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39)

당연히 유경은 원체 남자에겐 관심이 없었다. 사실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과거에는 그런 불행한 일까지 있었는데다, 요 몇년 간은 그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나와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일자리를 구해 달라진 삶에 적응하느라 숨 쉴 틈도 없이 바빴기 때문에 연애 같은 곳에는 도저히 

눈 돌릴 겨를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도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 한번을 

못해보지 않았던가... 

언젠가는 언니에게 좋은 남자가 나타나서 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속으로 늘 바래왔던 윤아였지만.... 

모순적이게도, 사실 한편으로는 언니라면 그 어떤 남자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할 것이라는 짐작도 내심

항상 해왔었다. 설령 그 미모는 둘째치더라도, 누구보다도 더 아픈 과거를 간직한 언니가 한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결코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 그랬는데...'

그 남자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한 기간 동안, 언니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병실을 찾았었다. 그 때는 그저 미안함과 감사함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매일같이 병실에서 만나 서로에게 

웃음 지으며 친근한 모습을 보여줄 때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 

하지만 그런 애매한 시간이....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져도 이상하지는 않을 

그런 시간이었으리라.

'언니가... 남자를 사랑한다?'

믿기가 힘들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언니가....

여인이 사랑에 빠진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동생인 윤아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신의 언니이기 때문이 아니다. 유경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쉽게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닐까.

아마도 유경의 인생에 있어서 윤아가 알기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단 한명도...

생전 처음으로 동생이 아닌 타인의 손에 의해 구원받아, 그런 끔찍한 절망의 늪 속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쉽게 자신의 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버린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머릿 속이 복잡헀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생각은 도저히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남자, 분명히 그럭저럭 좋은 사람이긴 했다. 약간 어딘가 칠칠맞고 어리버리해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비록 언니보다 네 살이나 연하라는 점이나, 곧 졸업을 하겠지만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는 점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어쨌든 만약에 언니가 정말로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 거라면, 그것은 축하를 해주면 해줄 일이지 자신이 이렇듯

머리가 복잡해질 이유는 없었다. 

그래, 분명히 그런데.... 

'그런데도... 이 기분은 뭐지?'

심란한 마음... 이것은 단순히 언니의 감정 여부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이상한 기분은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이씨! 아침부터 왜 이런담!" 

괜스레 이유도 모르게 짜증이 난 윤아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힘껏 걷어차버렸다. 

또르르 굴러가버리는 돌맹이... 

그리고, 그 순간 윤아의 아랫배와 허리 부근에서 욱신한 통증이 한차례 뜨끔했다. 

"윽..."

윤아는 인상을 살며시 찡그리며 배를 움켜잡았다. 마치 근육이 수축된 듯한 이 통증.

어저께부터 골반 주위가 불편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아... 짜증나."

생리통이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다. 월경 주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라는 것을 윤아는 느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남자 이상으로 당당하고 씩씩한 송윤아라고 해도, 그녀 역시도 일단은 여성의 몸이었다.

근 한 달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여성의 상징, 마술이라고도 불리는 이 필연적인 통증을 

그녀라고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어김없이 감정이 예민해지고 기분이 불쾌해진다. 그래도 아직까진 그다지 별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윤아는 우산을 꼭 쥐고는 빗줄기가 퍼붓는 길거리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 나답지 않아... 그래, 이건 그냥 생리 때문이야.'

이 심란함과 불쾌함이 섞인 뒤숭숭한 마음은 전부 다 순전히 월경 전의 예민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리가 끝나면 이 이상한 기분도 모조리 싹 사라질 것이라고, 그렇게 윤아는 스스로 타이르듯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 와중에 문득, 어저께 그가 자신에게 농담삼아 놀려댔던 그 말이 머릿 속에 갑자기 떠오른다... 

'흐흐흐. 음, 내 생각엔 말이야, 넌 지금 날 너무너무 좋아해서 나랑 데이트한 너네 언니를 마구 질투하고 

있는거 같애.'

자기 딴에는 그저 장난이랍시고 시답잖게 해본 말이었겠지만, 그걸 잘 알고있으면서도 어쩐지 그 말이 쉽게

그녀의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자신답지 않은 이런 모습.... 

"질투? 흥... 웃기지도 않아."

그러한 그녀의 기분을 대신 말해주기라도 하듯, 굵은 빗줄기들은 그칠 생각도 않고 어두운 하늘에서 계속해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내일은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2 학년 때 까지야 모의고사에 별 부담을 느끼지는 않겠지만,

고 3 수험생에게 있어서 모의고사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자칫 수능 점수로 직결될 수가 있으니까. 

수능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내일의 모의고사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어느정도 대비를 해볼까 하는 마음에 등교하자마자 책상에 앉아 책을 펴고 샤프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도, 도저히... 공부가 안된다!'

돌부처가 아니고서야 지금 이 상황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눈을 감고있든 뜨고있든 자꾸만 새록새록 머릿 속으로 어제 미용실에서 유경 누나와 나누었던 그 정사의 

장면들이 한결같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으아... 진짜 미치겠다.'

피곤해서 잠은 오고, 안 자고 버틸려니 자꾸만 떠오르고, 그렇다고 잘 수도 없고!

마치 비디오 테잎을 머릿 속에 틀어놓은 것 마냥 실감나게 재생되는 유경 누나와의 섹스...

그것도 미용실 안에서 그렇게나 적나라하게....

그 자극적인 상상 덕분에 이미 바지 안에서 자지가 또 빳빳하게 서서 고개를 쳐드느라 지금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다. 애국가를 벌써 1 절부터 4 절까지 돌림노래로 줄창 반복을 했건만 도저히 이 놈의 

기둥이 가라앉을 생각을 안한다.

'게다가 아침에 누나와 통화까지...'

내가 유경 누나와 모닝콜을 주고받다니....

정말이지 이 모든 상황이 전부 꿈만 같다. 꿈에 그리던 소원 성취를 결국 그렇게 이루었건만 그 여파는 꽤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너무 생생하고 황홀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 이런 이상한 기분의 연속...

"야, 조성재. 무슨 좋은 일 있냐? 왜 히죽히죽 쪼개고 있어."

이렇게 피곤한 와중에도 기분만큼은 너무 행복한 탓인지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옆자리의 친구 녀석이 

본 모양이었다.

"뭔 개소리야? 피곤에 쩔은 내 모습이 안 보이냐?"

"눈에는 다크서클 꼈는데 주둥이는 히죽거리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시치미를 뚝 떼고 친구 녀석의 말을 씹고는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문제 하나를 읽기도 전에

또 유경 누나의 얼굴만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니... 사실은 얼굴 뿐만이 아니라 어제 보았던 새하얀 나신 전체가.

'내가 유경 누나의 알몸을 눈으로 보았다니! 아니, 사실 본 것 만이 아니지...! 할 건 다 했잖아.

으아, 제길...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이제 좀 익숙해지련도 하건만, 나의 여신과 바로 어제 미용실에서 그렇게 진한 정사를 나누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

떠올리자마자 또다시 머릿 속이 뒤죽박죽 곤죽이 되어버린다. 나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혼자 방방 날뛰고 생지랄을 떨었다. 

옆에서 친구 녀석이 '아침부터 뭘 잘못 처먹었나...' 등의 말을 궁시렁거리며 날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누가 뭐라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한 남자니깐!

'근데... 유경 누나는 괜찮으려나. 전화할 때 목소리 들어보니까 많이 피곤한 것 같던데...'

비록 나야 어저께부터 줄곧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이런 황홀한 기분이지만... 유경 누나는 지금 괜찮을까?

오늘도 미용실에 일 나가야 할 텐데.... 으음, 이거 걱정되네.

사실 유경 누나에게 좀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너무 흥분한 탓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런 짓을

저질러버린 것은 아닌지, 나같이 별 볼일 없는 놈이 내 주제에 감히 그녀처럼 완벽한 여인을 안았다는 사실이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인지도.... 별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 속을 이리저리 마구 휘젓고 다닌다.

'에이... 괜한 생각하지 말자. 자격지심일 뿐이야. 누나도 괜찮다고 했는데 뭘...'

그래... 분명히 누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그녀는 분명히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이 내 고백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누나도 날 사랑한다고....

'사랑...?'

유경 누나가... 날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고? 나를?

"으아아아! 젠장! 진짜 너무 너무 행복해!! 누가 나 좀 말려봐!!" 

나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또다시 주체를 못하고 무슨 정신병자 마냥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이 격한(?) 행복을 토해냈고, 옆의 친구는 물론이고 반 전체의 모든 친구들이 그렇게 폭주하는 나를

질린 표정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놈 왜 저래...?"

너네는 몰라도 돼, 자식들아! 푸하하하하~

웃기는 일이었다. 아침 내내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줄창 내리 쏟아붓던 그 굵은 빗줄기는 점심식사를 마치고나자

거짓말처럼 뚝 그치더니 오후로 접어들고 나서는 완전히 잠잠해져버렸다. 

젠장, 변덕스런 환절기 날씨 하고는... 뭐 어쨌든 맑아졌으니 기분은 좋네.

"진짜 이거만 마시고 공부한다."

내 기억으로 아침부터 한 대여섯 번은 이 소릴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잡생각을 이기지 못하고 매점으로 내려와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 캔을

들이키며 이번에야말로 꼭 교실에 들어가면 마음 잡고 공부하리라 단단히 다짐했다.

다 마신 캔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휙 던져넣고 다시 교실로 올라가려고 교정 현관을 지나가던 중,

문득 저 멀리서 현관 복도를 걷고있는 한 여학생이 보였다. 

그런데... 그 여학생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다.

'어라...? 윤아잖아.'

내 사랑스런 천사의 동생이자, 언제나 밝고 씩씩하며 덧붙여 좀 지나치게 당당한 소녀.

하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명랑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 아이의 뒷모습이 오늘은 어쩐지

조금 기운이 없어보인다. 걸음걸이에 힘이 빠졌다고 해야하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야! 송윤아!"

어쨌든 나는 그 이유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뒷모습의 소녀를 소리높여 불렀다.

"....?"

윤아는 내 목소리에 잠시 뒤돌아보더니, 이내 자기를 부른 날 발견했다.

내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윤아는 물끄러미 인사도 없이 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가...

"흥...!"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인사 한마디도 없이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얘가 갑자기 사람 무안하게 왜 이런담? 

"야, 너 뭐 안좋은 일 있어?"

"....왜 물어?"

조심스럽게 묻는 내 말에 톡 쏘듯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윤아.

"그냥... 좀 힘도 없어 보이고 기분도 안좋아 보이고 해서..." 

남자답지 못하게 실없이 우물쭈물 말을 늘어놓자, 윤아는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평소답지 않은 그 아이의 모습... 나는 어쩐지 약간 걱정이 되어 재차 다시 한번 물었다.

"어디 아파?"

"...."

윤아는 작은 한숨을 폭 한번 쉬고는 긴 생머리를 한번 슥 쓸어넘기며 무덤덤하게 한마디 대꾸했다. 

"나 오늘 생리야."

"아, 그렇구나... 오늘 생.... 뭐, 뭐, 뭐, 뭐라고!?"

전혀 대수롭지 않은 뭔가를 한마디 톡 내뱉는 듯한 그 태도에, 잠시 덩달아 중얼거리던 나는

곧 그 의미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그만 펄쩍 뛸 뻔했다. 

'새, 새, 생리? 혹시 생라면을 잘못 들은건 아니겠지?'

윤아는 정말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듯 그저 뾰루퉁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이쪽이 이상한 놈으로 생각될 지경이었다.

나는 이 무참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뭐라도 말을 꺼내야겠단 생각에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그, 그, 그래. 그럼... 당연히 기분이 많이 안좋겠구나. 하, 하하..."

그래, 마술에 걸린 여자는 굉장히 예민하다고들 하잖아? 

아마도 내가 알기로 그럴 때는 신경 거슬리게 건드리지말고 조용히 냅두는게 최선이라고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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