?”
아버지가 얘기를 이어나갔다.
“믿기 어려울 거다. 우리는 모두 영혼 상태로 저승이라는 곳에 있었어. 영혼 상태에서는 어떤 생각도 하기 어려웠지. 그런데 위대한 신께서 너를 눈여겨보고 너의 꿈속에 우리가 나타날 수 있게 해주었단다.”
루시에게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뢰가 솟아났고 정말 믿고 싶었다.
“왜나야? 그리고 죽으면 바로 환생하는 거 아니었어?”
“위대한 신의 생각을 우리 같은 필멸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도 잘 몰라. 그리고 우리는위대한 신과 하나의 계약을 했단다. 지금은 말해줄 수없지만.”
루시는 이름도 모르는 그 신에게 갑자기 분노가 솟구쳤다.
“무슨 계약을 한 거야! 혹시 악마 같은 거야?”
그때 어머니가 성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신께 무슨 말이니! 위대한 신은 저승에서 우리가 곧 소멸할 상황에 너랑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단다. 이렇게 기회까지 주셨어. 위대한 신께서는 우리를 강제하지 않았고 우리가 동의한 거란다.”
남동생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누나. 우리 모두 누나를 너무 보고 싶어서 동의한 거야. 그리고 어차피 저승에 있으면 소멸할 거였어. 우리한테 나쁜 계약도 아니었어.”
루시는 두 사람의 기세에 못 이겨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근데 위대한 신이 누구야?”
아버지가자상하게 말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단다. 하지만 엘리아 여신은 절대 아니고 그 하위신도 아니란다.”
“다른 신이 있었어?”
“우리도 잘 몰라. 하지만 위대한 신께서는 그런 별 볼 일 없는 것들보다 더욱더 위에 있는 존재란다.”
루시는 깜짝 놀랐다.
엘리아 교를 믿고 있던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루시곧 위대한 신이 너와 접촉하실 거야. 너는 선택받은 거란다.”
“알겠어.”
남동생이 대화 주제를 바꾸자고 했다.
“누나. 그런 심각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즐거운 얘기 하자.”
어머니도 맞장구쳤다.
“그래 루시야.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너의 꿈에 나타날 수 있어. 그리고 위대한 신께서 우리한테 특별한 능력을 줘서 꿈의 환경도 바꿀 수 있고. 혹시 우리가 나타나면 싫어?”
루시는 머리를 도리도리 돌렸다.
“아니. 계속 나타나 줘.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서 너무 기뻐.”
남동생이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헤헤. 앞으로 계속 누나 볼 수 있겠네.”
루시는 가족과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루시는 동생인 카일을 끌고 다니며 들판의 동물들을 구경하고 쓰다듬었으며 산딸기가 보여서 뜯기도 했다.
밤이 되자 루시는 따뜻한 물로 씻고 7년 전 자신의 방이었던 곳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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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는 자신의 포션 상점 겸 집 2층의 침대에서 번쩍 눈을 떴다.
마음이 충만해지고 정말 행복한 잠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즐겁고 개운하게 잔 적이 있었을까?
꿈속에서의 일이 모두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제 있었던 힘들었던 일이 모두 날아가고 마음이 저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가족을 만나니 복돌의 빈자리가 모두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아. 또 꿈꿔서 가족 만나고 싶다.”
루시는 애써 아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1층의 포션 상점을 열기 위해서 내려갔다.
루시는 온종일 포션 상점에만 있었고 손님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친구나 엘빈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고 만나도 즐거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루시는 손님들을 봐도 친밀감이 생기지 않았기에 가짜 웃음을 보여주면서 물건을 팔았다.
여자에게 가면 쓰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가 끝나고 루시는 침대에 누웠다.
꿈에서는 가족들이 자신을 반겼고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루시는 가족에게 자주 갔던 음식점을 만들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가족은 자신들 이외의 영혼은 꿈으로 들어올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루시가 풀이 죽자 아버지가 비슷한 요리를 해줘서 루시의 기분을 풀었다.
루시가 꿈에서 침대에 누우면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3일이 흘렀다.
그동안 루시는 포션 상점 1층에만 계속 머물렀다.
루시가 가끔 식료품을 사러 가는 것 빼고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일절 없었다.
루시에게는 꿈이 현실보다 더 행복한 시간이었다.
4일째 되는 날에 루시가 포션 상점의 계산대 의자에 앉아있을 때였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 루시.”
“누구세요?”
루시는 주변을 돌아봤지만 상점 안은 자기 혼자뿐이었다.
“나는 위대한 신이란다.”
‘!’
루시는꿈속에서 가족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가족들은 모두 위대한 신을 찬양했고 고마워했다.
루시도 슬슬 위대한 신에 대한 감사가 생기기 시작한 참이었다.
“위대한 신님 안녕하세요. 가족을 만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위대한 신님을 뭐라 불러야 할까요?”
“그냥 신님이라고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루시는 지금까지 종교를가져본 적이 없다.
엘리아 여신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신이라는 존재의 목소리는 자애와 따뜻함이 넘쳤고 듣기만 해도 신뢰와 존경이 솟아나게 했다.
만약 전지전능한 존재를 만난다면 이런 느낌인가 생각이 들었다.
“신님.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물어보도록.”
“왜 저인가요?”
신님은 긴 침묵 끝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네가 어렸을 때부터 너를 보고 있었단다. 너에게는 뛰어난 재능이 있고 그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선택의 보상으로 가족과 만나는 기회를 주었지.”
“알겠습니다.”
브래돈 마을의 약사 겸 마법사가 무슨 도움인가 싶었지만, 신의 깊은 뜻을 필멸자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루시가 지위와 돈이 없어서 이 모양이지 마법 재능은 최상위라고 할 수 있었다.
마법학원 강사도이 정도 재능이면 제대로 교육받아서 궁정 마법사도 노려볼 수 있다고 했었다.
갑자기 번뜩 생각이 들었다.
“계속 저를 보고 계셨으면 왜 제 가족이 죽었을 때 나타나지 않으신 거예요! 왜 안 도와주셨어요!”
신님은 5분 정도 침묵하다가 대답하였다.
“나는 엘리아 여신과 친하지 않다. 적대관계에 더 가깝지. 나는 그동안 봉인되어서 의식만을 겨우 밖에 내보낼 수 있었고 엘리아 여신이 통치하는 이 대륙에서는 더욱더 어려웠다. 너의 가족이 죽었을때는 나도 마음이 아팠고 도와주고 싶었지. 하지만 이제 큰 힘을 회복하여 이렇게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엘리아 여신과 동격 또는 그 위의 격을 가진 존재다.”
루시는 엘리아 여신에 대한 비난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분노로 인해 대답이 끊겨 나왔다.
“큭. 네.”
루시는 머리를 비우고 물어보았다.
“이제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계약은 무엇인가요?”
“일단 기다려라. 때가 되면알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너와 이어져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네가 원하면 끊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고 싶니?”
루시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3일 동안 꿈속의 가족 이외에 친하게 만난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엘빈도 만나지 않았다.
엘빈도 직접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밀당하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었다.
루시는 입이 근질근질한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루시가 물었다.
“그냥 아무 대화나 나눠도 될까요?”
“그럼. 편하게 아무거나 얘기하렴.”
루시는 신님과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신님한테는 신기하게도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시원하게 얘기해줄 수 있었다.
신님과의 대화는 너무 재밌었고 신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모두 알고 계셨다.
루시는 낮에는 신님과 대화하면서 포션 상점을 운영하고 저녁에는 꿈에서 가족과 만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3일이 더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