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 누나에게 들은 얘기로 나도 그것을 알고있었다.
소중한 언니에게까지 말하지 않은 그 이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언니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것을 내게
말해줄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알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확인하듯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별 건 아냐. 난 그저 강해지고 싶어."
"...뭐?"
강해지고 싶다니... 귀여운 18살 여고생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해맑고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난 강해져서, 언니를 지켜야해."
"....."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미소짓는 얼굴을 바라보아야했다.
하나뿐인 언니에게도 감춰오며 그녀가 검을 휘둘렀던 그 이유는 바로 그 소중한 언니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없이 서로만을 생각하고 위하는 그 두 자매의 모습에 나는 어쩐지 심장이 아련해져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넌... 참 강하구나."
언니와 함께 힘겹고 아픈 과거의 세월을 살아왔을텐데도 언제나 당당하고 씩씩한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윤아의 모습에서 나는 왠지모를 그녀만의 강함을 볼 수 있었다.
"흥~ 당연하지. 여자라고해서 남자보다 약하란 법은 없잖아."
겉보기엔 그저 좀 건방진 아이라는 생각부터 들지만, 알고보면 그녀도 나름대로의 시린 상처를 안고있는,
그리고 그 상처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밝고 명랑한 18 세의 귀여운 소녀라는 느낌이 들었다.
"뭐... 어쨌든 다행이야."
"...응? 뭐가? 누나가 무사한거?"
"아니, 뭐 그것도 다행이긴 하지만... 니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아... 그, 그래."
그 의외의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럴 것 같진 않았는데 의외로 날 걱정하고 있었던건가?
"그럼 나도 이만 가볼게. 언니가 걱정되서 말야."
"으응, 그래야겠지. 누나 혼자 둘 수는 없잖아."
"어휴... 정말 그 자식 또 한번 나타나면 그 땐 진짜로 없애버릴거야."
투덜거리며 목검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아.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돌리던 그녀는 이내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응?"
그녀는 맑고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언니와 똑같은 말을 꺼냈다.
"고마워."
"...응? 뭐가?"
"그냥... 전부 다."
자신의 언니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 역시 자매는 닮는 것일까?
하지만 그 말을 하며 지어주는 둘의 미소에는 분명히 서로 다른 각자의 매력이 숨어있었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그 아름다운 자매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병실을 나서는 윤아의 뒤를 따라나와 아까 유경 누나와 헤어졌던 그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까처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여 벨소리가 울리자 윤아는 나를 돌아보았다.
"뭐 보답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감사의 뜻으로 좋은거 하나 줄게."
"좋은거...? 뭘?"
"이리 와봐."
교복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 모습에 나는 무엇을 준다는 것인지 의아해져서
고개를 힐끔 내밀었다.
"뭔데 그러는..."
하지만, 말을 하려던 내 입술은 번개처럼 빠르게 포개어진 윤아의 입술에 의해 가로막혀버렸다.
입술이 서로 겹쳐지는 쪽 소리와 함께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얼어붙었다.
불과 한시간도 전에 유경 누나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이번에는 그 동생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져나갔다.
잠시 동안의 재빠른 도둑키스를 성공리에 끝마친 윤아는 헤헤 웃음을 지었다.
"어때? 좋지?"
"...."
귀엽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까 유경 누나와의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을 때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이
쩍 굳어버렸다. 자신의 언니가 입을 맞추었던 입술에 키스를 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채,
윤아는 그렇게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심심할때 올테니까 몸조리 잘하고 있어."
"...."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나는 멍하니 굳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겨우 한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자매의 키스를 연달아서 느끼게 된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얼어붙어있는데, 아까 농담을 던졌던 그 간호사가 다시 복도를 지나가며 또 한번 장난스럽게 말했다.
"젊은 학생이 능력도 좋으시네요."
물론 그 말소리 또한 지금 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미행, 난투, 중상, 그리고 끝에가서는 아름다운 자매의 입맞춤.
과연 오늘은 좋은 날이었을까, 나쁜 날이었을까.
여름방학 보충수업의 남은 기간을 병원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서 보내야했던 나는 방학기간이 끝나고
개학이 찾아옴과 동시에 곧바로 퇴원을 했다. 당초의 예정보다는 조금 이른 감도 있었지만 하루종일
좁은 입원실에서 맛 없는 병원밥이나 먹으려니 온몸에 좀이 쑤셔오기도 했고, 고3 수험생으로서 입원 때문에
홀라당 날려버린 시간들이 아깝기도 했기 때문에 입원보다는 통원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병실 문을 나서던 내 머릿 속에 짧은 입원기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겪었던 많은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부산에서 급히 올라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엄청나게 놀라시던 부모님께 그저 단순한 사고였다고 애써
둘러대야 했던 것, 매일같이 병문안을 와서 이것저것을 챙겨주던 천사같은 유경 누나, 허구헌날 보충수업을
땡땡이치고 병실로 놀러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가던 윤아, 그리고 병원에서도 나름대로 공부 좀 해볼거라고
책만 펴놓고서는 결국 마지막엔 지나가는 간호사 누나들 엉덩이나 힐끗거리고 훔쳐보며 허송세월했던
한심한 나...
뭐랄까, 그다지 나쁘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별로 다시 겪고싶지는 않은 경험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했던 입원생활, 그 와중에서도 내게 가장 커다란 기쁨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날마다 한번도 거르지않고 날 찾아와주었던 유경 누나를 보는 것이었다.
미용실 일로 상당히 바쁠텐데도 매일 꼬박꼬박 내 병문안을 와서 간호를 해주던 아름다운 절세미인의 모습은
덕분에 같은 병실 안의 남자들에게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게다가 심심할때만 놀러오겠다고 해놓고서는 아예 밥먹듯이 병실을 들락날락거렸던 윤아를 보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말이야 어쨌건 끝내주는 미인이 둘 씩이나, 그것도 한 자매가 자주 병문안을 와주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입원 일주일만에 같은 병실 내에서는 물론이고 병원 전체에까지 삽시간에
퍼져나가버린 어이없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야만했다.
거 뭐라더라... 엄청나게 이쁜 애인이 둘이나 있는 양다리 남학생이래나 뭐래나...?
과장의 정도를 넘어서 어처구니가 없는 유언비어였다. 물론... 솔직히 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간호사들의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볼 때, 그녀들이 자기네들끼리 숙덕거리면서 퍼져나간
소문일거란 생각도 들긴 했다만... 뭐 어찌됐건 유경 누나와 그렇게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즐거웠다.
언젠가 병문안을 왔던 그녀에게 한번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별 일은 없었냐고...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내내 그때 도망쳤던 그 남자가 신경쓰여서 도저히 안심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천만다행스럽게도 그 남자는 그 이후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유경 누나의 말대로 정말로 날 칼로 찌른 것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영영 숨어버린 것일까?
뭐 그렇게만 되었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만은....
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와서 개학하자마자 중간고사가 있다고 겁을 줄 때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퇴원해서 개학을 맞이하고보니 정말로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원래 고 3 의 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내신처리를 위해서 1, 2 학년들보다 훨씬 빠르게, 그야말로 개학과
동시에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학기간 내내 간호사 누나들 몸매나 보면서 입원실 침대나
득득 긁고있었던 나는 개학하고 몇일만에 다가온 그 중간고사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
뒤늦게 나름대로 노력하여 완전히 망치지는 않았다고 해도 어쨌든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못할 듯 싶었다.
중간고사의 마지막날, 시험을 모두 마치고 3 학년들은 일찍 교문을 나서고 있었지만 그 발걸음들은 하나같이
가볍지 않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또 기말고사, 그리고 좀 더 있으면 수능이 다가올텐데 중간고사 하나
끝났다고 뭐가 기쁘겠는가.
나 역시도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옆에 붙은 친구 녀석과 운동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입원하느라 공부도 못했을텐데, 너 쪽박난거 아냐?"
"됐어 임마. 어차피 우린 수능에 올인인데 뭐."
친구 녀석과 푸념을 늘어놓으며 운동장을 지나 정문으로 나오려는데, 문득 이상하게 정문에 바글바글 개미떼처럼
모여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군수군거리며 마치 돋대기 시장 마냥 우르르 원을 짜듯 몰려있는
그 어마어마한 인파에 나와 친구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뭔 일이야? 싸움이라도 났나?"
"글쎄... 무슨 구경난 것 같은데. 가보자."
호기심이 동한 우리는 그 어수선하게 바글거리는 복잡한 학생떼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산만하고 어지러웠기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파고들어가려 끙끙대는 내 귀에 주위에 몰린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몇마디 들렸다.
"....와, 끝내준다. 무슨 연예인인가?"
"멍청아. 저렇게 예쁜 연예인이면 내가 이름 외우고 있지."
"진짜 환상이다... 말이라도 한번 걸어봤으면 좋겠네."
"한번 말걸어볼까?"
"미친 놈. 니가 뭘 믿고?"
앞의 남학생 두 명이 주고받는 수군거림에 참을 수 없이 호기심이 솟아오른 나는 거의 돌진하는 기세로
인파들을 헤치고 그 떼거리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갔다.
'제길, 도대체 누가 왔길래 그러는거야? 나도 좀 보자!'
그리고 겨우겨우 그 틈새를 뚫고 원 안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나는 곧 교문 앞에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차분하게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위의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기 짝이없는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미동도 하지 않고
정문 앞에 서있는 그 여인의 모습은 누가봐도 반할 정도로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자신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넋이 나간 남학생들의 시선을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볼이 살짝 물들어있었다.
'어?'
그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던 내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졌다.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서라던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 미인의 얼굴이.... 내가 잘 알고있는 여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
나는 나도모르게 유경 누나를 소리높여 불렀고,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즉각 반응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 덕분에 그 자리에 개떼처럼 바글바글 모여있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로 꽂혔다.
순식간에 그 엄청난 인원의 눈동자들을 한 몸에 받게된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그저 어설프게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었다.
"누, 누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윤아 보러 오셨어요?"
"아니, 그게... 너보러 왔는데, 애들이 자꾸 쳐다보네..."
내게로 다가온 유경 누나는 자꾸만 자신에게 쏠리는 남학생들의 넋나간 부담스러운 시선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누나가 나를 보러왔다는 말에 입이 귀에까지 쭉 걸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행복을 느끼고 있기에는 이 벌떼같은 시선들이 너무 신경쓰였다.
"저기.. 일단 딴데로 가죠."
난 우선 자리를 벗어나기위해 유경 누나를 데리고 그 짜증나고 부담스러운 인파들을 다시 헤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알아서 좌우로 길을 물살처럼 쫙 벌려주는 학생들 때문에 아까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개중에 몇몇 녀석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휘파람을 불며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와우! 조성재, 너 이 자식!"
"쏠로인 줄 알았는데...!"
"이야~ 부러워서 미치겠네."
"너 임마, 치사하게 얘기도 안해주고!"
아까 전에 옆에 붙어있던 친구 녀석까지 합세해 날 아는 친구들이 하나같이 거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거의 전교의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은 엄청난 미인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에
내 얼굴을 아는 녀석들은 모두 일제히 감탄 섞인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진 나는 그런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어쩐지 입가에 실실 걸리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누나, 윤아 안보고 가도 괜찮아요?"
"괘, 괜찮아. 빨리 가자... 여기 좀 부담스러워."
자신의 미모에 침까지 질질 흘릴 기세로 혼이 빠져나간 듯한 남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다른 여인이라면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건만 그녀는 그저 부끄러워하며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할 뿐이었다.
난 그렇게 당황하는 그녀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얼른 정문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끊임없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친구 녀석들의 감탄과 부러움 섞인 수군거림이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겨우겨우 교문을 빠져나온 우리는 일단 되는대로 근처 공원의 벤치에 잠시 힘없이 주저앉았다.