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무튼... 나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윤아야. 피곤하면 먼저 자... 걱정하지말구."
[그래... 알았어.]
"으응... 고마워."
유경 누나는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나한테 귀엽게 눈을 한번 흘겼다.
"너무해... 못됐어."
"하하... 미안해요."
유경 누나는 밉살스럽다는 듯 살짝 내 옆구리를 한번 툭 쳤지만 더 이상 어떤 힐난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는 몸을 기대어 올 뿐이었다.
"나 추워. 좀 안아줘."
그 사랑스런 요구를 거절할 턱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춥지 않도록 가냘픈 어깨부터 온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서로의 따스한 체온과 숨결, 그리고 심장 고동소리 까지도 느껴지고 있었다.
내 품에 안긴 채로 그녀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하지 않은 행복한 침묵이 잠깐 찾아들었다.
그녀는 곧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너 처음 아니었지...?"
경험 여부를 물어보는 질문... 뜨끔하긴 했지만 이미 살을 섞은 그녀에게는 숨길 수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네... 누난요...?"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되물었는데 순간 어두워지는 그녀의 표정. 나는 곧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아, 이런 바보같은...'
그녀의 불행했던 과거 이야기가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젠장, 눈치도 없이 멍청하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아... 죄, 죄송해요..."
"괜찮아...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뭘..."
내가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해버린걸까...
나는 멍청한 내 자신을 탓하며 그녀의 기색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잔잔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이 처음이야."
"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처음이라구."
어쩐지 가슴이 찡해지는 말이었다.
후회하지 않는 걸까?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놈에게 몸도 마음도 줘버린 것을...
"나한테 무슨 할 말 없어...?"
"할 말... 이요?"
무언가 바라는 듯한 그녀의 말... 내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미안하다거나 하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으음... 그러니까..."
"얼른 해봐."
사실 답은 벌써 나와있었다. 서로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복잡한 말도 필요없이, 간단한 말 한 마디면 된다.
다만 그 말 속에 얼마만큼의 감정을 싣느냐가 중요한 것....
"사랑해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낯뜨거운 소리는 평생 내 입에서 나올 일이 없을 대사로 알고 있었거늘...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이 말을 그녀에게 속삭이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그래... 나도."
그리고 나의 천사도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윤아야, 나 왔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언니의 목소리에 TV 화면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윤아는 고개를 들었다.
"언니, 너무 늦었잖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후훗... 미안해. 다음부턴 안 늦을게."
윤아는 미소짓는 언니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본다.
어쩐지 기분이 좋은 듯한 모습... 어딘가 굉장히 피곤해 보이기는 한데,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으응? 글쎄...?"
애매한 대답을 하며 말꼬리를 흐리지만 언니의 그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윤아는 문득 아까 전 통화에서 언니가 성재와 같이 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성재 오빠하고 같이 있었던거야?"
"응? 으응..."
"....둘이 또 데이트 했어?"
"후훗... 데이트는 무슨."
자신의 언니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있었던 윤아는 지금 그녀의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것이 아마도 성재와 관련되어 있는 일임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윤아야, 나 좀 피곤해서 먼저 씻고 잘게. 괜찮지?"
"...그래. 알았어. 잘 자, 언니."
"응... 너두."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윤아는 어쩐지 언니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경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윤아는 리모콘으로 TV 화면을 꺼버렸다.
"....나 왜 이래."
윤아는 리모콘을 등 뒤로 던져버리며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수험생에게 있어서 아침에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 것 만큼 괴로운 일이 과연 또 있을까...
게다가 우중충한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이런 기분 나쁜 날 아침에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만 들어도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더욱 더 힘들어진다.
"...으으."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이불 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려보는 나였지만,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밝은 아침 햇살이 아니라 어둑어둑한 먹구름과 굵은 빗줄기였다는 사실에
평소보다 더 몸을 일으키기가 싫어진다.
'제길... 몸이 왜 이리 무겁냐.'
아침부터 이런 날씨여서 좀 맥이 빠지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몸이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너무 피곤한 탓에 손 끝 하나 움직이기도 싫다.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이 정도로 피곤한건 정말 오랜만이다...
도대체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피곤한거지...?
'응...? 어제 내가 한 일...?'
잠결에 비몽사몽하는 뇌리 속으로, 서서히 어제 하루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마치 단편 조각처럼 띄엄띄엄 천천히 하나 둘씩 떠오르는 기억들...
'분명히... 어제 난... 미용실에서... 유경 누나하고... 같이...'
같이... 그리고... 뭘 했지?
"....."
순간, 헤롱헤롱하던 머릿 속이 번쩍 불이 들어오고 잠이 확 달아났다.
뇌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거늘 저절로 몸이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하, 하하... 하하하~"
이불을 걷고 일어난 채, 완전히 미친 놈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분 나쁘게 웃어제끼는 나.
누가 본다면 영락없는 정신 이상으로 알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이 행복한 웃음을 멈출 길이 없었다.
"흐흐~ 피곤한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정신이 들고 몽롱했던 기억들이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오고나자, 그저 나오는 것은 마냥 즐거운 웃음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화끈하게 했는데 안 피곤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세상에.... 이렇게나 행복한 피곤이 있을 줄이야! 하나도 힘들지가 않아. 으흐흐흐흐!
"누나한테 전화나 해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드럽게 우중충해 보이던 날씨가 갑자기 더없이 해맑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사랑의 행복인가?
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들고 곧바로 1 번을 꾹 눌렀다.
그러자 어제를 기점으로 내 핸드폰의 1번 자리를 새롭게 당당히 차지한 사랑스런 천사의 이름이 곧바로
액정에 떠올랐다.
[유경누나♡]
아,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 너무 행복한 날...
간밤에 잠자리가 좀 뒤숭숭하더니, 어째 눈을 뜨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까지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날씨는 또 왜 이래...'
윤아는 입을 삐죽거리고 투덜거리며 교복 치마를 걸쳐입었다.
평소대로라면 지금쯤 언니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같이 먹고나서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언니는, 어제부터 느꼈던 것이었지만 어쩐지 굉장히 피곤한 듯...
아직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다.
원래 윤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동생을 깨워주는 것이 일상이었던 유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유래없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언니를 피곤하게 만든 것인지...
윤아는 도통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곤히 자는 언니를 굳이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아침 밥이야 대충 때우면 그만이고, 언니는 일 나가려면 시간도 많이 멀었으니 꼭 자신이 깨울 필요는 없었다.
늘 현관문을 나설 때면 받았던 배웅을 못 받는다는 것이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교복을 모두 갖춰입은 윤아는 신발장으로 나서며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유경의 방을 슬며시 한번 살펴보았다.
문 틈새가 살짝 열려있었기 때문에 안을 조심스럽게 흘끗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어라.. 언제 깬거지...?'
윤아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세상 모르게 잠들어있던 유경이었는데, 열려진 방 문 틈새로 조그마한
말소리가 도란도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응, 이제 막 일어났어."
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문 틈새로 흘러나오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문에 살짝 기대어
귀를 기울여본다. 어쩐지 언니의 통화를 몰래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언니와 통화를 주고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못내 궁금했기 때문이다.
"후훗.. 늦잠 잤어. 덕분에 좀 피곤했잖아..."
살짝 웃음을 터뜨리는 유경의 목소리에 윤아는 발소리를 죽이고 더욱 바짝 문간에 귀를 가져다 대어보았다.
대체 누구길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저리 웃으면서 전화를 하는 걸까...
"아냐, 난 괜찮아... 넌 안 피곤해?"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언니는 퍽 다정하게 그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언니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윤아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졌다.
둘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통화의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응, 그래... 성재야, 오늘도 열심히 하구... 아침 꼭 챙겨먹어..."
그리고 이어지는 언니의 말에서 나온 그 이름이 윤아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
잠시 아무런 말도,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문간에서 마냥 못 박힌듯 가만히 숨을 죽이고 서있던
윤아는... 다시 발소리를 죽이고는 천천히 신발장으로 살금살금 걸어나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신발을 신은 윤아는 언니에게 들리지 않도록 현관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살며시 비틀었다. 희미한 경첩음이 짤막하게 한차례 울렸지만, 아무래도 언니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윤아는 언니에게 아침인사조차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렇게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뭐야... 둘이 정말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윤아는, 언니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전부 궤뚫어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얼마 전부터 유경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그런 막연한 느낌을 어렴풋이 받기는 했었다.
비록 눈으로 발견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미묘한 변화이긴 했지만, 어쩐지 언니가 예전보다 더 옷을 이쁘게
입으려 한다던지 평소에는 별로 즐겨하지도 않았던 화장을 옅게 한다던지...
요즘들어 치장에 약간 더 신경을 쓰는 것 같기는 했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고 그 자연미 하나만 가지고도 다른 여인들은 감히 따라올 수도 없는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했던 언니이긴 했지만, 그렇게 조금 꾸미기까지 하고나자 정말이지 요 근래 들어 유경의 모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여동생인 자신이 봐도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면 다른 사람
눈에는 오죽할까...
그렇지만 그것을 그렇게 썩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도 그럴것이, 여인이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오히려 언니의 경우에는 예전에 비해서 꾸밈이 조금 늘어난 것 같다는
정도의 느낌만 받았을 뿐이지, 혹 그게 사실이라 치더라도 다른 여인들의 치장에 비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조촐한 꾸밈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는데...
'그치만... 그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서 그랬던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