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미안... 괜히 불러서. 난 다시 갈테니까... 모, 몸조리 잘하구."
"....."
"그, 그럼 난 가볼게. 안녕."
그렇게 대충 어설픈 인사를 하고서 도망치듯 자리를 휙 뜨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참 한심했지만...
솔직히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무엇을 더 해줄 것이 있겠는가.
"....멍청이."
달음박질하듯 뛰는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려는 내 등 뒤로, 윤아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언뜻 희미하게 들린 것 같았다. 그 미약한 느낌에 문득 뒤를 살짝 돌아보았지만......
이미 윤아는 등을 돌리고는 다시 복도 저편으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의 그 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운 빠진 걸음..... 아마 그것도 생리 때문이겠지?
어쨌든...... 그 모습에 나는 방금 전의 그 목소리가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되게 놀랬다... 생리라니. 윤아도 그런거 하는구나.'
하긴 여자인 이상 안하는게 더 이상하지만... 아니, 안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당돌하고 맹랑한 성격이라도 역시 여자는 여자라는 거구나.
'뭐... 솔직히 그 성격만 빼고 보면 특이할 것 없는 여자애잖아. 얼굴도 예쁘고.'
새삼 이런 기분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어쨌든 천하의 그 송윤아 역시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한 명의 소녀라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좀 묘했다.
근데, 대뜸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해버리다니.... 무지 놀랬다, 진짜.
'그런데... 그거 상상하는 나는 또 뭐하는 놈이냐? 젠장.'
성격이야 좀 그렇다쳐도, 어쨌든 그 귀엽게 생긴 아이가 생리라니....
인형을 보는 듯한 그 뽀얗고 동글동글한 귀여운 얼굴과 그런 적나라한 단어를 서로 결부시키기가
참.... 낯뜨겁고 애매하다.
이건 정말 순전히 내 마음 속으로만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어쩐지 조금 흥분된다.
에잇 제길, 내가 지금 무슨 민망한 생각 하고 있는건지!
'정신차려라, 조성재. 유경 누나 동생 가지고 무슨 삐리리한 상상이야. 공부나 하자, 공부나.'
그래, 공부하자! 유경 누나하고 어울린단 소리 들으려면 적어도 공부 하나는 열심히 해야하지 않겠냐!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는 다시 샤프를 집어들었다.
- 딩, 동, 댕, 동 ♬
하지만, 세상 만사가 참 마음대로 돌아가주지 않는 것이... 기껏 마음을 굳게 먹고 책상에 앉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어느새 저녁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만 샤프를 책상 위에 휙 내던져버렸다. 에라이, 젠장할!
오늘도 병원에 들러야했던 나는 어김없이 조퇴증을 끊어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배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다 아물어있었다. 이제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어 보일만큼.
솔직히 매우 민망한 말이긴 하지만, 어제 유경 누나하고 할 때에도.... 그녀를 배에 태우기까지 했는데
별로 아프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으흐흐흐흐!
'아... 보고 싶다.'
불과 어제 저녁에 그렇게 찐한 애정 행각을 벌이기까지 했지만, 하루가 채 안된 그 시간조차도 내게는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보고 또 봐도 이렇게 계속 보고 싶은데, 아침에 목소리나 잠깐 들은 것으로 만족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무슨 쓸 데 없는 고민이람.'
그렇다면 보러가면 될 일이지 나도 참,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푸하하하하.
혹시 유경 누나가 일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어제처럼 지금쯤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것이고 오늘은 머리를 자를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별 상관없겠지 싶었다.
'내가 가면 누나도 좋아할까...?'
누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대체 뭘 믿고 그런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심 그렇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으니까.
'그래, 누나도 좋아할거야.'
어쩌면 곧 퇴근 시간이니까 둘이서 잠깐 데이트라도 또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흐흐흐~
아, 너무너무 기대된다. 역시 이런게 사랑의 행복이라는 거구나.
"어서 오세요... 앗!"
언제나처럼 유리문을 열고 미용실 안으로 들어서는 내게, 어제도 카운터를 맡고있었던
그 여직원이 오늘도 카운터에 앉아있다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짤막하게 큰 소리를 낸다.
"안녕... 하세요."
어색하게 인사하는 내 얼굴을 살펴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그 여직원...
이름이 미선 씨라고 했었지... 아마도.
'근데... 왜 사람 얼굴을 보고 다짜고짜 놀래?'
무슨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마냥 눈을 크게 뜨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내 쪽이 더 말 꺼내기가 곤란해진다.
유경 누나 불러달라고 말해야하는데... 이건 평소보다 더 말하기가 어렵구만.
"저기... 왜 그렇게 보세요?"
살짝 민망해진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여직원은 한동안 계속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잠시 그런 침묵 상태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 여직원이 입을 열고는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쳤다.
"유경 씨 애인이다!"
"...."
....뭐? 이 여자가 방금 뭐라고 한거지?
"유경 씨! 빨리 좀 나와 봐! 남자친구 왔어!"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가며 동네방네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치는 그 여직원...
나는 순간 아무 반응도 못하고 그저 얼이 빠져서 그 자리에 쩍 굳어버렸다.
"유경 씨, 진짜 남자친구야? 애인이야? 응?"
어수선하게 온갖 수선을 떨며 유경 누나에게 다그치듯 대답을 재촉하는 다른 여직원들....
그냥 좀 대충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기필코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다들 끈질기게 물어온다.
아마도 유경 누나처럼 완벽한 미모를 가진 여인의 남자친구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본인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은가보다....
'으, 난감하다...'
힐끗 유경 누나를 돌아보니 그녀는 애매하게 옅은 웃음만 짓고 있을 뿐...
나는 이제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녀가 무슨 기발한 센스라도 발휘해서 이 당황스런 상황을
지혜롭게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미용실 내의 거의 모든 직원들과, 심지어는 몇몇 손님들까지도 이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대답만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유경 누나가 무슨 대답을 할까.....
'누나, 제발 어떻게 좀 해봐요...'
내가 생각해도 뭐 별다른 수가 있겠냐만은, 나는 이 순간 그녀의 기발한 재치를 전적으로 믿었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서 이 난감한 상황을 아무 일 없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지만.... 행복하게도, 그녀는 이런 내 믿음을 정말로 멋지게 배신해버렸다.
"응! 남자친구야."
마치 봄 날의 따스한 한줄기 햇살처럼 해맑게 방긋 웃으며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물어보았던 여직원도, 미용실 내의 모든 직원들도, 그리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손님들까지도.... 그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에 모조리 전부 침묵해버렸다.
"....."
자기네들이 물어볼 땐 언제고, 표정이 돌처럼 쩍 굳어서 순식간에 내게 모든 시선을 화살처럼 내리꽂는 그들.
아아, 그 경악의 시선들이라니....
"표정들이 되게 재밌다. 그치?"
"하, 하하, 하하하..."
어설프게 웃으며 유경 누나와 나란히 길을 걷는 나.
미용실 문을 그녀와 함께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주위에서 자기네들끼리 재잘거리고 소란피우며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 여직원들의 반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꺅꺅 소리를 지르질 않나 날 이리저리 뜯어보며 자기들끼리
마치 사람 해부하는 것처럼 분석을 해대질 않나... 아무튼 여자들이란 참...!
"좀 무서운 누나들이네요... 남자친구 두 명 나오면 아주 뒤집어지겠던데."
"후훗. 원래 그런 얘기들 무지 좋아하거든. 거의 여자들만 모여있다보니까."
하긴 그래서 여자 셋만 모여도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나온건가...
"그런데... 그렇게 얘기해도 괜찮아요?"
"응? 뭐가?"
"저 같은 남자더러 애인이라고 소개하셔도..."
누나가 난처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한 말이기도 했지만, 내심으로는 이것 또한 그녀에게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남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 한심한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말일지도 몰랐다.
자신 없이 우물쭈물하는 당당하지 못한 태도... 그녀 앞에 선다면 설령 내가 아닌 다른 남자라도 분명히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다.
"뭐 어때? 애인 맞는데."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그저 한줄기 미소를 지었다. 나를 첫눈에 반하게 했던 그 따스하고 포근한 웃음을.
'애인...'
애인... 애인... 애인이라고!
아아, 이 들어도 들어도 신선하고 감미로운 어감이라니....
'내가 유경 누나하고... 애인...?'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현실을 마음 속으로 그렇게 한번 되뇌어본다.
내, 내가 정말로 유경 누나의 남자친구란 말이야? 진짜?
물론 어제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왜? 내가 애인인 거 싫어?"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그녀가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그렇게 물어온다.
하지만... 싫을 턱이 있을까. 너무 좋아서 믿기지가 않을 뿐이지.
"아, 아니요!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내 말에 다시 환하게 웃음 짓는 누나.
또다시 주체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이 가슴 속을 가득 메워왔다.
유경 누나를 볼 때면 난 항상 어김없이 이렇게 행복해진다. 정말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자야....
'그래, 믿자. 난 유경 누나의 애인이야!'
아직 믿기 힘들지만, 실감나지 않지만, 일단은 받아들이자. 이 행복을.
'그럼... 유경 누나는 내 애인이란 거야?'
길을 걷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주위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내 애인이라고....
'어흑, 진짜 너무 행복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19 년 인생 살면서 행복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몰랐던 나였지만 지금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행복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끝없이 샘솟아오르는 이 벅찬 황홀감.... 그래, 행복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길가에 피어있는 풀 한포기, 굴러다니는 돌맹이 하나, 먹구름 한 조각까지도 더없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 순수한 즐거움. 신기하게도 이 세상 모든 것이 정말로 아름다워보였다. 이것이 행복. 이것이 사랑.
'아~ 행복하다.'
포근하게 웃음 짓는 나의 천사... 아니, 나의 연인과 함께 나는 그 아름다운 거리를
그렇게 나란히 거닐고 있었다.
이놈의 변덕스런 날씨는 참 줏대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젠 겨우 좀 맑게 개이는가 싶더니, 조각조각 남아있던 먹구름들이 금새 또다시 빗방울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 저번에도 유경 누나하고 데이트할 때 중간에 비가 와서 산통 다 깨놓더니만....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 때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엔 우리 둘 다 우산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누나. 우산 안 펴세요?"
빗줄기가 그다지 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맞아서 좋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누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손에 쥔 우산을 펴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가 펴들고 있는 우산 속으로 쏙 들어와버린다.
"이게 더 좋아."
순식간에 한 우산 아래에서 몸이 서로 꼭 달라붙어버린 누나와 나...
그녀의 이 대담한 대쉬에 난 그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 이게 꼭 해보고 싶었어."
"...네? 뭘요?"
"좋아하는 남자 생기면 같이 우산 쓰고 걷는거."
어딘가 소녀적인 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것 같은 그 말...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남자라는 것이겠지...?
'정말 꿈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