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39)

"글쎄? 나름대로 표현은 해봤는데 멍청해서 그런지 잘 알아듣지를 못하더라구."

"하하하, 그럼 눈치가 없는거잖아. 눈치 없는 사람 좋아하면 힘들다던데 윤아 니가 딱 그렇겠구나."

"......"

윤아는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내가 윤아가 좋아한다는 

그 남자에 대해 안좋은 말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인가 싶어서 가슴이 덜컥했지만 

석연치가 않았기에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날 가만히 바라보던 윤아는 이내 곧 코웃음을 치면서 

의미 모르게 무언가 한마디를 개미소리 만큼이나 작게 중얼거렸다.

"....알긴 아는구만."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응? 뭐라구?"

"아무 것도 아냐."

대답을 회피하는 윤아의 태도가 심히 미심쩍었지만 추궁을 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라 나는 할 수 없이 말꼬리를

돌려야했다. 

"허허, 어쨌든간에 그 남자...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부러운걸."

"왜?"

"왜긴? 온 세상이 다 알아주는 까칠한 공주님의 짝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 영광스런 남자가 어찌 부럽지 

않을 수 있겠어? 킥킥."

짖궃은 장난기가 또 다시 발동하여 그렇게 과장을 섞어 놀려보았지만 내가 되려 무안할 정도로 윤아는 아무 반응

도 해오지 않았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윤아를 놀려보겠냐는 심술맞은 생각이 들어 조금 더 찔러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놀려먹는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윤아가 무서워서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진짜다. 정말로.

"아무튼 윤아야, 니가 정말 좋아한다면 계속해서 좋아한다고 표현을 해 봐. 솔직히 어떻게 들릴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 넌 이 남자 저 남자 아무렇게나 좋아할 수는 없는 성격인 것 같은데... 한번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면 포기할 생각말고 꾸준하게 노력해보라는 뜻이야. 아니면 타이밍을 좋게 잡아서 정말로 고백이라도 

해보던가?"

어찌되었건 간에 윤아가 다소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게 상담을 요청해 왔을테니 그렇다면 나는 그나마 

그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는 것이 도리였다. 비록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암만 생각해봐도 지금 내가 윤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 또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됐어."

"뭐...? 왜?"

"그 남자 벌써 애인이 생겨버렸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윤아의 그 말에 나는 일순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그, 그럼 벌써 임자가 있단 소리야?"

"그래. 사귄지 얼마 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불어오는 찬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윤아가 힘없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설마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할 말을 잃은 나는 그저 난감한 마음에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만 

살펴야 했다. 짝사랑 하는 남자가 이미 다른 여자랑 눈이 맞아버렸댄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 걸까?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그 순간 도로 저편에서 빈 택시 한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저걸 잡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금새 그럴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윤아가 즉각 손을 들어 그 택시를 잡아세웠기 때문에.

"......"

택시에 오른 윤아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달리는 택시 안에서 창문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길거리의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윤아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하나 고민을 하느라 말을 하지 못헀고 윤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차창만 멍하니 들여다 볼 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옆얼굴이 그렇게 

쓸쓸해 보였던 적은 분명 처음이었다.

차가 막히는 시간대도 아니었고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택시는 금방 빌라 입구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택시에서 막 내리려는 찰나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나는

얼굴 만면에 화색을 띌 수 밖에 없었다. 혹시나 했던 이름이 고스란히 찍혀있었으니까.

"여보세요? 누나?"

[응, 나야.]

유경 누나의 목소리를 확인한 나는 입가에 걸리는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돈을 내는둥 마는둥 하며 

택시비를 내고는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윤아가 눈을 가늘게뜨며 내 팔을 잡아 흔들더니 

목소리를 죽이고 입모양으로 '언니 전화야?' 하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순간 윤아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이어지는 유경 누나의 목소리에 나는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통화에 집중해야 했다.

[오늘 모의고사랬잖아. 혹시 내가 시험치는 중에 전화 한 건 아니지? 지금쯤 쉬는 시간일 것 같아서 

전화해 본 건데.]

과연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만약 내가 학교에 있었다면야 지금쯤 외국어 시험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어제 모의고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더니 아마도 쉬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서 전화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그저 기특하고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생각도 깊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리요.

"하하, 괜찮아요. 계산 잘 하셨네요."

[전화 받으니까 다행이네. 난 네가 시험치느라 꺼놓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게 사실은 지금 학교가 아니거든요. 시험 치다 중간에 조퇴해버려서....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조퇴라니?]

"하하, 그렇게 됐어요."

[무슨 일인데? 어디 아픈거야?]

비록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는 해도, 조퇴라는 말에 내 몸 상태부터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씨 또한 기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웃으며 사정을 설명하려는데, 그 순간 윤아가 내 핸드폰을 

홱 낚아채버렸다.

"어, 어라? 왜 그래?!"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 강탈 행위에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돌려달라는 의미로 윤아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는 내 핸드폰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언니, 나야."

그 모습에 나는 그만 얼이 빠져서 차마 제지할 생각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유경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윤아는 내 시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채 통화를 계속해나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윤아와 유경 누나 사이에 말들이 오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화를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윤아의 말을 들어봤을 때, 지금 나하고 같이 있다는 것과 그 사정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뻘쭘하게 아무 것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언제쯤 내 차례가 오려나 멀뚱하게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했다.

"응, 걱정할 거 없어.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잖아. 그냥 올 때 빈혈약이랑 철분제 좀 사다주면 고맙구...."

슬슬 내가 지루함을 느끼려는 찰나 윤아가 대화를 끝맺을 기미를 보였다.

"그래, 고마워 언니. 일 열심히 하구.... 응, 끊어."

뭐? 끊어?

"야, 끊긴 뭘 끊어! 나 바꿔줘야 할 거 아냐!"

난 화들짝 놀라 윤아에게 손을 급히 내밀었다. 내가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윤아는 정말로 통화를 끊어버릴

심산이었는지 가차없이 핸드폰을 덮어버리려다가 아슬아슬하게 손을 딱 멈추었다. 

"......"

윤아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순순히 핸드폰을 넘겨주지 않았지만 내가 손을 더 뻗어 얼른 돌려달라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내게 폰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구긴 인상을

풀지 않으며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누나, 저에요."

[그래, 성재야. 윤아한테 들었어. 윤아 데려다주느라 너까지 조퇴했다면서?]

"그게... 그렇게 됐어요. 하하."

[아무리 그래도 시험 치다가 나오면 어떡해.]

"아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중요한 시험도 아니잖아요. 치나 마나 하는건데 뭐."

[그게 아니라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내 동생 때문에 시험도 못 치고...]

"에이, 미안하긴요. 뭐 그런 것 가지고..."

마음 같아서는 '정 미안하시면 오늘 데이트 해주실래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옆에 서서

괜시리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윤아의 눈치가 보여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과연 천생연분은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내가 굳이 먼저 그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성재야, 너 그럼 오늘 뭐 할거야?]

"네? 글쎄요... 윤아 데려다주고 집에가서 공부 하던지 해야겠죠."

[그래? 그럼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미용실에 들렀다 가면 안 돼?]

"예? 왜 그러세요?"

[후훗, 왜 그러긴? 애인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데 그게 이상해?]

직설적인 유경 누나의 말에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입이 귀까지 쭈욱 걸리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을 했다.

"아... 그런 거였어요? 하하하, 알았어요. 그럼 이따가 들릴게요."

[정말?]

"당연하죠. 저도 누나 얼마나 보고 싶은데."

내 말에 유경 누나는 기쁜 듯한 웃음을 지었고 나 역시 그런 그녀가 무척 사랑스러워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유경 누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행복할 뿐이었다.

"조금 있다 봐요, 누나. 윤아 집에 데려다주고 갈게요."

유경 누나의 대답을 듣고 통화를 종료한 나는 하늘에 몸이 붕 뜨는 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끼며 실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는 너무도 차갑게 인상이 굳어버린 윤아가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미간을 찡그린채 나를 노려보는 그 분위기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마냥 귀여워만 보이는 

그 얼굴에도 불구하고 기세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였다. 

"왜, 왜 그래?"

"....."

윤아는 아무 말 없이 날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기만 하더니 이내 매몰차게 등을 홱 돌려버렸다.

비틀대면서도 기어이 먼저 걸어가버리는 윤아의 뒷모습을 나는 황급히 쫓아야만 했다.

계단을 올라가 거의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그녀의 집 현관문 앞에 다다를 때 까지 윤아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쪽에서 먼저 무슨 말을 해보고 싶었지만 냉랭히 걸어가버리는 윤아의 분위기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현관문 앞에 도착해 윤아가 손잡이를 돌리려고 멈추어 서자 나는 그제서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기, 윤아야."

문을 열려던 윤아의 손이 멈칫하더니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차갑게 대답했다.

"왜?"

"있잖아... 너 요즘에 기분이 계속 안좋아 보이는데, 혹시 아까 전에 말했던 그 남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요즘들어 툭하면 저기압이 되어버리는 윤아의 모습을 염려하여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버렸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분이 나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근래 윤아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을 때, 아마 그 원인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이 아마도 틀리지 않을 거라고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윤아가 이렇게 냉전 상태가 되어버린 원인도, 아마 자기는 연애 문제가 풀리지 않아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나와 유경 누나가 눈 앞에서 버젓이 연애를 해대고 있으니 심통이 나서 이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런 내 추측이 나름대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여, 딴에는 '내 눈치는 역시 빨라' 하면서 자찬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잘 아네."

냉기가 폴폴 날릴 정도로 매몰찬 윤아의 대답. 하지만 나는 역시 그랬던 거구나 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치만 윤아야, 너무 상심하지는 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세상에 남자는 많고, 또 혹시라도 그 남자애가 지금 하고 있는 연애가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여자 친구 있으면 뭐 어때? 계속해서 니가 관심을 보여주면 그 남자 

마음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구."

세상에 임자있는 사람 건드리는 것만큼 몹쓸 짓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농담삼아 그렇게 말을 

꺼냈다. 아마 윤아도 내가 지금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었다. 비록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윤아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의도에서 그녀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러고 싶거든? 근데 그럴 수가 없어."

하지만 윤아는 쏘아붙이듯이 내 말에 반박을 해왔다. 나는 기왕 시작한거, 최대한 윤아를 달래보자는 심산으로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임자있는 남자한테 대쉬해보라고 부추기는 내 꼴이 참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니 왜? 내가 그 남자 애인이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긴 몰라도 아마 너 정도면 전혀 밀릴게 없을 것 

같은데? 사랑은 원래 움직이는거야. 쟁취하는 거라구."

열과 성을 다한 내 위로에도 윤아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급기야 현관문의 손잡이를 

벌컥 돌려버리더니 문을 열어젖히며 내게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그 남자 애인이 우리 언닌데!"

"뭐....?"

"나더러 남자 하나 놓고 언니랑 싸움이라도 해보란 거야?! 내가 오빠 때문에 그래야겠냐구!

오빠 진짜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른 윤아는 열어젖힌 현관문 안으로 휙 들어가버리더니 찬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주저없이 문을 거칠게 쾅 닫아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얼떨결에 복도에 혼자 남겨진 나는 당황하여 방금 

윤아가 했던 말의 의미를 미처 생각해볼 틈도 없이 닫힌 현관문을 툭툭 두드렸다.

"야, 윤아야! 왜 그래?"

"......고마웠어. 잘 가."

순식간에 마치 쫓겨난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나는 연신 현관문에다 대고 윤아를 불렀지만

윤아는 한술 더 떠서 닫은 문을 아예 잠궈버리더니 끝끝내 열어주지 않았다. 힘없는 목소리로 현관문 안쪽에서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윤아의 목소리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린

내 머릿 속에서는 윤아가 남겼던 말들이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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