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39)

되려 동생 쪽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져오자 잠시 당황한 유경이었지만,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성재랑 사귀기로 했어."

침착한 대답.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긍정이었다.

"....언제부터?"

이미 아까 그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사실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자신의 언니에게서 그 말을 확인하고나니,

정말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하고 기묘한 충격이 윤아의 뇌리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언제부터 두 사람 서로 좋아하게 된 거야? 도대체?"

너무나도 이상한 질문. 윤아는 이런 질문을 언니에게 던지고 있는 자신의 꼴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 이런 말을 꺼내고 있는 입이, 그리고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언니를 보고 있는 이 눈까지도,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지독한 괴리감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언니... 그 오빠 좋아해?"

유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윤아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굳어있는 동생의 표정은 어찌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으응... 좋아해. 좋아하니까... 사귀지."

다시 한번 그 지독한 침묵이 윤아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윤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왜?"

"응?"

"왜 갑자기 그렇게 된 거야? 내가 아는 언니는.... 남자라면 싫어하는 성격 아니었어?"

유경은 가만히 윤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상대방의 마음 속을 궤뚫어보는 듯한 언니의 그 고요한 

호수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위에서 몸을 돌려 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니의 시선에 거북함을 느끼다니.... 언제 이런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맞아.... 그랬지."

"....."

유경은 돌아앉은 윤아의 곁으로 다가가 침대 위에 자신도 조심스럽게 앉았다.

"예전에 나는 정말 그랬어... 남자라면 생각하기도 싫었잖아. 아마 너도 잘 알거야. 

난 그게 내 모습인 줄 알았어. 평생 동안 안 바뀔 줄만 알았던 내 모습 말이야...." 

"....."

"그런데... 윤아야, 그게 아니더라."

아무 말이 없는 윤아.... 유경은 의미 모를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난 말야.... 남자 싫어한게 아니었나봐. 정작 좋아하고 싶은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니까.... 

정말로 놓치기가 싫어지더라. 나도 결국은 여자였던거야. 사랑도 해보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은 

그런 보통 여자 말이야.... 후훗. 이상해?"

".... 그래서 23 년 만에 처음 만난 이상형이 그 오빠라 이거야? 진짜 그래?"

"그래. 그런가봐."

"언니도 남자 취향 되게 특이하다, 정말."

윤아는 다시 몸을 돌리고는 이번엔 유경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오빠랑 언니랑... 안 어울려."

전혀 예상치 못한 윤아의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유경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가 너무 아깝다는 얘기야."

윤아는 그 말을 끝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먼저 씻고 자야겠어. 생리 때문에 피곤해. 언니도 일찍 자."

"저기, 윤아야..."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아의 모습에 유경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녀가 무어라 말려볼 틈도 없이

윤아는 이미 방문 손잡이를 열어젖히고 있었다. 

"윤아야. 혹시 너..."

다급히 말을 꺼내는 유경. 그 말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윤아가 잠시 멈칫했다.

손잡이 위에 얹은 손을 더 움직이지 못하고 윤아는 가만히 서서 유경을 가만히 돌아본다.

"....혹시 뭐?" 

"아, 아냐... 아무 것도."

"....잘 자, 언니."

윤아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방 문을 열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동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도 유경은 끝내 아무런 말도 더 꺼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처음이리라.... 둘 사이에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다음 날의 모의고사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굳이 결과를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공부 한 자도 안한데다가 어제의 일로 체력까지 바닥으로 떨어진 마당에 당연히 시험을 잘 쳤을 리가 없었다.

언어영역과 수리영역을 화려하게 망쳐먹은 나는 점심시간이 찾아오자 밥 맛도 없는 식사를 억지로 꾸역꾸역

뱃 속에 밀어넣고는 교정 벤치로 나와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난 좆됐어. 언어를 발로 풀었다니까."

"야이 새꺄. 난 수리를 전부 3 번으로 찍었어."

"이제 좀 있음 외국언데... 아, 짜증난다. 진짜."

옆에서 친구들이 저마다 각각 자랑이라도 하듯 자신이 얼마나 시험을 망쳤는지에 대해 열띈 토론을

펼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대화에 참여할 의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에휴... 도대체 이래가지고 어쩌자는건지.

"조성재. 넌 잘 봤나보다? 아무 말도 없는 거 보니."

"참 나... 잘 보긴 개뿔이. 아마 오늘 친 게 내가 친 모의고사 중에 제일 못친 걸 거다."

모의고사를 치고 기운이 빠져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3학년들과는 달리 1, 2 학년 후배들은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축구공을 뻥뻥 차대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퍽이나 부러워지는건 나도 이젠

노땅이 다 됬다는 증거이려나?

"후... 저 때가 좋았지, 진짜."

"얌마, 좋긴 뭐가 좋냐? 저놈들도 1, 2 년만 지나면 우리 꼴 되는데."

"그렇긴해도 저 때로 돌아가면 공부 열심히해서 일류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냐?"

"미친... 꿈 깨, 임마. 넌 1년 더 줘봤자 놀기만 할 놈이야."

거 새끼, 말 한번 아름답게 하는구만.

"아, 이제 내년이면 고딩 끝이다. 대딩 되면 열라 좋겠지?"

"말 같잖은 소리 작작해. 좋긴 뭐가 좋냐?"

"왜 안좋아?"

"야, 대학을 가야 좋더라도 좋을거 아니냐. 그리고 고딩 졸업하면 못하는게 얼마나 많은 줄 알어?"

"뭐가 있는데?"

"너 임마, 가령 예를들어 스무살 넘어가는 순간부터 교복 입은 애들이랑 빠구리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여튼 이 새끼 머리 속엔 꼭 이런 거 밖에 없어요."

"뭐 이 자식아!? 인생에 여자 빼면 남는게 어딨어?"

곁에서 별 시덥지 않은 주제로 열을 올리는 친구들을 무시한채 나는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 왜 이렇게 답답하냐.'

문득 유경 누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늘 위에 누가 스케치라도 해놓은 듯 아른거리는 그 예쁜 얼굴.

아... 보고 싶다.

'젠장. 지금 무슨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안본지 몇시간 됬다고.'

하지만 어쩌랴. 사랑이란게 다 그런 건데.

'윤아는 화가 좀 풀렸으려나...'

어제 그 기세로 봐서는 오늘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지. 유경 누나가 어제 잘 말해본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좀 나아졌을지도...

'그래. 원래 성격은 밝은 애잖아. 누나 말대로...'

나도 모르게 2 학년 교정 쪽을 돌아보게 된다. 암만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래도 이젠 내 연인이 되는 사람의 동생인데.... 계속 나쁘게 지내봐야 좋을 거 하나 없잖아.

'한번... 가볼까?' 

만약 아직도 화가 안풀렸다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는 커녕 말도 없이 고개를 홱 돌려버릴테지만...

"윤아, 양호실 갔는데요?"

"....엉?"

하지만 2 학년 2반 교실에서 윤아의 모습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한 2학년 후배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윤아가 교실이 아닌 양호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호실...?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그 건강하다 못해 힘이 팔팔 넘치는 애가 몸이 아프다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고.... 무슨 일이지?

고개를 흘끗 들어 그 교실의 벽걸이 시계를 올려다보니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꽤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 녀석 참.... 은근히 신경 많이 쓰인단 말야.'

소식을 전해준 후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나는 곧장 2 반 교실을 떠났다.

등 뒤에서 그 후배가 계속해서 무어라고 수군수군 거리는 걸로 봐서는.....

아마 십중팔구는 내가 혹시나 윤아 남친이라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자기네들끼리 저마다 한마디씩 쑥덕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거 하여간, 여자들이란.... 

- 똑똑똑.

'아무도... 없나?'

양호실 문을 살짝 두드려보았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소리 없이 

돌려 열고는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섰다. 양호실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한 적막만이 깔려있을 뿐, 언제나 계시던 

양호선생님은 지금 점심식사라도 하러 갔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윤아가 있긴 있으려나?'

양호실 한쪽에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간이 침대가 너댓개 쯤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조심 다가가 침대의 커튼을 하나씩 살짝 걷어보기 시작했다.

'있구나.'

딱 네번째 침대의 커튼을 걷어보았을 때, 나는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의 소녀가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조용히 

잠들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윤아 말고도 양호실에는 두어명 정도가 더 누워있었는데, 모두 잠들어있어서 

그런지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고요한 숨소리 뿐이었다.

'얘가 어디 아픈가... 아님 그냥 수업 땡땡이 치고 싶어서 자러 온건가?'

확실히 윤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잠들어있는 윤아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간이 의자를 끌어다가 침대 옆에 놓고는 슬며시 걸터앉았다.

'자는 모습... 자기 언니랑 많이 닮았네.'

어제 유경 누나의 자는 얼굴을 감상한 데 이어, 이렇게 윤아가 자고 있는 모습까지 유심히 살펴보니 둘은 꼭 

누가 자매 아니랄까봐 그 모습이 퍽 많이 닮아있었다. 마치 아기처럼 잠들어 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언니나 동생이나 둘 다 잠버릇은 이쁘게 들었나보다. 

'생긴 건 참 귀여운데... 성격도 얼굴만큼 귀여우면 오죽 좋을까.'

볼 때 마다 늘상 하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으려니까 그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정말 성격만 괜찮으면 최고일텐데.... 

뭐 하긴... 나하고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뭘 봐?"

"으헉!"

한창 잡생각에 빠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홱 열리는 그녀의 눈꺼풀.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처럼 경악하여 순간 의자에서 앉아있던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아, 안자고 있었어?"

"....자고 있었는데 오빠가 깨웠잖아."

"내, 내가 언제..."

"그렇게 얼굴 들이대면 싫어도 깨게 되있어." 

무덤덤하게 쏘아붙이는 윤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상 모르게 곤히 자고있던 애가 얼굴 좀 붙였다고 바로 깨냐...?

혹시 처음부터 안자고 있었던 거 아냐? 하긴 그러고보니까 새근새근 하는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안 들렸던 것도 같은데....!

"근데 왜 왔어."

"아니... 그게..."

어쨌든 정말 무지하게 놀랬다. 생각 해보라, 자고 있는 줄 알고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얼굴이 눈을 번쩍 뜨고 날 올려다보는 그 상황을. 

윤아가 얼굴이 귀여워서 망정이지 그게 험악한 남자였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공포괴담이 될 수도 있다. 

"그... 니가 좀 걱정되서. 니 친구가 양호실 갔다고 하길래... 어디 다쳤나해서 와봤지."

"....."

잠시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내 눈만 멀뚱히 올려다보던 윤아였지만 곧 옅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치... 오빠가 언제 내 걱정했다고."

"야, 무슨 말을 해도.... 그런데 도대체 뭔 일이야? 어디 아파?"

"어제 말했잖아."

"뭘...?"

"오빠 바보야? 요즘 생리라니까."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듯이 가볍게 내뱉아버리는 윤아....

"아, 그, 그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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