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가 없는 윤아의 억지에 나는 무어라 말을 꺼낼 생각조차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유경 누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딱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해대는 윤아의
속마음 자체가 의심스러워 말문이 막힌 것이다.
"......"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자 윤아 또한 아무 말도 더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어색하기 짝이없는 그
지독한 침묵 속에 또다시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약간 쌀쌀해진 완연한 한줄기 가을바람이 우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나무 벤치를 황량히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그 바람 소리, 그리고 공원 한가운데에 고요하게 흐르고 있는 분수대의 물줄기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공원을 거니는 연인들의 도란도란한 말소리.... 단지 그것 뿐이었다.
나와 윤아의 사이에는 참 오랜 시간동안 아무런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단 한마디도.
"아하하..."
무슨 말을 어떻게해서 이 침묵을 한번 깨뜨려볼까 속으로 무던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윤아였다. 하지만 어쩐지 허탈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그 웃음소리에 나는
이유도 모르면서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분위기 이상해졌네. 미안해, 오빠."
"......."
"못 들은 걸로 해, 그냥."
"......."
"나 오빠랑 언니 사귀어도 별로 상관없어. 사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오빠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해, 난."
"윤아야..."
"집에 가자. 나 빨리 쉬고싶어."
찝찝한 마음에 무어라 말을 더 붙여보려고 헀지만 윤아는 확실하게 말을 끝맺고 자리에서 일어남으로써
그 대화를 종결시켜버렸다. 비록 그 말투가 어제처럼 화가 났다거나 하는 기색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 귀에는, 그리고 내 머리에는, 그 말 속에 숨겨진 차가운 한기만큼은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그런 낯설기 짝이없는 기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벌떡 일어선 윤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어지러운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윤아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속은 윤아가 던진 말들을 수도 없이
되뇌이며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곰곰히 새겨보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와중에 별별 이상한
생각들이 머릿 속을 가득 메우고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윤아가... 혹시...'
실낱같은 희미한 추측 하나가 잠시동안 뇌리 속을 형광등처럼 밝히며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잠시였을 뿐, 나는 이내 곧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억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헛생각하는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애써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고, 언제나 버릇처럼 늘상 해대던 그런 망상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그렇게 치부해버리며 마음 속으로 부정을 해보았지만 한번 머릿 속에 떠오른 그 갑작스런 추측은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위태로운 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는 윤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이 꽉 메워진 것처럼 심란하고 무거운 기분이 엄습해왔다.
"뭐해, 오빠. 안 갈거야?"
"으, 으응... 갈게."
뒤를 힐끔 돌아보며 재촉하는 윤아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윤아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찝찝한 의구심의 심란한 느낌을 조금도 떨쳐버리지 못했다.
'답답해서 미치겠네...'
아마도 내가 그 때 조금만 더 성숙했더라면 나는 윤아의 말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윤아가 나보다 적어도 몇 배는 더 답답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나는 의외로 조금 덜떨어진 면이 있었는가보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먼 훗날....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가끔 지금의 이 순간을 돌이켜보며 내가 얼마나 멍청했었는지를 떠올리고는
웃음 짓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직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오빠. 오빠는 언니가 첫사랑이야?"
"응?"
뜬금없는 윤아의 질문에 나는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를 살펴보던 고개를 흘끗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윤아는 가만히 서서 내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글쎄.... 굳이 따지자면 솔직히 첫사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나만큼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은 없어. 정말이야."
"그래?"
윤아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빈 택시가 지나가나 살펴보면서 마치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거 알아? 언니는 오빠가 첫사랑이야."
"그, 그래... 그렇겠지."
난데없고 갑작스런 발언에 말문이 막혔지만 한편으론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유경 누나가 다른 남자를 사랑해 본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도 대강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윤아의 입에서 그것을 확인하고나니 새삼스럽게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헤헤, 역시 누나는 내가 첫사랑이었던 거야.'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 걸까....? 의아해진 나는 윤아의 눈치만 살피고 서있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언니한테 잘해주란 말야. 언니는 지금 첫사랑을 하고 있는 거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어? 으응... 그래, 당연하지."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속으로 윤아가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속으로는 언니를 챙길 줄 아는 나름대로 배려 깊은 아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빠."
"응?"
"그럼 오빠는 연애 경험이 많다는 소리야?"
아까부터 정말 어떤 의미를 담고 묻는 것인지 모를 질문을 많이 건네는 윤아.... 이건 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뭐... 많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있긴 해."
별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만났던 날라리 여자애들과의 관계도 경험은 경험이었다.
아무리 내가 지금에 와서는 그런 관계들을 별볼일 없었던 추억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고는 해도 어찌되었건
내 과거의 경험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차라리 유경 누나가 첫사랑이었더라면 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별 애정도 가지지 않고 그저 섹스만을 위해
아무렇게나 만나 대충 시간만 때운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그런 관계들 가운데에 내 첫경험도 끼어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뭔가 착잡하고 씁쓸했다. 그런 방탕한 과거만 보내지 않았더라도 나하고 유경 누나의 관계에
첫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래도, 아까 윤아에게 말했듯이 이만큼이나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그걸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그렇지, 참.... 혼자 헛생각하느라 까먹을 뻔 했잖아. 대체 그걸 왜 물어본 걸까?
"아, 그냥.... 그럼 오빠한테 연애상담이나 좀 받아볼까해서."
"뭐? 여, 연애 상담?"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란 까먹는 소리인가.... 연애상담이라니?
"무슨 말이야? 상담이라니?"
"아니 뭐 별건 아니고... 나도 요즘 연애 좀 하고 싶은데 마음같이 잘 안풀려서 말야."
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뜻밖이다 못해 경악스러운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뭐어!? 윤아야, 너 좋아하는 남자 있었던 거야?"
"왜? 나는 뭐 없을 줄 알았어?"
쇼크로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이 무지막지한 화제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바보처럼 눈만 깜빡대고 있으려니 윤아가 목 언저리를 긁적거리며 약간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난 연애같은거 해본 적이 없어서 아는게 없거든. 오빠가 아는거 많으면 얘기 좀 들어주면 좋겠는데...
그래 줄 거야?"
"그, 그럼 당연하지! 빨리 말해봐, 나 듣고 싶어 미치겠어."
비록 놀란 것은 놀란 것이지만 나는 이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를 놓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세상에 이런 솔깃한 얘기가 있나! 남의 연애 얘기 듣는 것 만큼 재미있는게 또 없다고들 하는데 게다가 그것도
다른 애도 아니고 시건방 공주님 송윤아 양의 연애사라니....
"니가 좋아한다는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야? 너하고 동갑이야? 아님 연상?"
"한 살 연상이야."
한 살 연상이라니.... 그러면 나하고 동갑이란 얘기잖아?
"그래? 그럼 나랑 동갑이네! 설마 우리 학교야?"
"응."
우리 학교! 그렇다면 우리 학교의 3 학년생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이야, 이거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
"누구야? 그게 누구야? 혹시 내가 아는 친구일지도 모르잖아."
너무 궁금해서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윤아같이 특이한 애가 연심을 품었다는 것일까?
그 이름 모를 3 학년 남학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녀석이 꼭 내가 아는 친구이기를 바랬다.
"오빠도 아는 사람이야."
"뭐...? 내가 아는 사람?"
나는 윤아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알고 윤아도 아는 그런 인물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는 없는 것 같은데....
"누군데?"
"그건 말 못해. 비밀이거든."
우씨... 얘가 지금 누구 약올리나. 한껏 궁금하게시리 부풀려놓고는.
뭐 하긴 직접 이름을 밝히는 것은 좀 부끄럽기도 하겠지만서도....
"좋아.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 묻고 싶은게 뭔데?"
"뭐 딱히 물어볼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 오빠는 나한테 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말야.
내가 좀 답답하거든."
"그럼 짝사랑이란 얘기야?"
"그래."
세상에나... 그것도 한술 더 떠서 짝사랑!?
갈수록 연속적으로 겹겹이 밀어닥치는 쇼크의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머릿 속이 이리저리 휘저어지고 있었다.
눈앞의 이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다 못해 아무런 하등의 연관성이 없을 것 처럼 보이는' 송윤아라는 소녀가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연애 문제를 안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도
짝사랑이랜다. 나는 이미 이 화제에 온 신경이 쏠려 다른 문제는 안중에도 없이 윤아의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리기만 하고 있었다. 물론 택시를 잡는 일 따위는 벌써 뇌리에서 매우 깔끔하게 잊혀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한가지 생각 때문에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래, 그럼 역시 그건 망상일 뿐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잖아. 하하.'
나는 아까 공원에서의 일을 떠올리고는 연신 쓰게 웃고 말았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지만, 비록 헛생각이었다
고는 하지만, 나는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윤아가 어쩌면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말이다.
근거도 없는 희미한 추측일 뿐이었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서도 그 실낱같은 의심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심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내 그런 우스운 추측이 헛된 상상이었을 뿐임이 분명해졌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하...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나는 어쩐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이 못내 창피하기도 하고 씁슬하기도 하여 그런 기분을 떨쳐보고자
내 쪽에서 먼저 윤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는 널 싫어한다는 거야?"
"글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확실히....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은걸."
"그래? 너하고 서로 잘 알긴 아는 사이야?"
"그럭저럭... 사실 서로 알게된 게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어."
"그럼 좋아하게 된 것도 얼마 전부터 였겠네?"
"그래."
"좋아한다고 표현은 해봤어? 직접 말은 못하더라도 표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 남자 쪽에서도
뭔가 반응이 올텐데."
윤아는 내 질문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마주 대하자 나는 이유없이 괜히 어딘가가 불편해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