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39)

난 그제서야 어제 윤아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내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 그랬구나... 어제 생리 어쩌고 하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야... 근데 저기 누워있는 애들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조심 좀 하고 말해."

"어쩌라고... 여자는 다 하는건데."

하긴 니 막나가는 성격을 누가 말리겠냐....

"그럼 그거... 때문에 아픈 거야?"

차마 생리통이라고 대놓고는 말 못하겠다.

"그래."

"그거 많이 아파?"

"궁금하면 오빠도 해보던지..."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윤아는 침대에서 애써 몸을 일으켰다.

한 눈에 척봐도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보이는데 왜 일어나는걸까?

"야, 왜 일어나? 아프면 좀 더 쉬지..."

"조퇴할래."

"....뭐?"

"집에 가서 잘래. 여기 불편해."

"....."

참 대단한 발상입니다요.... 정말 눈을 씻고 뜯어봐도 학생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윤아. 

뭐 나라고 남말할 처지가 아니긴 해도....

"아, 짜증나..."

윤아는 걷기가 조금 어지러운지 침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약간 힘들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보아하니 집까지 제대로 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평소 가지고 다니던 목검은 어디갔지? 그거라도 있으면 지팡이로 쓰면 될 텐데.

"오빠." 

"으, 응?"

한 서너걸음 정도 떼었을까, 윤아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날 홱하고 돌아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던 것은 아마 내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나 좀 업어봐."

하, 하하... 이거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점심시간이 어느새 끝나가고, 외국어영역 시험 시작 10 분전 예비종이 교내 곳곳에 퍼져나갔다.

축구공을 차던 후배들과 스탠드에 앉아있던 친구들까지 모두 교실로 하나둘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너 정말 괜찮겠어?"

"뭐가." 

교문 앞에 서있었던 나도 물론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뜻 교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눈 앞에서 당장이라도 픽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윤아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틀대면서 집까지 어떻게 걸어가겠다고 그래? 그러지말고 그냥 나 시험 끝날 때 까지 기다려.

오늘 모의고사라서 일찍 마치니까 끝나고 같이 가면 되잖아. 너 걷는거보니까 혼자 보내기 진짜 불안하다."

"됐거든. 신경 끄셔."

윤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갑자기 다시 차가워진 윤아의 태도에 나는 골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제 일에 대해서는 좀 화가 풀린 것 같았는데..... 다시 이렇게 차가워져 버리다니.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지만....

"윤아야... 화났어? 내가 안 업어줘서?"

"웃기지 마! 누가 그래? 나 화 안났어."

말은 그렇게 한다만 지금 윤아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단단히 열받은 상태였다. 그것도 매우 심하게 말이다.

만약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저 남자 여자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여자가 저리 화났나?' 

뭐 대충 이런 생각을 할 테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윤아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그 이유라는 것이 진실을 

알고보면 정말로 가당치도 않을만큼 사소한 것이었다.

"에이... 화난 것 같은데. 내가 안 업어줘서 화난거 아냐?"

"말 같잖은 소리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시지? 시험 시작할걸?" 

"그래. 들어가야지. 근데 니가 좀 걱정되서...."

"말은 잘해요. 걱정된다는 사람이 그 몇분 거리를 못 업어줘? 흥! 항상 말 뿐이면서... 걱정은 얼어죽을." 

"....."

거 봐. 너 내가 안 업어줘서 삐진 거 맞잖아....

어지럼증 때문인지 한걸음 한걸음을 무척 힘겹게 딛어가며 간신히 걸어가는 윤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무거운 한숨을 푹 쉬었다. 

"윤아야. 담임한테 조퇴한다고 말은 해야지..."

"아, 신경 끄라니까."

담임한테 한마디 말조차 남기지 않고 교실에서 가방만 챙겨 막무가내로 교문까지 나와버린 윤아. 

하지만 신경을 끄라고 말해도 도저히 신경을 끌 수가 없다. 저렇게 한걸음 옮기는 것도 비틀비틀 위태로운데

저 상태로 어떻게 집까지 간다는 말인가? 

'에휴... 저 성질을 누가 말려.'

나는 마지막으로 윤아에게 택시라도 타고 가라고 말해보았지만 그녀는 이제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은 어떤 말을 한다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연거푸 한숨만 푹푹 쉬면서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제 점심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슬슬 들어가봐야 하니까. 뭔 말을 해봤자 듣지도 않을테니.

- 풀썩.

"....?"

만약 그 불길한 소리만 없었더라면 나는 그대로 교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으로 못내 무거워진 마음 때문에 뒤를 흘끗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던 윤아가 결국에는 

멀리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힘없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있었다. 

"윤아야!"

순간 완전히 대경실색해버린 나는 얼른 잽싸게 뛰어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윤아야, 너 괜찮아? 다친 데 없어?"

"......"

"야,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걷는 거 보니까 아슬아슬하더니.... 너 정말 이래가지고 집까지 어떻게 갈래?"

"왜, 왜 이래... 호들갑 떨지마. 발 좀 헛 디딘 것 뿐이야."

내 앞에서 자신답지 않게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못내 당황스러운 듯 윤아는 내 시선을 피하며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나는 이것으로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애물단지 아가씨를 이렇게 혼자 

덜렁 보내버리는게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한 일인지를.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기다려. 1 분이면 되니까 절대 어디 가지말고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려. 알았어?"

"뭐...? 뭐하게..."

윤아가 의아한 눈으로 무슨 말이냐는 듯 날 올려다보았지만 나는 서둘러 그녀를 돌담 근처에 앉혀놓고는

지체없이 뛰는 걸음으로 교실까지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어휴, 그 기집애 참! 무지하게 신경 많이 쓰게 한다, 정말...'

교실로 달려들어간 나는 맨 먼저 벽걸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1분만 있으면 외국어영역 시험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친구 한 녀석이 그 꼴을 

궁금하게 여겼는지 즉시 물음을 던져왔다.

"야, 너 왜 그래?"

"나 조퇴하는거다. 나중에 담임 들어오면 그렇게 말해. 나 저번에 배때기에 구멍 나서 입원한거 있지? 

그거 상처 도져서 지금 급하게 조퇴하는거라고 말야. 담임한테 꼭 그렇게 말해, 알았지?"

"뭔 소리야... 멀쩡해보이는 놈이."

"그러니까 구라 좀 치란 말야, 임마. 하여튼 너만 믿는다. 나 갈게!"

"어, 어? 야, 임마! 조금 있으면 외국어 시험이야!" 

나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을 남기고는 잽싸게 가방을 들쳐매고 교실을 휙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날 부르는 친구 녀석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그래. 어차피 이번엔 오전부터 말아먹은 모의고사, 성적에도 안들어가는데 그까짓거 한번 땡치면 어떠랴. 

지금 외국어가 중요하냐? ....... 그래, 씨발. 곰곰히 생각해보니 좀 중요하긴 중요하군. 

어쨌든 그렇긴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윤아를 도저히 혼자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신경 안쓰려고 해도 엄청 쓰이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게다가 어차피 이 상황에서 시험 쳐봤자 심란해서 

잘 풀지도 못하리라.

"가자."

"....?"

다행히도 내가 돌담까지 돌아왔을 때 윤아는 혼자서 어디로 가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아니, 어쩌면 움직일 힘이 없었던 것인지도....

"가자구. 너 빨리 집에 가야지."

내가 가방까지 매고 나오자 윤아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래서인지 방금 전까지 냉기 풀풀 날리며 싸늘한 분위기를 줄곧 유지해왔던 그녀였지만 질문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지 내게 설명을 요구해왔다.

"오빠... 지금 뭐하는거야? 시험은?"

"아, 그냥 조퇴했어. 너 혼자 보내기가 좀 그래서."

"뭐...?"

아무리 별볼일 없는 모의고사라고는 하지만 시험 치다가 중간에 조퇴하는 사람은 또 처음봤는지 윤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이런 표정 지으니까 참 귀여운데... 왜 요즘엔 계속 화만 버럭버럭 내는 것인지. 

"오, 오빠 바보야? 세상에 시험 치다말고 조퇴하는 사람이 어딨어?"

"야, 바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하게 하냐. 난 그래도 너 걱정해서 나온건데."

"그래도 시험이잖아!"

"그래봤자 이거 모의고사잖아. 또 어차피 오늘은 아침부터 망쳐놔서 별로 더 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얼른 가자. 신경쓰지말고."

"....."

윤아는 내가 손을 내밀자 뭐라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부축까지 해서 일으켜 세워주니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앗."

하지만 일어서자마자 금새 다리에 힘이 탁 풀리는지 한걸음도 못떼고 다시 허물어졌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가 미리 잡아주었기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내심 좀 창피한지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미, 미안."

"아니. 근데 윤아야... 너 원래 생리를 이렇게 심하게 해? 애가 제대로 걷지도 못해."

"그게 아니라.... 빈혈이 심해서 그래. 나 원래 빈혈기 있는데 피 흘리면 더 심해져서 이러는 거야.

나는 뭐 어지럽고 싶어서 어지럽겠어?"

"그렇구나..."

윤아의 상태를 살펴보니 내가 같이 부축하면서 간다고 해봐야 계속 걷기는 힘들 것 같았다.

택시라도 태워야겠지만 그래도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까지는 나가야 할테니....

'에휴... 할 수 없지.'

나는 윤아의 앞에 등을 돌리고 쪼그려 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윤아가 뭐하냐는 듯이 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내가 가방까지 등에서 풀어내고 등을 자신에게 내밀자 반신반의하면서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뭐하는... 거야?"

"뭐하긴. 빨리 업혀."

"아, 아까는.... 안 업어준다며?" 

"생각 바꼈어. 또 바꾸기 전에 빨랑 업혀."

윤아는 내가 등을 내밀고 앉은 자세로 가만히 있자 업혀야할지 말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 참, 안 업어줘서 화낼 땐 언제고 업어준다고 등 내미니까 고민하는 건 또 뭐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텐데?"

"야, 그럼 아까 전에 업었다면 학교 안에 있는 애들이 안 쳐다봤을 것 같냐? 그럴 것 같아서 내가 못 해준건데.

그 때는 안 업어준다고 삐지더니 지금은 왜 빼고 그래?"

"삐지긴 누가 삐졌다 그래! 오빠 자꾸 착각할꺼야?"

"아 시끄럽고, 빨랑 업히래도."

난 윤아의 팔을 잡아 이끌어 억지로 내 등에 태웠다. 평소대로라면 그 무시무시한 송윤아를 내가 억지로 어떻게

해본다는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제대로 걸을 기력도 없는 상태였다. 과연 내 생각대로 평소의 

윤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힘없이 그녀는 내 등 위에 쓰러져내렸다. 

"자, 출발."

나는 윤아의 다리를 두 손으로 꼼꼼히 받쳐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얼떨결에 내 등에 업혀버린 

윤아는 물고기마냥 파닥파닥 몸부림을 치면서 어떻게든 내리려고 생떼를 써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내려 줘. 쪽팔린단 말야."

"나는 뭐 안 쪽팔린 줄 알아? 그리고 니가 언제 쪽팔린거 따지고 사는 애였냐? 아까는 그렇게 업어달래더니, 원."

"내려 줘! 내려 달라니까?!"

"천하의 송윤아 님께서 당황하시는거 보니 지금 힘이 없긴 없나보구만. 그럼 그냥 업혀있어, 괜히 무리하지말고."

"오빠 나 내리면 맞는다!?"

등 위에서 윤아가 워낙 법석을 떨어대는 통에 방향 잡기가 힘들 정도였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 저항에는 

전혀 실속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지금 기운이 없기로소니 윤아 성격에 진짜로 내리고 싶으면 내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겨서라도 내렸을 것이 분명 틀림없는데도 마냥 파닥거리기만 하면서 말만 늘어놓고 있는걸 보면.....

"허허. 그래, 그래. 몸 괜찮아지면 때리던 말던 맘대로 하고 지금은 좀 가만 있어라. 내 눈 찌를라."

능글맞은 웃음에 그녀는 약이 바짝 오르는지 악랄하게도 내 귓볼을 꼬집어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야! 야, 뭔 짓이야! 얌전히 못 있어?!"

"내가 지금 아프다고 아주 그냥 만만하지? 오빠 두고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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