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39)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어느새 윤아가 가차없이 통화를 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뚜, 뚜 하는 소리만이 귓가에 허무하게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었으니까.

"거 참... 나이도 젊은 아가씨가 성격 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한숨을 푹 쉰 나는 핸드폰을 다시 유경 누나의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이젠 정말로 누나를 깨워야 할 듯 했다. 난폭하긴 했지만 윤아의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있었다. 

'하긴, 당연히 걱정이 될 테지...'

불과 얼마 전에 그런 위험한 일까지 당할 뻔 했는데.... 밤 늦게까지 언니가 보이지 않으니까 

동생으로서 당연히 걱정할 만도 하리라. 확실히 내가 자매에게 참 못할 짓 많이 하긴 하는가보다.... 에휴.

비록 아직까지 곤히 잠들어있는 유경 누나의 단잠을 깨우는 것은 심히 마음이 아픈 일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살며시 흔들기 시작했다. 

"....."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윤아의 협박이 무서워서 그런건 절대로 아니다. 결코 아니다. 진짜. 진짜로....

"말해 봐. 지금 시간이 도대체 몇 시야?"

"......"

잠결에 비몽사몽하는 유경 누나를 간신히 깨워서 데리고 택시를 잡아타 빌라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우리 앞에 들이닥친 것은 윤아의 서슬퍼런 불호령이었다.

이제껏 내가 봐왔던 윤아의 모습들 가운데 단언코 지금처럼 표정이 심히 딱딱하게 굳어보였던 적은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그 깜찍하고 귀여운 얼굴을 굳혀봐야 무섭긴 얼마나 무섭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표정 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냉랭하기 짝이없는 분위기 자체가 집안 전체를 옭아매고 있었다.

"미, 미안해 윤아야."

어쨌든 그 기세가 몹시 사나웠기에 나와 유경 누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모아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쇼파에 앉은 채 우릴 가만히 노려보는 윤아의 표독스런 눈꼬리는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언니. 어제 분명히 다음부턴 안 늦겠다고 그랬잖아."

"으응... 정말 미안해. 이제 진짜로 안 늦을거야. 윤아야, 그러니까 화 풀어. 응?"

살살 타이르는 듯한 유경 누나의 말도 지금의 윤아를 달래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차마 언니에게 더이상 화를 내기는 좀 불편한지, 이번에는 나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윤아.

"됐어. 언니 때문에 화난 거 아냐."

유경 누나를 응시할 때 하고는 달리, 이번엔 아예 죽일 듯한 기세로 날 노려보는 윤아의 시선에 

나는 그저 시선을 이리저리 딴데로 애써 피할 뿐 이었다. 

'제, 제길. 무서워 죽겠네.'

눈빛만으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면 이미 나는 오체분시되어 저승으로 떠났으리라.

이거 원,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오빠."

"....왜?"

마치 고양이의 눈을 연상케하는 윤아의 눈동자. 평소에는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과 매우 잘 어울려보였던

그 서글서글하고 맑은 동그란 눈망울이 지금은 거의 무슨 살인광선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내 모습도 꼭 고양이 앞의 쥐와 같았다.

"대체 우리 언니랑 둘이서 맨날 뭐하고 쏘다니는 거야?"

"무, 무슨 뜻이야?"

"둘이 맨날 만나서 뭐하느라 이렇게 늦게 들어오냐고!"

그 날벼락같은 날카로운 추궁에 내가 굳어버린 것은 그녀의 기세가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이 너무나도 궁색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게 정답일 것이다. 

'뭐,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솔직하게 딱 까놓고 '야한 짓 하느라' 라고 대답할 바에야 차라리 빌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편을 택해야하는

내 입장에서 이 서슬퍼런 질문은 정말이지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경우였다.

난감한 마음에 유경 누나를 흘끗 돌아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심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영리하기 이를 데 없는 유경 누나의 머리로서도 이런 성질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누나와 잽싸게 난감한 눈빛을 주고 받은 나는 결국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처리해야함을 

느끼고는 애써 입을 열었다.

"뭐...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누나하고 얘기 좀 하다보니까

시간이 어느새 많이 지나서 말이지... 하, 하하. 다음부턴 절대로 이런 일 없을 거야. 내가 열시 넘으면

무조건 누나 집으로 보낼게. 그리고 오늘 일은 말이지...."

"언니."

하지만 열심히 이것저것 지어내서 변명을 늘어놓고있던 나의 말은 윤아가 중간에 가차없이 매몰차게 

끊어버리는 탓에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유경 누나는 갑자기 윤아가 다시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동생을 돌아보았다.

"으응?"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은 안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확인 좀 해야겠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뭐? 도대체 뭘 확인한단 말이지?

유경 누나는 물론이고 나 역시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윤아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윤아는 차마 그 말을 꺼내기가 꽤나 쉽지 않은지 잠시 입술을 달짝거렸지만 이내 표정을 다시 차갑게

굳히고는 숨죽여 긴장하고 있던 우리에게 청천벽력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단 한마디로 정곡을 완벽하게 찌르는 엄청나게 날카로운 추궁이었다.

"혹시 둘이 사귀고 있어?" 

결코 가실 것 같지 않았던 여름철의 무더웠던 살인 더위도 어느새 한결 잠잠해진 듯,

빌라 입구를 걸어나오니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피부를 통해 생생히 느껴져왔다. 

"날씨가 좀 추운데.... 이만 들어가세요. 저 갈게요."

"응. 가는거 보고 들어갈게."

빌라 입구까지 날 배웅하러 나와준 유경 누나 역시 차가운 밤바람에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간편하게 입고 나오느라 꽤나 얇은 옷차림 탓에 더욱 추워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덕분에 살짝 옷 위로 드러나는 누나의 타이트한 몸매로 눈이 즐거워지는 것은....

내가 변태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남자이기 때문인가?

"택시타고 가. 많이 늦었는데."

"괜찮아요... 누나도 들어가세요. 많이 피곤하시잖아요." 

아까 원룸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있었던 유경 누나의 모습을 슬쩍 놀려버리는 듯한 그 말에 

누나는 눈꼬리를 가늘게 뜨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하하...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여기저기로 돌려 근처에 보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심통이 난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 위에 내 얼굴을 주저없이 마주 덮었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럽고 기습적인 입맞춤에 누나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그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를 굴려 주위에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느라 몹시 당황했지만....

그러면서도 끝끝내 날 밀쳐내지는 않는 그 귀여운 모습이라니. 으흐흐.

이번에는 다른 때 하던 것처럼 혀를 얽어가는 그런 깊은 딥키스는 장소가 장소인지라 불가능했지만,

살짝 입술만 데었다 떨어져나가는 이런 짧은 키스도 나쁠 것은 없었다. 

"놀랬잖아..."

"흐흐, 놀래라고 한 거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누나는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건 내 착각일까? 

뭐 사실 유경 누나는.... 안 그럴 것 같아도 알고보면 은근히 키스를 무척 좋아하니까. 

'키스...라...'

키스라고 하면 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방금 했던 것처럼 짧은 입맞춤을 잠깐 나누어보았던 적이 있는

한 소녀의 얼굴이.... 하지만 정말이지 얄궂게도, 그 얼굴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유경 누나의 동생의 것이었다.

"그런데... 누나."

"응?"

키스 덕분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꽤 좋아진 듯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짓고 있던 유경 누나가 날 돌아보았다.

나는 이대로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는 마당에 이런 화제를 꼭 꺼내야하나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두는게 좋을 것 같아 어렵게 입을 떼었다.

"윤아... 아무래도 많이 화난 것 같죠?"

"....."

유경 누나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화내는 건지... 전 모르겠네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요?" 

"괜찮을 거야. 윤아는 그렇게 오래 화내지는 않거든. 밝고 착한 애니까...."

"글쎄요...."

내가 알기로 요즘들어 윤아가 나에게 화가 나 있는 듯한 상태가 벌써 꽤 된 듯 싶은데....

"내가 들어가서 잘 말해볼게. 걱정말고 얼른 가. 내일 학교 가야 되잖아?"

하긴 내가 고민해봐야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알았어요... 누나도 들어가세요. 갈게요."

"응. 조심해서 가... 잘 자구."

빌라 건물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입구 쪽을 한번 돌아보니 유경 누나는 그 때 까지도 가만히 서서 

내가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마침 도로 저편에서 달려오는 

택시를 잡아세웠다. 뒷좌석에 올라 몸을 기대고는 창문 너머로 빠르게 흘러 지나가기 시작하는 길거리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금새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송윤아... 대체 왜 그러는거지?'

"그래. 우리 사귀고 있어."

윤아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유경 누나가 아닌 내 입에서 나오게 되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유경 누나를 대신해서 내가 직접 대답을 한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경 누나의 동생에게 그 사실을 계속 비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굳이 그 사실을 애써 숨기기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유경 누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누나도 날 사랑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우리가 사귄다는데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는 것 아닌가. 공개적으로 밝히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어도.... 그렇기 때문에 유경 누나의 동생에게 굳이 비밀로 감추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적어도 나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그 솔직한 대답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심각한 충격을 받은 듯한 윤아는 잠시 아무런 말도, 미동도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침묵의 시간이 한참동안이나 영원처럼 계속되고나서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 한마디 뿐. 

"....사귀지 마."

그 차디 찬 한마디를 매몰차게 내뱉은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더 꺼내보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방 안으로 난폭하게 걸어들어가더니.... 마치 문을 박살내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냉랭한 한기가 싸늘하게 깔린 거실에 둘만 남게 된 나와 유경 누나는 영문을 몰라 그저 서로를 

돌아보기만 할 뿐이었고. 

생리통은 갈수록 서서히 심해지고 있었다. 윤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통증이 느껴지는 배와 허리 부근을

감싸쥐었다. 자궁이 수축하는 주기가 점점 심해지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비명을 지르듯이 

극심한 통증을 호소해왔다.

'이게 무슨 꼴이야... 진짜.'

그런 와중에 그렇게 심하게 신경질을 부렸으니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까 전에도 결코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있는대로 그렇게 성질을 부리고나자 통증은 물론이고

불쾌한 기분과 예민한 신경까지 더욱 악화되었다. 이 꼴이 될걸 알면서도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인지....

'뭐야...나 왜 이래. 내가 지금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이렇게나 화가 끓어오르는데도 그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이 화를 내는 것임에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니...

이래서 제일 알기 힘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 이제 어차피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녀는 제대로 알고 싶을 뿐이다. 자신이 지금 진정으로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를. 

'나... 지금 언니가 남자랑 사귄다는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정말로?'

싫다. 이런 복잡한 생각은.

복잡한 생각을 할 만한 문제는 처음부터 만들지를 않고, 만약 생긴다면 고민하기보다는 직접 부딪혀서

행동으로 해결하는 성격의 윤아로서는 이런 부류의 고민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마치 아무리 고민을 해도 정답을 찾아낼 수가 없는 어려운 수학 문제처럼....

- 똑똑똑.

"윤아야. 들어갈게."

점점 생리통이 번지기 시작하는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윤아는 유경의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오는 자신의 언니. 그를 배웅해주러 나가는 것 같더니 방금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저기... 윤아야. 아직도 화 안풀렸어?" 

"....."

"언니가 정말 잘못했어. 내일부턴 진짜 진짜 안늦을거야. 응? 이제 화 풀면 안될까?"

윤아가 걸음마를 떼던 시절부터 그녀를 돌보아온 유경은 동생을 달래는 일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둘 사이에는 문제 자체가 생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럴 일도 별로 없었지마는 

어쩌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번씩 윤아가 삐지는 일이 있더라도 타이르듯이 좋게 달래면 금새 화를 풀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윤아의 굳은 표정이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언니 때문에 화난거 아니라니까."

"그러면... 뭐 때문이야?"

잠시 표정만 굳히고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윤아. 유경은 그런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차분한 시선을 받다 못한 윤아는 마침내 입을 떼었다.

"언니. 정말 그 오빠랑 사겨?"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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